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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의 시대, 방향이 되다

이재훈 지음 | 두란노서원


방황의 시대, 방향이 되다

이재훈 지음

두란노서원 / 2022년 12월 / 200쪽 / 13,000원





Part 1. 괜찮다는 말 대신, 흔들어 깨우라



재난을 통해 삶의 올바른 자리를 찾는다


‘코로나’라는 단어만 들어도 고통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 고통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해야 한다. 하나님은 ‘고통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고통을 통해서’ 일하신다. 고통 없이는 잘 변화하지 않는 우리의 습성 때문에 고통을 사용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두 가지 방법으로 다루신다.

첫째, 고통의 상황을 빨리 제거해 달라는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기를 기뻐하신다. 그런데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있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응답이 아니라 또 다른 방법으로 그 고통을 다루신다.

둘째, 고통 속에서 우리 내면을 변화시켜 올바른 자리를 찾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에 들이닥친 고통의 상황이 삶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고통 때문에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한 것만 같아 더 괴롭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때로 고통을 통해 우리를 올바른 자리로 인도하신다. 고통은 우리 내면에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예를 들어 삶의 목적을 어디에 두고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있으며, 특히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와 같은 것들이다. 고통은 우리가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상황이 비정상일 수 있고,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상황이 오히려 되돌아와야 할 정상적인 길일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코로나 팬데믹도 하나님이 고통을 다루시는 두 번째 방법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마지막 종말의 때를 준비할 수 있는 멈춤의 시간을 주신 것이다. 기도하기 위해서는 멈추어야 한다. 방향을 재조정하기 위해서는 속도를 늦추어야 한다.

코로나 팬데믹 덕분에 어떤 선진국이나 국제기구도 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이산화탄소 발생량이 줄어들고, 멸종 위기에 있던 동물들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온 세계가 강제 안식년에 들어가게 된 상황에서 우리에게 익숙했던 것들은 무너져 가고 있지만, 반대로 우리가 잃어버렸던 것들이 되돌아오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이 다루시는 고통의 목적은 우리가 삶의 올바른 자리를 찾는 것이다. 고통은 우리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우리 안에 안정적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의심하게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고난의 이유를 알기 위해 고심하느라 올바른 자리로 가기 위해 싸우는 일을 잊어버린다.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한번은 그가 기차 여행을 하는 중에 표를 잃어버렸다고 한다. 승무원이 표 검사를 하려고 왔지만, 아인슈타인은 표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를 알아본 승무원이 “박사님, 제가 당신이 누구인지 잘 압니다. 저는 당신이 분명히 티켓을 사셨을 것이라 확신하니 염려하지 마세요. 괜찮습니다.” 하고 지나갔다. 그런데 잠시 후 승무원이 뒤를 돌아보니 아인슈타인이 계속해서 의자 밑을 뒤지면서 표를 찾고 있었다. 승무원이 다시 그의 자리로 가서는 “아인슈타인 박사님,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당신이 누구인지 잘 압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아인슈타인은 고개를 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도 제가 누구인지 잘 압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인생에도 목적지가 중요하다. 우리는 인생의 목적지와 경로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죄이다. 고통은 이러한 죄에서 떠나 회개하고 우리 삶을 재정렬(reset)하라는 하나님의 신호이다. 자기중심적인 삶의 방향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방향으로, 스스로 목적지를 정하던 인생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지를 바라보는 인생으로 바꾸라는 하나님의 신호이다.

또한 고통은 예비된 축복을 받기에 합당한 자리로 인도하시는 도구이다. 사실 고통 자체가 축복은 아니다. 고통은 괴로울 뿐이다. 그런데 고통 너머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 이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진정 감사함으로 고통과 그 너머의 축복을 맞이할 수 있다.

미국 중서부의 한 작은 교회 목사가 어느 성도의 집을 방문했는데, 선반 위에 구슬이 담긴 두 개의 커다란 병을 보았다. 한 병에는 구슬이 가득 차 있었고 다른 한 병에는 몇 개만 담겨 있었다. 그 병이 뭔지, 왜 구슬을 담아 두었는지 이유를 묻자 성도는 이렇게 답했다.

“이제까지 살면서 저는 수많은 인생의 짐을 축복으로 바꿔 주신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구슬이 몇 개밖에 없는 병은 제 인생의 짐을 가리킵니다. 원래는 그 병 가득 구슬이 들어 있었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제 짐을 축복으로 바꾸어 주실 때마다 그 병의 구슬을 옆에 있는 축복의 병으로 옮겼답니다. 이제는 축복의 병이 가득 차고 짐은 몇 개 안 남았습니다. 고통당할 때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세상을 바꾸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구하는 것만이 도움이 됩니다.”

고통받는 세상에서 우리는 울부짖는 소리만이 아니라 우리를 올바른 자리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생생한 음성을 듣는다. 어떤 고통이 찾아온다 하더라도 영혼의 올바른 자리를 굳게 지킬 수 있기를 소망한다.

팬데믹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


코로나 팬데믹이 종식된 후 문제는 이렇게 혹독한 전염병을 치르고도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하고 그 후를 맞이한다는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끝나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준비해야 한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코로나 팬데믹을 통해 깨닫게 된 것들이 있다.

첫째, 모든 사람은 동일한 DNA를 가진 생명체로서 하나의 공동체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둘째, 모든 사람의 생명은 동일하게 매우 소중하다는 것이다. 셋째, 모든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이 사회, 경제, 정치는 물론 생활 전반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기에 코로나 이전과 이후 시대로 나누어진다고 말하지만, 인류 전체 역사를 놓고 본다면 그 정도의 대격변은 아닐 것이다. 이와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대재난은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이었다. 세상은 분명히 홍수 이전과 이후의 시대로 나누어졌다.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나님이 홍수 심판 이후에 주신 말씀(창 9:1-17)에 순종하여 생명을 지키고 번성해야 한다. 그 말씀의 핵심은 다른 어떤 생물들보다도 인간의 생명이 땅에 가득하게 하라는 말씀이다. 가난과 기근이 심각한 지역에서는 산아제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자녀를 낳는 데는 어느 정도의 한계가 있기에 더 심각한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녀를 낳아 키울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잉태된 생명을 너무 쉽게 죽게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에서는 출산율이 5~6퍼센트 이상을 기록하는데, 우리나라는 1퍼센트도 채 넘기지 못하면서 OECD 국가 중 최저를 기록했다. 이러한 속도로 나가면 저출산의 위기로 문명이 붕괴할 수도 있다. 낙태를 통해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에 새겨 놓으신 가장 중요한 진리를 위반하는 것이다. 그것은 진리를 공격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자를 공격함으로써 하나님을 직접 공격하는 것이기도 하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이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살인을 회개해야 한다. 아벨을 죽인 가인의 살인이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 코로나 이후 우리 사회에 생명에 대한 존중 의식이 일어나 더는 살인이 행해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지금은 은혜의 시대이다. 우리는 세상의 마지막 날이 오기까지 극한 혼돈으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게 된다. 하나님은 현재의 자연 질서를 말세까지 보존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것이 일반은혜다. 이러한 일반은혜를 허락해 주시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이라는 특별은혜를 주시기 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 모든 곳에서 모여들어 그리스도의 지체 속으로 인도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도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가운데 행하신 것처럼 지금도 오래 참고 기다리고 계신다. 코로나 팬데믹은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질서로 돌아가야 한다는 하나님의 경고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생명을 지키고 잘 돌보며 이웃의 생명을 존중하는 공동체로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들어야 한다. 코로나 이후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지키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생명을 지키고 돌보고 번성해야 한다. 모든 세상에 주어진 하나님의 일반은혜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주어지는 특별은혜가 임하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Part 2. 용납과 수용 이전에, 진리를 말하라



제2의 바벨탑을 무너뜨리신다


하나님은 제2의 바벨탑에 대한 심판으로 코로나라는 강수를 두셨다. 이 두 번째 바벨탑을 쌓은 세 기둥이 진화론과 무신론과 인본주의이다. 오랜 세월에 거쳐 축적된 이들의 주장이 현대에 이르러 탄탄한 사회적 영향력을 구축하여 모든 사상을 장악해 가고 있다. 두 번째 바벨탑을 쌓는 목적도 첫 번째 바벨탑을 쌓았던 때와 다르지 않다.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는 것이다. 첫 번째 바벨탑에 대한 심판이 흩으시는 것이었듯 두 번째 바벨탑에 대한 심판도 마찬가지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란 흩어져야 살 수 있는 것과 다름없다. 바벨탑의 본질은 인간 스스로 자신과 역사의 주인이 되어 하나님을 인생과 역사 밖으로 내보내려는 것이다. 절대 불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스스로 쌓아 올린 문명과 기술의 탑을 자축하며 마치 가능한 것인 양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오스 기니스(Os Guinness)는 현대 사회가 암흑에 빠져든 이유를 세 가지로 지적했다. 이는 제2의 바벨탑을 쌓는 이들이 사용하는 세 가지 중요한 원리이기도 하다. 첫째, 인간의 삶에는 자명한 진리가 없다는 것이다(No Givens). 하나님의 창조나 자연적 도덕 질서는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따라서 옳고 그름, 참과 거짓, 선과 악, 남성과 여성 같은 질서들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개인의 시각에 따라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둘째, 인간관계에 법칙이란 없다는 것이다(No Rules). 따라서 십계명, 황금률, 자연법 등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여긴다. 셋째, 인간의 노력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이다(No Limits). 충분한 시간과 함께 인간의 독창성이 발휘된다면 인간은 모든 것을 사회적으로 구성할 수 있다고 믿는다. 신기술만 발견된다면 인간이 백만 년이라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허무는 생각들이다. 참과 거짓, 선과 악, 남성과 여성을 비롯한 도덕과 윤리의 생태계를 허문다. 인간의 모든 지식이 오직 사회적으로만 구성된다고 주장하고 있기에 매우 극단적이다. 진리는 단지 관습이나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일 뿐 절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통적으로 주어지는 모든 윤리는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므로 이에서 해방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한다.

가장 명백한 사례가 ‘성 혁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인간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진화되었기 때문에 생물학에 지배될 필요 없이 스스로 성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무서운 혁명이다. 이 혁명은 생물학적 증거를 무시하고 인간의 성을 사회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이다. 이런 일들이 일부 서구사회에서 성공했고, 이제 대한민국을 위협하고 있다. 인권을 위해 일한다고 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이러한 흐름을 옳다고 믿고 계속해서 합법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가정과 사회의 기본을 흔들고 무너뜨리는 일이다. 이러한 시도에 성공한 나라들의 역사는 최악의 사회적 혁명으로 기록될 것이 분명하다.

인간의 모든 삶을 사회적으로 재구성하여 분명히 존재하는 도덕 윤리의 생태계를 파괴하여 기본 질서를 무너뜨린다면 무서운 재앙이 도래할 것이다. 첫 번째 바벨탑에서는 단지 언어를 복잡하게 하여 흩으시는 것으로 끝났지만, 두 번째 바벨탑에서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넘어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경고 다음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Part 3. 거짓이 지혜 같아도, 정직하라



영적 성숙은 철저한 정직에서 온다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막 8:23-25).

예수님은 치유의 기적을 베푸실 때 때로는 말씀만으로 고치셨다. 앞을 보지 못하는 이를 고치실 때 “보라”라는 단 한마디의 말씀만으로도 즉시 낫게 할 능력이 있으셨다. 그런데 마가복음 8장에 나오는 맹인의 눈은 침을 뱉고 안수해서 고치셨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사람은 한 번의 안수로 완전히 고침받지는 못했다.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였을까? 예수님이 첫 번째 안수하셨을 때 병자는 왜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볼 정도밖에 고쳐지지 않았을까?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비유와 같다. 치료의 절차를 통해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교훈이 있다.

보기는 하나 완전하고 명확하게 보지는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처럼 보는 영적 수준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보지만 본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의 믿음 수준은 믿지만 믿는다고 말할 수 없는 정도이다.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믿는 사람인데, 행동을 보면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믿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이 왜 절대적으로 필요한지 명확하게 모른다. 마음을 온전히 바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지 못한다. 예수님이 구주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영역에 있어서는 의지가 분열되어 있고, 성경의 가르침과 권위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눈이 다 보인다고 성급하게 주장하면 안 된다. 무엇인가 보이기는 하지만 다 보이는 게 아니라면 보이는 만큼만 보인다고 말해야 한다. 구원의 기쁨이 충만하지 않으면서 충만한 척하면 안 된다. 믿음이 충분하지 않으면서 충분한 척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흉내 내서는 안 된다. 명백하게 보이지 않는다고 절망하거나 서두를 필요도 없다. 지금 내가 보는 것을 정확하고 정직하게 말하면 주님이 명확하게 보이는 단계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영적 성숙의 길은 철저하게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세상을 뒤집어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어느 아빠가 일곱 살 난 아들에게 부유함을 자랑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들을 데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보여주기로 했다. 그는 아들을 데리고 거대한 저택에서 나와 가난한 친구가 사는 시골의 작은 농장으로 갔다. 작고 허름한 집에서 아빠는 아들과 이틀을 머물렀다. 저택으로 돌아온 아빠는 아들이 가난한 집에서 무엇을 보고 배웠는지, 자기 의도가 통했는지 궁금해 이렇게 물어봤다.“아들아,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잘 보았니? 거기서 무엇을 배웠니?”

“네 아빠, 정말 좋았어요. 우리 집에는 개가 한 마리뿐인데, 그 집에는 네 마리나 있었어요. 우리 집 마당에는 수영장이 한 개 있는데 그 집 뒤에는 끝없이 이어지는 개울이 있었어요. 우리 집에는 전등만 있는데 그 집에는 멋진 별들이 있었어요. 우리는 밤에 제각각 혼자 텔레비전을 보는데 그들은 모두 둘러앉아 친구처럼 재미있게 놀았어요. 아빠! 우리가 얼마나 가난한지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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