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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발자취를 따라서 2

피터 워커 지음 | 도서출판CUP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서

피터 워커 지음

도서출판CUP / 2023년 3월 / 578쪽 / 26,500원





마게도냐



유럽으로 들어가는 첫걸음


안디옥에서 보낸 시간 동안 원기를 회복하고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에 고무된 바울은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훨씬 더 서쪽으로 진출하기로 했다. 그는 갈라디아 남부를 통과해 소아시아의 서쪽 해안에 당도했고, 여기서 에게해를 건너 마게도냐로 가라는 강력한 환상을 경험했다. 이로써 기독교 메시지가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의 해안에 도착했다. 바울은 마게도냐에 도착한 것이 하나님의 분명한 인도하심의 결과였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는 아시아 속주와 그곳의 수도인 에베소로 들어가기 원했지만,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다(행 16:6).” - “예수의 영”이 이를 허락하지 않으셨다. 결국 그들은 드로아 해안에 도착했고, 마침내 이곳에서 분명한 인도하심을 받았다. 바울은 꿈에 한 사람이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았다.

바울과 함께 여행하는 이들은 끊임없이 기도하며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많은 경우 그들은 하루하루 무엇을 하게 될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예상치 못한 것에 대비해야 했다. 바울이 빌립보에 갔을 때도 이처럼 융통성이 필요한 접근 방식을 보게 된다.

빌립보의 강가에서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이며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었다(행 16:12). 마게도냐의 필리포스 2세가 세운 이 도시는 주전 42년의 끔찍한 빌립보 전투 이후 퇴역 군인들이 정착한 로마 식민지가 되어 이 지역의 주요 도시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의 동전은 압도적으로 로마의 것이었다. 외국의 영토가 아니라 사실상 로마의 변경 거류지라는 지위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곳이다. 빌립보와 아드리아 해안의 디라키움(Dyrrachium)을 연결하는 에그나티아 대로(Via Egratia)를 활용해, 또는 디라키움과 이달리야 사이를 항해하는 배를 통해 로마와 긴밀한 소통을 유지했다. 실질적이며 특별한 의미에서 빌립보에서는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다.”

바울과 그의 일행은 주중에 도착해 다음 토요일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 회당이 어디 있는지 사람들에게 물었으나, 도시 밖 시냇가 근처에서 모여 기도한다는 소수의 유대인 여성들의 모임을 소개받았다. 그들은 그곳에서 설교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루디아라는 이름의 한 여성이 곧바로 강에서 세례를 받고 싶다고 말했다. 버가모 남쪽에 있는 도시인 ‘두아디라 시의 자색 옷감 장사’로 소개된 이 여성은 상당한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의 집은 바울 일행을 수용할 만큼 컸으며, 그의 가족이 모두 세례를 받았다. 또한 누가는 그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다고 설명한다. 유대인은 아니었지만, 유대교 주변에 머물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지금까지는 상황이 좋았다.

운명의 변화


점치는 재능을 지닌 이로써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던 노예 소녀가 바울 일행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큰소리로 외쳤다(행 16:16~17). 바울은 이런 설명에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 사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정확하게 묘사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며칠 동안 이런 상황에 계속되자 그들은 성가시며 당혹스럽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바울은 사람들이 자신의 메시지를 이런 식으로 처음 듣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에게 귀신을 내쫓았다(행 16:18).

노예 소녀의 주인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더는 점치는 능력으로 많은 돈을 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울과 실라는 도시의 광장으로 끌려왔고, 로마의 행정관들 앞에서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하는 골치 아픈 유대인’으로 고발당했다(행 16:19~21). 공식적으로 유대인은 로마 시민들을 개종시킬 수 없었는데, 사도들의 행동은 개종을 유도하는 행동으로 보였을 것이다. 무리가 그들을 고발하며 소동을 벌이는 가운데 그들은 제대로 된 심문도 받지 못하고 즉시 태형을 당했다.

바울과 실라는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다. 행정관들은 이들을 하룻밤 동안만 감옥에 가두어 두려고 했던 것 같다(행 16:35). 하지만 자정 무렵 지진이 나서 감옥 문이 열리고 죄수들을 묶은 사슬이 풀렸다. 죄수들이 탈출했다고 생각해 공포에 사로잡혀 자결하려고 했던 간수는 기쁘게도 바울과 실라가 아직 거기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큰 안도감을 느낌과 동시에 경외감에 사로잡혀 그들 앞에서 무서워 떨며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고 물었다(행 16:26~30). 바울과 실라는 더 중요한 ‘구원’ - 예수 안에서 얻을 수 있는 - 에 관해 이야기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 결과 그들은 새로운 신자를 얻었을 뿐 아니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 밤 그 시각에 바울이 전하는 주의 말씀’을 들은 후 세례를 받았다. 그날 밤 아무도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을 것이다. 대신 그들 모두가 함께 식사를 했다. 그리고 간수는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했다.”

믿음과 세례


여기서 우리는 루디아나 간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예수에 대한 믿음의 반응은 즉시 세례의 필요성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바울의 가르침은 언제나 세례가 뒤따르는 믿음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예수가 명하신 대로 행했다(마 28:19).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린도전서 12장 13절

바울에게 세례는 예수가 세우신 새 언약의 표지, 참으로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의 일원이 된다는 표지였다. 이것은 바울이 이미 갈라디아서에서 주장했듯이 할례(하나님의 백성에 참여하는 이전의 표지)가 더는 필요하지 않다고 보았던 주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기 때문에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3:26~27).” 할례보다 세례가 더 나은 점 중 하나는 이제 여성도 남성과 동일한 자격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라고 말한다(갈 3:28). 바울의 메시지가 그때까지 자신이 주변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특별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음은 당연한 일이다. 이제 그들은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 중앙 무대로, 그분의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의 핵심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빌립보인들에게 작별을 고하다


빌립보의 행정관들은 바울과 실라가 체포될 때 그들이 로마 시민일 가능성을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부하들이 이런 말을 전했을 때 놀라고 두려워했다. 그들은 죄수들이 이 문제를 계속 따지면 자신들도 곤란해질 수 있음을 알고 정중히 사과하고 그들에게 도시를 떠날 것을 요청했다. 그들은 짧은 시간 루디아의 집에 들러 그곳에 모인 신자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길을 떠났다. 누가 자신이 빌립보 주민이었다는 우리의 판단이 옳다면 누가도 이곳에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의심할 나위 없이 사도들은 그에게 이 작은 회중을 믿음 안에서 세울 책임을 맡겼을 것이다. 바울은 4, 5년이 지나서 이곳을 다시 찾게 될 것이다.

데살로니가를 향해


세 사람은 에그나티아 대로를 따라 서쪽으로 향했다. 이 길은 로마 제국의 주요 간선 도로 중 하나였으며, 이 길을 이용하는 많은 이들은 로마를 최종 목적지로 삼았을 것이다. 그들의 시선은 서쪽으로 이어진 속주의 수도 데살로니가를 향해 있었다(행 17:1~9). 그들은 (빌립보와 달리) 마게도냐 최대 도시인 이곳에 규모가 큰 유대교 회당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 실제로 회당이 있었다(행 17:1). 다시 한번(자기의 관례대로) 바울은 회당으로 가서 적어도 세 번의 토요일에 걸쳐 구약을 가지고 메시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논증했다(행 17:3). 이것은 예수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눅 24:26), 심지어 죽으시기 전에(막 8:31) 말씀하셨던 바와 매우 비슷해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십자가와 부활을 핵심으로 여겼으며, 회당이라는 맥락에서 이것이 히브리 성경의 메시아적 본문의 성취라고 주장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이번에는 회당의 유대인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번에도 새로운 신자들 중에는 몇몇 ‘귀부인’을 비롯해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가 포함되어 있었다(행 17:4).

더 나은 반응을 보인 베뢰아


바울과 실라, 디모데는 펠라에서 에그나티아 대로를 따라 남쪽으로 19km 떨어진 마을인 베뢰아로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바울과 그의 일행이 한동안 숨죽여 지냈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다시 한번 회당으로 갔다. 이번에 그들은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유대인 주민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행 17:11).” 많은 유대인이 믿었지만, 이번에도 적잖은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들이 믿었다(행 17:12). 누가는 이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지만, 나중에 바울의 동역자가 된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의 이름이 언급된다(행 20:4).

얼마간 조용한 시간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런 평온함이 곧 깨지고 말 것을 이제는 그들도 예상했을 것이다. 데살로니가의 회당에 속한 이들이 도착해 사람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행 17:13). 이 때문에 바울은 즉시 마게도냐를 떠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새로운 신자 중 일부가 경호원처럼 행동하며 그를 육로로 혹은 해로로 아덴까지 안내했다. 그들은 돌아와 가능한 한 빨리 디모데와 실라를 아덴으로 데려오라는 바울의 지침을 전했다(행 17:11~12).

일행이 마게도냐에 머무르는 동안 젊은 디모데에 관한 언급은 거의 없다. 그는 동역자들의 행동을 관찰함으로써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배우라는 권면을 받았을 것이다. 그가 영웅적인 활약을 펼칠 시간이 올 것이다. 지금은 흔들리지 않는 동반자 역할과 충성 때문에 그를 소중히 여겼다. 그리고 전에 이 ‘살인자’ 역할을 맡았던 마가와 달리 이 젊은이는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게도냐를 다시 찾은 바울


바울은 도사리는 위협에도 곧 마게도냐 속주를 다시 방문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4, 5년이 지나서야 다시 그곳을 찾을 수 있었다. 바울은 개척한 교회를 돌아볼 뿐만 아니라 새로운 곳을 개척하기 위해마게도냐 서쪽으로 향했다(3차 선교 여행). 이 여정에 데살로니가 출신의 두 사람, 즉 아리스다고와 세군도가 그와 동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나중에 고린도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는 바울의 일행에 속하게 된다(행 20:4). 아마도 베뢰아 출신의 소바더 역시 동행했을 것이다. 이듬해에 그는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라고 썼다(롬 15:20). 고린도와 에베소에서 겪었던 전혀 다르지만 기진맥진하게 만드는 어려움에서 벗어나 바울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능력 - 선교의 최전선을 개척하는 것 - 으로 활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마게도냐에서 가장 오래 머문 때는 주후 55년과 56년의 이 ‘숨겨진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 ‘이방인의 사도’는 이스라엘의 메시아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겠다는 각오로 소수의 젊은 동역자들과 함께 계속 여행했다. 배를 타고 바로 로마로 갈 기회가 사라졌다고 판단했을 때, 그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니고볼리를 경유해 고린도로 가기로 했다(딛 3:12).

위험하고도 외로운 시간이었을 테지만 그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그는 기력을 완전히 회복하여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신학 저술 - 그의 필생의 역작인 로마서 - 를 쓸 수 있었다. 그가 마게도냐에서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고 죽을 뻔한 경험을 하기도 했지만, 이곳은 새로운 생명이 솟아나는 모판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고난을 당하셨지만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분을 따르는 삶의 일부였다.



에베소와 밀레도



가르침과 작별 인사


바울의 에베소 사역은 주후 2년 가을 무렵에 시작되었다. 에베소는 그를 파송한 교회가 있는 시리아 안디옥을 제외하면 아나톨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 - 바울과 같은 개척자들에게 핵심적이며 전략적인 장소 - 였을 것이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이곳에 올 기회를 찾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그 문을 닫으신 것처럼 보였다(행 16:6), 그러나 빌립보에서 시작해 데살로니가를 거쳐 고린도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큰 도시에서 귀중한 경험을 쌓고 난 지금이 마침내 이 도시에 다가갈 때였다.

다시 한 번 갈라디아 남부 지역을 통과해 여행하면서 바울은 내륙을 지나(행 18:23, 19:1) 쉬지 않고 가야 한 달 이상 걸리는 800km의 여정을 마친 후 에베소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도착해, 고린도에서 만나 동역하고 지난봄 예루살렘으로 떠날 때 헤어졌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찾았을 것이다. 도착한 직후 바울은 이상하게도 세례 요한이 전한 세례에 관해서는 알지만, 예수의 이름으로 베푸는 세례에 관해서는 알지 못하는 열두 제자들을 만난다(행 19:1~7). 이 사실은 이 지역에 그리스도인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암시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에베소는 ‘처녀지’였던 셈이다. 이는 언제나 그리스도가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야심을 지니고 있던 바울 같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도전이었다(롬 15:20). 바울은 결국 이곳에서 3년을 보내고 이곳의 사역을 디모데의 손에 맡긴다. 이것은 시간의 시험을 견뎌내는 사역이 될 것이며, 에베소는 앞으로 수 세기 동안 기독교 신앙의 중심지 중 한 곳이 될 것이다.

세계의 불가사의


속주의 공식 수도는 북쪽으로 약 145km 떨어진 버가모였지만, 에베소는 아시아 속주의 주요 항구였으며 토로스 산맥 서쪽 지역에서 가장 큰 교역 중심지였다. 원래 이오니아 해안선을 따라 세워진 수많은 그리스 정착지 중 하나였던 에베소는 (카이스테르강 하구에 자리 잡은) 전략적 입지와 아데미 여신의 수호자(혹은 신전지기)로서의 평판 때문에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거대한 아데미 신전은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다. 도시 자체는 수많은 언덕으로 오르내리는 8km 길이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바닷길로 도착하는 이들은 (인구가 25만 명이었던) 이 도시의 수용 인원 2만 5천 명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극장이 세워진 언덕을 향해 주랑이 세워진 긴 길을 따라 도시 중심부로 들어갔다. 이 도시는 상업적으로 번성했을 뿐 아니라 마법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도 유명했다. 고대에 ‘에베소 문서’는 신비로운 주문과 암호화된 공식을 담은 문서를 지칭하는 구절이었다. 이교 예배와 마법으로 유명했던 이 도시는 이제 곧 예수가 주시라는 바울의 가르침을 만나게 될 것이다.

바울의 전략


어떤 이들은 이 시기에 에베소의 유대인 수가 1만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한다. 상대적으로 환영하는 기간이 석 달 동안 지속되었지만, 이내 익숙한 거부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행 19:9). 이때 바울은 대안적인 공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두란노’라는 교사와 연관된 강의실이었다. 사도행전 본문의 다른 해석에 따르면 바울은 날마다 ‘아침 11시에서 오후 4시까지’ 이곳을 사용했다. 비록 여름의 뜨거운 날씨를 견뎌야 했지만, 바울은 2년(대략 주후 3년과 4년) 동안 이 일을 계속했다. 누가는 이 시기에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라고 말한다(행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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