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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묻고 성경이 답하다

차준희 지음 | 도서출판CUP


성도가 묻고 성경이 답하다

차준희 지음

도서출판CUP / 2022년 4월 / 312쪽 / 16,000원





신앙의 기본기



성경이 우리 손에 오기까지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나요?


성경은 누구의 작품인가?:
성경의 기원과 형성 과정에 대해 분명하게 보여 주는 본문이 하나 있다. 예레미야 36장이 바로 그 본문이다. 이 장은 하나님이 그동안 예레미야에게 주신 모든 말씀을 기록하라고 명령하신 것을 증언하고 있다. 여호야김 제4년(기원전 605년)에 예레미야는 친구인 서기관 바룩에게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말씀을 두루마리 책에 받아 적게 했다. 바룩은 예레미야가 대언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두루마리 책에 받아 적었다.

당시 예레미야는 성전 출입을 금지 당했다. 1년 뒤인 여호야김 제5년(기원전 604년)에 바룩은 예레미야를 대신해 금식일에 예루살렘 성전에 모인 유대인들을 향해 두루마리 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낭독했다. 이 말씀은 유다의 죄를 준엄하게 꾸짖고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유다 가문이 내가 그들에게 내리려 한 모든 재난을 듣고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리니 그리하면 내가 그 악과 죄를 용서하리라 하시니라 _ 예레미야 36:3


이 말씀을 들은 고관들은 일종의 국무회의를 열고 기록자인 바룩을 은밀히 초청해 다시 그 말씀을 낭독하게 한다. 고관들은 그 말씀을 듣고 말씀의 출처인 예레미야와 바룩에게 은닉할 것을 권고한다. 고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들이 이 일로 인해 목숨을 잃지 않을까 염려하여 예레미야와 바룩을 숨기려고 한 것이다.

여호야김 왕은 두루마리의 내용을 듣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펜나이프로 그 두루마리 책을 베어서 화롯불에 던져서 모두 태워 버린다. 과거에 여호야김의 아버지인 요시야는 기원전 622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자신의 옷을 찢고 회개했다. 반면에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은 자신의 옷을 찢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인 두루마리 책을 찢어서 태워 버린다. 의로운 왕과 악한 왕이 극명하게 대조된다. 자신을 찢으면 의로운 왕이고, 상대를 찢으면 악한 왕이다.

고관들의 만류에도 여호야김의 만행은 그치지 않았고, 그는 서기관 바룩과 예언자 예레미야를 체포할 것을 명령한다. 예레미야와 바룩은 하나님이 숨겨 주셔서 직접적인 화를 피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다른 두루마리 책을 준비시키고 다시 말씀을 받아 적게 하셨다.

이에 예레미야가 다른 두루마리를 가져다가 네리야의 아들 서기관 바룩에게 주매 그가 유다의 여호야김 왕이 불사른 책의 모든 말을 예레미야가 전하는 대로 기록하고 그 외에도 그 같은 말을 많이 더하였더라 _ 예레미야 36:32


여호야김이 두루마리 책을 불태운 결과, 개정 증보된 두루마리 책이 다시 탄생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성경의 기원과 형성 과정을 잘 보여 준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로 시작된다. 동시에 하나님의 계시는 사람을 통해 기록된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의 공동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성경의 원초적인 출발은 하나님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으로 간주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영감)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_ 디모데후서 3:16~17


성경의 더 자세한 형성 과정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성서학자들의 다양한 추정만이 가능하다. 성경은 구전 - 기록 - 수집 - 편집 - 개정의 작업을 거쳐서 우리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정확한 형성 과정은 신비의 영역으로 남겨져 있다. 나중에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그때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다.

성경 자체가 갖는 신비와 은혜는?:
성경은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경은 하나님 한 분과 다수의 인간 저자들이 동원되어 완성된 책이다. 이러한 것이 신비요 은혜다. 성경의 저자로 동원된 인원이 적어도 수십 명이 된다. 이들은 다양한 신분을 가졌으며, 출신 지역도 다양하고, 살아온 연대도 다양하고, 그 폭도 넓다. 기록자 중에는 목자, 왕, 법률가, 어부, 농부, 교사, 의사, 세리, 심지어 섬으로 유배된 죄수도 있다. 그들의 출신 지역으로는 로마를 비롯하여 예루살렘,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 터키가 있다.

성경은 모세를 최초의 기록자로 보더라도 기원전 1,500년 혹은 1,300년에서 기원후 100년경에 이르도록 1,600년 혹은 1,400년의 기간 동안 쓰인 책이다. 번역된 언어만도 3,000개에 가까우며, 지난 50년간 판매된 책 중에서 단연 최고의 베스트셀러인데, 무려 39억 권이 팔렸다는 통계도 있다.

성경은 책 중의 책이다. 하나님이 1,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수많은 기록자를 동원해 남긴 계시의 책이 성경이다. 그래서 성경은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인류의 지혜와 인문 교양이 담긴 고전이다. 성경은 세계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입증되었고, 인정받은 책이다. 전 세계 20억 이상의 인구(천주교, 개신교, 러시아 정교회, 그리스 정교회 신자들을 다 합해)가 경전으로 읽는 책이다. 또한 구약성경은 기독교만이 아니라 유대교의 경전이기도 하다. 게다가 구약성경 맨 앞의 다섯 권의 책은 이슬람교의 경전에도 포함된다. 따라서 성경을 알면 전 세계 40억 이상의 인류 문화와 소통할 수 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우주와 인간, 나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을 파악할 수 있다. 나를 향한 창조주의 뜻을 알아야 인생을 값지게 보낼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인생의 나침반’이다. 성경이 보여 주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궁금하지 않은가. ‘인생 사용 설명서’인 성경을 펴 보고 싶지 않은가?



교회와 공동체



교회는 어떻게 생겨났고, 무엇을 지향하는 곳인가요?


교회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다. 이 용어는 성경에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처음 언급되었다. ‘에클레시아’는 원래 로마 시대에 정치적 또는 종교적 목적으로 일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모이는 모임을 가리킨다. ‘에클레시아’는 ‘밖으로’를 뜻하는 ‘에크’와 ‘부르다’를 뜻하는 ‘칼레오’가 합쳐진 용어로, ‘에클레시아’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불려 나온 사람들이고 그들의 공동체다. 한마디로 ‘에클레시아’는 ‘불려 나온 사람들의 모임’이다. 따라서 교회는 예배당이 아니라 예배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_ 마태복음 18:20


역사적으로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 생겨났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공동체를 형성했고, 그 공동체가 성령의 오심과 함께 교회가 되었다. 성경에 교회를 소개하는 여러 개념이 나오지만, 그중 가장 중요하고 흥미로운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_ 고린도전서 12:26~27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교회에 속한 교인들이 모두 하나라는 것이고, 하나 된 교회가 삶을 나누는 공동체임을 보여 준다. 공동체란 말 그대로 ‘공통의 몸’을 가진 ‘하나의 지체’라는 뜻이다. 교회는 한 몸이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고, 우리는 모두 그 머리에 붙어 있는 한 지체이다.

오직 사랑 안에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_ 에베소서 4:15~16


교회가 한 몸이고, 우리의 몸이 교회라면, 우리 몸에서 지금 가장 중요한 곳은 어딜까? 심장일까? 뇌일까? 심장이나 뇌가 아니다.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지금 아픈 곳’이다. 가정 안에서도 아픈 사람이 중심이다.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대통령, 장관, 기업 총수, 목사가 국가의 중심이 아니다. 지금 아픈 사람,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중심이다. 교회에서도 가장 중요한 대상은 지금 아픈 사람이다. 지금 눈물 흘리는 사람이다. 그래서 공동체로서 교회는 특히 약자에게 민감해야 한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최후 심판의 비유에 따르면, 약자에 대한 연대와 섬김이 영벌과 영생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_ 마태복음 25:40


기원후 1세기 초대교회는 세상이 규정하는 가치관을 거스르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가져온 새로운 창조로서 세상을 마주했던 공동체였다. 당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 시대에 일반적이고 정상적으로 여겼던 삶의 방식마저 뒤엎는 특별한 존재로 살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_ 갈라디아서 2:20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_ 고린도후서 5:17


그러나 교회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완전히 거룩하게 된 의인이 아니다. 루터의 표현을 빌리면, 교인들은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인 모순 속의 존재들이다. 그 모순이 극복될 때인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믿음 속에서 삶의 부조리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인내하는 법을 배우는 곳이 교회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부합하는 존재 방식을 끊임없이 추구하면서 지상의 체제와 사회에 대한 강력한 대안적 공동체, 즉 대조사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현실의 삶에서 여러 부족함과 거듭된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자기의 과제로 삼고,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부분적으로 미리 맛보는 곳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완성된 기관이 아니다. 교회는 완성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되어 가는 존재(Being in becoming)’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 이념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믿고, 이를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실천해 가는 공동체다. 동시에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미리 경험하고 맛보는 곳이다.



신약 성경 인물 다시 보기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재물을 나누고 따르라 하시는데, 돈을 많이 벌고 싶은 것은 잘못일까요?
영생을 묻는 부자 청년에 관한 내용은 마태복음 19:16~30, 마가복음 10:17~31 그리고 누가복음 18:18~30에 나온다. 오늘은 마태복음의 내용에 주목한다.

모든 신앙인이 모든 소유를 포기하라고?:
예수님은 영생을 묻는 청년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라고 명령하신다. 만일 집과 소유물을 다 포기하고 예수를 따라야 한다면, 예수를 믿고 따르는 우리는 어쩌면 예수 믿는 것 자체를 심각하게 고민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예수님이 모든 것을 다 “나누어 주고 자신을 따르라”라고 말씀하신 경우는 많지 않다. 이 말씀을 하신 경우는, 1) 열두 제자처럼 다른 것에 매이지 않고 항상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같이 일하기를 바라는 경우나, 2) 이 젊은이처럼 그의 소유가 우상이 되어 버린 경우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신 “소명 이야기”(나를 따르라)로 읽어야 한다. 우리 같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명령은 아니다. “휴, 다행이지요.”

재물이냐 하나님이냐: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21절)라고 명령하신다. 이 명령은 이 청년의 율법적 과신을 무너뜨리기 위한 전략으로 주어진 것이다. 청년은 하나님의 계명을 모두 지키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18-20절). 하지만 그는 이미 ‘재물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그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여 가니라 _ 마 19:22




이 청년은 영생을 얻는 것보다 재물을 소유하는 일에 더 집착했다. 이 이야기에서 ‘영생’은 ‘생명’과 동의어이고(7절), ‘구원’과도 동의어로 쓰인다(25절). 이 청년은 짧은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만 필요한 ‘재물’ 때문에, 영원한 세상에서 매우 중요한 ‘영생과 생명과 구원’을 놓치고 있다. “무엇이 중헌디??”이미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과 재물은 겸하여 섬길 수 없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_ 마태복음 6:24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여전히 많은 재물에 묶여 있는 것은 실제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물에 묶인 사람’은 ‘하나님과는 풀려진 사람’, 즉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이다.

하늘 통장: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 즉 이웃을 돕는 구제는 하늘에 보화를 쌓아 두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전에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이 있느니라(마 6:20~21)”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유대교에서는 사람은 하늘에 통장을 가지고 있으며, 그 통장의 잔고가 최후 심판 때에 그에게 지불될 것이라고 가르쳤다. 하늘의 통장에 많이 저축해 잔고가 많은 사람이 결국 더 많이 받게 된다는 것이다.

세상에 둔 마음과 하늘에 둔 마음: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 여기서 마음은 인간의 중심으로 인간 전체를 의미한다. 이 말씀은 마음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매여 있어야 함을 말한다. 사람의 마음이 세상 재물에 매여 있으면 그것은 우상 숭배이다. 세상에 재물을 쌓는 행위는 우상 숭배이고 영원한 생명을 죽이는 일이다. 마음을 세상 땅에 두고 사는 자와 마음을 하늘에 두고 사는 자가 대조된다.

돈에 매이면 천국도 구원도 없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충격적인 선언이다.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_ 마태복음 19:23~24


이 말씀은 당시의 보편적인 사고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다. 당시에 부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요,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 가운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쉬운 사람은 당연히 부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러한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엎고 있다. 여기서 낙타는 당시의 팔레스타인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동물이었고, 바늘귀는 당시에 볼 수 있는 가장 작은 구멍이었다. 이 표현은 일종의 과장법이지만, 본래의 의미는 분명하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일은 전혀 없을 것이라는 단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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