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머슴으로 살고 싶었다
임동헌 지음 | 쿰란출판사
나는 머슴으로 살고 싶었다
임동헌 지음
쿰란출판사 / 2025년 10월 / 256쪽 / 15,000원
1부 무엇을 보는가?
시작을 앞둔 끝자락세밑은 우리에게 주어진 한 해의 마지막 정리의 기회이자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소중한 날이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는 마음은 아쉬움과 기대가 교차된다. 금년은 여느 해보다 이런 교차의 마음이 큰 것 같다. 그러나 성경에서 주는 교훈의 말씀이 마음을 진정시킨다.“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나니”(전 1:9).
인생을 살다 보면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새삼스럽지도 않으며, 흥분되는 것도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생각하면 기대와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하나님의 묵시를 받아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며 흥분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
이 땅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모두 예전에 있던 것들이 반복되는 것들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은 새로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의 삶의 특징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경이로움이다. 학개서에 성전건축을 16년이나 중단하고 자신들의 삶에만 도취되었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경고하셨다. 그 말씀에 백성들이 감동되어 성전 재건에 힘썼다. 그런데 ‘감동’이란 히브리어의 뜻은 ‘흥분’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은 흥분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경이로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의 경이로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바울 사도는 그의 일생을 마감하면서 이렇게 고백한다.“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그리스도인의 삶은 끝이 좋아야 한다. 끝이 좋기 위해서는 삶의 과정에서 올바르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런데 살다 보면 탐심이나 미혹의 길에 빠져 인생의 끝에 낭패를 당하기도 한다.“사슴을 좇는 자는 토끼를 돌아보지 않는다”라는 격언처럼 하나님 나라를 향해 달려가는 자는 ‘토끼’와 같은 하찮은 세상의 것에 연연하지 않아야 한다. 이 땅에서 순례자로 살아가는 성도는 이기적인 세상의 상식이나 속물적 기준에 매여서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세밑의 끝자락에 선 지금, 인생의 끝자락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지혜를 갖자.
에펠탑 효과‘미녀와 야수’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지역에서 전해온 전래 동화이다. 그 내용과는 별개로 미녀와 야수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관계로 보인다. 그런데 이들이 해피엔딩에 도달할 수 있을까? 남녀의 관계를 놓고 던지는 질문 중 하나다. 아니, 남녀관계뿐 아니라 사람의 모든 관계에 다 적용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도 스킨십이 강화되면 될수록 관계가 발전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정으로 맺어진 사회다. ‘미운 정 고운 정’이라는 말처럼 마음에 맞지 않아도 자주 부딪치고 만나다 보면 정이 들고 친근해진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로버트 자이언스는 학생들에게 12장의 얼굴 사진을 무작위로 보여주고 얼마나 호감을 느끼는지 측정했다. 결론은 사진을 보여주는 횟수가 늘어날 때마다 비호감을 가졌던 사람에 대한 호감도가 증가했다. 이처럼 비호감이었던 관계라도 자주 보게 되면서 점차 호감으로 변하는 현상을 일컬어 ‘에펠탑 효과’라고 한다.
건립 초기의 에펠탑은 퇴출 대상이었다. 파리의 정경을 완전히 망쳐놓을 흉측한 철탑이라고 비난받았다. 거기에다 ‘악마의 표식 같다’는 혹평까지 있었다. 하지만 파리 시민들은 자나 깨나 에펠탑을 볼 수밖에 없었다. 세워진 지 130년이 지난 지금은 파리 시민들이 에펠탑을 사랑하게 되었고 파리의 관광명소로 자리를 잡았다. 이것이 에펠탑 효과다. 세계의 수많은 관광객이 그 비호감인 에펠탑을 보려고 몰려들고 있지 않은가? 에펠탑을 빼고는 파리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아마 처음으로 교회에 발걸음했던 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은 어색하거나 불편했을 것이다. 처음 예배에 참석했을 때의 어색한 분위기는 교회와 예배에 적응하기에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두 번 더 출석하게 되면서 주님과 가까워지게 될 것이다.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별로 호감을 갖지 못했던 사람도 자주 얼굴을 대하게 되면 호감으로 변한다.
그런데 불편한 감정과 오해로 피차 틈을 보이면 돌아오지 못하는 강을 건넌 것처럼 영원한 이별을 고하는 경우가 있다. 관계의 틈이 조금 벌어졌을 때 더 가까이 다가가자. 흉측하게 보일지라도 한 번 더 쳐다보자. 흉물이 명물로 바뀔 때까지 다가가고, 보고 또 보면서 에펠탑 효과를 누리며 살아가자.
빼기의 인생 지혜오늘은 금년의 마지막 주일이다. 누구든지 ‘올 한 해도 다 지나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한 해의 마무리를 어떻게 할까?’ 하고 고민할 것이다.
한해 한해 나이를 먹을수록 이력서의 공란이 채워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인생 이력이 늘어난 것이다. 그렇다고 인생이 풍요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쓸데없는 것들이 늘어난 경우가 많다. 쓸데없는 것은 쓰레기다. 쓰레기는 버려야 한다. 더하는 것은 성장을 의미하고 빼는 것은 무언가를 정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더하거나 빼는 것은 모두 소중한 것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빼야 한다는 것이다. 광석에서 얻고자 하는 광물질을 얻기 위해서는 세 번의 큰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런 과정을 위해 부수고 빼고 버리고 녹여서 20톤의 광석에서 10~20그램의 금을 얻을 수 있다. 20톤에서 20그램의 금을 얻는다면 얼마나 많은 것을 빼내 버려야 하는가? 20그램(약 5돈)의 금을 얻기 위해 10톤 트럭 2대 분의 광석(천만 배)을 버려야 한다. 이것은 인생의 금쪽같은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 무엇을 얻었느냐보다 무엇을 버렸느냐가 더 소중함을 가르쳐주는 교훈이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버리고 또 버리고 또 버리자. 천만 번을 버리자. 그리고 그때 남은 것이 비로소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빼기는 핵심을 찾아가는 것과 같다. 가장 덜 중요한 것, 가장 덜 원하는 것부터 하나하나씩 지워 나가자.
썰물에 바닷물이 빠져나갔을 때 백사장의 모래가 드러나듯이 내 주위의 덜 중요한 것을 덜어내면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만 남게 될 것이다. 갖고 싶은 것이 많은 것은 진짜 갖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먹고 싶은 것이 많을 때도 마찬가지다.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을 때,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모를 때, 어떤 일의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 지우개로 하나하나씩 지워 나가면 마지막 몇 개가 남을 것이다. 그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마음의 지우개가 있느냐이다. 연말에 내 인생에서 뺄 것을 과감하게 빼버리자. 쓸데없는 인생 쓰레기는 비워버리자. 그리고 새해를 맞이하자.
2부 삶의 다이어트
직업(職業)직업이란 ‘개인이 사회에서 생활을 영위하고 수입을 얻을 목적으로 한 가지 일에 종사하는 지속적인 사회활동’이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이 말은 피동적인 동기로 시작해서 억지로 한다는 부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낱말을 뜻풀이하여 곱씹어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직(職)이란 ‘직무’를 의미한다.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업(業)이란 내가 이루어야 할 ‘과업’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직업이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그 일을 통해 수입을 얻는 것은 수고의 대가로 당연한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직업을 단순히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여기지 않았다. 직업을 돈을 벌기 위함보다는 인생의 과업과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하나님의 부르심과 맡기심’으로 보았다. 성도의 삶에 대해 ‘하나님의 사역을 위한 사명과 세상에서 소금으로 살아야 할 사명’을 동일하게 보았다.
종교개혁자 존 칼뱅은 이렇게 말한다. “목사의 한 편의 설교와 구두 수선공의 구두를 수선하는 일은 똑같이 소중한 일이다. 다만 무엇이 복음 증거에 더 효과적인가가 다를 뿐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일하는 모든 것에는 성(聖)과 속(俗)의 구별이 없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과업, 또는 사명을 더 크게 생각하는 직업의식’을 가져야 한다. 수입이라는 외적 동기부여가 아닌 사명이라는 내적 동기부여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직업을 사명으로 알고 행복하게 일을 수행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많아야 한다. 그런 사회가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는 세상이다. 요즘 돈만 생각하며 직업을 선택하는 세태를 보면 실로 안타깝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하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내가 하는 일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직업을 통해 어떤 일을 이루기를 원하시는가를 항상 생각하자.
새벽이슬 같은 노인(露人)노인은 나이 들어 늙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노인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가 짙다. 사람들은 모두 늙어 노인이 되지만, 노인이라고 모두 똑같은 노인이 아니다.
성경은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잠 16:31)라고 말씀한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는 말은, 늙음은 그 자체가 ‘영광의 면류관’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면류관은 아무나 얻는 것이 아니고 공의로운 길에서 얻는다. 요즘 노인을 사회의 문제로만 여기는데 나는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노인들은 말한다. “너도 늙어봐라!” 이 말은 노인이 되면 너도 어쩔 수 없다는 말이고, 젊은 사람들을 향한 비아냥거리는 말일 수 있다. ‘곱게 늙어야 한다’는 말을 생각하며 살자.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소한 일에도 성질을 부리며, 어떤 일이든지 화부터 내며, 성화를 참지 못하고 신경질적인 삶을 사는 노인(怒人)이 있다. 눈치 없고 둔하여 자기 자리를 모르고 어리석은 노인(魯人)이 있다. 일에 빠져 평생 일을 놓지 못하며 사는 노인(勞人)도 있다. 거기에 지칠 정도로 일에 집착하며, 온갖 것에 간섭하는 노인(?人)이 있다. 평생 무엇엔가 매여 종노릇만 하다가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 노인(奴人)도 있다. 나이 들어 배낭 메고 문화 유적지며 자연의 경관을 즐기면서 여행하고 사는 노인(路人)이 있다. 그러나 새벽이슬을 머금고 마지막까지 베풀며 사는 노인(露人)도 있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어떤 노인으로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우리가 추구해야 할 노인은 ‘이슬을 머금은 노인(露人)’이 아닌가 생각한다. 성경은 청년들을 ‘새벽이슬 같다’고 한다.“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 110:3).
새벽이슬 같은 노인(露人)은 늙어도 거룩한 옷을 입고 산다. 새벽이슬 같은 노인은 나이가 들어도 즐거이 헌신한다. 새벽이슬 같은 노인들은 나이가 들수록 주님께 가까이 나아간다. 어떤 노인으로 살아갈 것인지 선택의 몫은 나 자신에게 달려있다. 믿음의 족장들은 모두 새벽이슬과 같은 노인(露人)으로 살았다. 그들은 복의 근원으로 살았다. 그들은 후손들을 축복해주었다. 그들은 자자손손 천대까지 ‘새벽이슬 같은 후손’으로 살아가도록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버릴 줄 아는 지도자우리는 모두 따르는 자(follower)요, 또한 인도자(leader)다. 아버지의 자녀로 태어났으니 아버지를 따르는 자요, 내가 아버지가 되었으니 자녀의 인도자다. 교회에서도 나는 먼저 믿은 자들을 따르는 자요, 처음 믿는 성도들에게는 인도자다. “따르는 일이 어려운가, 인도하는 일이 어려운가?” 이런 질문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왜냐면 어떤 형편에 있든지 자신의 몫이요, 그것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따르는 자든지, 인도하는 자든지 각자의 말과 행동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게 된다.“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 14:12).
그러나 굳이 말한다면 리더의 역할이 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 3:1).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문제의 대부분은 먼저 된 자, 지도자에게 책임이 있다. 지도자는 모든 것이 혼재된 상황과 현실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고 그 자리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알아야 한다. 진정한 리더십은 섬김에 있음을 주님은 말씀하신다.“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4).
온고지신이라는 말과 같이 옛것과 새로운 것의 순환을 통해 역사는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다. 과거에 매몰되어 있다면 결코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없다. 세계적 경영학자인 피터 드러커는 “리더는 버릴 줄 알아야 한다”라고 했다. ‘주어진 상황에서 과감하게 버릴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라는 것이다.
경영학에 ‘매몰원가’(Sunk Cost)라는 용어가 있다. 매몰원가는 ‘생산에 들어간 비용 가운데 회수가 불가능하여 원가 계산에 포함하지 않는 부분’을 말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투자한 것이 아깝고, 실패를 인정하기 싫어서 과거와 단절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쉽게 말해 본전 생각에 매몰되어 사는 경우다. 지도자는 과거에 매몰되지 않고 지나간 일을 과감하게 버릴 줄 아는 사람이다.
3부 인가귀도(引家歸道)
내 곁에 있는 사람이 바로 나다인류의 가장 큰 업적은 거대한 조직을 만드는 것이다. 바벨탑을 쌓으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하나님도 대적할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큰 조직을 가질수록 힘이 세지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모두가 큰 힘, 거대한 조직을 추구한다. 그런데 능력에 따라 조직의 크기가 결정된다. 인터넷에서도 팔로워(follower)의 숫자와 검색의 숫자를 통해 힘을 과시한다. 청와대 민원에서도 청원인의 숫자에 따라 영향력이 달라진다. 선거에서는 득표가 능력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인맥을 넓히는 것은 자신의 자리를 넓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유상종(相從)이라는 말은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린다는 뜻이다. 부정적인 의미로는 ‘패거리’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능력이라고 사람들은 인정한다. 옛말에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살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독야청청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독야청청하라고 하신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불의 기적을 체험하고, 기도 응답을 받고도 실의에 빠졌다. 왕후 이세벨이 더 완악해져서 엘리야를 죽이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지친 몸으로 로뎀나무 아래 엎드려 하나님께 죽기를 청했을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18).
내 곁에 있는 사람이 내가 누구인지를 증명해 준다. 서양 속담에 “당신의 친구를 소개해 주시오.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이지 말해주겠소”라는 말이 있다. 요즘 내 곁에서 나와 생각과 비전과 삶을 함께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그 사람들이 곧 나의 정체성을 말하는 한 부분이다.
“나는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해!”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올바른 삶을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주님은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셨기에 사람을 의탁하지 않으셨다(요 2:24). 사도 요한은 벌거벗은 몸으로 공중목욕탕에서 도망쳐 나왔다. 왜냐면 ‘이단자가 들어왔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단자와 같이 멸망시킬 것이 두려워서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 나는 어떤 사람과 뜻을 같이하며, 비전을 나누고 인생길을 가고 있는지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