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판 명저)고통이라는 선물
폴 브랜드, 필립 얀시 지음 | 두란노
고통이라는 선물
폴 브랜드, 필립 얀시 지음
두란노 / 2001년 8월 / 428쪽 / 15,500원
의사의 길로 들어서다내 평생 가장 어두운 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신을 벗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준비를 끝냈을 때 끔찍한 생각이 무서운 힘으로 나를 강타했다. 발의 반쪽에 아무 느낌이 없었다. 의자에 털썩 앉았다. 내 마음은 무섭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아마 환상이었을 것이다. 눈을 감고 볼펜 끝으로 발꿈치를 찔러 보았다. 아무 느낌이 없었다. 발꿈치 주변에 뭔가 닿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어떤 메스꺼움보다도 더 무서운 두려움이 뱃속을 뒤틀어 놓았다. 마침내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인가? 나병을 다루는 사람들은 누구나, 나병의 첫 증상 중 하나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나병을 치료하는 의사에서 나병 환자로 비참하게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인가? 나는 몸이 뻣뻣하게 굳은 채 일어나서 무감각한 발에 힘을 주고 앞뒤로 무게 중심을 옮겨 보았다. 그러고 나서 옷 가방을 샅샅이 뒤져 바늘을 찾아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는 발목 바로 밑 살갗을 바늘로 조금 찔러 보았다. 아무 통증도 없었다. 반사 작용이 나타나는지 보려고 바늘을 더 깊이 찔렀다. 아무 느낌이 없었다. 바늘을 찔러 생긴 구멍을 통해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전율했다. 고통이 느껴지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느낄 수 없었다.
내 인생은 어떻게 될 것인가? 사람들의 아픔을 덜어주는 데 보탬이 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믿음으로 인도에 갔었다. 그러나 이제 소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영국에 그대로 머물다가 죽어야 하는가? 물론 가족과도 격리되어야 할 것이다. 아이들은 특히 감염이 잘 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환자들에게 나병과 맞서 싸우고 스스로 새로운 삶을 꾸려 가라고 입심 좋게 달랬는가? 저주받은 사회가 나를 환영하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내 진료실에 있는 진료 차트들은 내 몸이 점차적으로 마비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 줄 도표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었다. 일상생활의 즐거움은 사라지고 말 것이었다. 강아지를 쓰다듬는다든지, 부드러운 비단의 감촉을 느껴 본다든지, 어린아이를 안는다든지 하는 이 모든 감각적인 일들이 곧 똑같이 느껴질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마침내 날이 밝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불안과 절망에 빠져 있었다. 거울을 통해 면도하지 않은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병의 흔적을 찾기 위해 코와 귓불도 살펴보았다. 밤새도록 내 속에 있는 임상 의사가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결코 두려워하지 말아야 했다. 런던의 여느 의사들보다 나병에 대해 더 많이 알았기 때문에 진찰 과정을 결정하는 것은 내게 달려 있었다. 제일 먼저, 그 병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감을 잡기 위해 감각을 상실한 부위를 정밀하게 표시해야 했다. 나는 앉아서 심호흡을 하며 바늘 끝으로 발꿈치를 찔렀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나는 지금까지 마치 전기 충격처럼 생생한 그 통증만큼 유쾌한 감각을 느껴 본 적이 없다. 나는 나의 어리석음에 큰 소리로 웃어댔다. 이제는 모든 것을 완전히 느낄 수 있다. 내가 몸을 구부린 채 열차에 기대앉아 있었을 때, 내 몸은 무게와 압력을 재분배하는 일상적인 불안정한 움직임을 지탱하기에도 힘겨운 상태였다. 일시적이었다! 밤새 그 신경이 원상 회복되어 이제는 고통과 촉감과 추위와 더위에 대한 메시지를 충실하게 뱉어내고 있었다. 나병에 걸리지 않았다. 단지 피곤에 지친 여행자가 질병과 과로로 신경 쇠약에 걸렸을 뿐이다.
내 발이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정반대 현상이 일어났다. 깊은 수렁을 지나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온 것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하나님, 고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다. 그 이후로는 형태가 어찌 됐든 그런 기도를 수백 번도 넘게 되풀이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기도가 이상하게, 심지어 모순적이거나 자학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그것이 계속적으로 밀려드는 감사의 제목이 되었다. 나병 환자가 고통을 느끼는 우리를 얼마나 부러움의 눈길로 바라볼지 그때 처음으로 이해했다.
나의 직업 생활은 고통이라는 주제의 주변을 맴돌아 왔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여러 다른 문화 속에 살면서 고통에 대한 다양한 태도를 아주 가까이에서 보아왔다. 내 인생은 대충 3기로 나누어지는데 인도에서 27년, 영국에서 25년, 미국에서 27년 이상을 살았다. 각 나라에서 나는 고통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알았다.
나는 나치스 치하 독일 공군의 대공습의 공포로 가득했던 시기에 런던에서 의학 인턴 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 대공습으로 인해 자만에 빠져 있던 런던은 쑥밭이 되고 말았다. 육체적 고통은 끊일 날이 없었다. 그것은 거의 모든 대화의 초점이 되었고 신문 1면의 헤드라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내가 겪은 런던 사람들의 60%가 그때를 자기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던 때로 회상한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본다.
전쟁 후 나는 인도로 갔다. 마침 그 나라는 분할로 인해 쪼개지고 있을 때였다. 어디를 가나 가난과 고통이 상존하는 그 나라에서 나는, 근엄하게 조용히 고통을 수용함으로써 고통을 참아낼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육체적으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데서 기인하는 비극을 안고, 사회에서 최하층 천민으로 취급당하며 살아가던 나병 환자들을 보살피기 시작한 곳은 바로 그 땅이었다.
미국으로 건너와서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고통을 피하려고 하는 사회를 접하게 되었다. 미국은 어떤 면에서 볼 때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독립 전쟁을 치른 나라였다. 미국 환자들은 내가 겪어 본 어떤 환자들보다도 더 편안한 삶을 영위했다. 그러나 그들은 고난을 맞이할 준비가 훨씬 덜 되어 있었을뿐더러, 고난으로 인해 훨씬 더 많은 상처를 입었다. 미국에서 진통제는 이제 연간 630억 달러에 달하는 상품이 되었고, 텔레비전 상업 광고들은 효능이 더 좋고 더 신속한 진통제를 선전하고 있다. 어떤 상업 광고는 다음과 같은 짤막한 표어를 내세운다. “통증을 느낄 틈도 없어요.”
런던 사람들은 어떤 대의명분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고통을 견뎌냈고, 인도 사람들은 고통을 예상하고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배웠으며, 미국 사람들은 고통을 적게 겪으면서도 고통을 더 많이 두려워했다. 이들 세 나라의 사람들은 각각 인간 존재의 이런 신비스러운 사실들에 대해 내 나름의 안목을 갖는 데 도움을 주었다. 우리는 대부분 언젠가 끔찍한 고통에 직면할 것이다. 나는 우리가 미리 어떤 태도를 계발하느냐에 따라 실제로 고통이 닥쳤을 때 그 고통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가 결정된다고 확신한다. 이 책은 그 확신에서 나왔다.
나의 어린 시절, 부모님이 콜리 말라이 사람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은 이유는 바로 그분들의 의술이었다. 아버지는 선교사 훈련 대학인 리빙스턴 대학에서 1년 동안 열대 의학을 공부하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런던에 있는 동종 요법 병원에서 배운 것에 의존하셨다. 그분들이 받은 의학 훈련은 한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분 모두 히포크라테스의 본래 모토를 몸소 보여주셨다. 좋은 의술은 질병뿐 아니라 사람을 치료한다는 것이다.
부모님은 주위에서 무언가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전통적인 선교사들이었다. 그분들은 힘을 합해 학교 아홉 개와 일련의 병원들을 세우셨다. 농사에 대해 말한다면, 어머니는 콜리에서 채소밭을 가꾸는 데는 거의 성공하지 못하셨다. 그러나 감귤류의 과일을 생산하는 과수원은 번창했다. 아버지는 당신의 전문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건축업 분야에서 일하시는 것을 더 좋아하셨다. 아버지는 젊은 마을 청년들을 모아 놓고 목공을 가르치셨고, 마을 주민들의 초가지붕을 갈아야 할 때가 되면 기와 만드는 법도 가르쳐 주셨다. 소작농들이 평지에 사는 지주들에게 부당한 대접을 받으면, 아버지는 수백 명의 대표단을 이끌고 지역 사령부로 가셨다. 그러고는 소작농들을 대신하여 영국의 식민지 관리들에게 말씀하곤 하셨다.
이 모든 선행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제시 브랜드와 어머니 에벌린 브랜드는 산지 사람들을 위해 기독교 교회를 세우려는 소중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완전히 실패하셨다. 영 숭배를 전문으로 하는 마을의 한 사제가 자신의 생계가 위태로워질 것을 염려한 나머지,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신들의 진노를 얻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다녔다. 우리는 신체적 위협을 당했으며, 나는 그 사제를 볼 때마다 숨곤 했다. 독살당한 소들이 그의 위협을 잘 보여주었다. 그래서 부모님이 매주 예배를 드리셨지만 참석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감히 기독교인이 되려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다가 1918년부터 1919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전염성이 강한 스페인 독감이 콜리 마을까지 퍼졌다. 그 병은 콜리 마을을 덮쳐서 맹렬한 기세로 사람들을 죽였고 마을 전체를 형체도 없이 산산이 깨뜨렸다. 두려움에 질린 사람들은 병든 가족이 낫도록 보살피기는커녕 숲속으로 도망쳐 버렸다. 아버지는 그렇게 버려진 독감 희생자들이 질병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영양실조와 탈수 때문에 죽어 가고 있다고 판단하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우리 집 밖에 있는 큰 가마솥에 한 솥 가득히 쌀죽을 끓여 여러 날 동안 그 죽을 계속해서 공급하셨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말을 타고 마을마다 다니시면서 버려진 환자들의 입 속에 죽과 정수한 물을 떠 넣어 주셨다.
부모님을 대적하던 그 사제와 그의 아내도 결국 병에 걸렸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버렸으나 부모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부모님은 정기적으로 그들에게 음식과 약을 가져다주셨다. 그 사제는 ‘적’으로 생각하던 사람들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며 자기가 부모님을 아주 잘못 판단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아버지께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이 나를 이어 사제가 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종교를 믿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나를 도와줄 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 자녀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면 좋겠습니다.”
며칠 후, 나는 우리 집 현관에 서서 눈물에 젖은 열 살짜리 소년이 들판을 가로질러 오는 것을 보았다. 그 아이는 고열로 시달리는 아홉 달 된 여동생을 안고 있었으며, 사제와 사제의 아내에게서 받은 서류 뭉치를 갖고 있었다. 그렇게 하여 내 여동생 루스와 형 아론이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콜리 말라이에 있던 교회가 6년 동안의 거센 저항 끝에 첫 신자를 얻었다.
나는 부모님에게서 고통이 환자에게만 신호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의 공동체에까지 신호를 보낸다는 사실을 배웠다. 마치 고통을 감지하는 개개의 감각 기관들이 몸의 다른 세포들에게 “나를 보살펴 줘! 제발 나를 도와줘!” 하고 외치듯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인간들도 전체 공동체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부모님은 아무리 위험해도 그러한 요청에 용기 있게 대처하셨다. 훈련도 거의 받지 못하시고 자원도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당대의 가장 치명적인 질병들을 치료하셨다. 서혜 임파선종 전염병, 장티푸스, 말라리아, 소아마비, 콜레라, 천연두 따위의 질병들이었다. 나는 에이즈 바이러스 같은 변종이 콜리 말라이 산에 나타났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분명히 안다. 아버지는 충분치도 못한 약품 가방을 챙겨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들에게 달려가셨을 것이다. 아버지의 의술은 인간의 깊은 동정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동정심(compassion)이라는 말은 라틴어 어근인 ‘com + pati’에서 나온 것으로, 함께 고통을 당한다(to suffer with)는 뜻이다. 부모님은 의학 훈련의 부족을 인간의 고통을 향한 본능적인 반응인 동정심으로 극복하셨다.
나는 아홉 살 되던 해인 1923년까지 콜리 산에 머물렀다. 그 후 누이인 코니와 함께 정규적인 교육을 받기 위해 영국으로 갔다. 하지만 영국에서 나는 이방인이 되었다. 아버지는 자연 속에서 배우신 것들을 편지를 통해 나에게 개인 지도하셨다. 거의 6년이란 세월이 흘러 나는 열다섯 살이 되었고, 나의 미래를 위해 결정을 내려야 할 시기가 되었다. 어디에서 살아야 하며 어떤 직업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우리에게는 상의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었기에 나는 부모님이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그러나 1929년 6월, 비보가 도착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는 전보였다. 말라리아의 악성 합병증인 흑수열에 걸려 발병 이틀 만에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그 전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 비보로 인해 자녀들이 놀라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 이후 어머니가 보내시는 편지들은 모두 두서가 없었고 어머니는 마치 정신이 혼미한 사람 같았다. 그래서 가족들의 권유로 1년 만에 어머니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때 슬픔이 사람을 얼마나 황폐화시키는지를 처음으로 보았다. 시간이 흐르자 어머니는 잘 적응해 가셨다. 그러나 1년 뒤 어머니는 영국에 계속 머무르시라는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시고 콜리 말라이 산 꼭대기에 있는 방갈로로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일은 콜리 산에서 인근 네 개의 산지에까지 이어졌다. 그곳 사람들은 어머니를 가리켜 ‘산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그 말은 어머니의 묘비에도 새겨져 있다. 어머니의 무덤은 내가 자라던 방갈로에서 비스듬히 경사진 곳 바로 밑에 있는 아버지의 무덤 옆에 있다.
어머니는 나에게 아버지의 과학적인 업적을 유산으로 물려주려고 애쓰셨다. 내가 의사가 되어 콜리 산으로 돌아오는 것이 어머니의 꿈이었다. 그러나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어린 시절 경험한 의술에 관한 기억들이 몇몇 고통스러운 장면으로 압축되었다. 아버지가 돌보신 가장 끔찍한 환자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 남자는 곰에게 찢긴 채 살아남았는데 머리 껍질이 이쪽 귀에서 저쪽 귀까지 완전히 찢긴 채였다. 그리고 또 다른 장면이 있는데, 그것은 아마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오후 낯선 남자 세 명이 병원을 찾아오자 아버지는 우리에게 구경도 못 하게 하셨다. 나는 살금살금 나가서 숲속에서 몰래 지켜보았다. 그 사람들의 양손은 염증으로 뒤덮인 채 뻣뻣하게 굳어 있었으며, 손가락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붕대로 발을 감쌌는데 아버지가 붕대를 풀자, 발가락이 하나도 없는 뭉툭한 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린 시절, 나환자를 접촉한 일은 더 이상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의학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아버지가 그 환자들을 치료하실 때 느끼던 것과 똑같은 두려움과 극도의 혐오감이 뒤섞여 떠오르곤 했다. 의학은 내게 맞지 않았다. 고통과 아픔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하고 싶은 것들이었다. 영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만일 누군가 나에게 내 일생의 과업이 고통을 의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에 집중되면 좋겠다고 제안했다면 나는 큰 소리로 웃었을 것이다. 내게 고통은 연구 대상이 아니라 회피 대상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건축학을 5년이나 하고서도 결국은 의학을 전공했다.
리빙스턴 의과 대학의 1년 과정은 세계 각지에서 온 35명의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들 해외에서 활동하기로 헌신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의 끔찍하던 장면들을 회상하면서 창백해졌다. 그러나 머지않아 의학이 내가 자연에 대해 느끼던 경이감 속으로 나를 빠져들게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 역시 의료 일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안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2년 간의 훈련원 과정에는 일정 기간 동안 자선 병원에서 봉사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의학에 대한 나의 관심이 마침내 행동으로 옮겨지게 된 것도 바로 그때부터였다.
어느 날 밤 내가 응급실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구급차 수행원들이 의식을 잃은 아름다운 젊은 여성을 실어 왔다. 병원 직원들은 의식을 잃은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통제된 응급 처치를 신속히 실시했다. 한 간호사가 피 한 병을 가지러 복도를 달려가는 동안 의사는 수혈 기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의사는 내가 조수복을 입고 있는 것을 흘끗 보더니 혈압계를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혈압계를 읽을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 여자의 팔목에서 아무런 맥박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그녀의 살갗은 소름 끼칠 정도로 창백했다. 내부에 출혈이 있었다는 증거였다. 병원의 휘황찬란한 불빛 속에서 그 여자는 성당에 있는 석고상 같았다.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분명 죽었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 간호사가 피 한 병을 들고 도착했다. 의사는 큰 주사기로 여자의 혈관에 주사를 놓고 혈액이 들어 있는 병을 철제 스탠드에 높이 달아맸다. 의료진은 돌아가며 그녀에게 적합한 피를 더 구해 올 동안 수혈의 진행 상황을 지켜봐 달라고 부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