힐러리의 삶
칼 번스타인 지음 | 현문미디어
Prologue 1999년 2월 12일, 시계 바늘이 정오를 향하고 있을 무렵 힐러리 로댐 클린턴(Hillary Rodham Clinton)은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의 거실로 들어섰다. 굽 없는 구두에다 간편한 바지와 상의를 입은 수수한 차림이었다. 이제 그녀는 곧 회의를 소집할 참이었다. 그 회의는 힐러리 자신의 운명뿐 아니라 이 나라의 역사까지도 바꿀 수 있는 그런 회의였다. 빌 클린턴(Bill Clinton)을 처음 만났던 1970년 이후로 그녀는 온갖 험난한 굴곡과 쓰라린 역경 속에서도 남편 곁을 꿋꿋이 지켜왔다. 가장 최근에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던 모니카 르윈스키(Monica Lewinsky) 사건도 물론 그중 하나였다. 바로 오늘, 자신을 오랫동안 괴롭혀왔던 이 사건에 드디어 종지부를 찍게 되리라. 힐러리를 포함한 전 국민이 모니카 르윈스키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접한 지 벌써 1년의 시간이 흘렀고, 그동안 힐러리와 백악관은 심한 몸살을 앓아야만 했다. 이제 힐러리는 이 끈을 놓으려 한다. 자신의 결혼 생활이나 백악관 혹은 국민적 관심사로부터 도피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세 가지와 더욱 깊은 상관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새로운 도약을 꾀하고 있었다.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뉴욕 주(州)에서 상원의원에 출마해 공직에 진출하는 최초의 퍼스트레이디가 되기 위한, 그리고 자신의 야망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함이었다. 2006년 상원의원 재선에 성공하자 힐러리는 쉴새 없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정치관이나 통찰력, 자신의 미래와 윤리관, 성(性), 신앙, 그리고 여전히 건재한 자신의 결혼 생활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지치지 않고 풀어놓았다. 이렇게 그녀는 혼자의 힘으로 클린터니언(Clintonian)들의 반대세력에게 진정한 공포와 광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세간의 관심은 굶주린 늑대와 같은 언론에 선동되어 온통 '인간 힐러리'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 관심의 정도가 때로는 빌 클린턴을 넘어서기도 했다. 미국 역사상 유례없는, 유권자가 아닌 사법 절차에 의해 당선된 조지 W. 부시(George W. Bush) 대통령은 선거운동 당시 유권자들에게 클린턴 부부에 의해 실추된 백악관의 위상과 무너진 미국의 전통적 가치를 재건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워 많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힐러리는 지금 그녀의 명성에 매료된 전 국민적 분위기에서 그야말로 자신의 황금기를 맞이하는 동시에, 반대로 엄청난 비난과 논쟁의 대상이 되어 미국을 들끓게 하고 있다.
Ⅰ 성장기일리노이주 파크리지 위즈너 가(街) 235번지, 힐러리 로댐 가족이 한때 살았던 곳이다. 이곳은 흔히 교외라고 하면 떠올리게 되는, 베란다가 딸린 현관 앞으로 푸른 잔디 언덕이 펼쳐진 목가적인 전원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숲이 울창한 곳으로 전후(戰後) 번영의 기대감이 감도는 그런 곳이었다. 힐러리 가족은 아버지 휴 로댐(Hugh Rodham)의 고집스럽고 괴팍한 성격 탓에 이웃과 어울리지 못하는 유별난 가족이었다. 휴 로댐은 내재해 있는 열등감 때문에 일부러 더 심술궂게 행동하는 사람들처럼 모난 성격의 소유자였다. 자식들은 아버지의 그런 괴팍하고 우울한 성향을 참아내야 했고, 궁색하리만치 검소한 생활을 견뎌내야 했다. 또한 자라면서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퍼붓는 욕설과 모욕을 들어야 했다. 그는 비록 무자비하고 공격적이며 폭력적인 아버지였지만, 그와 그의 아내 도로시 하웰 로댐(Dorothy Howell Rodham)은 자식들에게 끈끈한 가족애와 그것의 소중함을 가르쳤다.
그 누구보다 힐러리는 이 가르침을 가슴 깊이 간직했던 것 같다. 1975년 빌 클린턴과 아카풀코로 신혼여행을 갔을 때, 그녀는 부모와 남동생 휴이(Houghie, 휴 주니어), 토니(Tony)도 데려갈 정도였다. 힐러리는 사춘기를 거치며 아버지와는 멀어졌지만, 어머니와는 더욱 가까워졌다. "지금의 힐러리를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어머니 도로시죠. 도로시를 보고 있으면 힐러리가 보여요"라고 린다 블러드워스 토머슨(Linda Bloodworth Thomason)이 말했다. 할리워드 제작자인 린다는 힐러리의 가장 오래된 친구 중 한 명이다. 하지만 힐러리의 기질은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힐러리는 "경우와 때에 따라서 아버지가 될 수도 있고 어머니가 될 수도 있다"고 벳시 에블링은 말한다. 어린 시절 로댐 가와 가깝게 지내며 자주 드나들었던 힐러리의 사촌 오스카 다우디 또한 힐러리는 어머니의 치밀한 성격과 아버지의 허세를 모두 물려받았다고 단정지어 말한 바 있다.
힐러리에게 목표를 높이 두라고 가르쳤던 도로시는 특이하게도 힐러리가 미국 최초의 여성 연방대법원 판사가 될 것이라는 말을 했었다. 하지만 힐러리는 우주 비행사가 되고 싶었고, 14세 때 미국항공우주국(NASA)에 지원 서류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여성은 지원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게 된다. 또한 도로시는 아이들이 혼란 속에서도 평정을 유지하는 법을 가르쳤다. 이를 위해 그녀는 힐러리에게 목수들이 사용하는 수준기(면이 평평한가 아닌가를 재거나 기울기를 조사하는 데 쓰는 기구)를 이용하여 그 안의 기포가 어떻게 가운데로 이동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이 수준기가 네 안에 있다고 상상하렴. 그리고 기포가 항상 중앙에 오도록 노력하려무나. 가끔은 기포가 위로 올라가기도 할 거야." 도로시는 수준기를 세워 기포가 위로 가게 해 보였다. "그럴 때면 기포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도록 만들어야 해." 도로시는 수준기를 다시 바로 눕히며 말했다. 힐러리는 처음부터 학교에 쉽게 적응했고, 유진필드 초등학교(Eugene Field Elementary School)에서는 거의 언제나 전 과목 A를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심한 근시로 아홉 살 때부터 안경을 써야 했는데, 이는 1950년과 1960년대에 성장기를 거친 소녀에게는 결정적인 결함이라고 할 수 있었다. 힐러리는 주로 붉은 색이나 보라색 테의 안경을 썼는데, 처음으로 콘택트렌즈를 끼게 된 33세까지 안경은 그녀 외모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 때로 그녀는 허세를 부리며 안경을 쓰지 않고 돌아다니다가 마치 "안내견의 도움을 받는 맹인"처럼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고 그녀는 기록했다. 졸업 후 몇 년 뒤 열린 동창회에서 힐러리는 벳시에게 "이 사람이 누구지 내가 아는 사람이야? 그럼 저 사람은?"이라고 계속 물어야 했고, 벳시가 친구들의 이름을 일러줄 때면 힐러리는 "저렇게 생겼었는지 정말 몰랐는데"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Ⅱ 웰즐리 여대생1965년 가을, 힐러리 다이앤 로댐은 너무 많이 읽어 너덜너덜해진 배리 골드 워터의 『보수주의자의 양심The Conscience of a Conserv-ative』이 들어있는 여행 가방을 들고 웰즐리에 도착했다. 비교적 조용한 중남부 교외에서 자란 그녀가 별안간 만만치 않은 여학생과 함께 생활하게 된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명문 사립기숙학교 출신으로 여름이면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으며,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아는 외국어 한 둘은 기본이고, 웰즐리 풍이라고 부를 만한 교양도 제법 갖추고 있었다. 힐러리도 나름대로 메인 사우스 고등학교에서 상위 5퍼센트 안에 들었지만, 이는 별로 내세울 만한 것이 못 되었다. 힐러리는 이제 더 이상 '또래보다 똑똑한' 학생이 아니었다. 사실 동북부에 있는 7대 명문 여대들 중에서도 특히 웰즐리에 합격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남들보다 똑똑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고등학교 졸업반에서 상위 1~2퍼센트 안에 든 전적을 갖고 있었다. 힐러리가 입학하던 1965년은 하버드(Harvard), 예일, 컬럼비아(Columbia), 브라운(Brown) 등 기타 아이비리그가 아직도 남학생의 입학을 선호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다보니 전국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여학생들은 웰즐리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물론 똑똑한 학생들 중에서도 비싼 학비를 감당할 형편이 되거나, 그것도 아니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만큼 특출하게 똑똑해야만 했다).
이런 고상한 환경에 힐러리는 위축되었고, 두려움 속에서 첫 학기를 시작했다. 엽서로만 보아왔던 외국에 덩그러니 혼자 나와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힐러리가 동부의 여대로 진학하겠다고 결심한 데는 웰즐리 출신이었던 고등학교 선생님의 영향이 컸다. 힐러리가 다른 7대 명문 여대 중에서도 웰즐리를 유독 마음에 들어 했던 이유는 그녀가 사진으로 본, 서정적인 느낌의 완만한 잔디 언덕, 숲 속의 승마 전용로, 투명하게 맑은 연못 등의 예쁜 캠퍼스 때문이었다. 특히 웰즐리의 와반(Waban) 호수 사진은 여름을 보냈던 위놀라 호수를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이런 엽서 같은 환경과 달리, 힐러리가 가져온 옷이라고는 피터팬 블라우스와 겹주름 스커트, 납작한 구두, 무릎 양말 등이었다. 힐러리는 부모가 그녀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떠나자마자(어머니는 집으로 돌아가 내내 울었다고 한다.) 자신이 선택한 이 학교에는 자기보다 훨씬 똑똑하고 훨씬 멋진 여학생들로 가득하며, 심지어 이들 중 대부분은 앞으로의 출셋길마저 보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이들과 경쟁한다는 것은 그저 힐러리 혼자의 생각일 뿐이었다.
결국 생각을 바꾼 힐러리는 웰즐리에서 국가 정세·문화·정치·성 관념의 변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으며, 그녀다운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사실 이미 판명된 것처럼 두꺼운 안경을 끼고 복잡한 정치관을 가진 소녀가 7대 명문 여대의 완벽한 매너를 갖춘 여성의 구식 모델을 따를 필요는 없었다. 후에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냈던 로버트 라이히(Robert Reich)가 힐러리를 처음 보았을 때, 그녀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금발의 긴 생머리, 그리고 나팔바지를 입은 신입생이었다. "힐러리와 나는 자칭 학생 '개혁가'였어요. 급진주의자들이 학교 건물을 점령하고 학교를 휴교시키기 몇 년 전이었죠. 우리는 인권운동 행진에 참여하고 더 많은 흑인 학생들의 입학을 요구했어요. 심지어 우리는 전국을 한데 모을 생각까지 했으니까요.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을 했던 거죠." 라이히의 말이다. 웰즐리 시절 그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남자를 꼽으라면 바로 돈 존스 목사였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존스 목사는 힐러리의 상담자 역할뿐 아니라 통신원, 고해 신부, 소크라테스식 논쟁의 대상, 그리고 정신적 조언자의 역할을 해주었다.
힐러리는 우울해질 때면 언제든 돈 존스 목사를 찾았다. 이후에도 그들은 줄곧 이러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남편의 탄핵 소동이 있던 해에도 힐러리는 그를 찾아 조언을 구했다. 존스는 힐러리에게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설교, '너는 받아들여졌다(You are Accepted)'의 내용을 중점적으로 들려주었다. 죄와 은혜는 공존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설교였다. 틸리히는 "은혜는 우리가 엄청난 고통과 불안 속에 있을 때 찾아온다. 그리고 이런 일은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그사이 그녀는 열심히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고 굳게 믿었다. 이후 그녀는 인생이 고통스럽게 느껴질 때마다 각종 영적인 격언, 때로는 사이비적인 격언들(개중에는 뉴에이지 식의 허튼 소리들도 있었고 나름대로 깊이 있는 어구들도 있었다)에 의지하여 구했고, 혼란스러운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 이러한 것들은 후에 힐러리가 자신이나 남편의 탐탁치 않은 행동이나 성격을 공식적으로 합리화하고자 할 때 사용되기도 했다.
Ⅳ 아칸소 생활빌 클린턴이 힐러리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숙명론자가 아니었다. 누구나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다고 믿었다. 특히 어머니가 비참하게 살아왔던 것과는 달리 자기 자신만은 알 수 없는 힘이나 다른 사람들의 지배적인 면에 영향 받지 않을 수 있다고 믿어왔다. 또한 개인(특히 그녀 자신)의 힘으로 사건이나 다른 사람의 천성을 바꿀 수 있다는 말도 믿지 않았는데, 그녀는 실제로 그 두 가지 모두를 바꿔보려고 고집스럽게 노력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빌과의 연애와 결혼에 있어서, 힐러리는 명백한 사실 한 가지를 깨닫게 된다. 빌의 여자 문제는 통제 불능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언젠가 자신을 화나게 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남편의 바람기가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다. 힐러리는 빌의 성문제나 충동적인 면에 있어서 남편을 사춘기 소년으로 간주했으며, 이를 그의 평범치 않은 어린 시절 탓으로 돌렸다. "바람을 피우는 것보다 더 나쁜 일들이 있었거든요." 1989년 빌이 스스로 아칸소의 이혼녀인 마릴린 조 젠킨스(Marilyn Jo Jenkins)와 사랑에 빠졌다고 믿었던 때, 그녀가 자신의 절친한 친구에게 했던 말이다. 정말로 힐러리를 낙담시키고 분노하게 한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빌을 바꾸지 못했다는 무기력함이었다.
힐러리는 연애 시절부터 결혼 생활 내내 이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힐러리가 빌과 결혼을 결심하기까지는 2년이라는 기간이 걸렸다. 빌의 여성 편력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했을 뿐 아니라 아칸소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 자체에도 회의적이었으며, 또한 그가 자신의 열정(때로는 그녀를 향한 압도적인 열정까지도)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력도 의심스러웠다. 그녀는 아이들을 갖고 싶었지만 얼룩진 결혼생활에서 그 아이들이 자라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릴 때는 보모에게 버림받고, 커서는 남편에게 학대받았던 - 힐러리가 좋아하지 않는 표현이다. - 그녀 어머니의 경험이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아칸소라는 물에 살짝 발을 담그고 거기서 살아남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계산이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그 기간 동안 그들의 결혼이나 정치 행로가 뜻대로 되지 않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조심스럽게 대비책도 준비했다. 또한 이미 연애를 할 때부터 드러난 빌의 바람기로 인해 그들의 결혼 생활이 마냥 안정적(특히 불륜 사건 없는 결혼생활)이기를 바란다는 것은 도박과 같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사랑과 더불어 언젠가는 워싱턴에서 이룰 거대한 정치적 미래에 대한 꿈을 위해 결혼을 선택했다. 아칸소로 간다는 것은 워싱턴이나 뉴욕에서의 일류 직장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고, 약속된 미래에 대한 불빛을 꺼뜨리는 것과 같았다. 웰즐리 졸업 이래로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릴 탄탄대로를 가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아칸소에서 그녀의 위치는 결코 지도자의 것이 아니었다. 지도자가 된다는 것이 결혼을 한다는 것과 대치되는 개념은 아니었지만, 빌 클린턴과 결혼해 그의 영역에 있을 때에는 얘기가 달랐다. 그녀 스스로 자신의 재능과 열정과 에너지를 남편의 앞길을 밝히는 데 사용하는, 전통적인 환경을 선택한 것이다. 어머니의 세대가 그랬듯이 말이다. 대신 힐러리는 협력자이자 관리자, 그리고 고문 역할을 맡았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내린 결정이었다. 빌은 힐러리가 자신과 결혼한다는 것이 '큰 위험이 따르는 결정'이라는 것과 그녀가 아칸소에서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지금까지 운 좋게도 당대의 가장 유능하고 능력 있다는 사람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지만, 힐러리만 한 파트너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힐러리가 가진 정치적 잠재력은 누구보다 월등했습니다. 그녀는 머리가 좋고 마음이 따뜻하며, 나보다 더 훌륭한 조직력을 갖추었고, 나만큼 뛰어난 정치기술을 가지고 있었어요. 나는 그저 그녀보다 경험이 조금 더 많을 뿐이었지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행복이 제일 중요했다고 말하면서 어쩌면 자기 없이 독자적인 길을 가는 것이 그녀로서는 더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결혼 초기부터(혹은 빌의 말대로 '한동안') 힐러리와 빌은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했다. 뜻대로 되지 않자 그들은 1979년 여름, 버뮤다로 휴가를 떠나면서 샌프란시스코의 불임 전문가와의 상담을 예약했다. 힐러리는 자궁 내막염을 앓고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