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신자가 묻다
이상준 지음 | 토기장이
새신자가 묻다
이상준 지음
토기장이 / 2025년 5월 / 240쪽 / 15,000원
1장 왜 하나님인가?사람들이 신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세상을 살면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생과 세상에 있는 요소들을 다 이해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다면 굳이 신의 존재를 찾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살아갈수록 이해할 수 없는 요소들을 참으로 많이 만나게 된다. 결국 인생과 역사와 세상에 대한 근본적인 설명을 해줄 누군가를 인간은 끊임없이 찾고 있다. 이에 반해 무신론자들은 인간의 합리성과 과학적 진화론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우주의 정교함과 일관성은 오히려 창조주의 존재를 방증한다.
초월적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차원의 법칙을 보아야 한다. 1차원의 선 위에 사는 존재가 도저히 치울 수 없는 장애물을 만났을 때 2차원의 존재가 이를 치워주면 이를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3차원의 시공간에 사는 인간이 영원하고 초월적인 세계에 가본 적이 없으면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과학은 3차원의 현실 세계를 다루는 방법론일 뿐이므로, 과학으로 초월적 영역의 신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섣부른 맹신이다.
과학주의에 빠진 무신론은 3차원의 시공간에 갇힌 과학적 방법론으로 초월적 영역을 재단하려 한다. 초등학교 5학년인 한 소년은 부모와 교사의 영향으로 확고한 무신론자가 되어 있었다. 동부에서 태어난 그 소년에게 서부에 가본 적이 있냐고 묻자 없다고 답했다. 그럼 가본 적도 없는 서부에 인앤아웃 버거라는 맛있는 햄버거 가게가 존재한다는 말을 듣고 무조건 그런 가게는 없다고 단정하는 것이 맞느냐고 되묻자 소년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영원하고 초월적인 세계에 가본 적도 없으면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단정하는 것 역시 틀린 일임을 깨달은 소년은 그 자리에서 무신론을 내려놓았다.
신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자들에게 17세기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내기 논증을 통해 신을 믿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권면했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믿음의 대가로 영생을 얻지만 믿지 않으면 파국을 맞게 될 것이다.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믿거나 믿지 않아도 잃을 것은 없다. 따라서 수학적 확률과 기대 가치 측면에서 신을 믿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영원한 위기관리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모든 종교가 같은 꼭짓점을 향해 가는 등산로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불교는 신을 믿지 않는 무신론이고, 힌두교는 모든 것을 신으로 숭배하는 범신론이며, 이슬람교는 율법과 형벌로 통치하는 비인격적인 유일신론이다. 오직 기독교만이 인격적인 유일신론이다. 기독교가 유일신을 고집하며 배타적이라는 비난을 받지만, 이는 타종교에 대한 차별이 아니라 부부간의 정조를 지키거나 생부만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과 같은 순전함을 위한 옳은 배타성이다. 고차원의 존재가 저차원으로 내려오는 차원의 법칙에 따라, 영원의 세계에 계신 하나님이 3차원의 시공간으로 다가와 인간의 눈높이에 맞춰 만나주신 감동적인 이야기가 기독교의 본질이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신의 존재를 다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의 과학으로도 신의 존재를 다 실증할 수 없다. 인간의 심성으로도 신의 존재를 다 감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이 먼저 신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신이 먼저 인간에게 다가오는 것이 맞다. 이것이 차원의 법칙이다. 고차원은 저차원이 자기 차원 안에 속해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저차원에 접속할 수 있다. 하지만 저차원은 자기 차원이 자기 세계의 한계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고차원에 진입할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은 영원의 세계에 계신 그분이 시공간의 3차원 세계로 먼저 다가오신다고 말한다. 성자 예수님이 영원한 천상의 보좌를 버리고 이 죄악의 땅에 오셔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어 주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제 우리는 초월자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고, 경험할 수도 있고, 대화할 수도 있고, 교제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다가오시어 그분의 나라(천국)로 데려가신다고 하니 이것이야말로 온 우주에서 가장 감동적인 신데렐라 스토리가 아닌가!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눈높이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돌아오라고 말하고 있다. 아버지께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나를 낳아 주시고 키워 주신 육신의 아버지가 계신 것처럼, 내 영혼을 조성하시고 이 세상에 보내시고 보이지 않게 나를 키워 주신 내 영혼의 아버지가 계신다. 이제는 그분을 만나야 한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세상의 쾌락과 화려함이 좋아서 영적으로 길을 잃은 자녀들도 이제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와야 한다. 하나님은 자녀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돌아오면 언제든 대문 밖으로 달려 나와 껴안고 기쁘게 맞이해 주시는 분이다. 주저하지 말라. 그동안 인본주의를 신뢰했든 무신론을 따랐든 다 상관없다. 당신을 정말 사랑하셔서 당신을 구원하시고 평생토록 인도하시며 영원까지 맞이해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2장 왜 인간인가?오늘날 대다수 과학자가 진화론을 지지하지만, 진화론은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가설이자 이론에 불과하다. 생물학의 대진화나 우주론의 빅뱅 이론은 실험적으로 완전히 증명된 적이 없으며, 우주가 생명체에 적합하게 정밀히 조정되어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누군가의 설계를 암시한다. 아마존 원주민이 문명 세계에 와서 컴퓨터를 보고 그 속에 귀신이 있다고 믿는 것은 미신이지만, 그렇다고 컴퓨터를 만든 이가 없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놀라운 컴퓨터가 존재한다는 것은 탁월한 지성을 가진 설계자가 있다는 뜻이듯, 정밀한 우주 역시 입법자의 존재를 반증한다. 오늘날 과학의 대전제가 된 진화론은 생물학적 변이를 침소봉대한 가설에 불과하다. 찰스 다윈은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핀치 새들의 부리 모양이 각 섬의 환경과 식량 자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관찰하고 생존 경쟁을 통해 진화한다는 자연선택 이론을 내놓았다. 그러나 핀치 새의 부리 변이는 종 안에서의 소진화일 뿐, 종 자체가 완전히 변하는 대진화의 증거가 될 수 없다.
코넬 대학의 저명한 진화생물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윌리엄 프로바인은 만약 다윈주의가 옳다면 피할 수 없는 5가지 결론에 도달한다고 말했다. 첫째, 신이 존재하는 증거는 없다. 둘째, 사후 생명은 없다. 셋째, 윤리의 절대적 토대는 없다. 넷째, 삶의 궁극적인 의미는 없다. 다섯째,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의지란 없다. 이렇게 되면 결국 인간은 그저 고성능으로 작동하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하고 언젠가 방전되면 버려지는 건전지와 같은 존재가 된다. 이런 유물론적 가치관을 가지면 현세주의와 쾌락주의와 물질주의와 허무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차피 한 세상이니 최대한 많이 누려 보고 최대한 즐기다가 가는 것이 전부인 인생이 된다. 하지만 이런 인생은 이내 허무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경은 영이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혼을 주셨으며, 인간은 동물들과는 다른 존귀한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인간은 육체 덩어리가 아니라 영혼을 가진 하나님의 형상이다. 과학이 유일한 진리의 기준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초월적 세계에 대한 그 어떤 지식과 정보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물질계 너머에 계신 초월적 존재로서 우리에게 성경이라는 통로를 통해 그분의 세계에 대하여 계시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이라는 창조의 동산에서 과학을 통해 하나님의 질서를 배우고, 성경이라는 진리의 동산에서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배워야 한다. 무신론자들이 성경과 과학을 분리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다. 우리는 성경도 하나님의 계시이며 과학도 하나님의 도구라고 본다. 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통해서도, 과학의 발견들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17세기에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영국의 과학자 아이작 뉴턴은 자신의 집에 찾아온 무신론자 친구에게 방 안에 있는 지구본이 만든 사람 없이 갑자기 생겨났다고 말했다. 친구가 제정신이냐며 어떻게 만든 사람이 없이 지구본이 생기느냐고 반문하자, 뉴턴은 이 작은 지구본 하나도 만든 이가 있어야 존재하는데 어떻게 이 거대한 우주가 만드신 이 없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느냐고 일침을 가했다.
성경은 인간이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창조의 작품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아름다운 하나님의 작품으로 만드셨다면, 왜 선악과를 만드셨을까. 선악과가 없었으면 죄도 짓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 논리다. 만약 법이 없다면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세상이 될까, 아니면 무법천지가 될까? 생각해 보라. 하나님은 우리와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원해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지, 소일거리 정도로 갖고 놀려고 만드신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자원함이 없이는 온전한 사랑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잠시 연애를 하거나 썸을 타는 정도가 아니라 참사랑을 나누고 영원한 혼인 관계를 맺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이 자유의지를 오용하여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말았다. 사탄은 인간을 속여 선악과를 먹게 함으로 인간이 타락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원망한다면, 여전히 우리는 사탄의 속임수에 속고 있는 셈이 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와 사랑이라는 최고의 선물을 주시는 분이다. 그리고 망가진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살려내셔서 이 고통의 역사를 환희의 역사, 승리의 역사로 바꿔 주실 유일한 분이다. 우리의 죄로 인해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시는 고통마저 감수하셔야 했다. 하나님은 흙과 생기로 사람을 지으셨다. 인간은 육체 안에 혼을 담고 있는 영이기에, 순간적인 재미와 쾌락만 추구하면 결국 허무해진다.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먹고 의미 있는 인생을 추구할 때 비로소 영원한 만족을 얻고 살아나게 된다.
3장 왜 예수님인가?절대자 하나님이 계신 것도 인정하겠고 인간에게 영적인 필요가 있다는 것도 알겠다 해도, 왜 꼭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하는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되신다는 것을 고백하면 되는 것 아닌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제시하신 유일한 해답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장난감이 아니라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자녀로 창조하셨다.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신 것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선악의 절대적 기준이 되심을 인정하라는 단 하나의 룰이었다. 축구 선수들이 정해진 룰을 지킬 때 오히려 그라운드에서 자유자재로 플레이할 수 있듯, 이 룰은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장치였다. 또한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이유는 자원함이 없이는 온전한 사랑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 자유의지를 오용하여 타락했고 죄의 그물에 빠지게 되었다. 인간은 스스로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며 타인과 비교하는 상대적인 의를 내세우지만, 이는 구원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폐 기능에 문제가 생긴 사람이 오래된 구형 엑스레이 앞에서는 매우 건강하다고 판정을 받을지 몰라도, 신형 MRI로 검사해 보면 문제점들이 낱낱이 드러나는 것과 같다. 세상이라는 거울 앞에서는 타인의 문제만 보이고 나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거룩하시고 한 점 흠이 없으신 하나님의 거울 앞에 서면 정직한 죄인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날 뿐이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오용해 타락하고 고통의 역사가 시작되었지만, 하나님은 자녀인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홍수가 난 마을에서 강물에 떠밀려 가는 남자를 구하기 위해 한 구조대원이 다리 위에서 자신의 생명을 걸고 뛰어내렸다. 그는 남자를 구해냈지만 체력이 소진되어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처럼 예수님은 그분의 생명으로 우리의 생명을 대신하셨고,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
하나님은 시간의 미로에 갇힌 인간에게 먼저 손을 내미셨고, 그 유일한 구원의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이 잘 와닿지 않는다고 말한다. 만약 당신에게 자녀가 10명 있는데 유괴범이 당신의 생명을 내놓아야 아이들을 놓아주겠다고 한다면 자식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녀가 단 1명일 때 1대 1로 생명을 바꾸는 것이 아까워서 목숨을 내주지 못하겠는가. 예수님은 온 인류라는 숫자 때문이 아니라, 단 한 명일지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피를 흘리며 죽으셔야만 했던 이유는 영적 세계의 법칙 때문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생명을 위한 희생이 필요했다. 십자가는 고대 사회에서 최악의 중범죄자에게만 적용되던 가혹하고 치욕적인 형벌이었다. 이 십자가의 처참함은 곧 우리가 지은 죄악의 처참함을 그대로 보여 준다. 본래 우리가 직접 그 참혹한 심판을 받아야 했지만,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를 지심으로 죽음을 맞이하신 것이다. 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은 당대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스캔들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는 최고의 능력이자 지혜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왜 꼭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느냐고 묻지만, 사실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것이 감사한 일 아니겠는가. 만약에 예수님이 구원자로 오지 않으셨다면 우리에게 아무런 구원의 여망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고층 건물에 대형 화재가 일어나 구조원이 사람들에게 건물 밖에 깔아 놓은 대형 에어 매트리스로 뛰어내려야만 살 수 있다고 말하는데, “아니 왜 그렇게 편협한가? 승강기는 사용하면 안 되는가?”라고 항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두려운 일일지라도,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열려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인 것이다.
이러한 십자가의 대속은 한 청년의 재판 이야기로 잘 설명된다. 한 청년이 중범죄를 저지르고 법정에 서게 되었는데, 그의 재판을 담당한 판사는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였다. 판사는 법정에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한편으로는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정의를 집행해야 하는 공인이었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판사는 그에게 엄청난 벌금형을 부과했다. 그러나 판결이 끝난 후 그는 조용히 법복을 벗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래로 내려와 아들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아들의 손을 잡고 “나는 판사로서 네게 벌을 내렸지만 아버지로서 네 벌금을 대신 치르겠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아들이 감당할 수 없는 죗값을 대신 치름으로써 아들은 비로소 자유를 얻게 되었다.
성경은 죄를 빚이라고 표현한다. 죄를 짓고 공짜로 벗어나는 일은 없으며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진정한 죄 용서의 의미를 1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다. 어떤 사람이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금액인 1만 달란트, 오늘날로 환산하면 약 5조 원에 달하는 빚을 졌는데 임금님이 그를 불쌍히 여겨 다 탕감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 그런데 그는 나가서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즉 약 5백만 원을 빚진 친구의 멱살을 잡고 갚으라고 독촉하며 감옥에 처넣었다는 이야기다.
창조주이신 주님 앞에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 자신을 죄로 망가뜨리고 세상을 오남용해서 망가뜨린 엄청난 채무자다. 예수님이 우리의 죗값을 치러 주심은 임금님이 1만 달란트를 탕감해 준 것과 같다. 채권자가 오히려 채무자를 쫓아다니면서 빚을 탕감해 주겠다고 나서는 이 은혜로운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4장 왜 믿음인가?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의 의로운 행위나 도덕적 선행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과 긍휼 때문이다. 인간의 행위는 매우 상대적이며 자력 구원은 불가능하기에 하나님은 전적인 은혜를 베푸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