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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본받으라

이상준 지음 | 토기장이


예수님을 본받으라

이상준 지음

토기장이 / 2025년 9월 / 356쪽 / 19,000원





1장 예수님의 승리를 본받으라


예수님의 공생애는 성부의 인정과 성령의 임재로 시작되었으나, 순식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광야로 이끌려갔다. 영적 저체온증에 시달리게 되는 광야의 시험은 우리가 최고가 아닌 최악의 컨디션일 때 찾아온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최종 장면에서 악한 황제 코모두스가 무력이 출중한 주인공 맥시무스를 이기기 위해 미리 칼로 그의 등을 찔러 중상을 입히고 결투에 나서는 비열한 방법을 사용한 것처럼, 원수는 40일 금식이라는 극한의 결핍 속에서 치사한 방법을 다 동원하여 공격해 온다. 따라서 평화의 때에 깨어 영적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첫 번째로 마귀는 굶주리신 예수님께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합리적인 유혹을 했다. 육체의 필요를 스스로 채우라는 속삭임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응수하셨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결코 떡으로만 채워지지 않으며 영혼을 살아나게 하는 말씀을 먹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결핍보다 영적인 우선순위와 존재의 지향점을 위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하나님이 친히 모든 것을 더하여 채워주신다.

두 번째로 마귀는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천사들의 보호를 받아보라며 도발했다. 십자가의 고난 대신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임을 쉽게 증명해 보이고, 나아가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의심하라는 유혹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는 자기 증명 욕구가 없으셨기 때문이다. 전설적인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이 나이키 옷을 입으면 나이키가 조던을 빛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조던이 나이키를 빛나게 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본질 그 자체이시기에 기적을 보여주어야만 하나님의 아들로 증명되는 분이 아니다. 우리 역시 십자가를 통해 이미 존재 증명이 끝난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하고 정체성을 흔드는 원수의 대담한 거짓말에 속지 말아야 한다.

세 번째로 마귀는 자신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천하만국의 영광을 주겠다는 대담한 거래를 제안했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에서 극장에 숨어 지내는 유령이 아름다운 프리마돈나 크리스틴에게 자신에게 영혼을 팔면 실력과 세상 영광을 주겠다고 거래를 요구하는 것과 같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도 성공과 권력을 위해 양심과 영혼을 판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라”며 사탄을 물리치셨다. 내가 2005년 밴쿠버 온누리교회에 부임했을 때 교회는 두 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때 나는 어설프게 중재자 역할을 하려 하지 않고 새벽부터 주일 예배까지 전심으로 하나님만 경배했다. 그러자, 부흥과 기적이 나타나며 사람들이 오직 하나님께만 주목하게 되었고 교회가 하나 되었다. 인간의 권력 다툼과 갈등은 정치적 수완이 아니라 오직 절대자 하나님만을 인정하고 경배할 때 잠잠해진다.

예수님과 마귀의 싸움은 현격한 수준 차이가 났다. 유치원에 다니던 내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 형에게 이기고 싶어서 100 더하기 100이 뭐냐고 묻는 것을 보고 웃음이 터진 적이 있다. 형에게는 너무나 쉬운 문제였던 것처럼, 상대는 죽기 살기로 달려들어도 주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마귀의 거짓을 가볍게 이겨내셨다. 영적 전쟁은 진리와 거짓의 싸움이다. 사탄의 집요함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우리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이긴 싸움을 하고 있음을 명심하고 영적 소속을 분명히 하여 최후 승리를 누려야 한다.



2장 예수님의 권위를 본받으라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주신 가르침은 이렇게 살면 좋겠다고 사람들에게 권면하는 상황 윤리가 아니라, 반드시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선포하시는 규범 윤리이자 절대적인 기준점이었다. 교회를 다니는 우리조차 유한한 인간을 상수로 두고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변수로 착각하여, 내 뜻은 포기하지 못한 채 하나님의 말씀 중에 내가 보기에 좋은 것만 취사선택하려 한다. 한 기독교 변증가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개종한 무슬림을 만났을 때, 그 무슬림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들 기독교인들은 참 이상하다. 당신들은 절대자 하나님을 믿는 것이 맞는가? 내가 이슬람교를 믿을 때는 신이 원이었고 인간이 점이었다. 그런데 개종해서 기독교인들을 만나 보니 당신들은 자신이 원이라고 생각하고 신을 점으로 여기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가변적이고 유한한 피조물인 자신에게 절대성을 부여할 것이 아니라, 불변하는 만세반석이신 예수님의 절대 진리의 말씀에 인생의 기초를 세워야 한다. 예수님은 나를 창조하신 창조주요, 나를 건지시는 구원자이며, 역사의 최후 심판주이시기에 그분의 말씀은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다.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일침을 가하셨다. 이는 교리적인 행위 구원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종교적 자기 의나 요식 행위, 지식적인 앎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진정한 주로 고백하고 우리의 지정의 전인격과 영혼육 전존재가 전적으로 따르는 존재적 구원을 말씀하신 것이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유독 능력을 좋아하여 신비한 기적이나 영적인 능력인 뒤나미스만을 좇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모든 능력 중에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최강의 능력은 하나님의 자녀 됨에서 나오는 존재의 힘, 즉 엑수시아라는 권위다. 능력은 목적에 이르는 과정이지만 권위는 최종 목적지이기에, 이 영적 권위를 깨닫고 사명자로 살아갈 때 세상의 어떤 조롱과 멸시와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게 된다.

착하고 이타적인 성도들이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하고 상처받는 경우가 많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착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시면서 동시에 담대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신다. 선함은 결코 약함이 아니며, 우리는 선하고도 담대한 십자가 군병이 되어야 한다. 전에 섬기던 교회에 정말 착하고 온순하며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하고 사랑이 넘치는 집사님 한 분이 있었다. 자녀들도 잘 키우셨지만 이분은 늘 남편 앞에만 서면 작아졌다. 남편은 유명 대학의 교수였는데 능력이 출중해서 학교의 중요한 프로젝트는 도맡아 했고 집에 와서도 청소며 수리며 못 하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 탁월한 남편이 아내에게 “왜 집안일을 이렇게 대충대충 해놨어”라고 물으면 집사님은 얼어 버린다고 하셨다. 그런데 어느 날 십자가를 통과하는 체험을 하고 성령 충만해진 뒤 상황이 바뀌었다. 남편이 예전처럼 책망해도 체구도 아담한 아내가 예전과는 달리 너무나 평안한 모습을 보였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니까 흔들림이 없었던 것이며, 그 뒤로 남편도 아내를 매우 존중하게 되었다.

또한 영적 권위는 사랑과 조화를 이룰 때 영혼을 하나님께 이끌 수 있다. 차세대 사역을 할 때 학생들을 사랑하면 친밀해지지만, 권위자를 향한 존경심이 있어야 학생들을 하나님께로 이끌 수 있음을 알게 된다. 한번은 경상도 출신의 노총각 선생님이 중등부에 온 적이 있다. 서울 생활을 몇 년 하셨는지 모르지만 경상도 사투리가 좀 심하셔서 과연 아이들이 선생님에게 반응을 할까 내심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가장 늦게까지 분반 공부를 하는데도 아이들이 초집중을 했다. 알고 보니, 이 선생님은 매일 새벽 기도를 하고 금요 철야 기도를 하는 분이었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놓고 눈물로 기도했다. 그러고는 주일에 와서 아이들에게 인사말로 “친구 때문에 상처받지 마라 니 하나님이 계시잖아”, “성적 때문에 뭘 고민하노 지혜 주실 거야” 이렇게 던지는 말들에 아이들이 깊은 감동을 받았다. 선생님이 매일의 중보 기도를 통해 아이들이 가장 고민하는 문제들을 알게 되고, 그것을 만져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처럼 삶의 곡선인 사랑과 직선인 권위가 조화를 이루는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한다.



3장 예수님의 시선을 본받으라


2천 년 전 유대에서 사람들은 동족의 혈세를 착취하는 로마의 앞잡이인 세리를 혐오하여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 마태를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부모에게 선물이라는 뜻의 이름으로 태어났으나 세상의 비난 속에 괴물로 전락해 버린 그에게서 예수님은 보물을 발견하셨다. 모두가 포기한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점멸하는 작은 불씨를 보신 예수님은 정죄 대신 눈물이 맺힌 눈으로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다. 이는 영혼의 숨이 멈춰가는 자에게 전기 충격기를 갖다 대고 심폐소생술을 한 것과 같았고, 마태는 그 충격적인 부르심에 일어나 주님을 따랐다.

이후 마태는 자기 집에서 세리와 죄인들을 모아 큰 잔치를 열었고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앉아 음식을 드셨다. 바리새인들은 죄인들과 어울리면 함께 부정해진다는 합리적인 논리로 이를 비난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다고 옹호하셨다.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그들이 정죄해야 할 죄인으로 보였지만, 예수님의 시선에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치료하고 회복시켜야 할 환자이자 잃어버린 영혼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러한 시선의 차이는 오늘날의 교회와 가정에서도 나타난다. 캐나다 밴쿠버에서 목회할 때, 한 여집사가 남편이 교회에 나오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결혼 12년 만에 처음 교회에 오겠다고 했다면서 행복해했다. 다만 남편이 열이 많아서 옷이 좀 짧아도 이해해 달라고 당부했다. 다음 주일에 교회에 나온 남편은 정말 짧은 반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신고 나타났고 온몸에 털이 가득했다. 그래도 대환영할 일이었지만, 2주, 3주가 지나자 어르신들이 불러 세우고는 교회에는 그런 복장으로 오는 게 아니니 고쳐 입으라고 꾸짖었다. 나는 마음이 어려웠다. 아내의 12년 눈물로 겨우 교회에 나온 사람이 발길을 끊을까 염려하여, 나는 그에게 열이 많아서 그런 걸 어떻게 하겠냐며 복장은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나오시라고 격려했다. 감사하게도 계속 교회를 나온 그는 어느 겨울날 그 반바지와 슬리퍼 차림으로 주차봉을 들고 주차 봉사를 하고 있었다. 율법과 정죄가 아닌 복음과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킨 것이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부모가 행복하고 인격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적이고 강박적인 종교 생활을 강요할 때 자녀들은 불행해진다. 학업도, 진로도, 결혼도 종교적 기준에 맞춰 한 치의 오차가 없기를 요구받는 아이들은 숨이 막혀 우울증과 강박증에 빠진다. 부모가 바리새인이 되면 자녀는 여지없이 죄인이 되어 멀쩡한 아이가 괴물로 변하고 만다. 그래서 아이의 일탈과 방황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고 목사인 내게 데려오면, 아이는 이미 긴장한다. 교인인 부모도 이 정도인데 목사는 얼마나 자신을 압박하고 강요할지 걱정되기 때문이다. 그런 자녀에게 그동안 정말 힘들었구나, 이제는 자유하렴, 다만 인생이 정말 힘들 때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널 도와주려고 기다리신다는 걸 잊지 않고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해 주면 아이들은 마음의 긴장감이 풀어지면서 스스로 하나님과 가까워지려 한다.

세상은 사람을 유물론적 관점의 물질로 보아 열성 인자는 버리고 현재의 포지션만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영혼의 포텐셜을 보신다. 남의 돈을 치밀하게 빼앗던 세리 마태에게서 그 집요함으로 구약의 말씀을 130회나 인용해 메시아를 증거할 복음 전도자의 가능성을 보셨다. 사람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것은 정죄가 아니라 그 영혼의 가능성을 믿고 끝까지 품어주는 주님의 긍휼과 사랑이다.



4장 예수님의 침묵을 본받으라


예루살렘의 초막절 끝 날, 종일 이어진 논쟁으로 지치셨을 예수님은 아침 일찍 다시 성전으로 나오셨다. 그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한밤중에 매복해 있다가 현장에서 잡은 간음한 여자를 끌고 왔다. 그들은 여자의 삶이 부도덕하든 말든 개의치 않고 오직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미끼로 그녀를 이용한 비정한 자들이었다. 성적 탐닉에 빠진 여자나 종교적 자기 의에 중독된 지도자들 모두 내면의 주림을 채우지 못해 잠 못 이루는 병든 영혼들이었다.

현대 사회 역시 무한 경쟁 속에서 스펙을 쌓느라 잠 못 이루고 사랑의 진실성을 스스로 배반하는 사회다. 청년들은 피상적인 썸과 플러팅만 주고받으며 상처와 배신감을 쌓아간다. 2009년 온누리교회 여호수아 청년부를 담당할 때 나는 매주 설교에서 손만 잡으면 결혼하라고 강조했다. 자매들은 적은 수의 형제들에게 집착하고, 형제들은 많은 자매들을 찔러보기만 하며 헌신하지 않는 모습을 멈추게 하려는 의도였다. 처음에는 피식피식 웃어넘기던 청년들도 매주 반복되는 말에 점차 진지해졌다. 하루는 한 순원이 순모임에 갔다가 순장과 악수하려다 말고 악수하면 안 되지, 결혼해야 하는데 하며 손을 거두기도 했다. 이렇게 감정적 필요를 위해 상대를 이용하는 일을 멈추자 진정성 있는 교제가 늘어나며 수많은 커플이 결혼하게 되었다.

또한 혼전 순결과 생명 경시의 문제도 심각하다. 한번은 남편의 외도 고백에 충격을 받은 아내가 상담 이메일을 보내왔다. 나는 남편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조언했다. 그런데 그 아내가 다시 이메일을 보내 솔직히 자신도 대학 때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었으며, 남편을 용서할 수 없는 마음 뒤에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이 있다고 고백했다. 혼전 관계 역시 혼외 관계의 연장선이다. 우리는 무수한 생명을 낙태로 지우는 현실 속에서 진정한 사랑과 헌신의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종교 지도자들은 모세의 율법을 들먹이며 돌로 치라 명한 이 상황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할 것인지를 시험했다. 처형하라면 반로마주의자가 되고, 놓아주라면 반율법주의자가 되는 진퇴양난의 함정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시며 침묵하셨다. 예수님의 침묵은 무의미한 변론을 피하고, 그들의 분노가 발화점까지 끓어오르도록 기다리며 그들 스스로 자신의 언행을 반추하게 하려는 가장 선한 답변이었다.

침묵을 깨고 마침내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다. 밤새 음녀를 잡으려 혈안이 되었던 그들 역시 방조죄, 범인 은닉죄, 직무 태만죄, 음란죄 등을 짓고 있는 심각한 죄인들이었다. 영적 관음증 환자들처럼 남의 죄를 들춰내며 즐기던 성난 군중은 주님의 준엄한 말씀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돌을 내려놓고 하나둘씩 떠나갔다. 나 역시 누군가의 잘못에 돌을 던지려 할 때면 주님은 꼭 내게도 같은 잘못이 있음을 깨닫게 하신다. 인간은 전적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 긍휼과 구원의 대상일 뿐이다.

소리치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성전 앞에는 예수님과 여자만 남았다. 주님은 아무 힘없이 서 있는 여자와 같은 눈높이에서 그녀를 인격적으로 부르셨다. 유일하게 그녀를 정죄할 자격이 있으신 죄 없으신 주님조차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만천하에 죄가 드러나 죽을 뻔했던 여자의 목에서 정죄의 사슬을 온전히 끊어주신 것이다. 전날 성전에서 생명수를 마시라 외치셨을 때 아무도 오지 않았지만,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에서 끌려온 이 한 여자만이 주님의 부활 생명을 체험하고 온전히 그 생명수를 마시게 되었다.



5장 예수님의 기적을 본받으라


예수님은 전도 여행을 마치고 지친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라고 하셨다. 배를 타고 호수 반대편 벳새다로 이동했지만, 사람들은 소문을 듣고 먼저 도착해 있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쉼과 안식의 영역까지 침범해 들어온 무리들을 결코 달갑게 여기지 않았으나, 예수님의 시선에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보였다. 목자 없는 양은 생존할 수 없기에, 예수님은 불쌍한 무리들을 앉혀 놓고 종일토록 말씀의 꼴을 먹이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세상에는 빈 들에서 만나는 목자 없는 양 같은 인생들이 있다. 2001년 대만의 대북한인교회 청소년 수련회 강사로 갔을 때 만난 S군이 그러했다. 부모님과 갈등을 빚고 학교에서는 패싸움과 부정행위로 정학을 맞은 고등학교 1학년 남학생이었다. 머리는 불꽃 모양으로 올리고 반짝이를 뿌리고 다녔지만, 내가 한국에 전화를 해야 한다고 하니까 친절하게 국제전화카드 사는 것을 도와줄 만큼 말과 행동에 따뜻함이 묻어나는 아이였다. 수련회 3일 동안 닫혔던 마음을 열고 하나님을 뜨겁게 만난 S군은 마지막 날 밤 자신의 불행한 가정사를 털어놓았다. 사랑 없이 결혼한 부모는 서로를 미워하며 그 미움을 아들에게 투사해 아이를 굶기고 때리며 학대했던 것이다. 수련회를 마친 뒤 관광을 시켜주겠다는 담임목사님의 호의를 정중히 거절하고 S군과 만나 시간을 보냈다. 왜 정학을 받았냐는 질문에 S군은 부모도 하나님도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친구들마저 버리면 갈 데가 없었다고 대답했다. 밤새 그와 함께 기도하고 다음 날 공항에서 눈물로 헤어진 후, 한국에 돌아와서도 주일마다 전화를 걸어 교회를 챙겼다. 그해 여름, 통역자가 없던 한국 단기선교팀의 통역을 엉겁결에 맡게 된 S군은 목사님의 말씀을 통역하다 큰 은혜를 받았고, 새로운 결단으로 공부해 대만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이처럼 목자 없는 양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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