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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발자취 그 길목의 노래들

황윤석 지음 | 쿰란출판사


은혜의 발자취 그 길목의 노래들

황윤석 지음

쿰란출판사 / 2025년 8월 / 320쪽 / 16,000원





1장 이력서 없는 입사



황윤석이 만난 사람 - 김우중 회장


나의 인생의 해도 어느덧 한때를 넘기며, 지난날의 회상에 다시 잠긴다. 황톳길, 흙담길에서 어바인까지,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팔십 년을 바라보고 있다. 나그네 길에서 힘든 시간도 보냈지만 하나님은 늘 넘치는 은혜로 기대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통해 내 인생길을 인도해 주셨다.

오늘은 지나간 기억 속의 그리운 얼굴들을 되새겨 본다. 그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은 대우그룹의 고(故) 김우중 회장이다. 잊을 수 없는 그날의 만남을 시작으로 하나님께서는 내 영혼에, 내 인생의 앞날을 그려주셨다.

이상한 점심 약속:
“넌 어떤 사업을 해도 성공할 놈이야.” 서울대 상대에서 공부했던 4년 내내 담당교수와 친구들은 나를 보면 입버릇처럼 말했다. 거침없고 자유로웠으며 한편 저돌적이기까지 한 나에 대한 평가였다. 평균 C 학점으로 가장 경제성 있는 졸업을 앞두고 있는 나에게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D 해상화재보험(현재 현대화재해상)이었다. 나는 제안을 수락했다. 가장 매력적인 스카우트 조건은 보험의 메카인 영국 런던의 로이드로의 해외연수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 하지만 로이드 유학 약속은 계속 미뤄졌다. 위험 예측, 분산 같은 통상적인 업무에 맥이 빠졌다. 그렇게 2, 3년이 지나면서 유학의 기대로 부풀었던 마음도 점차 바람 빠진 풍선처럼 되었다. 지루한 회사 생활이 이어졌다.

어느 날 점심을 같이 하자는 대학 동기의 연락을 받았다. 그는 당시 대우그룹 공채 1기로 섬유부에서 수출 역군으로 활약 중이었다. 시내에서 만나 뜨끈한 우동을 앞에 놓고 근황을 나누는데 뜬금없이 식사 후 같이 갈 곳이 있다는 것이다. 별생각 없이 따라간 곳은 대우그룹이었다. 그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대우그룹 회장실이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볼 사이도 없이 그에게 이끌려 회장실로 들어섰다.

“어서 오게.” 김우중 회장이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얼결에 회장실에 들어온 나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알고 보니 대학 시절 내내 나를 지켜봤던 친구가 회장님께 나를 추천한 것이었다. 내가 지닌 장점이 대우에서 더 빛을 발할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김우중 회장은 1960년대 후반 대우 실업을 설립한 신화 같은 인물로 모든 젊은이들이 꿈꾸는 도전의 아이콘이었다. 1970년대의 (주)대우는 뛰어난 역동성을 발휘하여 단기간에 최고의 성장을 이끌어냈다. 유능한 CEO의 눈은 매의 눈과 같았다. 짧은 대화 속에서도 능력과 열정을 읽어내고 성장 잠재력까지 가늠하는, 남다른 통찰력이 번득이는 그 눈빛에 나는 단숨에 빨려 들어갔다.

면담은 짧았다. 대화인지 면접인지 알 수 없는 대화였다. 길게 묻거나 따지지도 않았다. 회장님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월요일부터 출근하게.”나에 대한 신뢰의 다른 표현이었을까, 악수를 청하는 김우중 회장의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찌릿, 전기가 흘렀다. 그 순간 나는 나의 인생에 새로운 길이 열린 것을 깨달았다. 그야말로 이력서 한 장, 자기소개서 한 장 제출하지 않은 특채였다. 대우그룹 사가에도 나오듯, ‘오대양 육대주를 발로 뛰는’ 대우맨이 된 것이다. 1973년 1월 4일, 가슴이 두근거리는 긴장과 흥분 속에서 첫 출근을 했다.

초기 종합상사의 하루


대우그룹 비서실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당시 대우는 해외 무역 중심의 종합 상사 초기여서 회사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해외 시장 개척의 열정으로 뜨거웠다. 하루가 멀다 하고 해외 바이어들이 내방하고 그들을 상담하는 일들로 하루 24시간이 오히려 짧을 지경이었다. 서울역 앞 대우센터를 인수하는 일, 각 계열사의 생산 현황을 보고하는 일 등 중요한 업무들이 끝없이 산적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역동성을 사랑했다. 12시간 이상 근무는 예사가 되어 급기야는 통금 시간이 퇴근 시간처럼 되어버렸다. 당시는 모든 ‘상사맨’들이 그러한 불같은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통큰 회장님:
부동산에 문외한이던 나에게 부동산 실사 임무가 주어졌다. 50여 건의 은행 부실채권 담보 부동산 입찰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현장마다 찾아가 사진을 찍으며 실사를 하는 과정에서 훗날 부평대우그룹 자동차 공장 부지가 마련되는 성과도 있었다. 그중 주택 이십여 채가 있었는데 김우중 회장은 그것을 대우그룹 임원들에게 배당해 주셨다. 회장님은 입사 3년 차인 나에게도 혜택을 누리게 해주셨다. 성북구 미아동에 있는 회장님이 결혼하시고 사셨던 신혼집을 나에게 할당해 주셨던 것이다. 그 당시 서울 변두리 중에도 변두리였던 개봉동에서 출퇴근하는 나를 생각해 주신 것이다. 분에 넘치는 배려를 해주시며 아껴 주시던 회장님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가정을 이룬 인생 여정길


우리의 첫 신혼집은 개봉동 13평 시영 임대 아파트였다. 조립식 가구 몇 개가 전부인 소꿉장난 같은 신혼살림이지만 행복했다. 안정되고 편안한 가정을 그렇게도 원했는데 스위트홈, 해피 패밀리의 꿈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섯 살 이후 휑하게 뚫려 있던 어머니의 빈 자리가 비로소 채워진 느낌이었다.

유월의 신부:
아내를 처음 본 순간, 눈이 부셨다. 바로 이 사람이구나 싶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형용사가 무색해졌다. 내 눈길을 사로잡은 그녀 외에, 세상의 어떤 여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내를 만난 것은 내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이었다. 우리는 우리만의 특별한 결혼식을 꿈꿨다. 틀에 박힌 순서에 장터처럼 혼잡한 결혼식은 싫었다. 정결하고 거룩한 곳에서 사랑의 맹세를 하고 싶었다. 아내가 이대 중강당 채플을 제안했다. 채플은 이대 졸업생들에게 결혼식 장소로 제공하는 특혜가 있었던 것. 그야말로 하늘이 준 장소였다. 우리는 서둘러 예약했다.

웨딩드레스는 단순한 절제미가 돋보이는 아름다운 드레스였다. 아내가 직접 디자인했다(의상직물학과를 졸업한 아내는 남영나이론에서 디자이너로 일했다). 6월의 신부는 아름다웠다. 결혼식을 마친 후 채플 앞 교정에 가득한 6월의 꽃들 속에서 가든파티를 했다. 하객들과 자연스레 어울리며 핑거푸드와 가벼운 음료를 나누는 결혼식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둘이 계획한 결혼식이었다. 신부와 눈을 맞추면서 우리만 알 수 있는 비밀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게 꿈만 같았다.

첫 번째 서원, 제가 믿겠습니다


“자네는 기독교인인가?”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때까지 생각해 본 적 없는 예상 밖의 질문에 당황했다. 채플 결혼식을 하려면 반드시 이화여대 교목 선생님이 주례를 서야 했고, 교목 선생님이 주례를 서려면 둘 다 반드시 기독교인이어야 했다. 채플을 예약한 후 결혼 주례를 부탁드리기 위해 교목 선생님을 찾아뵌 것인데 뜻밖의 질문에 맞닥뜨린 것이었다.

내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교목 선생님은 채플 사용과 주례를 취소한다고 통보했다. 규정상 자신이 임의로 할 부분이 아니어서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예비 신부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으리라. 이미 결혼 준비를 끝냈고 청첩장도 돌린 상태였다. 채플 사용도 못 하고 주례도 없으니 예정된 결혼식은 무기한 연기해야 할 판이었다. 기가 막혔지만 방법이 없었다. 규정이 그렇다는데 어떡한단 말인가.

기대하고 꿈꾸어 왔던 결혼식이 무산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답이 없는 고민만 깊어지던 어느 순간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믿으면 되지! 지금부터라도 믿으면 되잖아! 다시 교목 선생님을 찾아가 면담을 요청하고 간곡하게 말씀드렸다.“지금은 제가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약속드립니다. 결혼 후 반드시 기독교인이 되겠습니다.”

교목 선생님은 난감한 표정이었다. 나는 계속 간청했다. “제가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정말 간절한 마음이었다. 한참 숙고하시던 교목 선생님이 이윽고 말씀하셨다.“학교 원칙에는 어긋나지만 약속을 믿고 주례를 서주겠네.”

나는 다시 힘주어 다짐했다. “제가 믿겠습니다.”



첫 번째 서원은 그렇게 막을 열었다. 결혼식이 열리는 이대 중강당 채플에서 수많은 하객들 앞에서도 다시 고백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생명과 구원의 구세주로 인정하고 고백합니다.”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한 이 약속이 얼마나 큰 약속인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이 약속이 내 일생을 바꾸는 거룩한 신앙고백이라는 것도, 15년 후에 그 열매를 맺으리라는 것도.

지켜지지 않은 약속, 그러나 지켜지게 될 약속:
대우그룹에서의 직장 생활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60~70시간을 넘나드는 바쁜 일정을 소화하다 보면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그렇다 보니 일요일에 교회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일부러 약속을 안 지킨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사람이 되겠다는 약속, 즉 서원은 계속 유보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를 향한 그분의 계획은 세밀하고도 은밀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다만 내가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다. “제가 믿겠습니다.” 결혼을 위한 그 언약은 결혼보다 더 크고 위대한 약속, 나의 영원한 생을 향한 첫 서원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그 약속을 잊은 듯 살았지만 하나님은 나의 약속이 성취될 수 있도록 신실하고 인자하심으로 준비하고 계셨다. 그렇게 하나님은 15년이라는 긴 세월을 기다려 주셨다.

비서실은 싫습니다


대우 비서실 근무는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자꾸 영업부서 쪽으로 눈길이 갔다. 당시 영업부서는 초기 종합상사로서 해외시장 개척의 열정으로 뜨거웠다. 활기차고 생동감 있는 분위기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나에게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품어온 꿈이 있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김우중 회장의 캐치프레이즈는 곧 나의 캐치프레이즈였다. 영업부야말로 세계를 향한 나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곳이었다. 회장님의 총애를 받을 수 있는 비서실과 밤낮없이 세계 곳곳으로 발품을 팔며 뛰어다녀야 하는 역경의 영업부…. 나는 맨땅에 헤딩해야 하는 척박한 허허벌판 쪽을 택했다. 내가 발을 디뎌야 할 곳은 안락한 비서실이 아니라 세계를 향한 영업의 불모지였다. 마침내 어렵사리 회장님 승낙이 떨어졌다.

호된 신고식:
본사 영업부의 일은 나에게 꼭 맞는 옷과 같았다. 그즈음 수출 역군의 업무는 숨돌릴 틈조차 없을 만큼 타이트했지만 모두 자부심 하나로 일했다. 세계 각국에서 찾아온 바이어들을 만나 어떡하든 상대방을 설득시키고 감동시켜 계약을 성사시켜야만 했다. 매번 진땀나는 일이었지만 나는 누구보다 그 일을 즐기고 있었다.

나의 첫 해외 출장지는 마닐라였다.

“인쇄용지를 팔아라.”

예고도 없이 불시에, 부서장이 내린 출장 지시였다. H 제지공장과 선물 계약으로 팔아야 할 인쇄용지 수출 건으로, 혼자 동남아 시장에 가서 어떡하든 팔고 오라는 것이다. 당시 마닐라는 한국종합상사 지점이 하나도 없는 불모지였다. 그런데 이제껏 수출한 적 없는 국산 인쇄용지를 팔라니…. 영업을 위한 시장 정보나 연락처도 없었다. 내 손에 쥐여준 것은 인쇄용지 샘플과 비행기표뿐이었다.

마닐라의 고독한 밤:
마닐라 공항에 도착했다. 난생처음 타보는 대한항공 국제선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동남아 특유의 습하고 무더운 공기에 숨이 막혔다. 마치 밀림 한가운데 툭 떨어진 느낌이었다. 도로를 가득 메운 트라이시클의 행렬, 귓전을 가득 채우는 낯선 언어들, 처음 보는 이국적인 풍경, 낯선 이국인들 가운데 나 역시 이방인으로 서 있었다. 그 막막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모든 게 생소한 마닐라 공항에서 물어물어 택시를 타고 간신히 시내 허름한 호텔에 투숙했다. 창밖에는 폭포수 같은 스콜이 갑자기 쏟아지고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빗줄기는, 앞이 보이지 않는 나의 처지와 똑같았다. 인쇄용지를 팔아라? 누구에게? 어떻게?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었다. 대체 무슨 수를 써야 이 낯선 곳에서 현지 바이어들을 만날 수 있단 말인가. 감당할 수 없는 초조함이 밀려왔다. 입안이 바싹 타들어갔다. 벌러덩 침대에 누웠다. 그렇게 누웠는데 문득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노란색 전화번호부가 눈에 들어왔다.

옐로우 북에서 길을 찾다 1:
별생각 없이 뒤적거리던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거기엔 업종별, 상호별로 업체 주소와 전화번호가 고스란히 다 들어 있는 게 아닌가! 당시 필리핀은 진작부터 옐로우 페이지 디렉토리라는 전화번호부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누군가가 ‘너, 이거 찾고 있었지?’ 하면서 꼭 집어서 알려주는 것 같았다.

계속 뒤적거리다가 마침내 ‘paper importer list’, ‘wholesaler list’를 발견했다. 즉시 해당 업체에 일일이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연결되는 곳마다 입이 부르트도록 나를 소개하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하지만 필리핀 종이 매매상들은 오래전부터 유럽이나 일본산 용지를 공급하는 거래선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처음 접하는 한국산 용지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천신만고 끝에 몇 군데 연결이 되었다. 나의 간절한 진심과 열심이 통했던 것일까. 한 곳에서 소위 평가 시험 주문을 받게 되었다.

나는 갖고 온 종이 샘플을 보여주었다. “당신들이 일본에서 수입한다는 용지와 비교해 봐라.” 그러나 수입상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겉보기에는 큰 차이가 없으나 실제 분석 검사와 인쇄 테스팅을 해보기 전에는 가타부타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나는 가격, 납기일 등을 질문하면서 그의 대답으로 정보를 파악하고 곧바로 다시 제안했다.

“이미 좋은 일본 업체 공급선이 있는 것은 알지만 우리 제품을 소량이라도 구매해서 테스트해 봐라. 가격과 납기는 최대한 맞춰주고 품질도 보장한다. 이렇게 소량을 테스트해 보고 향후 거래는 다시 만나서 결정하자. (주)대우라는 한국 굴지의 기업이 보증하겠다.”수입상들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첫 거래 성공이었다. 그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감사합니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어떤 존재에게 나도 모르게 감사가 튀어나왔다.



영업부에서 나의 담력을 키우려고 맡긴 상식 밖의 테스트였으나, 생각지도 못했던 전화번호부라는 선물로 첫 해외 출장에서 성공적인 물꼬를 틀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선물이었다.

첫 출장에서 100만 불 담력을 얻다!:
마닐라에서 고객과의 질문을 통해 배우며 상담 거래에 눈을 뜬 나는 홍콩 시장으로 향했다. 당시 까탈스럽기로 유명했던 흥정의 달인 홍콩 상인과도 ‘종이 업계의 New Face’라는 말도 안 되는 selling point로 나를 소개하며 거래선을 확보했다. 이렇게 초보 수출 용사의 첫 해외 출장은 만족할 만한 실적을 올리며 필리핀, 홍콩, 방콕, 싱가폴, 쿠알라룸푸르 등으로 연결되었다. 해외 첫 출장에서 기대 이상의 수주 달성은 지금 생각해도 믿기 어려운 실적이었다.

영어는 나의 운명


내가 살던 삼각지는 미 8군이 자리하고 있어 미국인을 대할 기회도 많았고 생활용품 등 미국 물품을 취급하는 곳도 많았다. 학용품도 다양했는데, 1950년대 후반 우리나라 제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품질이 우수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미국 원조 물자로 학교 도서관에 끼어들어온 초등학교 교과서였다. 우리가 사용하던 교과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매끈한 종이에 올 칼라로 선명하게 인쇄된 초등학교 영어 교과서가 그렇게 좋아 보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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