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 넌 누구니
뉴스위크 지음 | 중앙일보시사미디어
Korea 넌 누구니
뉴스위크 지음
중앙일보시사미디어 / 2007년 5월 / 1권 289쪽·2권 241쪽 / 10,000원
서문: 미국 - 미국인에게 우리는 무엇인가몇 달 전 한 일간지에 회고록을 기고한 일본인 학자는 1977년 월간 《대화》 8월호에 실렸던 리영희 교수의 '광복 32주년의 반성'이라는 글을 언급했다. 리영희 교수는 '일본인들이 망언을 되풀이하는 근원적인 책임과 잘못이 과연 일본인들에게만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망언을 허용하는 근거가 "이 민족, 사회, 국가 내부에 존재하는 탓도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 일본인 학자는 리영희 교수의 글이 기존의 한·일 관계 논의를 180도로 바꾸는 새로운 인식이었다고 회고했다. 한국인들은 지금까지 끊임없이 한·미 관계를 고민해왔다. 미국은 한국을 일본으로부터 해방시켰고, 한국 전쟁 당시 공산군의 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주었으며, 1950년대 이후에는 전후 복구와 경제성장에 큰 힘을 주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미국에게 우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한국인들에게 그다지 익숙한 질문이 아니었다. 단지 한국이 미국에 매우 중요한 나라이기 때문에 미국이 한국을 도와주기도 하고, 한국의 내부 상황에 개입하기도 하며, 주한미군을 계속 주둔시킨다고 생각할 따름이다. 진정 한국은 미국에 그렇게 중요한 나라인가? 만약 중요하다면 왜 중요하고, 어떤 요소들이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을 중요하게 고려하도록 만드는가? 만약 중요하지 않다면 미국은 왜 그렇게 많은 비용을 한국을 위해 사용할까? 사실 이 질문들은 리영희 교수가 한·일 관계를 고민한 동일한 맥락에서 한·미관계를 생각해보도록 만든다. 만약 미국이 한국의 우방이면서 동시에 제국이라는 역할까지 했다면 '이 민족, 사회, 국가 내부에 존재하는' 그 무엇 때문은 아니었을까. 만약 한·미 관계에서 나타나는 미국의 부정적인 역할에 한국인들이 실망했다면 그러한 역할을 만들어낸 책임 속에는 한국인들의 몫도 존재하지 않을까.
1940s 해방 그리고 분단
RHEE'S REVIVAL 《1943년 12월 13일자》
귀국할 날 기다리는 이승만 박사이승만 박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교대표부의 전권대표다. 그는 관 속에 들어가 중국 상하이(上海)로 갔다가 전권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워싱턴으로 돌아온 유일한 외교관이다. 이 박사는 지난주 카이로 협정문서가 발표되자마자 성명을 발표했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이 박사와 그의 정부[현재 중국 충칭(重慶)에 망명]가 조국 땅에 내리쬐던 일본이라는 빛보다 더 강렬한 빛을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박사는 한국이 일본의 압제에서 독립할 날이 길러지기를 반세기 이상 기다려왔다. 자그마한 체구에 신사다운 면모를 갖춘 이 박사는 독실한 감리교 신자다. 그는 감정에 북받치는 목소리로 조용히 기쁨을 표시했다. 말하는 동안 간간이 손가락 끝을 입으로 후후 불었다. 1898년 독립협회 사건으로 일본 감옥에 투옥돼 몇 년간 옥살이를 할 때 거의 매일 대나무 회초리로 손가락 끝을 후려치는 고문을 받아 생긴 버릇이다. 이 박사는 1904년 석방될 당시 옥중에서 쓴 '독립 정신'이라는 책을 발표했다.
이 박사는 1912년 일본이 조작한 '105인 사건'에 연루돼 또 다시 투옥될 위기에 처하자 한국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그는 미국에서 열리는 세계감리교대회의 한국 대표로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을 받은 터였다. 그러나 일본인은 그의 출국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 박사는 일본이 일개 한국인을 붙들어 두는 처사는 한국을 그만큼 두려워한다는 표시이며 2500만 한국인에게 체면을 잃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 말에 뜨끔한 일본은 미국 체류기간 중 한국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고, 6개월 이내에 귀국한다는 전제로 그의 출국을 허락했다. 그러나 7년이 지난 후에도 미국에 남아있던 이 박사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리고 내각의 의견을 들으려고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의 측근들은 그를 관 속에 숨겨 상하이로 들여보냈다. 일본 정부는 그의 목에 10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었지만 허사였다. 이 박사는 몇 년 전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사임했고, 그의 뒤를 김구 주석이 이었다. 한국 안에 있는 한국인들 역시 김구의 독립운동을 높이 평가한다. 그들은 일본의 압제 아래서 모국어를 쓰지 못하고, 종교 탄압마저 받고 있다. 68세인 이 박사는 살아생전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계 민주진영에서 승인 받고(아직 미국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자유를 찾은 조국의 품에 돌아갈 날이 꼭 오리라고 믿었다.
- 김구는 이번 주 충칭에서 전후(戰後)즉시가 아니라 '적절한 절차를 거쳐서'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 회담 당사자들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KOREA UNDER TWO FLAGS 《1945년 10월 1일자》
미·소 '두개의 코리아'로 분할 통치 해럴드 아이잭스 뉴스위크 특파원은 미국과 소련이 '해방'해준 이후 한국에 닥친 정치·경제적 혼란상을 믿을 만하게 설명한 기사를 보내왔다.
존 R하지 중장은 미 육군 제24사단을 이끌고 한국에 왔다. 그러나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 선언을 이행할 연합국 최고위층의 정책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는 설사 연합국의 정책이 있다 해도 내용이 무엇인지는 모른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가 아는 내용은 미 육군 극동사령부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받은 특명뿐이었다. 일본의 항복을 접수하고, 법질서를 유지하는 최선의 수단으로 현 정부 체제를 유지하라는 명령이었다. 이 명령은 처음엔 아베 노부유키 총독이 이끄는 조선 총독부를 계속 유지하라는 의미로 해석됐다. 미군을 하늘이 보낸 해방군으로 여겨 열렬히 환영한 한국인에게는 충격이요, 실망이었다. 한국인들의 이런 반응은 미국의 점령 정책에 확실한 변화를 가져왔다.
식량, 토지, 정치: 그 다음 시급한 문제는 식량이다. 일본인들은 전쟁 동안 농촌에서 모든 곡물을 약탈했으며, 비축해 놓은 다량의 식량을 미군이 들어오기 직전에 태우거나 버렸으며, 그 외 다른 방법으로도 먹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쌀과 육류·어류·채소는 구하기 힘들고 가격도 비싸다. 일본인들은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화폐를 남발하고, 물가 통제조치를 중단함으로써 소비자 시장에 혼란을 야기했다.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았고, 실업률이 치솟았다. 많은 사람이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라고 알려졌다. 좀 더 광범위한 경제 문제는 부동산 소유권 문제다. 땅과 공장·상점을 포함해 전체 부동산의 약 80%가 일본인 소유로 추정된다. 하지 중장은 일본인 소유의 부동산을 몰수할 계획이 없다고 발표했다. 현재 미군은 혹시 있을지 모를 한국인들의 점거 시도를 우려해 일본인 소유의 부동산을 보호중이다. 미군의 점령 이후 50여 개의 정당과 위원회·단체가 생겼다. 가장 중심이 되는 두 단체는 민주당과 인민공화국건국준비위원회다.
두 개의 코리아는 안 된다: 그러나 한반도가 미군 통치 지역과 소련군 통치 지역으로 나뉨으로써 많은 문제가 야기됐다. 한국인들은 당황스럽고 걱정스러운 표정이 역력하다. 그들은 이런 상황 역시 '일본의 책략'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자가 이해한 바로는 미 국무부와 육군 모두 분할 통치는 예측하지 못한 듯하다. 현재 이곳의 상황 전개로 미루어 한국 점령에 관한 사전 계획이나 관련 정책의 진지한 고려가 없었음이 분명하다. 이곳에 파견된 미 국무부 대표라고는 한국 경험이 전무하고 정치적 책임도 없는 하위 외교관 한 명뿐이다. 어쨌든 원래는 미국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고, 소련·중국·영국이 형식적으로 대표를 파견할 계획이었다는 정보를 접했다. 분할 통치 발표는 포츠담 회담 이후에 나왔고, 미국 측 관계자들에게는 놀라운 소식이었다. 소련은 신속히 움직였다. 그들은 미군이 도착하기 13일 전인 8월 26일 관할 지역을 점거했다.
1950s 동족상잔의 비극
UNCLE SAM TAKES AS WORLD COP 《1950년 7월 10일자》
미국, 세계 경찰 역할을 맡다미국이 자유를 수호하려고 이토록 값비싼 대가를 치른 적은 없었다. 대담한 국가정책을 승인하면서 미국인들이 이처럼 굳은 결집력을 과시한 적은 없었다. 아직도 용감한 기사의 개입을 갈망하는 세계에서 미국의 국가적 자존심이 이같이 고양된 적은 없었다. 6월 30일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미 지상군의 남한 투입을 명령했다. 이로써 미국은 정복욕에 사로잡힌 공산군으로부터 극동의 이 공화국을 구해내는 돌이키지 못할 임무를 떠맡게 됐다. 발표 당시 트루먼은 미국의 대표로, 그리고 말 그대로 자유세계의 대표로 연설했다. 트루먼은 미군 최고사령관으로서만이 아니라 국제적 침략 행위에 맞서 유엔을 대표해 행동할 권한을 위임받은 세계 경찰 총수의 자격으로 연설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대장은 침략 현장에서 트루먼을 대신하는 부사령관이 됐다.
위험: 트루먼과 참모들은 미군 투입을 전쟁이 아니라 치안유지 작전이라고 불렀다. 신중한 표현이었다. 미국 측은 또 러시아가 지금이나 추후에 북한군 침략자들과 쉽게 관계를 단절하도록 신중한 태도를 견지했다. 그러나 트루먼과 참모들은 미국이 중대한 위협에 직면한 사실을 알았다. 러시아는 북한군을 물러가게 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거절했지만 직접 남침에 가담하진 않았다. 소련제(U.S.S.R.)표식의 항공기가 최전방에서 간혹 눈에 띄었지만 러시아 병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러시아는 또 한차례의 세계대전에 뛰어들 준비가 안 돼 있었기 때문에 전투는 위성국 국민들에게 맡기려는 듯했다. 위성국 사람들은 전투 초기단계에 스스로도 놀랄 만한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러시아가 만주나 시베리아에 주둔 중인 자체 병력을 동원해 북한군을 지원할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못한다.
그 지역에 배치된 러시아 군사력은 일본에 주둔한 맥아더 휘하의 군사력보다 월등히 우세했다. 세계가 북한의 남침에 정신이 팔린 사이 소련은 대만·인도차이나·베를린·유고슬라비아·이란 등 10여 곳 중에서 한 곳을 실제 공격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모험에는 신중한 계산이 요구된다. 미국과 유엔의 입장에서 한 번도 싸워 보지도 않고 '트루먼 라인'(공산주의의 침략을 저지하려 트루먼이 동북아시아에 그은 선)이 뚫리도록 내버려 둔다면 세계에(특히 서구 민주주의와 러시아 공산주의 중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지역에) 앞으로 러시아권 밖에선 안보를 전혀 보장하지 못한다고 선언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독일 분할에 뒤이은 일련의 사태도 따지고 보면 서구의 그 같은 '직무 유기'의 결과였을지 모른다(적어도 트루먼과 그의 참모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트루먼 진영은 그러나 그 같은 일련의 사태 이후에 초래될지 모를 세계대전은 최대한 피하려 했다.
도전에 맞선 미군'사후 약방문'이라는 한국의 오랜 속담은 4200년 동안 이 나라에서 그래왔듯이 지난주에도 그대로 통했다. 한국전쟁 발발 첫 주 내내 서구는 환자를 구하려는 희망에 약방문을 하나씩 처방해 나갔다. 그러나 그 어떤 처방도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구하기엔 시간상 역부족이었다. 왜냐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 공화국이 남침한 지 불과 이틀 뒤인 6월 27일 오전 9시 30분(현지시간) 이미 러시아제 T-30중형 탱크와 T-70경형 탱크를 포함한 북한군 탱크 100대가 서울로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인구가 계속 늘어나는 서울은 시민들(현재114만 1766명)이 대혼란에 빠져 무법천지가 됐다. 북한군은 지프·담배 등 모든 동산(動産)을 '빌려'갔다. 공산주의자들이 서울을 접수하자마자 주민들은 자신의 안전을 지키려고 황급히 집과 가게 앞에 '해방군 환영'이라고 적힌 깃발을 내걸었다. 그러나 서울 중심가 도로 변에는 침략자들을 환영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초가집과 기와집 안에서 지냈고, 가게 문은 나무판자로 굳게 걸어 잠갔다.
NEW UNITED NATIONS LINE-MACARTHUR'S 《1950년 10월 9일자》유엔의 새로운 저지선 '맥아더 라인'이번 주 38선을 넘은 유엔군의 목표다, 유엔군은 서울 함락 후 북한 수도 평양을 쟁취하겠다고 수륙양용 공격에 나섰다. 미 해병대가 38선에 접근하면서 이미 재개되기 시작한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막으려는 목적이다. 맥아더 라인은 맥아더 장군이 혼자 정한 저지선이 아니었다. 그 선은 맥아더가 북한군의 항복을 요구하기 전에 맥아더에게 주어진 비밀 지시의 일환으로 미국 정부가 결정했다. 맥아더 라인은 북한에서 동서의 폭이 좁은 지역을 가로지르는 선이다. (토끼 모양을 한 한반도의 목 부위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선). 유엔군은 잔여 북한군을 괴멸시킨 뒤에도 그 선을 넘지 못하도록 돼 있다. 물론 한국전쟁의 모든 작전처럼 이 계획도 사전 통고 없이 바뀔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한국전을 해결할 정치적 방법이 모색되는 동안 유엔군이 그곳에서 대기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 선이 중국·러시아와 유엔군 사이에 상당한 면적의 완충 지대를 남겨두려는 취지로 설정됐다는 점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38선을 넘는 모든 전략에는 인천상륙작전처럼 매우 큰 부담이 따르기 때문이다. 유엔군이 북한 땅에 진입할 무렵 이미 저우언라이 중국 외교부장은 38선이 뚫리면 중국이 북한을 지원한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중국의 이런 위협을 허풍으로 여긴다. 그러나 맥아더라인은 중국이 한국에 실제로 개입할 경우 기꺼이 맞서 세계평화에 초래될 위험을 최소화하겠다는 의지의 표시다. 더군다나 유엔의 38선 통과 결정 이후 공산 진영에 초래된 혼란은 전적으로 우연만은 아니었다.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의 계획을 까마득히 몰랐기 때문에 반격을 계획할 어떤 근거도 못 찾았다. 미국은 38선 통과가 군사적인 기습공격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상대의 허를 찌르는 데 성공한 셈이다.
연합국의 조언 묵살한 이승만 대통령 "敬天愛人" 이승만 대통령의 부산 집무실 문에 걸린 훈시다. 이 대통령이 직접 붓으로 쓴 15cm 높이의 사자성어다. 그러나 아무리 그 가르침대로 살려 애썼어도 많은 사람들이 사랑으로 보답하지 않는다고 이 대통령은 느꼈으리라. 국민의 손으로 뽑은 국회의 경우가 특히 심했다. 유엔이 승인한 1948년의 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선출하는 임무는 의회에 맡겨졌다. 그러나 의회는 이 대통령에게 다시 대통령직을 맡길 분위기가 아니다. 국민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려는 이 대통령의 헌법 개정안도 보류됐다. 국민투표라면 이 대통령이 재선될지도 모른다. 지난주 워싱턴에 도착한 외교 보고서는 우려를 자아냈다. 이 대통령이 아직도 국회에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의지를 보인다고 묘사됐다. 그리고 상황이 악화되리라고 예측했다. 일부 보고서는 이범석 내무장관을 중심으로 하는 이 대통령 충복들이 무력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독재정권을 수립할지 모른다고 내다봤다. 지금까지 어떤 외교적인 충고에도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 존 J 무초 미국 대사는 이 대통령에게 미국의 입장을 끈질기게 설명했다. 그는 헌법적 절차를 지키겠다는 보장을 받아내려 했다. 그리고 미국과 유엔이 적극적으로 도우려 한다는 뜻을 이 대통령에게 확인해 줬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답변은 이랬다. "미국과 유엔이 경제와 금융 지원을 줄이기로 한다면 불행한 일이지만 그래도 내정간섭보다는 낫다."
* 유엔 한국 통일부흥위원회(UNCURK)도 형편은 마찬가지였다. UNCURK는 열흘간 냉각기를 두며 체포된 반대파 의원들을 석방하고, 부산 지역 계엄령을 해제하는 한편 의회를 휴회하자고 제안했다.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