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봉호 교수의 쉽게 풀어쓴 세계관 특강
손봉호 지음 | 도서출판CUP
손봉호 교수의 쉽게 풀어쓴 세계관 특강
손봉호 지음
도서출판CUP / 2023년 7월 / 312쪽 / 15,000원
세상을 보는 눈, 세계관
세상을 보는 여러 가지 관점세계관이란 문자 그대로 세상을 보는 눈이다. 쉬운 예를 들면, 노란색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이 노랗게 보인다. 사람의 눈은 노란 안경을 끼는 것처럼 어떤 관점, 태도, 가치관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본다. 세계관이란 개념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모두 다 세상을 똑같이 볼 것으로 생각했다. 모든 사람은 먹어야 하고, 가정을 이루어 사는 등 모두 비슷하니까 그와 같이 세상도 비슷하게 볼 것으로 생각했다. 서양 사람들은 19세기 말까지도 모든 사람에게 이성이란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모든 사람은 같은 이성이 있기에 궁극적으로 모두가 세상을 같이 보게 되어 있다고 믿었다. 다만 아시아나 아프리카 사람들은 좀 뒤떨어져 있어서 자기들만큼 그렇게 정확하게 세상을 보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들도 자기들과 비슷하게 보고, 생각하고 평가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 후에 교통, 통신 수단이 발달되어서 사람들이 다른 지역 사람들을 접할 기회가 많아지면서, 그런 생각이 잘못이란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19세기 말 독일 태생 미국 문화인류학자 보아스는 캐나다 원주민 이누이(Inui)족의 문화를 연구하고, 이누이 문화는 서양 문화에 ‘뒤떨어진’ 문화가 아니라 ‘다른’ 문화란 주장을 펴서, 오늘의 문화 상대주의의 효시가 되었다. 그때부터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르게’ 세상을 보는 것이지 ‘틀리게’ 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세상을 보는 태도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모든 것이 다 옳다’는 관점이다. ‘제 나름대로 다 옳은 이유가 있다’는 입장이다. 두 번째는 그와 반대로 ‘아니다. 한 가지만 옳고 다른 것은 다 틀렸다’는 입장이다. 이 두 가지 태도 중 첫 번째 경우, 즉 모든 것이 다 자기 나름대로 옳은 것이라는 입장을 ‘상대주의’라고 부른다. 상대주의는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이라는 생각이다. 요즘 전 세계에 지배적인 경향은 대체로 상대주의적이고, ‘문화 상대주의’는 정설로 수용되고 있다.
세계관은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 국가와 법, 도덕성 등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에도 반영된다. 즉 구체적 사건에 관한 판단이 그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세계관 대신 ‘가치관’이라고 표현하고, ‘확신’이니 ‘신조’니 하는 말을 쓰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사람마다 신조가 다르다’ 혹은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정치, 경제, 과학 기술 등이 공적 영역을 차지하고 종교는 삶의 변두리로 밀려나서 공적 영역에는 간섭할 수 없으며, 그래도 별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이런 문화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정치, 경제, 학문, 기술 등과 종교적 신앙은 전혀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엄격하게 따져보면, 모든 사람은 종교가 있고, 정치, 경제, 학문 등도 사실은 어떤 특정한 세계관에 의해 지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세계관은 부지불식간에 종교적 신앙에 따라 결정된다. 이 책은 이 사실을 분명히 하고자 쓰였다.
문화의 결정적 요소, 종교한 문화의 특성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종교다. 지금도 세계 문화를 유교권, 불교권, 이슬람권 등으로 나누는 것을 보면, 문화에 끼치는 종교의 영향력이 그만큼 컸고, 그 자취가 지금도 상당히 크게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종교란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교리 혹은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자연, 인간, 삶에 대한 고유한 관점이 있고, 그것들을 ‘절대적인 것으로 수용하는 것’이 종교의 특성이라면, 그 영향은 당연히 클 수밖에 없다. 어떤 관점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사고와 평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런 점에서는 공산주의와 같은 이념도 종교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해야 한다.
또한 세계관은 개인적이기보다는 공동체적, 사회적 혹은 문화적이다. 한국에 사는 기독교인이라면 일상생활에서 이뤄지는 가치 판단에서 기독교적으로 생각하고 평가하기보다는 한국적으로 판단할 가능성이 크다. 아마도 정치적 판단이 전형적인 예일 것 같다. 한국 국회의원 중 약 삼분의 일이 기독교인이고, 천주교인까지 합치면 거의 절반에 가깝다. 그런데도 한국 정치에 기독교적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없다. 기독교인 국회의원이 그렇게 많은데, 왜 정치는 기독교적이지 못한가? 그 의원들은 개인적으로는 기독교인이지만, 기독교적 세계관에 따라 정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일이면 교회에 열심히 나가고 새벽기도회에도 출석하지만, 정치는 비기독교적으로 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적으로 살고 행동하지 못한다 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세계관에 대해서 따져보아야 하는 것이다.
세계관 바로잡기우리가 세계관에 관해 논하는 이유는, 우리가 어떤 세계관을 가졌는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서 많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떤 세계관을 가졌는지 자문해 본 결과 그것이 기독교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 자신의 세계관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세계관 같은 것에 관심도 없고, 자신이 어떤 세계관을 가졌는지 모르면, 세계관을 바꾸기가 매우 어렵다.
기독교인은 다른 종교 신자와는 달리 세계관에 관해 반드시 생각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다. 기독교가 계시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자연 종교는 세계관에 관해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저 각자 생각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 둬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계시의 종교인 기독교는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종교다.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주님이 하신 말씀이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라고 했다(이사야 55:8~9). 계시를 따르는 사람은 이 세상 사람들, 소위 자연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느낀 것이 일반화되어 만들어진 문화에 그냥 젖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너희는 이렇게 해야 한다. 이렇게 세상을 보아야 한다.”라고 계시하셨다. 계시란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계시하시지 않아도 우리가 알아서 올바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계시하실 이유가 없었다. 또 기독교의 계시는 언어로 표현되어 있기에 우리는 그것을 의식할 수 있고 그것을 기준으로 우리 자신을 비판할 수가 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유리한 조건에 있다. 즉 세상을 어떻게 보아야 한다는 것이 명시적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성경적 바탕 위에서 그것을 말할 수 있기에, 자신과 세상에 대해서 훨씬 더 비판적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자기비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생각이 어떤 것이고 이 세상이 어떠한가를 객관적으로 보는 훈련이 된 사람에게나 가능하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성경이란 기록된 하나님 말씀이 있고, 기도를 통해 자신을 살피는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 상당수가 기독교인이거나 어릴 때 성경 교육을 받는 등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 기독교인은 비판적 사고를 하는 데 상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기에 지적으로 높은 수준에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반성적일 수 있고, 잘잘못을 잘 구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세계관의 핵심적 요소: 하나님의 존재
무신론과 유신론세계관에서 하나님의 존재만큼 결정적인 것은 없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바울이 표현한 대로 “내일이면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라는 것이 일관성 있는 결론이다(고전 15:32). 하나님의 존재는 사람의 가치관, 삶과 죽음에 관한 태도, 삶의 목적 등 사람의 모든 중요한 것에 영향을 끼친다. 신의 존재를 가장 분명하게 부인하는 공산주의 사회들이, 그렇지 않은 사회들과 얼마나 달라지는가를 보면, 그 영향을 실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존재와 관련해서 무신론과 구별되는 불가지론도 있다.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모른다는 입장이다. 이론적 지식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을 잃은 현대 지성인들에게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입장이다. 지식인들 가운데는 무신론자보다 불가지론자들이 더 많다.
종교의 씨앗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 심각한 현상 가운데 하나는 ‘죽음’이다. 우리 인간은 다 죽고, 인간에게는 자신의 죽음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주로 죽음 이후의 상황에 대한 불안이라고 한다. 실제로 미국의 한 여론 조사에서 “죽음에서 가장 두려운 부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음 후에 자신이 처할 상황에 대한 불안이 더 크다고 대답했다.
모든 인간에게는 불가사의하고 불가항력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태풍이나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처럼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현저히 높다. 일본은 세계에서 과학 기술이 발달한 나라 가운데 하나이고 국민의 지식수준도 상당히 높은 나라다. 그런데도 세계에서 미신이 가장 많은 나라다. 일본은 태풍이나 지진 등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는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은 초월적 힘을 의지하려 한다. 인격적 신이든, 잡신이든, 운명이든 신적인 것 혹은 초자연적 힘을 찾고 의지하게 된다.
독일의 종교학자 루돌프 오토는 이러한 모든 것을 통칭하는 것으로 ‘누멘’(numen)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신(神)의 행위, 영향력, 신비스러운 힘을 뜻하는 말로 고대 라틴어에서 나온 말이다. 이는 신적인 것, 인간과는 다른 큰 힘과 영향력과 지혜가 있다는 의미다. 어떤 사건이 우리가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큰 것일 때, 우리는 겁에 질리고 공포감을 느끼며 그 대단한 힘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오토는 이런 ‘성스럽고도 위압적인 두려움의 정서’가 종교의 기원이라 했다. 또한 칼뱅은 인간에게는 ‘신에 대한 느낌’이 있고, 그것을 ‘종교의 씨앗’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엄청난 재앙이 일어나면,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느끼고, 인간의 지식과 능력을 초월하는 존재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하게 된다. 그런 것이 신에 대한 느낌이고 종교의 씨앗이다.
인격적인 하나님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다. 인격이란 ‘자유의지가 있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라고 정의할 수 있다.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외부의 압력이나 법칙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행동할 수 있어야, 즉 스스로 결정해서 행동할 수 있어야 자유의지가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정확한 이유를 가지고 사리가 분명한 결정을 하면, ‘올바로 결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왜 그렇게 했는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했다면, ‘자의적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궁극적으로 따지면 하나님의 의지는 자의적(恣意的, arbitrary)이다. 하나님이 무슨 이유가 있어서 결정한다면, 하나님이 따라야 하는 법칙이나 권위가 또 하나 있어야 한다. 그런 하나님은 절대적이지 않다. 하나님이 인격적이란 말은, 하나님 이외에 하나님보다 더 높은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음을 함축한다. 위대한 교부요 철학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의지가 자의적임을 강조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자의적 결정을 할 수 있는 분이다.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일반적 신관의 가장 극단적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것은, 윤리학에서 개신교와 천주교의 입장 차이다. 둘 다 소위 신명론(神命論)을 따른다. 즉 우리가 왜 어떤 행동은 해야 하고 어떤 것은 하지 말아야 하는가의 기준이 하나님의 명령이란 것이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하나님은 절대 나쁜 것을 명령하지 않으신다고 주장하고,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이 금지하는 것이 나쁘다고 주장한다. 즉 천주교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고, 개신교는 하나님 명령 자체가 그 기준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하나님 뜻 외에 어떤 다른 기준도 순종하지 않으신다는 말이다. 그만큼 하나님의 의지는 절대적이다. 자유롭게 결정하시지만, 한 번 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신실함에 관해 신학은 하나님의 불변성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그리스 철학의 영향이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함’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불변함과 신실함은 비슷한 부분이 있지만 차이가 엄연하다. 신실함은 인격적 요소를 품고 있지만, 불변은 물리적 특성을 나타낸다. 디모데후서는 하나님은 자기를 부인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는 신실하지 못하더라도, 그분은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그분은 자기를 부인할 수 없으시기 때문입니다.”(딤후 2:13). 하나님은 약속을 뒤집지 않으신다. 만약 하나님이 구원하시겠다고 해놓고 그 뜻을 바꾸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겠는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며, 그 사랑은 일방적 사랑, 즉 우리가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여부와 상관없는 사랑이기 때문에, 그 사랑은 신실하고 우리는 그 사랑을 의지할 수 있다.
성경의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지식과 논리로 이해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욥기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욥은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큰 고난을 당한다. 그것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불평하는 욥에게 하나님은 “네가 어찌 내 생각을 아느냐.”라고 꾸짖으신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욥의 항의가 정당한 것 같은데, 하나님은 무지한 소리 그만하라고 꾸짖으신다. 하나님의 처분에 모든 것을 맡기고, 우리 생각을 절대화하지 말라고 하신다. 우리 나름대로 이론을 세워서 하나님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인간적인 이해 방식일 뿐이다.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
세상 지혜의 어리석음사람들은 스스로 매우 영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다른 성경의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한다. 세상의 이런 지혜를 성경의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는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라고 말한다. 세상의 지혜로 보면 십자가를 전하는 성경과 그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은 매우 어리석다. 하나님이 사람이 된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사람이 된 하나님이 십자가란 치욕의 형틀에서 죽는다는 것은 더더욱 말이 안 되어 보인다.
고린도전서 1장 26~27절을 보면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라고 한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통해서 오히려 세상의 지혜와 지식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25절에는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라고 한다.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는 자신이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더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어리석어서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지혜를 믿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해한다. 그래서 자신의 지혜도 믿고 신적인 존재의 능력에도 의지하려 한다. 이렇게 자신의 지혜와 하나님 사이의 중간을 택하는 것을 성경은 우상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사람이나 새나 네 발 짐승이나 기어 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라고 지적한다(롬 1:2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