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민의 답답답
조정민 지음 | 두란노서원
조정민의 답답답
조정민 지음
두란노서원 / 2022년 9월 / 244쪽 / 15,000원
1 믿음 / 기도
아무리 노력해도 믿음이 안 생깁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해도 믿음이 생기지 않아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저에게 믿음을 주실까요?
▲ 안 믿어지는 것을 어떻게 억지로 믿을 수 있겠어요? 안 믿어질 때는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다리다 보면 믿어지는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건을 주실 것입니다. 가령 어려운 일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가 있죠. 이 고통의 파도는 누구나 통과할 수밖에 없는 인생 역정입니다. 이때 ‘어디 계십니까? 내 고통을 보고 계시기는 한 겁니까?’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다 하나님을 만진 듯이 만나는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님과 씨름하는 시간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 있기는 한 겁니까? 도대체 하나님이 내 고통을 알기는 하세요?’ 하는 질문이 정직할수록, 진지할수록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번도 그런 질문을 해본 적 없다면, 한 번도 그런 의심을 해본 적 없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 질문에 대답하실 것이라는 걸 이미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믿을 만한 사람, 질문에 대한 답을 아는 사람한테 질문을 하게 됩니다. 들으나 마나 한 얘기를 하는 사람한테는 진지하게 질문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진지한 질문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거죠. 믿음이란 인격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람들한테 진지한 질문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면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겁니다.
무조건 믿는 것이 옳은 건가요?● 성경 말씀이 잘 안 믿어지고 하나님께 궁금한 것들이 많은데 그럼에도 무조건 믿는 것이 옳은가요?
▲ 성경은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쓰인 책입니다. 허구를 쓴 소설이 아닙니다. 출애굽 사건은 역사적 사건이지 꾸며낸 얘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실존 인물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꾸며낸 이야기라면 열두 명의 제자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톱에 썰려 죽고 절벽에 떨어져 죽었겠습니까? 이후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전하기 위해 순교를 했겠습니까? 사실로 믿었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겁니다.
성경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책이며 믿음으로 봐야 하는 책입니다. 무작정 믿어야 하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을 통해 십자가 사건을 접하면 우리는 먼저 감정적인 반응을 하게 됩니다. 가슴 아파서 눈물을 흘리게 되죠. 그러다 2천 년 전의 팔레스타인 땅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30대 청년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고 이성을 작동하게 됩니다. 그러다 어느 날 그 사건이 감동이 되는 순간이 있어요. Feeling이 생기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 감정적인 반응을 거친 뒤 Faith, 믿음이 생깁니다. 이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무조건 믿겠다 해서 믿어지지 않습니다. 믿음은 억지로 생기는 게 아닙니다.
차라리 성경을 읽으면서 ‘이게 사실이라면 나를 믿게 해보세요’ 하고 기도하세요. 무좀이 심했던 어떤 분이 교회에서 집까지 오는 동안 “하나님, 진짜 계시다면 내 무좀이나 한번 낫게 해보시오” 하고 기도했다가 진짜 무좀을 고침 받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무좀 특효약이라는 얘기가 아니라 이런 도발에도 때로 하나님은 반응하신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믿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무조건 믿겠다 하지 마시고요.
어떤 사람은 혼자서 통곡하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어떤 사람은 침대 곁에서 조용히 명상하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어떤 사람은 여행 중에 찢어지게 가난한 동네에 들어갔다가 하나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믿음을 선물로 받게 합니다.
믿음을 신념으로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돌려 대라, 5리를 가자면 10리를 가 줘라,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을 줘라, 빌리지 말고 누구에게든 꾸어 줘라, 얼마나 좋은 말씀입니까. 이 좋은 말씀을 의지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좋은 그리스도인 같지만, 만일 그것이 믿기로 작정한 신념이었다면, 고난이 왔을 때 한순간에 믿음이 허물어지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일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분이어야 한다는 내 생각을 믿었기 때문에, 내 생각과 다른 모습에 부딪치면 교회를 떠나거나 신앙을 잃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받은 믿음이 아니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믿음을 선물로 받는 경험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 말씀을 의심해도 괜찮은 건가요?
▲ 저는 솔직히 창조론이 안 믿어진다고 계속 질문했습니다. 창조론이 말이 됩니까? 그렇게 질문하고 의심하자, 하나님은 사건을 통해 그 질문들에 대답해 주셨습니다. 창조과학회장을 만나 사흘 동안 밤새도록 토론하는 시간이 마련된다든가, 누군가 선물로 준 설교 테이프나 책에 내가 의심하고 질문하던 것들에 대한 대답이 있다든가 하는 식입니다. 소름 돋는 경험을 참 많이 했습니다. 나중에는 의문을 가지기가 두려울 정도였어요. 또 무슨 일이 생기려나 싶어서요.
이처럼 저는 의심 많은 도마였습니다. 그런 제게 하나님은 믿을 수 있는 일들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의문이 들면 하나님께 솔직해지십시오. 불신이 생겼다면 솔직해지십시오. 안 믿으면서 믿는 체하는 것처럼 나쁜 게 없습니다. 안 믿어지면 안 믿는 대로 솔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한 영혼에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교회도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 안 믿는 사람, 의심하는 사람, 불신하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다 아시는데 왜 기도해야 하나요?● 예수님이 이미 나를 다 아신다고 하는데 굳이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 예수님은 당연히 나를 다 아십니다. 하지만 나는 예수님을 모릅니다. 나 자신도 잘 몰라요. 기도는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 가는 과정입니다. 내가 구하는 것이 곧 나의 모습이거든요.
우리 아들이 어릴 때 장난감 사 달라고 조르면 제가 다 사 줍니까? 아들의 요청을 듣기는 해도 사 주는 것은 한참 지나서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도하면 그분이 들으십니다. 그러나 그 요청에 Yes냐 No냐 또는 Wait이냐는 그분이 결정하실 일입니다. 나는 그분의 결정을 좌지우지할 수 없습니다. 그분이 No 하셨다면 그것이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돌아보면 그때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하는 일이 참 많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랑 만났으면 큰일 날 뻔했어 같은 일 말입니다. 그러니 기도는 하되 그다음은 그분께 전적으로 맡겨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Yes, No, Wait 하면 그대로 따르면 됩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그건 내 알 바 아니라고 했습니다(롬 14:8). 나는 오래 살고 싶지만 그분이 지금 데려가는 것이 좋다면 오케이라는 겁니다. 너무 수동적인 것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수동적인 게 아니라 가장 능동적인 태도입니다. 죽고 사는 데서 풀려나는 것보다 더 큰 능동적인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2 신앙생활
성경이 너무 어렵습니다● 성경을 꾸준히 읽고 싶은데 너무 어려워요. 어떻게 읽어야 하나요?
▲ 성경이 어려운 건 번역이 어렵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한테 성경은 전혀 어렵지 않을 겁니다. 자기 언어로 쓰였으니까요. 특히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쓰였는데 당시 가장 쉬운 말로 쓰인 겁니다. 성경이 쉽게 읽히려면 중학교 1, 2학년들이 막히지 않고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번역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 전체의 문맥을 이해하려면 좀 더 쉽게 번역된 성경을 읽는 게 도움이 됩니다. 그런 다음 다른 버전의 성경을 읽어보길 권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백번 읽어도 말씀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경적인 지식은 많은데 삶과 동떨어진 사람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읽었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보내신 러브레터입니다. 연애편지는 읽고 또 읽고 또 읽게 마련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사랑의 편지를 받고 아무렇지 않다면,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인 거죠.
성경은 66권으로 되어 있으며 저자가 40여 명입니다. 게다가 1600년이라는 시간 차를 두고 쓰였습니다. 그런데도 성경 66권은 한 권처럼 읽힙니다. 주제가 같으니까요. 디모데서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딤후 3:16). 과연 그렇죠. 성경은 각각 다른 사람이 썼지만 하나님이 한 성령으로 감동케 하셔서 동일한 주제를 관통하도록 하셨습니다.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그 믿음으로 성경을 읽어야 오늘 나에게 들려주는 말씀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우리가 3500~4000년 전에 쓰인 책을 읽는다는 게 기적 아닙니까?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내게 찾아와 말씀하신다는 걸 믿는 게 믿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거치지 않은 어떤 영적 체험이나 증거를 귀담아들으면 안 됩니다. 정말 위험한 일이에요. 세상은 갈수록 영적인 것에 갈급하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현상에 관심이 많아질 것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성경의 검증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말씀을 읽을 때 먼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이해되지 않는 말씀은 일단 넘어가세요. 나중에 한 번 더 읽으면 이해될 겁니다. 한 번 더 봐도 이해되지 않는다면 또 한 번 읽으면 됩니다. 그렇게 차츰차츰 이해해도 늦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상처받은 친구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상처받아서 사람을 만나기 싫다는 친구에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요?
▲ 운동선수가 경기 중에 꽈당 넘어지면 굉장히 아플 것 같은데 실제로는 통증을 별로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상처에서 통각 시그널이 올라와도 중요한 경기를 마쳐야 하니까 스스로 차단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경기를 마친 뒤에야 비로소 통증을 느낀다고 합니다. 이처럼 목표와 열정이 있는 사람은 웬만한 상처에도 끄떡하지 않습니다.
상처를 잘 받는 사람의 특징 중 하나가 과거지향적이라는 것입니다. 왜 과거지향적일까요? 미래에 대한 꿈과 비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연단받아야 합니다. 더 큰 믿음을 소망한다면 연단받아서 단단해져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 상처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신앙이 그만큼 연약하다는 걸 고백하는 거라고 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이 상처받았으면 그 길로 하나님을 떠났을 겁니다. 하지만 그동안의 연단을 통해 신앙이 성숙해진 아브라함은 끄떡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시험을 통과해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상처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연단일 수 있습니다.
제가 평생 살아오면서 받은 상처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70여 년간 받은 상처를 지금까지 갖고 있었다면 거기에 짓눌려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제겐 비전이 있고 꿈이 있기 때문에 상처 따위에 감정을 소모할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님, 시험을 면제해 주지 마시고 이길 힘을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면 끝나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완성될 비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미래지향적인 사람입니다.
3 연약함
죄를 안 짓고 싶은데 계속 짓게 돼요● 안 그래야지 하면서도 계속 죄를 짓게 돼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 성숙한 신앙이란 죄를 짓지 않는 게 아니라 죄를 짓더라도 예민하게 자각하는 것이며, 죄로부터 돌이키는 시간이 짧아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온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완전무결할 수 없습니다. 다만 죄를 지었을 때 죄를 묵상할 게 아니라 하나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자꾸 죄를 곱씹고 묵상하면 하나님과 멀어질 뿐입니다. 죄를 범했다 싶으면 하나님께 먼저 엎드리십시오. 죄를 곧바로 시인하는 것이 가장 빨리 회복되는 길입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한테 거짓말 한번 했다가 그 거짓말을 숨기려고 또 다른 거짓말을 한 경험이 있을 겁니다. 죄는 숨기면 숨길수록 또 다른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자꾸 죄를 짓다 보면 부모와도 관계가 나빠집니다. 우리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죄를 지었으면 숨기지 말고 주님께 털어놓으십시오. 내 죄를 시인하십시오. 하나님은 어떤 죄든 용서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어떤 죄보다도 큽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죄를 돌이키기 위해 처방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어떤 사람과 너무 불편한 관계여서 하나님께 저 사람을 죽이든지 날 죽이든지 해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와 관계가 틀어진 계기가 된 사건을 기억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날로 찾아가 내가 먼저 사과했어야 하는데 그냥 넘어가서 미안하다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날 이후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잘못을 한 그 사람한테 용서를 구하라 하시면 즉시 행하면 됩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여전히 죽음이 두렵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죽음을 생각하면 여전히 꺼림칙하고 무섭습니다.
▲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은 가짜 믿음이 되고 맙니다.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기대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영원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니까 그렇습니다. 새집을 사서 이사 가면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작은 집에서 살다가 조금 더 큰 집으로 이사 가는 것만 해도 너무 설레고 기쁜데 이 땅의 장막 집을 허물고 영원한 거처로 가는 죽음이 어떻게 슬프다고 마냥 울기만 할 수 있습니까? 물론 감정적으로 이별의 슬픔을 억누르기가 힘들지만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큰 소망으로 극복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기독교의 장례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불교식, 유교식, 샤머니즘식이 복잡하게 얽힌 장례 문화입니다. 우리는 탄식하고 슬퍼할 게 아니라 춤을 추며 기뻐해야 합니다. 이 장례 문화를 기독교식으로 바꾸면 세상에 영향력을 갖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가장 아름답고 기쁜 장례문화를 만들면 세상이 감동할 것이라 믿습니다.
저는 저의 장례식에서 부를 찬송가를 미리 정해 놨습니다. 어떤 분은 자신이 죽기 전에 장례식을 가졌다고 합니다. 죽기 전에 보고 싶은 사람들 만나 오해가 있다면 해명하고 잘못이 있다고 용서를 구하고 마지막으로 서로를 축복하는 기도로 마무리했다고 합니다.
주변 사람을 자꾸 판단하고 정죄하게 됩니다● 저는 신실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주변에 그렇지 않은 사람을 보면 자꾸 판단하고 정죄하게 됩니다. 나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요?
▲ 신앙이란 판단으로부터 자유해지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나타난 원죄란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면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정죄하게 됩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깁니다. 내 마음대로 타인을 조종하고 싶어 합니다. 그걸 우리는 권력의지라고 부릅니다. 권력의지란 죄인의 가장 큰 속성입니다. 그러므로 죄성으로부터 자유해지려면 가장 먼저 판단하는 버릇에서 자유해져야 합니다.
직장에서 꼭 그런 못된 인간을 만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이 우리 눈에 띄게 하시는 이유가 뭘까요? 그 사람하고 싸우라는 게 아닙니다. 피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 사람 놓고 한 달간 씨름해 보십시오. 그 사람이 변하든지 내가 변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나의 신실함은 그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저 사람도 구원해 주십시오. 저 사람도 주님의 사람 아닙니까?” 이렇게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