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묻고 성경이 답하다
소강석 지음 | 쿰란출판사
인생이 묻고 성경이 답하다
소강석 지음
쿰란출판사 / 2024년 9월 / 328쪽 / 17,000원
내 평생에 가장 잘한 일은?
페스트 이후의 격변, 종교개혁과 르네상스14세기 중엽에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었습니다. 그래서 유럽 인구의 1/3이 죽었습니다. 적어도 1억 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페스트는 우리나라 말로는 흑사병이라고 하는데, 사람이 시커멓게 변해서 죽는 병입니다. 어른만 죽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도 죽습니다. 태어난 지 몇 달 안 된 아이들도 이 병에 걸리면 새까맣게 타서 죽었습니다. 그때 가톨릭에서는 무조건 성당으로 모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교황이던 클레멘스 6세는 “우리가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이 페스트를 물리쳐 주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제들의 명령에 따라서 교회로 모였습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성당이 흑사병의 진원지가 되고 감염의 원천이었던 것입니다. 어른과 아이, 노인 할 것 없이, 그리고 심지어는 성직자들까지도 흑사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그러자 교회의 권위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성직자의 권위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교회를 희화화하기 시작했습니다.“도대체 하나님이 살아 있다면 왜 저 사람들이 저렇게 죽어가도록 놔두신단 말인가? 하나님은 무얼 하고 계시는가? 아무 죄도 없이 태어난 어린아이가 새카맣게 타서 죽는 걸 그냥 보고 계시는가? 심지어는 기도하는 성직자까지도 페스트에 걸려 죽게 놔둔단 말인가?”
특별히 보카치오가 쓴 『데카메론』에 이렇게 신을 우롱하고 교회를 희화화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이때쯤 질문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 질문은 바로 인간의 존재와 삶의 근원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때 외쳤던 구호가 ‘아드 폰테스(ad fontes)’, 즉 ‘근원을 향하여’ 또는 ‘원형을 향하여’였습니다. 그래서 15~16세기에 이르러서 유럽에서 두 개의 운동이 일어납니다. 하나는 종교개혁 운동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권위적으로만 가면 안 된다, 전통만을 따져서는 안 된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 진리의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종교개혁 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흑사병은 14세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16세기에도 또 발생했습니다. 이때 칼뱅은 지난날 가톨릭의 실수를 반면교사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쿼런틴 시스템(격리 제도)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구빈원을 만들어 사람들을 돕고, 그 구빈원을 격리 시설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일반 성도들에게도 쿼런틴 시스템을 적용하여 집에서 격리해 있으라고 했습니다. 대신 성직자들이 찾아가서 예배를 드려 주었습니다. 예배의 존엄성을 끝까지 지키면서도 이웃 사랑과 생명 사랑을 실천한 것입니다. 그래서 칼뱅의 종교개혁이 스위스에서 박수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본질은 인간이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대답을 성경을 통해서 받는 운동이었습니다. 루터와 칼뱅은 성경의 근원과 본질로 돌아가서 개혁의 기치를 높였습니다. 그러자 교황청이 가만히 있었을까요? 끊임없이 회유하고 협박했습니다. 그럴수록 종교 개혁자들은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습니다.
또 하나의 운동이 있었는데, 르네상스, 곧 인문주의 운동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중심이 되는 운동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신학이 모든 학문 중의 학문이었습니다. 모든 음악과 노래가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었습니다. 무조건적으로 신을 추앙하고 숭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때부터는 그 자리에 인간이 대신 서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이 질문을 하고 인간이 답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상아탑을 쌓아 올렸습니다. 물론 이 일로 인해서 문예 부흥이 일어났으니 인문학이 발달한 긍정적인 면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등지고 신학을 무시한 인문학이 너무 부흥하고 발전하면서 사회가 병들기 시작합니다. 신학이 죽고 신앙이 퇴보하다 보니까 갈 바를 모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인문학이 우상이 되고, 자유는 방종으로 변하고, 인권은 오염되었습니다. 프리섹스, 동성애, 마약, 폭력의 지배를 받는 세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런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우리가 인문학도 공부를 해야겠지만 다시 신학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너져 가는 교회를 다시 세워야 한다고 새삼스럽게 느꼈습니다. 중세에는 흑사병이 세계를 덮었지만, 얼마 전에는 코로나라고 하는 감염병이 전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아마 의학이 발전되지 않고 방역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면 엄청난 사람이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의학계에서는 또 다른 감염병이 올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러운 예측을 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다시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신학의 개혁을 일으켜야 합니다. 지금이 바로 신앙 회복 운동, 교회 세움 운동, 교회 재건 운동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끊임없이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에게 물어봐야 합니까? 우리는 사람에게 질문하지 말고 성경에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질문해야 합니다.
사람이 묻고 하나님이 대답하다그런 이유로, 사람이 묻고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대답해 주시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인문신답(人問神答)’, 혹은 ‘인문경답(人問經答)’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자,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자,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물어보면 뻔합니다. 아무리 인문학 서적을 보고 철학 서적을 봐도 ‘왜, 왜, 무엇을, 무엇을’ 질문하지만 특별한 답이 없습니다. 진정한 대답은 성경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통하여 대답해주십니다.
솔로몬은 세 권의 성경을 썼습니다. 가장 처음 쓴 성경이 아가서인데 젊을 때 썼습니다. 아가서에는 젊음의 정열과 예민한 감수성, 풍부한 사랑의 언어가 잘 녹아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서정적·영적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가 교훈을 줍니다. 두 번째로 중년기에 쓴 책이 잠언입니다. 그는 인생의 절정기를 맞이하여 잠언이라는 지혜서를 썼습니다. 잠언을 보면 문장이 직설적입니다. 돌려서 말하는 법이 거의 없습니다. 이렇게 살면 복을 받고, 저렇게 살면 망한다고 직설적으로 교훈을 줍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노년기에 마지막으로 쓴 책이 바로 전도서입니다. 솔로몬이 나이를 먹은 후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되돌아보면서 전도서를 썼습니다. 그래서 전도서의 분위기는 회고적이고 교훈적입니다. 문체도 무거우면서 예리합니다.
그러면 솔로몬은 왜 전도서를 기록했을까요? 앞으로 살날이 많은 젊은이들에게 하나님을 떠난 삶이 전혀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남들이 얻지 못한 부와 명예를 다 누려 봤습니다. 남들이 맛보지 못한 쾌락도 다 맛봤습니다. 그의 부와 지혜와 쾌락, 여러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평생을 황제 노릇을 했습니다. 천 명의 아내를 거느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누리고자 하는 것은 다 누려 봤고, 하고자 하는 것은 다 해봤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허무했습니다. 허무, 허무, 허무…. 더구나 하나님이 없는 삶, 하나님을 떠난 삶은 더 공허하고 허탄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전 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하나님이 없는 삶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헛되다는 말은 ‘헤벨’인데 ‘수증기, 입김, 한숨’이라는 뜻입니다. 수증기가 금방 날아가는 것처럼 우리의 삶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에는 ‘허무’와 ‘해 아래’라는 단어가 제일 많이 나옵니다. 허무라는 단어는 38회, 그리고 해 아래라는 말이 29회 나옵니다. 아래 성경 구절에서도 해 아래라는 말이 계속 나옵니다. 특별히 전도서 1장 14절을 보면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것이 다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전 1:14)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솔로몬이 왜 이렇게 해 아래서의 삶을 의도적으로 강조했을까요? 그렇게 한 실제적인 의도는 ‘해 위에서’의 삶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해 아래서의 삶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해 위에서의 삶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 하늘에 있는 태양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의의 태양이시고 공의의 태양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의미가 있고, 그럴 때 가치가 있고 보람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전도서의 결론은 딱 하나입니다. 이 한 구절을 위하여 수많은 문장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전 12:13-14)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솔로몬은 이러한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고 점층적으로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도서는 인생 예습서이기도 합니다. 솔로몬은 모든 것은 다 지나가고 바람을 잡고 구름을 잡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구름을 잡을 수 있나요? 손으로 바람을 잡을 수 있나요? 헛된 일이라며, 젊은 날부터 하나님을 바라보고 경외하며 충성하라고 합니다.
내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우리는 이 시점에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궁극적인 질문을 어떻게 드려야 할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왜 사는가? 내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어떠한 존재인가? 나는 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궁극적인 질문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반드시 근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야 할 종착역도 있습니다. 이 사실을 솔로몬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전 1:5-7)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바람도 돌아가며 강물도 언젠가는 바다로 흐른다고 합니다. 하물며 우리 인간이야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근원적으로 온 곳이 있다면 가야 할 곳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모든 것이 피곤하다는 것입니다.
(전 1:8)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얼마나 피곤한지 아무리 좋은 것을 보아도 족함이 없고,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들어도 귀가 가득 차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열정, 하나님이 없는 기쁨, 하나님이 없는 쾌락, 하나님이 없는 욕구는 다 피곤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해 아래서 날마다 새로운 것을 찾으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 무슨 새것이 없나 하고 새것을 찾아 얼마나 헤매는지 모릅니다. 학문을 하는 사람은 학문 속에 무슨 새로운 지식이 없는가, 철학을 하는 사람은 어디에 또 다른 진리가 없는가, 또 어떤 사람은 먹고 마시기를 탐하며 이 세상에 새로운 쾌락이 없나를 찾아서 헤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해 아래서는 새로운 것이 전혀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삶의 목표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신 사람들은, 허무나 공허와 같은 것이 없습니다. 삶이 새롭습니다. 순간순간마다 삶이 얼마나 신선하고 상큼한지 모릅니다. 이 사람에게는 결코 허무가 없습니다. 후회도 없습니다. 언제나 감사가 있을 뿐입니다. 보람과 가치만 있을 뿐입니다. 행복이 있을 뿐입니다.
전도서는 결코 절망이나 포기의 책이 아닙니다. 허무주의자의 주장도 아닙니다. 한 번뿐인 인생, 주를 위해 멋지게 살라는 교훈을 주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평생에 가장 복된 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나의 평생에 가장 잘한 일은 무엇일까요? 내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섬긴 일입니다. 이런 사람의 삶에는 후회가 없습니다. 공허가 없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를 섬기는 것에 절대로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루하루가 새로워질 것입니다. 순간순간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순간순간이 감사와 행복과 기쁨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당신의 인생 수업은?
살아있는 이들을 위한 인생 수업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처절한 자신의 삶을 고백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드레스 디자이너인 크리시다 로드리게스라는 여자가 암에 걸렸습니다. 그는 임종 직전에 사람들이 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나는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차를 타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병원 휠체어에 앉아 있습니다. 나의 집에는 디자인이 다양한 옷과 신발, 장신구 등 비싼 물건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병원에 하얀 환자복을 입고 있습니다. 나는 은행에 엄청난 돈을 모아 놓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병은 그 많은 돈으로도 고칠 수가 없습니다. 나의 집은 왕궁처럼 크고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병원 침대 하나만 의지하여 누워 있습니다. 나는 5성급 호텔을 바꿔가며 여행을 다녔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병원의 검진실을 옮겨 다니고 있습니다. 나는 유명한 옷 디자이너였으며 계약을 체결할 때 나의 이름으로 모든 사인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병원의 진단 검사지에 사인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보석으로 장식된 머리 장식품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항암제로 머리가 빠져서 비싼 보석을 장식할 머리카락 하나가 없습니다. 나는 어디든 갈 때 비행기 1등석을 타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간호사가 두 팔로 밀어주는 휠체어에 앉아 있습니다. 나에게 먹고 마시는 비싼 식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병원에서 약을 먹을 수 있는 물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병에 걸린 후에야 알게 됩니다. 병에 걸리기 전에 내가 가지고 있는 것, 그걸 가지고 영혼을 구원하며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그러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다 죽음을 앞두고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비로소 그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게 바로 어리석은 인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전도서에서도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가만히 보니, 순서만 있을 뿐이지, 지혜자도 죽고 어리석은 자도 죽고 가난한 사람도 죽고 부자도 죽었습니다.
(전 2:16) 지혜자도 우매자와 함께 영원하도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모두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솔로몬은 당대 모든 지혜자보다 뛰어났습니다. 그는 그 전 시대에 살았던 사람보다 더 뛰어났고, 후에도 그런 지혜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대한 지혜를 가졌던 솔로몬도 늙고 죽을 날을 맞았습니다. 죽을 날이 가까웠을 때 그는 죽음 앞에서 그 어떤 지혜도 필요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특별한 지혜가 있다 하더라도 그 지혜로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죽음 앞에서는 지혜마저도 헛되다고 고백합니다.
(전 2:15)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우매자가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게 지혜가 있었다 한들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하였도다 이에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하였도다
여기서 솔로몬은 지혜자의 죽음이나 우매자의 죽음이나 별 다를 바가 없다고 고백합니다. 부자의 죽음이나 가난한 자의 죽음이나 다를 바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해 아래 사는 것이 너무나 따분하고 지겹다는 것입니다. 해 아래서의 삶은 다 지겹고 짜증나고 괴롭고 헛되더라는 것입니다. 온통 삶의 근심과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그러니 그것이야말로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