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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전사들

정토웅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1장 전사들



고대 최고의 아시리아 전사들

세계사에서 오랫동안 간과해 왔던 나라 아시리아는 문명의 발상지였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가장 우수한 군대를 보유한 나라였다. 아시리아는 기원전 14세기경에 티그리스강 상류지역에서 대군사 국가로 부상했으며, 기원전 8세기경에는 현재의 중동지역 거의 전역을 지배했다. 아시리아가 이와 같이 큰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들이 최고의 군대를 보유한 데 있었다. 아시리아 군대는 기병, 보병, 전차병 그리고 공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전차가 맨 앞에서 달렸으며 안에 타고 있는 전차병들은 창과 활을 이용해 짧은 시간에 적의 보병을 해치웠다. 그러면 곧 기병과 보병이 살아서 패주하는 적을 쫓았는데, 기병은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는 기술을 최초로 발휘했고, 보병은 창병, 궁수, 돌팔매 병이라는 각기 역할에 따라 패잔병들을 처리했다.



아시리아군대는 전향을 원하는 포로들은 죽이지 않았다. 대신 군대에 편입시키고 포로들이 지닌 무기와 기술을 도입하여 효과적으로 전투에 활용했다. 말하자면 정복 지역의 기술자들을 공병대로 활용한 것이다. 이러한 공병대는 아시리아군대의 원정을 위한 도로를 개발하고 선박을 축조했으며, 공성 망치나 굴착 장비, 사다리 등 여러 장비를 개발했다. 하지만 식량이나 물자를 적지에서 충당하고 나면 적의 영토를 철저히 황폐화시켰다. 적이 재기할 수 있는 터전을 조금도 남기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아시리아 제국의 영광은 길게 가지 못했다. 제국을 안전하게 유지시킬 제도적 장치가 미비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612년에 아시리아는 바빌로니아를 비롯한 연합국의 공격을 받고 붕괴되고 만다.

춘추전국시대 중국 장수들

중국은 예수가 태어나기 약 1,000년 전부터 커다란 문명을 일으켜 어느 고대 문명권보다도 높은 수준의 생활을 누렸다. 춘추전국시대의 공자, 장자, 노자, 순자 등 제자백가들이 남긴 학술 업적을 보면 그 당시 중국인들의 학문, 도덕, 정치적 수준에 대하여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기원전 770년부터 221년까지 약 550년을 이끈 춘추전국시대는 큰 변혁기로 많은 제후들이 군웅할거 하던 시대였다. 기원전 403년 이전을 춘추시대, 그 이후를 전국시대라고 부르는데, 전자는 청동기 시대 후자는 철기 시대였다. 따라서 문화적으로는 크게 다르지만 천하가 평정되지 못하고 분열된 상태로 계속 유지됐기에 흔히들 양 시대를 구별하지 않고 춘추전국시대라고 부른다.



춘추시대 전쟁은 주로 제후나 장수들이 전차를 타고 싸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전투에 임할 때는 전차 1량에 보병 30명이 따랐지만 보병은 대충 싸우다가 전리품을 챙기면 될 뿐 그 역할은 크지 않았다. 그 당시 전쟁은 주로 장수들 간의 전쟁이었다. 정의와 도덕을 강조하는 제자백가들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은 중국의 장수들은 부하들에게 자신들이 영웅으로 보여지기를 바랐다. 장수들은 적에게 사자를 보내 결전을 벌일 시간과 장소를 정하였으며, 전차가 쉽게 움직일 수 있도록 사전에 땅을 고르도록 요구하였다. 또한 부상을 입은 적은 공격하지 않았으며, 아직 전열을 갖추지 못한 적을 공격하기 위해 북을 치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국상을 당한 적국을 공격하지 않는 등, 적의 약점을 이용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넘어가면서 완전히 바뀌게 된다.



100여 개가 넘는 제후국들 간에 전쟁이 계속되면서 합병이 잇따랐다. 그래서 전국시대에는 진, 초, 연, 제, 조, 위, 한의 7대 강국으로 재편된다. 전국시대에는 보병들의 활약이 커졌고 철로 만든 장창과 방패, 철제화살촉 등이 사용되었다. 보병들은 갑옷을 입지 않고 가벼운 차림으로 움직였으며 활을 주무기로 사용하였다. 서양인들은 활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용하는 무기라 하여 비겁한 무기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동양인들은 직접 맞부딪쳐 피를 보기보다는 일단 적에게 동요를 불러일으키고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용도로 활을 사용했다. 즉 무자비한 싸움을 벌이기보다는 세력을 과시하고 적절한 단계에서 전쟁을 끝내려는 전투방법을 택하였는데, 그러한 생각은 용병술과 책략 개발로 이어진다.



전국시대에는 적을 기만하고 유인하고 지형을 활용하는 등, 지능적이고 다양한 전술이 펼쳐졌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장수가 제(齊)나라 태생의 손무였다. 그의 저서 『손자병법』은 기본적으로 장수에게 요구되는 용병술과 책략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 책에 실린 다음 구절은 당시 중국 장수들의 전쟁관을 보여준다.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이 최선이 아니라 싸우지 않고 적의 군대를 굴복시키는 것이 최선이다." 당시의 장수들은 최소의 인명 피해와 최소의 재산 파괴로 승리하는 것을 진정한 승리라 여겼다. 사실 중국 전쟁사의 기록을 보면 주로 장수들 간의 책략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점은 군대조직과 무기, 기술 등을 중시한 서양전쟁사의 흐름과 큰 대조를 보인다.



무적의 로마군단

기원전 753년에 건설된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 내의 여러 도시국가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500년 후에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이어서 지중해 지역과 서부 유럽을 지배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하였다. 기원전 509년 이후 왕정에서 공화정 국가로 탈바꿈한 로마는 귀족들이 정치를 하고 전쟁 때는 유산 시민들로 하여금 군대를 형성하게 했다. 이 제도 속에서 로마의 존립은 절대적으로 로마군단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귀족들은 시민들의 권리를 최대한 보호해주는 가운데 민주정치가 발전했다. 시민들은 각자 자비로 무장했는데 전투에 필요한 창과 검, 방패, 갑옷, 투구 등을 갖추는 데 드는 비용이 양 30마리 값이었다. 따라서 재산이 없는 사람들은 병역 복무를 할 수 없었고 그로 인해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였다. 이처럼 로마인들에게 병역은 의무라기보다는 하나의 특권으로 간주되었다.



로마시민들은 17세부터 45세까지 군 복무를 했다. 이 중 25세 미만의 병사들은 경보병이 되었으며, 25세부터 45세까지는 중보병(완전히 무장을 갖춘 보병)이었는데 이들이 로마군의 주력부대였다. 중보병은 연령별로 편성되었으며, 25~30세는 '하스타티', 31~40세는 '프린시페', 41~45세는 '트리아리'라고 불렀다. 이처럼 비슷한 나이끼리 편성된 각 중대는 함께 훈련을 받고 동고동락하면서 깊은 연대감을 가졌다. 로마군단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처럼 사각형의 밀집대형을 유지하였으나 개개인이 보다 넓은 간격을 유지함으로써 전투 기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었다. 또한 120명으로 구성된 중대를 수십 개 모아놓은 집합체였으므로 골짜기, 하천 구릉 등과 같은 장소에서는 일부 병력만으로 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로마군대의 표준 전투대형은 앞에서부터 제1전열 하스타티, 제2전열 프린시페, 제3전열 트리아리의 순서로 배치하고, 제1전열 전방에서 경보병이 첨병 임무를 맡았다. 경보병들이 투창을 던져 적진을 흔들어 놓고 빠지면 제1전열인 하스타티 중대가 전투를 벌이고 이어 프린시페 중대가 전진하였다. 그 뒤에 대기하고 있던 트리아리 중대는 전투가 절정에 이르는 순간에 가담하여 노련하게 전투를 결정지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로마군단이 전투를 잘 수행할 수 있었던 핵심은 군기였다. 로마군은 불침번 중에 잠을 자다가 발각되면 현지에서 사형을 당했으며, 전열을 이탈하면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면하지 못했다. 로마 군대에서 명령 거역은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기동력과 신축성 그리고 정신력으로 무장된 로마군단은 근대 군대 형성의 근간을 제공했다. 유럽의 근대국가들은 '로마군단'을 모델로 삼기 시작했고 유럽 아닌 다른 지역에서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신의 도리깨 칭기즈칸의 몽골족

칭기즈칸은 12세기 말부터 13세기 초에 걸쳐 흩어져 있던 몽골 부족들을 하나로 통일시키고 최고 권력자로 부상했다. 그는 부족장회의를 통해 칸이란 호칭을 부여받자 먼저 국가 통치의 내부 기반을 다지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귀족 권한을 축소시키고 중앙권력을 강화했으며, 외곽의 숲속에 사는 소수 부족들을 귀화시켰다. 그리고 능력 위주로 인재를 기용하여 몽골 초원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자 세계 정복을 위한 대장정의 기치를 올리게 된다. 그런데 그의 정복활동의 주 동기는 공신들의 논공행상을 위한 선물들을 획득하고 나아가 내전으로 피폐해진 국내 경제를 개선시키기 위한 약탈에 있었다.

칭기즈칸은 대외 정복에 나서면서 대규모의 금은보화와 물자를 고국에 실어 날랐다. 일례로 실크로드를 점유하게 되자 화려한 비단이 강물처럼 흘러 들어오면서 몽골족은 비단을 보자기로 쓸 정도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렇듯 부를 누리게 되자 칭기즈칸과 휘하 추종자들의 정복에 대한 욕심은 끝없이 이어졌다. 칭기즈칸의 대장정은 아들, 손자와 더불어 3대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그들은 약 60년간의 짧은 기간에 과거 로마가 400년 동안 정복했던 것보다 훨씬 넓은 제국을 건설했다. 현대 지도로 보면 칭기즈칸이 정복한 땅은 약 30개 국에 30억이 넘는 인구에 해당된다.



몽골족이 제국을 건설하게 된 원동력은 무엇보다도 기동성에 있었다. 몽골족은 모두 기병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생활에 익숙했던 그들은 아무런 훈련 없이도 곧바로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추장스러운 보급 대열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기동이 용이했다. 몽골군은 5킬로그램 정도의 마른 마유 덩어리를 가지고 다니다가 가죽 용기에 쏟아 붓고 물로 풀어 식사를 했다. 그리고 가늘게 자른 육포를 먹었으며 중간 중간에 사냥과 약탈로 음식물들을 비축했다. 가벼운 옷차림도 기동성에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양털 겉옷 속에 몸에 꼭 맞는 비단 셔츠를 입었는데 그것이 어느 정도 갑옷 역할을 했다. 당시 화살은 실크를 완전히 뚫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화살이 박히더라도 실크를 잡아당김으로써 쉽게 끄집어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몽골군의 기동력에 영향을 미친 것은 그들의 우수한 말이었다. 몽골족의 말은 크기는 작았지만 번식용 말 이외는 모두 거세를 해서 힘이 좋고 유순했다. 그리고 초원과 악천후에 잘 적응되어 있어 장거리 원정에도 지치지 않았다. 몽골군은 출전 중에는 말에게 아무 물이나 풀을 먹이지 않았으며 살이 찌거나 병에 걸리지 않도록 특별 관리를 했다. 그리고 귀향했을 때는 아예 말을 타지 않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몽골말은 훈련이 잘되어 있어서 정숙을 기해야 할 때는 절대로 울지 않았으며 물을 마실 때도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이와 같이 기강을 유지한 몽골말과 몽골군은 혼연일체가 되어 전장을 누볐다.



칭기즈칸 군대의 신화 창출은 무엇보다도 무서운 정신력으로 이룬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칭기즈칸은 적을 공격하기 전에 몽골족이 매우 잔혹하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그래서 적의 수비대는 싸워 보지도 않고 속속 투항했다. 칭기즈칸은 부족들을 다루는데도 심리적인 기술을 이용했다. 그는 자신의 정복 사업이 하늘의 재가를 받은 것이고, 자신은 '신의 도리깨'라고 설교하고 다녔다. 또한 정복지역에 널리 전파된 이슬람교, 불교 그 밖의 어떤 종교든 종교의 자유를 전면 허용해서 분열 가능성을 막았다. 칭기즈칸이 건설한 몽골제국은 로마 대제국과 비교할 때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이 러시아, 터키, 인도, 중국, 페르시아, 우즈베키스탄 등의 통치자가 됨으로써 칭기즈칸의 자취는 약 700년이나 더 유지되었다.



2부 명장들



세계 최고의 군사적 천재 알렉산드로스 대왕

역사상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만큼 굵고 짧은 인생을 살다 간 영웅은 없었다. 아버지 필리포스 왕이 암살당한 해였던 기원전 336년, 만 20세로 왕위에 오른 뒤 33세에 사망할 때까지 13년 동안 그가 남긴 전쟁 승리의 기록은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신화였다. 그가 정복한 영토는 그리스의 올림푸스산에서부터 인도의 히말라야까지 광대했다. 물론 세계사에서 야심적인 정복자들은 많이 있었지만 알렉산드로스만큼 짧은 기간에 그렇게 광대한 지역을 정복한 사람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부왕 필리포스로부터 물려받은 군대는 알렉산드로스의 대제국 건설에 가장 큰 기반이 되었다.

마케도니아군대는 그리스의 다른 도시국가와 달리 시민들 외에 용병과 천민 그리고 노예 출신까지 받아들여 많은 병력을 확보했다. 그중 알렉산드로스가 특별히 신경을 써서 선발한 기병 전사 집단은 그 용맹함과 기술이 탁월하여 적진을 향해 돌격하면 아무도 막을 수가 없었다. 기병 외에 전투를 치르는 주력 병사는 중보병(무장한 병사)이었다. 이들은 4.2미터의 사리사(Sarissa)라고 부른 장창을 휴대했는데, 이 긴 창을 세우고 행군하면 마치 숲이 움직이는 듯했다. 전투대형은 다른 도시국가와 마찬가지로 밀집대형을 이루었으나 간격을 자유자재로 조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투가 개시되면 기병이 '망치(타격부대)' 역을 맡아 적을 포위 공격하고, 보병은 '모루(저지부대)' 역을 맡아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임무를 수행했다. '모루 위에 낫을 놓고 망치로 두드린다'는 식의 개념이었다. 이후 전쟁사에서는 주공과 조공을 명확히 구분하는 '망치'와 '모루' 전법을 보편적으로 적용하게 되었다.



마케도니아는 기병과 중보병 외에도 인접국 출신의 용병들로 구성된 다양한 부대를 보유했다. 용병들은 고용된 병사들이었으나 무적의 마케도니아 군대에 고용된 데에 높은 자긍심을 갖고 있어 충성을 다해 싸웠다. 알렉산드로스는 용병 외에도 각 지방에서 모집한 궁수, 포병, 공병, 수송병, 선원 등 특별한 기술을 지닌 병사들을 편입시켰다. 이렇게 강건한 체력과 다양한 군사기술 그리고 부대 간의 고도의 협력을 바탕으로 마케도니아군대는 최고의 공격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막강한 군대라 할지라도 위대한 지휘관이 없으면 그 장점을 발휘할 수 없는 법이다.



알렉산드로스는 가정교사였던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정치, 철학, 기하학, 수사학, 논리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다양한 가르침을 받았다. 사제지간에 큰 교감은 형성되지 않아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받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알렉산드로스의 책임감과 자제력 그리고 뛰어난 웅변술과 수사학은 스승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알렉산드로스는 뛰어난 웅변가였다. 그는 5만 명의 병사들 앞에서 말을 타고 연설을 했는데 숫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5,000명씩 열 번에 걸쳐 연설을 했다. 그는 연설을 통해 부하들의 사기를 진작시켰으며, 지친 부하들이 진격을 거부하며 반발할 때에도 연설을 통해 부하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흔히 말하기를 영웅호색이라고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쾌락을 철저히 절제한 금욕주의자였다. 결혼을 두 차례 했으나 모두 정략적인 결혼이었을 뿐 일생동안 어머니 외에 다른 여자를 사랑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신들에게 제사를 올리고 정무를 시작하였는데 사냥, 전술연구 또는 독서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저녁식사는 언제나 신하들을 초대해 함께 하고 연회를 베풀 때는 가볍게 술을 마시면서 주로 군사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전투에 임할 때는 하얀 깃털이 달린 은빛 투구를 쓰고 화려한 갑옷에 검광이 빛나는 칼을 뽑아 들고 선두에 서서 싸웠다. 복잡한 계략이 없었던 당시 전투에서는 지휘관의 영웅적 행동이 전장을 주도하는 견인차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화려한 노출이 적에게 표적이 될 것임으로 알면서도 부하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매번 그런 복장으로 진두지휘를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전장에서도 항상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드』를 들고 다니면서 그 신화 속에 나오는 영웅들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헤라클레스의 후손이라고 믿었는데, 이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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