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날이 은혜스럽다
김병삼 지음 | 두란노서원
모든 날이 은혜스럽다
김병삼 지음
두란노서원 / 2024년 10월 / 220쪽 / 14,000원
1 앞서가지 말고 함께 갑시다
# 하나님을 위해 뭘 하냐고요어느 잡지사 인터뷰를 하다가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목사님은 하나님을 위해 뭘 하세요?”
목회자에 대한 기대나 환상을 가지고 특별한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머리가 하얗게 되어 버리더군요.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하나님을 위해 하는 일이 별로 없어서 말이죠. 예전에는 그런 문제를 가지고 참 많이 씨름했던 것 같습니다.“하나님, 제가 무엇을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죠? 저에게 어떤 소명을 주셨죠?”
빨리 그걸 알아야 빨리 위대한 일을 하고,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면서 깨달아 가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별로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것 같지도 않고, 사실 하나님도 그리 기뻐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는 일들이 하나님께 얼마나 필요한 일들일까요? 그렇게 한다고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요?
한때는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 삶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헌신한다는 말들이 참 위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말들을 참 기뻐하시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를 하나님께 드리고 헌신한다고 해서 그게 하나님께 얼마나 큰 가치가 있을까요? 때로는 내 열심이 하나님을 앞서가 오히려 하나님을 힘들게 할 때가 많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성령님을 위해 산다는 것이 신앙적인 몸부림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하나님을 위해 살았던 신앙의 선배들이 무너지고, 또한 교만으로 끝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느 순간에 하나님을 위해 살았던 것이 자신의 업적이 되고 기념비가 되기 때문이죠.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한다고 할 때마다 내가 한 일에 대한 업적을 쌓는 듯한 느낌,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멀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하기보다. 그냥 하나님과 함께 가면 좋겠다고요. 사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느냐의 물음일 것 같습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마음대로 하십시오”라는 말처럼 말이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과 동행한다는 것이겠지요. 하나님 그리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하는 행동은 모든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굳이 우리의 능력 없음에 대한 한탄도, 하나님을 위해 한 일에 대한 자랑도 더 이상 필요치 않은 것처럼 말이죠. 우리의 신앙이 깊이를 더하면 더할수록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으면 좋겠습니다. 그 대신 매일매일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한 몸부림이 살아 있다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는 늘 바쁘고 쫓기고 불안했는데, 그냥 하나님과 함께 가자고 생각하니 참 좋더군요.
다시 인터뷰 때 받은 질문으로 돌아가서, 그때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 하는 일도 별로 없고, 무엇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요즘은 그냥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좋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냥 그렇게 쭉 살아갈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그냥 나와 함께하자!”
헨리 나우웬은 기도를 이렇게 정의 내린 적이 있습니다.
“기도는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다!”
바쁜 일상 가운데서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허비하기로 마음먹을 때, 가장 질적으로 충만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바쁜 세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가장 한가한 시간을 가질 때, 뭔가는 잘 모르지만 ‘영성’이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나요?
“기도는 다른 일로 바쁘게 살아가던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무척 한가해지는 것이다!”
이 쉬운 일이 참 힘든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갑니다. 분주한 사역의 한가운데서, 치열한 삶의 전쟁터에서 하나님과 함께 무척 한가한 시간을 갖는 것이 오늘 우리의 작은 소원이 되면 어떨까요?
2 완벽하지 않아도 되니 행복합시다
아파도 괜찮습니다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교인이 있습니다. 함께 아픈 마음과 형편을 나누면 좋을 텐데, 혼자 안고 갑니다. 그분에게는 아마도 ‘심판받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평생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온 자신이 당하는 고통이 누군가에게 저주받는 모습으로 비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말입니다. 종종 신앙인들이 빠지는 오류입니다.
저도 목회를 하면서 가끔 갈등의 시간을 보내며 ‘아프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습니다. 내가 아프면, 힘들어지면 스스로 잘못한 것을 인정하는 꼴일 테니 말입니다. 마치 스스로 감옥에 들어가 있는 듯합니다.
문제는 우리 삶에 찾아오는 질병과 고통, 아픔이 아니라 그 속에 갇혀 있는 우리 생각이 아닐까요? 예수님께 찾아와 물었던 제자들처럼 말입니다.“저 사람이 소경된 것이 누구의 죄입니까?”
그때 주님은 그 소경을 고쳐 주셨을 뿐 아니라, 그의 질병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필립 얀시는 이것을 “고통의 속량”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 말입니다. 고통이 우리를 속량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이죠.
더욱 무서운 것은 우리를 힘들게 하는 누군가가 아주 심각한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이 상대방을 심판하신다고 말하며 자신의 의를 증명하려는 것입니다. 목사님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 “거 봐요! 이제 알겠죠? 하나님이 누구 편인지” 합니다. 나를 힘들게 하던 사람이 갑자기 사업에 망해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거 봐요! 하나님이 살아 계시잖아요”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심판하셨다면 우리 가운데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듯합니다. 자신을 저주하는 것이든 상대방을 저주하는 것이든 저주는 우리 스스로를 깊이 가두는 참으로 무서운 감옥입니다.
저주의 감옥에서 나오십시오! 질병과 가난 그리고 고통 가운데서 우리를 속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보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를 자유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사탄에게 빼앗겨 버린 이 복음을 다시 찾아야 할 때입니다.
# 왜 접니까우리 인생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참 많습니다. 때로 하나님께 묻죠. “왜요?” 그렇지만 이해가 안 된다고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며 주로 고백한다면 그분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순종하는 것이 옳습니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사도 바울의 믿음의 고백이 참 많이 나오는데, 그중에 하나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 3:6)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하더군요.
“우리 두 사람은 모두 종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을 섬겨, 우리 주인이신 하나님께 여러분의 삶을 맡기는 법을 배우게 한 종일 따름입니다. 우리 두 사람은 주님께서 맡겨 주신 종의 임무를 수행했을 뿐입니다. 나는 씨를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심는 일과 물을 주는 일은 종들이 약간의 급료를 받고 하는 허드렛일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 중에 어떤 일이 더 중요한가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은 주인이 시켜서 하는 일입니다. 주인이 하는 일에 비하면 종들의 일은 어쩌면 허드렛일일지 모릅니다.
때로 우리가 하는 일의 목적을 모를 때도 있습니다. 주인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불평하기도 하고, 자신이 하는 일이 가장 귀한 일이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은 약간의 급료를 받고 하는 허드렛일에 불과합니다. 종의 마음은 늘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테니스로 1960년대와 70년대를 주름잡던 아더 애쉬 선수는 모든 테니스 선수의 꿈인 그랜드 슬램을 이룬 사람입니다.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윔블던에서도 우승했습니다. 그렇게 잘 나가던 그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발목이 잡혔습니다. 두 번이나 수술을 받았는데, 불행하게도 수혈을 받다가 에이즈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1993년, 그의 나이 50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에이즈에 걸린 것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그는 전 세계 팬들로부터 수많은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중 한 편지에 이런 질문이 있었다고 합니다.“왜 하나님은 당신에게 그런 나쁜 병에 걸리게 했을까요?”
아더 애쉬가 에이즈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다음에 이런 질문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아더 애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전 세계 5천만 명의 어린이가 테니스를 칩니다. 그중 5백만 명이 테니스를 정식으로 배웁니다. 그중 50만 명이 직업 선수가 됩니다. 그중 5만 명이 리그전에 참여합니다. 그중 5천 명이 그랜드 슬램 대회에 참여할 자격을 얻습니다. 그중 50명이 윔블던에 참여할 자격을 얻습니다. 그중 네 명이 준결승에 진출하고, 그중 두 명만이 결승전에 갑니다. 제가 윔블던 우승컵을 들었을 때, 저는 하나님께 ‘왜 접니까?’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어느 기자가 그에게 왜 그렇게 질문하지 않았느냐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더 애쉬가 이렇게 말합니다.“만일 제가 심장마비 혹은 에이즈에 걸린 것을 두고 ‘왜 접니까?’라고 묻는다면, 제가 받은 축복에 대해서도 ‘왜 접니까?’라고 물어야 하고, 그것을 즐기는 제 권리에 대해서도 질문해야 합니다. 1975년 윔블던 대회에서 우승한 다음 날, 저는 제가 받은 축복에 대해 ‘왜 접니까?’라고 물었어야 합니다. 만일 저의 승리에 대해 ‘왜 접니까?’라고 묻지 않았다면, 저의 실패와 재앙에 대해서도 ‘왜 접니까?’라고 묻지 말아야 합니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참 많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인생에서 펼쳐지는 희노애락의 이유와 목적을 다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고, 앞으로도 다 알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언제나 신실하신 주인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이해를 넘어서는 믿음으로 순종의 길을 따르렵니다.
3 힘자랑 그만하고 복음 자랑합시다
# 십자가를 이용하고 있진 않습니까크리스천 정치인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정치인 중에도 크리스천이 많은데, 왜 그런 분들이 소망이 되기는커녕 욕을 먹게 되었을까요?”그러자 한 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그 사람들 크리스천 아닙니다. 단지 신앙 있는 척 복음을 이용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과 신앙인은 다르다는 것, 그리고 우리에게 이제는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겠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지키는 자가 있고, 복음을 이용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성경에는 아주 중요한 사상이 있습니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남은 자’ 사상이죠. 하나님은 끝까지 세상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는 자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남은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구원의 때가 되면 하나님은 이 남은 자들을 분명하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하여 일하실 것입니다. 신앙의 영웅은 바로 이 신앙을 지킨 남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소수의 남은 자가 드러나고 하나님이 쓰시는 것이 증명되면, 남은 자들을 흉내 내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그래서 가시적으로는 교회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죠. 그것을 우리는 교회의 부흥이라고 일컬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부흥에 함정이 있습니다. 수많은 무리 가운데는 복음을 지켜 내는 남은 자들보다 남은 자들을 흉내 내며 복음을 이용하려는 자들이 몰려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복음을 이용하려는 자들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면 하나님의 교회는 핍박을 받고 세상으로부터 조롱거리가 됩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그런 때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목회데이터연구소의 2023년 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한민국에서 종교인 비율이 계속해서 줄어드는 가운데, 그럼에도 기독교인의 비율이 타 종교에 비해 가장 높다고 합니다. 그런 것에 비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교회가 칭찬받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멸시와 조롱을 받으며 더욱 외면당하고 있지요.
우리가 복음을 지키는 자들이 아니라 복음을 이용하려는 자들이 되어 버린 것 때문은 아닐까요? 복음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져야 할 것을 지고, 우리에게 주신 가시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아닐까요?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져야 하는 십자가가 혹시 ‘영광의 자리’에 올라가기 위한 수단이 되어 버리지는 않았는지 말입니다. 십자가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면 언제든지 십자가를 버릴 수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려고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람들과 제자들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 골고다로 향하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입니다. 십자가가 ‘목적’이 된 사람만이 주어진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 교회 부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깊이 생각하게 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처럼 살고 싶어서 예수님을 흉내냅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이 가셨던 길을 따라 걷다가 결국에는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달립니다. 그런데 십자가 아래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조롱합니다. 예수님이 달리셨을 때처럼 말입니다. 도저히 그 조롱을 참을 수 없었던 이 사람은 십자가에서 내려와 조롱하는 사람의 뺨을 때립니다. 맞은 사람도 때린 사람도 어이가 없는 상황이죠. 이 사람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다시 십자가에 올라가려고 뒤를 돌아보니, 이미 십자가는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땅히 져야 할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내려오면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사라져 버립니다. 십자가는 묵묵히 지며 지켜 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우리 인생에 가시가 있다면, 혹시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가 있다면 그저 묵묵히 지고 가봅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셨으니 말입니다. 십자가를 벗겨 주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우리와 끝까지 함께하시겠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에 복음을 지켜내는 자들이 필요합니다. 십자가를 지며 복음을 지켜 내야, 우리의 삶이 복음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오늘도 치열함이라는 말을 생각하게 되네요.
4 해결할 생각 말고 기도합시다
# 기도한다면서 떼쓰고 있지는 않습니까누군가 “기도합시다”라고 한다면 둘 중 하나입니다. 문제를 회피하려는 것이거나, 아니면 정말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도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실 문제가 생기고 사건이 터졌을 때 우리가 외치는 구호 중에 “기도합시다”만 한 것이 있을까요? 내 무력함을 인정하는 말이고 강단에서 선포하는 절규인데도 이 말이 때로는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가 뭘까요?
기도에 대해 묵상하면서 말씀을 준비하다 보니 조금은 답을 알 것 같았습니다. 문제는 기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지 않으려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언뜻 이해가 안 되는 말 같습니까? 생각해보세요. 누군가 비장하게 기도하려고 각오하고 작정했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기도이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피해 보려는 수단이 아닌가 의심해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