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변화시킨 세 가지 질문
조동천 지음 | 두란노
내 인생을 변화시킨 세 가지 질문
조동천 지음
두란노 / 2024년 1월 / 164쪽 / 12,000원
PART 1 첫 번째 질문, 나는 누구인가?대학 시절에 읽고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그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한 청년이 열심히 살았지만 워낙 밑천이 없다 보니 사업을 성공적으로 일으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악마가 나타나서 군침을 흘리게 하는 제안을 했습니다. 악마는 병 10개를 보여주면서 이 중에 하나에는 독이 있고 나머지 병에는 꿀이 있다고 했습니다. 만일 청년이 이 중에 하나를 골라 마신 후 죽지 않으면 원하는 돈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청년은 처음에는 단호히 거절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삶이 힘겨울수록 자꾸 악마의 제안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악마를 찾아갔습니다. 한 번만 시도해 보겠다고 마음먹고 떨리는 손으로 10개의 병 중 하나를 골랐습니다. 하나님께 한 번만 살려 달라고 기도하고는 마침내 선택한 병을 마셨습니다. 다행히 꿀물이었습니다. 그는 기뻐하며 악마에게 약속한 돈을 요구했고, 악마는 순순히 청년에게 돈을 건네주었습니다. 돌아가는 청년의 뒤에다 대고 악마가 말했습니다. “다음에 돈이 필요하면 다시 와라. 배로 줄 테니까.”청년은 절대 그럴 일 없다면서 돌아갔습니다.
쉽게 번 돈은 쉽게 없어지게 마련입니다. 자꾸 배로 준다는 악마의 속삭임이 들려옵니다. 그러다가 결국 다시 찾아가기를 벌써 여덟 번이나 했습니다. 용케 살아서 이제 병은 2개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청년은 어느새 노인이 되었고, 이제 나이 들어 죽으나 독을 마시고 죽으나 마찬가지겠다 싶어 마지막으로 악마를 찾아갑니다. 이제는 거칠 것 없이 남은 병 둘 중 하나를 마셨습니다. 놀랍게도 또 꿀물이었습니다. 노인은 승리에 취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내가 끝까지 이겼다. 악마야! 내 돈을 내놔라!”
그런데 악마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나머지 한 병을 자기가 마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기긴 뭘 이겨 이놈아! 이것도 꿀물이다. 네가 나를 이긴 것 같으냐? 너는 내 돈만 바라보고 평생을 살지 않았느냐! 인생의 의미도 사랑도 보람도 모르고 내 돈의 노예가 되어 네 영혼을 팔지 않았느냐!”
우리는 때로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을 성공’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져도 인생의 철저한 패배자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인생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인생에서 순간순간 다가오는 질문이 있다면 크게 세 가지입니다.첫째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삶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입니다.
둘째는 그 정체성에 따라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삶의 태도’에 대한 질문입니다.
셋째는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하는 ‘삶의 목적’에 관한 질문입니다.
이 세 가지는 끊임없이 우리의 일상을 파고드는 피할 수 없는 도전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정체를 모르는 물건처럼 내가 누구인지 확고한 자리매김이 없는 인생이라면 의미 없고 무가치한 삶을 살다가 끝날 수 있습니다.
정체성이 확고하더라도, 그에 합당한 삶의 태도와 기준을 바르게 지니고 있지 않다면, 사용법을 모르는 물건을 대하듯 답답하고 불안한 일입니다. 이리저리 쓸려 다니다가, 여기저기서 얻어터지고 실패한 인생으로 끝날 것이 뻔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인가’를 확정했으면 ‘어떻게 살 것인가’를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확고한 정체성과 바른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더라도 삶의 목적이 잘못되었다면, 아군에 떨어진 포탄처럼, 진지할수록 희생적이고 종말이 비참할 것입니다. 목적, 즉 방향이 잘못되면 열심히 살아가는 것 자체가 절망을 불러오게 됩니다.
그러니 가치 있는 생을 살고 싶다면,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로 달려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정리하셨습니다.
사탄의 정체성의 기준에 속지 마라인간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갈팡질팡하게 되는 이유는 인간이 오랫동안 사탄이 제시한 방법에 속아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제시한 방법이란 이런 것입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 4:3)
사탄의 이 같은 도전에는 인간이 오랫동안 정체성을 찾기 위해 구한 잘못된 방법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먼저 이 유혹의 구조를 보면, 앞부분에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나옵니다.“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것이 사탄이 진짜 흔들고 싶은 초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조건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다시 말해, 어떤 조건 하에서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정체성이 성립된다는 말입니다. 그 조건이란 이어서 나오는 “이 돌들이 변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입니다.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마귀가 계속 물고 늘어지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체성을 흔드는 말입니다.
이것을 일반화하면 오랫동안 인류를 무력하게 만든 사탄의 전략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곧 사탄이 우리를 속이고 길들여 온 전략입니다. 바로 ‘한 사람의 능력이 그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즉, 능력이나 경제력으로 그 사람의 정체성을 평가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를 보면 사탄의 전략은 제대로 먹힌 것 같습니다. 사탄이 우리를 속인 방법을 의심도 하지 않고 삶의 기준으로 삼고 있으니까요. 세상 사람들은 이 기준에 따라 서로를 평가하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휘어진 잣대로 길이를 재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입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의 능력이나 소유와 비교해서 나의 나됨을 평가하지 않습니까? 나의 업적이 있거나 사회적 위치가 있으면 한없이 교만해졌다가 그런 것이 없으면 한없이 초라해지지 않습니까? 대기업에 취직하면 귀공자나 된 듯이 우쭐하고, 실직당하니까 아무렇게나 구겨진 휴지처럼 초라하고 쓸모없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사탄의 속임수에 속아왔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말씀에 있다 예수님은 마귀의 이 같은 정체성 혼란 계략에 속아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마귀의 이런 잣대 자체를 거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마 4:4)
예수님은 먼저 “기록되었으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정체성의 근거를 예수님 자신의 형편이나 능력에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잘못된 접근 자체를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마귀는 ‘할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능력의 문제로 정체성을 결정하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논리 자체를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떡’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는 선언은 ‘돌이 떡이 되도록 하는 인간의 능력의 문제’도 아니고, ‘떡이라는 경제적 소유의 문제’도 아님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기준은 인간의 형편이나 처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고 계시느냐’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정체성으로 확고히 붙들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무엇입니까? 이 장면 바로 앞에 나오는 마태복음 3장에서는 예수님이 세례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하시니라 (마 3:16-17)
예수님은 하나님께 헌신했고, 성령을 체험했으며,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 중요한 것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기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이 오랫동안 써먹던 정체성 평가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 놓으셨습니다. 능력이 아니라 말씀이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속고 길들여져서 잘못 이해하고 있는 정체성의 고리를 끊어 버리셨습니다. 소유의 수준이나 능력의 유무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나의 나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받으실 때 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체성의 뿌리를 견고히 내리셨습니다. 성도의 정체성의 근거도 이래야 합니다.
나의 나됨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았던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의 확고한 고백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서도 듣고 싶어 하십니다. 절박한 현실 앞에서도 본회퍼 목사님이 외쳤던 마지막 말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누구인지, 오, 하나님 당신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PART 2 두 번째 질문, 어떻게 살 것인가?
‘내가 누구냐?’라는 존재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면 이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삶의 태도 문제가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누구인가’라는 존재 의식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더욱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사탄에게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으로서 나라 잃은 서러움을 탄식하며 메시아의 나타남을 고대하며 살았습니다. 따라서 당시 군중들은 유대 민족을 하나님의 초능력으로 단번에 구원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의 기대를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어떻게 살기로 결정하셨을까요? 사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나는 누구인가’가 결정합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어느 시각장애인이 나옵니다. 그는 몸이 불편한 것은 고사하고 마음고생이 아주 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나면서 시각장애인이 된 것을 그 부모나 본인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 시각장애인도 사람들의 놀림을 받아도 항변하지 못했고 아무 데도 쓸모없는 죄인으로 동냥이나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이 그에 관하여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가 나면서 시각장애인이 된 것은 그 자신 때문인지, 아니면 그 부모의 죄 때문인지를 예수님께 물었을 때 예수님의 대답이 그랬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그는 자신이 죄인도 거지도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값진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는 당당하게 예수를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비아냥거림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던 그가 어느 순간 급변해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요? 바로 정체성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이 바뀌면 삶의 태도(양식)도 바뀝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으면 세상 사람들의 잘못된 평가와 기준에 휘둘리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가장 용감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뀝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세상이 암묵적으로 강요한 자기 정체성과 그에 따른 삶의 태도 때문에 눌려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고 비굴하게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답지 않게 세상이 정해 준 정체성에 따라 자신의 한계를 정해 놓고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니 남들이 다 거지라고 손가락질해도 왕자처럼 품위 있게 행동하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인 당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마귀는 첫 번째 시험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말씀에 근거해서 확고히 갖고 있음을 알았습니다(1-4절). 마귀는 정체성의 문제로 예수님을 흔들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 정체성에 걸맞지 않은 삶의 방식을 주입함으로써 예수님을 흔들기로 작정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마 4:6)
마귀는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마귀 자신이 규정하려는 의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연의 법칙을 초월할 수 있지 않느냐,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특별한 보호를 해주지 못하겠느냐는 것이 마귀가 규정한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입니다. 더구나 그날은 명절이라 수많은 무리가 모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초월의 힘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아들로 화려하게 데뷔하라고 부추긴 것입니다. 마귀의 요구가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물도, 불도, 중력도 해치지 못하는 존재임을 입증하라는 것입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마 4:7)
사탄의 부추김에 예수님은 이렇게 일갈하셨습니다.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세상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삶의 방식이 불경죄에 해당할 정도로 옳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의 하나님’으로 끝까지 믿으라 마귀는 예수님에게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대단히 믿음이 좋은 듯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불신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를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것을 왜 테스트하겠습니까? 테스트는 의심이 갈 때 하는 것입니다. 테스트를 당하는 당사자는 테스트해 보고 나서 믿겠다니 대단히 불쾌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귀는 지금 무례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필요하면 알아서 부딪히지 않게 하실 것을 믿으면 됩니다. ‘어디 그런가 아닌가 보자’는 식으로 하나님을 테스트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귀의 제안에 대해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 전에 ‘너의 하나님’이라고 언급하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나는 개인적인 교제가 이뤄지는 관계가 확실한 사이입니다. 모세의 하나님, 예수님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요 20:17)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이상한 삶의 방식을 요청하면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란 의문을 달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시험에 드는 이유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에 혼란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멀리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외롭고, 지치고, 소진되었을 때,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이 가장 견디기 힘든 순간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확신이 없을 때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십자가에 달려 죽는 가장 고통스러운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 버림받은 그 절망적인 순간에도 예수님은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마 27:46)
그런 다음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잊으셨는가, 나를 버리셨는가, 어찌하여 나의 기도에 잠잠하시는가 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을 여전히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그런 순간에도 여전히 ‘나의 하나님’으로 신뢰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그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나의 하나님”이라 고백하셨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