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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을 아십니까? 5

이승하 지음 | 쿰란출판사


이 사람을 아십니까? 5

이승하 지음

쿰란출판사 / 2024년 12월 / 408쪽 / 18,000원





존 로스(John Ross, 1842~1915)


1784년 북경에서 영세 받은 이승훈이 조선에 들어온 것이 천주교의 원년이요, 개신교의 원년은 알렌이 상해에서 제물포로 들어온 1884년이다. 그 이듬해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들어오고, 그 후 스크랜턴과 헤론이 들어왔다. 그러나 조선에서 공식적으로 시작된 개신교 선교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중국, 만주, 일본, 미국에서 조선 선교를 위해 준비하셨다.

1879년 서양의 글로 한국의 역사를 처음 소개한 영국인 선교사 존 로스의 《History of Corea》가 처음 한국말로 번역되었다. 번역서 제목은 《한국사》였다. 1872년 중국에 입국한 로스는 만주에서 선교하며 북송의 사마광이 쓴 《자치통감》 등 중국 사료와 현지의 조선인 상인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그는 책에서 고조선부터 1876년 강화도 조약까지의 조선의 역사를 개괄하고 조선의 관습, 종교, 지리, 정부 등 조선에 대해 전반적으로 상세히 설명했다. 로스의 책은 서양인이 한국의 문화와 역사에 관해 쓴 다른 책에 비해 객관적이었다. 특히 로스는 기자조선설을 인정하고 특히 한글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한글의 구조와 특징을 설명하는 데 한 챕터를 할애하며 “조선인들의 알파벳은 너무나 아름답고 단순하여 30분 안에 충분히 통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조선의 역사와 문화, 조선인의 외모에도 후한 점수를 주어 “조선은 문명 수준이 높으며, 그 역사가 세계의 다른 주도적인 국가들보다 더욱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했다. 또 “조선인 중 흰머리에 수염을 기른 신사는 미남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훌륭한 서양인처럼 보이기에 충분하며, 중국인들과 달리 싸구려 무명은 옷감으로 사용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이 책은 한국문학번역원이 LG 연암문고가 소장하고 있는 1만 권의 한국사 관련 서양 고서 중 100권을 선정해 번역하는 프로젝트 가운데 14번째로 번역되었다. LG 연암문고 김장춘 연구위원은 “원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서양인이 최초로 한국의 역사를 독립된 한 권의 책으로 썼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존 로스(나요한, 羅約翰)는 1842년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자라면서 글래스고 대학교와 에든버러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로스는 신학을 마친 후 그의 나이 30세였던 1872년에 스코틀랜드 연합장로회 해외선교부로부터 중국으로 파송되어 만주에서 활동했다. 선교 초기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으나 마침내 기반을 세웠다. 이듬해인 1873년 로스는 알렉산더 윌리엄슨 선교사에게서 6년 전 토마스 목사가 평양 대동강에서 순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토마스 선교사의 한국 선교 열의에 감화받은 로스는 이때부터 조선에 복음을 전하겠다고 결심했고 조선 선교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되었다.

1793년 윌리엄 캐리의 인도 선교가 시작되었고, 1807년 로버트 모리슨의 중국 선교가 시작되었다. 서양이 중국 선교에 나서면서 한국 선교도 시작되었다. 토마스 선교사는 처음에는 중국 선교사로 시작했으나 조선 선교의 소망을 품고 조선에 왔다가 대동강에서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로스는 1873년 말 영구 지방을 순회 전도하다가 자신의 선교 방법을 두 가지로 정립했다. 첫째로 그 나라의 가치관이나 신앙을 빌리기보다 그 나라의 문화를 바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이나 가치관을 정립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둘째로 비기독교 지역의 교회는 외국인 선교사가 아니라 자국 기독교인의 생활과 전도 활동을 통해 성장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많은 선교사가 필요하지 않고 몇 군데에 몇 명만 있을 때 그 지방 신자들을 더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로스 목사는 사서삼경을 열심히 배웠고 전도할 때 그것을 많이 이용했다. 그는 유교를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사회의 훌륭한 가치관으로 칭찬했으며, 설교 시에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방법으로 이 윤리적 가치관을 사용했다.

1874년 10월 9일부터 로스는 당시 청국과 조선의 국경이자 양국 사이의 합법적인 교역이 이루어지던 고려문(高麗門, Corean Gate)을 여행했다. 고려문 마을은 청과 조선 사이에 있는 세관이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로스 목사는 그곳에서 조선 상인들을 만나 대화할 수 있었다.

1875년 말 만주에 온 지 3년 만에 로스 목사는 첫 선교 통역자 존 매킨타이어를 만났다. 매킨타이어는 로스 목사가 부르기 전까지 지부 서쪽 200km에 있는 유현에서 목회하고 있었다. 1876년 초 매킨타이어는 로스 목사의 여동생 캐서린과 결혼했다. 로스 목사와 매킨타이어는 선교 활동을 빨리 계획해 한 사람이 6주간 영구에 있으면 다른 사람은 6주간 순회 전도를 했다.

1876년 4월 말부터 5월 초까지 로스 목사는 두 번째로 고려문을 여행했다. 로스 목사는 애하와 압록강의 합류지점까지 갔다. 그곳의 농장에서는 중국인과 조선인들이 농사를 짓고 있었다. 두 강이 만나는 곳에서 로스 목사는 의주시를 보고는 압록강변을 따라 구경하려고 뱃사공을 부르려 했으나 조선의 변방 군인들이 두려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로스 목사가 조선 국경으로 간 이유는 자신에게 조선어를 가르쳐줄 선생과 신약성경을 조선어로 번역하도록 그를 도와줄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통역을 하고 또한 성경을 번역할 수 있을 만한 지식인을 만났는데, 그는 이응찬이라는 홍삼 장수였다. 이응찬은 통역자로 일하는 것에 관심을 보였고, 일주일 후 로스 목사의 교사가 될 것을 결심했다.

1876년 말 로스 목사는 그의 첫 번째 저서를 냈는데 《만다린 프라이머》(Mandarin Primer)라는 선교사들을 위한 중국어 교본이었다. 이응찬에게 조선말을 배운 로스 목사는 1877년에 그의 두 번째 저서인 《조선어 교재》(Corean Primer)를 발행했다. 이 책의 서론에 따르면, 이 책은 《만다린 프라이머》에 기초한 조선어 문법 공부 책이었다. 로스 목사의 《조선어 교재》는 영어로 썼고 조선어 문법을 설명했으며 조선어 예문 문장을 모두 서양어로 썼다. 이 책의 특징은 두 가지로, 하나는 띄어쓰기를 사용했다는 것과 그 사용언어는 표준어가 아니라 북쪽 사투리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의주 출신 이응찬의 영향이었다.

로스의 한글 선생이었던 이응찬은 로스를 돕는 중에 기독교에 대해 긍정적인 마음을 갖게 되었고, 그를 좀 더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응찬은 1875년 고려문에 가서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등 의주 청년 세 사람을 데려왔다. 이응찬을 비롯하여 네 사람의 한국 젊은이를 확보한 존 로스는 한국 선교를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이 성경 번역임을 알고 그때부터 성경 번역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그가 한글 성경 번역에 뜻을 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한국 선교를 오래도록 염원해온 그는 고려문에서 조선인을 만났지만 복음을 전하거나 성경을 줄 수가 없었다. 몇 년 전 조선에 있는 천주교인들이 심한 박해를 당했기 때문에 조선인들은 외국책을 가져가면 박해를 받을까 겁을 냈으며, 서양인과 접촉하기를 두려워했다. 로스는 말씀만이 기독교의 핵심이요 전도의 중심이라고 보고 한글 성경 간행에 전력해야 한다고 믿었다.

1880년 10월 존 로스는 연합장로교에 이렇게 보고했다.

“나는 6년 전 국경에 가서 조선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들이 중국과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때는 자금의 여유도 없어서 내게 조선어를 가르칠 선생조차 바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후 상황이 많이 변해 작년에는 4명의 조선인에게 세례를 줄 정도까지 되었다. 이들은 모든 학식 있는 자들이며, 그 외에도 11명이 기독교의 본질과 교리를 알려고 노력하고 있다. 또한 7, 8일 걸리는 여행길을 마다하지 않고 우리 선교본부까지 와서 조선인을 위한 성경과 기독교 서적 출판을 돕겠다고 기꺼이 나설 인물들이 우리가 원하는 만큼 상당수 확보되었다.”

선교본부를 흥분시킬 만큼 복음 전파는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서상륜이 1879년 만주 우장에서 로스에게, 4년 후 1883년에는 김청송이 그 뒤를 이어 세례를 받아 이제 세례를 받은 젊은이는 모두 6명으로 늘어났다. 이미 이들을 중심으로 조선인들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이러한 조선인 신앙 공동체는 적어도 1879년 이전부터 정기적인 모임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 조선인 신앙 공동체를 이끈 지도자가 조선인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인에 의한 조선교회가 이미 복음 전래 때부터 실행에 옮겨졌음을 보여 주며, 조선인들은 로스와 존 매킨타이어의 선교를 실질적으로 지원하여 그들로 조선 선교의 비전을 불태우게 했다.

그러나 이들의 가장 큰 공헌은 역시 성경 번역에 있다. 로스는 이들과 함께 성경 번역에 착수했다. 이들의 협력이 없었다면 ‘로스 역 성경’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초창기 성경 번역 과정은 조선인 번역자들이 선교사들과 함께 한문 성경을 읽고 나서 그것을 한글로 번역하고, 선교사는 그것을 다시 헬라어 원문과 대조하여 될 수 있는 대로 헬라어 원문에 가깝게 다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878년에 존 로스와 이응찬, 김진기, 백홍준 공역으로 누가복음 초역이 완료되었고, 매킨타이어가 한인 번역자들과 함께 다시 원문에 가깝게 재수정했다. 성경 번역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1879년 5월 로스가 안식년을 떠날 때 복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로마서 원고를 가지고 갈 수 있었다.

1882년의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와 《예수셩교 요한복음》의 출판은 한국 성경 번역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최초의 한글 성경이라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뛰어난 번역자들과 수차례의 재교정을 통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원문에 충실하면서 순 한글로 인쇄된 값진 결실이라는 점 때문이다. 로스는 끝까지 원고를 다듬는 일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최종 원고가 완성된 뒤 1881년 영어개역성경이 출판되자 로스는 여기에 맞춰 다시 한 구절 한 구절 대조하면서 원고를 손질한 다음 1882년 3월 24일 첫 성경인 《예수셩교전》을 출판했다. 이어 1883년 재교정된 《예수셩교 사도행전》 합본, 《예수셩교 셩셔 누가복음 대자전》, 재교정된 《예수셩교 요한복음》이 출판됐고, 1884년에는 《예수성교 말코 복음》과 《예수셩교 맛태복음》, 1885년에는 《로마인서》, 《코린돗젼후셔》, 《가라탸서》, 《이비소서》가 출판됐으며, 1887년에는 《예수셩교젼셔》 즉 신약 전권이 완간됐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성경 번역을 위해 공식적인 모임을 시작한 것이 1887년이었음을 감안할 때 이미 존 로스의 신약성경은 매우 앞서 완간된 것이었다.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가 저본(문서의 초벌 원고)으로 사용한 성경은 중국어 성경 문리, 헬라어 성경, KJV, ERV 등 네 종류의 성경이었다. 당시 번역이 진행된 곳이 만주 우장이었고, 오래전 한문성경이 출판되어 사용되었으므로 한문 성경을 주된 저본으로 사용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따라서 로스와 매킨타이어 역은 독창적인 번역이라기보다는 중국어 성경을 한국말로 번역한 작업이라고 할 만큼 중국어 성경을 모체로 번역한 성경이었다. 그러나 존 로스는 번역의 정확성을 기하려고 중국어 성경 외에 헬라어 성경과 두 권의 영어 성경도 저본으로 사용했다.

로스와 매킨타이어 역 한글 성경은 첫 작업치고는 여러 가지 면에서 상당한 수작(秀作)이었다. 비록 로스 역이 평안도 사투리가 많아 서울 지역에서 사용하기에는 불편했으나, 고유명사를 헬라어 원문대로 표기한 것이나 순 한국말로 번역한 것은 놀라웠다.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은 성경 번역에 협력한 이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권서인(勸書人)이 되었고, 고향에서 자신들이 만든 성경을 보급하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은 처음부터 한국인에 의한 복음 전파가 진행되었다.

당시 의주, 고려문, 만주의 개항장은 쇄국정책으로 조선에 선교사들이 직접 들어갈 수 없는 상황에서, 로스는 언젠가 선교의 문이 열릴 것을 믿으면서 번역한 한글 성경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지원으로 출판했다. 그는 이응찬의 도움으로 1877년부터 10년간 신약전서 《예수성교전셔》를 간행했는데, 이는 식자층을 위한 성경이 아니라 누구나 읽을 수 있었고, 또 그 일에 헌신한 한국인들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백홍준은 로스를 도와 이응찬과 함께 한글 성경 번역에 큰 도움을 주고, 서상륜과 함께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조선에서 권서(勸書)를 하면서 복음을 전했었다. 1876년 3월 조선이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으면서 문호를 개방했다. 백홍준은 감옥에 투옥되면서도 굴하지 않고 전도인의 삶을 살며 의주 교회의 초석이 되고, 1887년에 언더우드가 세운 조선 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의 초대 장로가 되었다. 그 후 전국으로 순회 전도를 다니다 1892년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던 중 옥중에서 순교했다. 이응찬 역시 그 후 아편쟁이 생활을 청산하고 성경 번역에 전심을 다하다가 1883년 9월 이국 땅에서 콜레라에 걸려 죽었다.

여기서 또 한 명 중요한 사람이 있다. 바로 서상륜과 서경조 형제이다. 서상륜은 백홍준의 친구였다.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은 백홍준이 서상륜에게 복음을 전했으나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사업에도 몇 번 실패한 상황에서 항구 도시인 영구로 장사하러 갔다가 사고를 당해 장사 물품을 모두 잃고 병까지 걸려 죽게 되었다. 그때 로스의 어학 선생인 이응찬이 서상륜을 발견하고 그를 매킨타이어 선교사에게 데리고 갔고, 매킨타이어는 그를 영국인 의사에게 소개해 치료를 받게 했다. 어릴 때부터 장사하면서 이득을 위해 사람을 속이고 속아 왔던 서상륜은 매킨타이어가 본인의 돈을 들여 무일푼인 자신의 병을 고쳐 주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서상륜은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생명을 구하기는 했으나 당시에는 예수를 믿으라는 선교사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기독교는 나라에서 금하는 사교(邪敎)였고, 서상륜은 이 종교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천주교 박해 사건도 알고 있었다. 다만 치료비를 갚을 수 없었으므로 그 성경을 받아왔다. 다른 개종자들처럼 서상륜도 처음엔 종교를 탐색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선입견이 사라지고 복음에 대하여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다음은 그의 기록이다.

“내가 생각하되, 내 나라 친구와 친척은 나를 좋지 않게 보는데 타국의 보지도 듣지도 못한 모양 다른 사람은 나를 친부형같이 사랑하니 이것이 어찌된 연고인고. 지금 로스 목사가 참사랑으로 권하니 예수를 믿는 사람은 참 하늘나라 백성이로다.”

매킨타이어와 존 로스 선교사는 그를 인격적으로 대했고 진심으로 사랑했다. 결국 이런 선교사들의 사랑을 통해 서상륜은 그들을 참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느꼈다. 서상륜이 개종한 것은 1881년 5월, 그의 나이 32세 때였다.

이처럼 1884년 9월에 알렌이 조선에 선교사로 들어오기 전에 이미 서북지방의 청년 중에 세례교인이 있었다. 로스가 이응찬의 도움으로 번역한 신약성경은 1887년에야 《예수셩교전셔》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다. 그 전부터 한글로 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한문 성경이 김청송이라는 사람을 통해 만주 한인촌에 퍼지면서 1884년 말에는 압록강 연안 한인촌에서 세례교인 100명, 남자 세례요청자 600명, 매일 예배하는 가정이 수천이었다. 또 이 성경은 백홍준과 서상륜 등을 통해 조선에 들어왔는데, 1883년 5월부터 평양에만 1천 권의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이 전해지고, 같은 해 서상륜은 서울에 400권의 복음서를 반포했다. 그 결과 여러 명의 개종자가 생겼고, 서상륜은 로스 선교사에게 서울에 와서 세례 베풀어 주기를 요청했다. 이때는 아직 알렌이 조선에 들어오기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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