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챙김
킴벌리 D. 무어 지음 | 아이템하우스
말씀 챙김
킴벌리 D. 무어 지음
아이템하우스 / 2021년 3월 / 288쪽 / 15,000원
제1주 하나님께 능하지 못한 일은 없습니다오늘은 누군가의 위로자인 당신에게 도리어 위로와 격려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온 힘을 다해 주위 사람의 어려움을 돌아보고 도움을 베푸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잊지 않고 돌보고 계십니다. 당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마음의 소원과 근심까지도 기억하고 계시죠.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8장 14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너무나 당연하게도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란 없습니다. 더욱이 그 여호와는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엡 3:20)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못 하실 일은 찾을 수도, 구할 수도 없습니다.
사라와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2:2-3). 당시 아브라함은 그 언약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와 사라에게는 자녀가 없는데다가, 둘 사이에 자녀가 생기기에는 자신들이 나이가 많아 늙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당시 아브라함은 백 세, 사라가 구십 세였기 때문에 불가능해 보이기만 했죠.
창세기 16장에는 아직 자녀가 없던 시절의 사라가 등장합니다. 사라는 후사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보고자, 남편 아브라함에게 자기 여종인 하갈을 첩으로 삼도록 종용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과 여종 하갈 사이에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이 태어났죠.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허용하셨지만, 결코 명령하신 적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언약을 우리 스스로 성급히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최초로 언약을 맺으신 창세기 12장 사건 이후로 어느덧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는 그 어떤 약속의 징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조짐도 없이 오랜 세월을 기다려 왔지만, 불가능한 상황이 여전히 가능하다고 말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나요? 이런 때 의심에 굴복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아야 합니다. 저 역시 굳은 결심을 무너뜨리고, 무력감과 정체감에 빠트리는 의심의 위력을 혹독하게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의심은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당신이 직접 삶을 통제하도록 부추깁니다. 그러나 의심의 자리를 ‘믿음’으로 바꿀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이끄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한없이 막막할 때, 회의감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말씀 가운데 드러난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의심이 믿음으로 바뀌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깨닫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충만히 받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은 결코 없다는 진리를 믿어야 합니다.
제3주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하심 가운데 있습니다
출애굽기 2장에는 모세의 출생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당시 애굽 왕 바로는 모든 백성에게 이스라엘 자손 중에 아들이 태어나거든 나일강에 던져 죽이라는 아주 무시무시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들을 낳은 여느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모세의 어머니도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보자기에 싸서, 역청과 나뭇진을 칠한 갈대 상자에 담아 나일강 강가의 갈대숲 사이에 두었습니다. 그날, 때마침 바로의 딸이 나일강에 목욕하러 나왔다가 갈대숲 사이에 있는 상자를 발견했습니다. 바로의 딸은 우는 아기를 보며 불쌍한 마음이 들었고, 히브리 사람의 아기가 분명하다고 생각했죠. 이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모세의 누이 미리암은 곧장 바로의 딸에게 나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이 ‘정체불명의’ 아기에게 젖을 먹일 히브리 유모, 말하자면 모세의 어머니를 데려오겠다고 자처했습니다. 바로의 딸은 이를 좋게 여겼습니다.
이제 모세의 어머니는 놀랍게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아들을 강물에 띄워 보내는 일은 어머니에게 가슴 찢어지는 슬픔이었지만,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모세의 삶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고 그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호하셨죠. 적재적소에 필요한 사람들을 두고. 이 일을 위해 그들을 직접 움직이고 인도하셨습니다. 떠나보냈던 아기가 발견되어 다시 친어머니 품으로 돌아올 거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물에서 건져진 이 아기 모세가 자라서 갈라진 홍해를 지나 수많은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해 낼 거라고, 어느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에 목적을 갖고 계실 때는 예측 불가하며, 예상 밖의 일도 한 치의 오차 없이 이루어집니다. 모든 상황과 사람을 친히 협력하게 하시어, 결국 그 목적을 완수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엄마든 교사든, 혹은 간호사든 사회 복지사든 하나님께서 당신을 뜻하신 곳에 두어 누군가의 목적을 성취하는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당신의 친절한 말 한마디 혹은 애정 어린 충고, 심지어 심한 비판의 말조차도 누군가의 삶을 선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타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세요. 절대로 자기 자신을 무가치하다고 여기거나, 당신이 마땅히 해야 할 조언이나 충고가 사소한 것이라고 무심히 넘겨짚지 마세요. 모든 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계획하심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제5주 당신의 능력은 누군가에게 꼭 필요합니다당신이 가진 달란트와 은사를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해 본 적이 있나요? 다른 사람이 가진 재능과 능력이 당신보다 월등히 뛰어나다고 느껴 본 적이 있나요? 그러나 결국 중요 한 건, 우리는 모두 천차만별하며 실력도 제각각이라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다름을 사용하셔서, 우리가 서로 돕고 채워 주도록 하십니다.
마태복음 3장 13절부터 17절에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요단강으로 나아와 세례 요한을 만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촌인 요한은 그 일대에서 명망이 높은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천국이 가까이 왔다며, 결연하고 단호하게 회개의 말씀을 전파했기 때문이죠. 선지자들의 말씀에 영감을 받은 요한은 자신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오실 거라는 예언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요한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담대히 선포할 수 있었죠.
어느 날,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를 강력히 거부했습니다. 기꺼이, 또 담대하게 주의 길을 준비하는 요한이었지만, 그는 자신을 예수님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한 자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하나님의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라고 말씀하셨죠.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그 누구에게도 세례를 베푸신 적이 없습니다(요 4:1-2). 같은 말씀에 기록되었듯이, 세례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않았습니다(요 10:4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당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각자 맡은 사명을 모두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맡은 사명도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중요합니다. 어쩌면 다른 사람이 가진 은사를 당신은 못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노래를 기막히게 잘 부르거나 악기를 다루지도 못하고, 혹은 아름다운 시를 쓰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의 ‘행함’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타인에게 베푸는 친절이든 아이들을 가르치는 능력이든 말이죠. 오직 당신만이 해낼 수 있는 역할이 있습니다. 당신의 역할이 적으면 그 나머지는 제가 감당하면 되고, 제 역할이 적으면 그 나머지는 당신이 맡으면 됩니다. 어느 쪽이든 우리에게는 서로가 필요합니다. 그러니 부디 당신의 가치와 사명을 하찮게 여기지 마세요. 당신이 가진 은사와 달란트가 그 무엇이든지, 누군가에게는 그 능력이 꼭 필요합니다.
제12주 복과 저주의 갈림길에서우리는 신명기 28장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두 가지 선택권, 즉 복을 받거나 저주를 받는 선택권을 주십니다.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당연히 누구나 복을 받는 쪽을 택할 것입니다. 어느 누가 저주받기를 바랄까요? 그러나 스스로 잠잠히 물어봅시다. ‘나는 복을 받는 자리로 자진하여 나아간 적이 있었던가?’ 라고 말이죠.
하나님의 말씀이 모세에게 임했고, 모세는 이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선포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그 말씀을 청종하면, 모든 복이 너희에게 임할 거라는 약속의 말씀이었죠. 많은 사람이 매주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 중에, 우리는 단 한 가지라도 제대로 지키며 살고 있나요? 그 말씀 가운데 단 하나라도 진정한 생명의 말씀을 붙들고 있나요?
당신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제 삶은 더는 이제 빙 돌아갈 여유가 없습니다. 시간을 허비해서도 안 되고, 더는 실수를 저질러서도 안 됩니다. 정확한 방향을 알고 그곳을 향해 나아가야 하고요. 그러려면 저는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해야 합니다. 당신도 저와 같은 입장일 수 있겠죠. 정확한 방향이 필요합니다. 혼란에 빠지고 싶지 않기에, 구체적인 방향과 행동 지침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치면 안 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복을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분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결코 말씀을 듣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과 들은 대로 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때로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일을 그르칩니다. 말씀을 듣고는 그것으로 끝냅니다. 매주 열심히 말씀은 듣지만, 그 말씀을 좇아 살지는 않습니다. 거기에서 순종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한 적이 있나요? 이제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당신이 선택할 차례죠. 복을 받기를 원하나요? 순종이 허다한 제사보다 낫습니다.
제18주 하나님은 잊지 않으십니다사무엘하 9장에서, 우리는 다윗이 므비보셋, 즉 친절한 친구 요나단의 아들이자 철천지원수인 사울의 손자에게 어떻게 은총을 베푸는지 보게 됩니다. 사울과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유모는 다섯 살 난 므비보셋을 떨어트렸고, 그때 다리를 다친 므비보셋은 평생 절름발이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몸이 불편한 사람은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었고, 인간으로서의 가치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죠. 따라서 므비보셋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평생을 살 수밖에 없었고, 성인되었음에도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인 마길의 집에 얹혀사는 신세였습니다.
사무엘상 20장 14절에서 15절에, 요나단은 다윗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는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내게 베풀어서 나를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몇 년이 지났지만, 다윗은 그 약속을 잊지 않았습니다. 왕궁에 불려 와 두려워하고 있는 므비보셋에게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니”(삼하 9:7).
므비보셋은 항상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8절 말씀에,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라는 대답을 보면 너무나 명백히 알 수 있죠. 어쩌면 므비보셋은 조부인 사울이 저지른 악행 때문에라도, 절대 드러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요나단과 맺은 언약을 지키기 위해, 그에게 은총을 베풀고 싶어 합니다. 므비보셋은 누군가 이런 큰 은혜를 베풀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헤아릴 수도 없는 계획을 세우고 계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행한 일의 옳고 그름에 따라, 당신을 잊거나 기억하는 분이 아닙니다. 모두 하나님의 은총 덕분입니다. 삶이 가시밭길처럼 보일지라도, 그 길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당신인데도 불구하고’ 은혜를 주십니다. 때로는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기도 하시죠.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마음에 간직하십니다. 므비보셋처럼, 당신은 자신을 하찮게 여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은 존귀한 사람입니다. 혹시 복을 받지 못했다고 느껴지나요? 사실 그 복보다, 하나님께는 당신 자체가 더 보배롭고 존귀합니다.
제21주 시험을 이길 수 있나요?성경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시험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와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눅 4:1-2). 1절 말씀에 주목해 보세요.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요단강에서 돌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던 장면을 기억하나요?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이런 소리가 났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 3:22).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이와 같은 확증을 얻자마자, 광야로 보내져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마귀는 기록된 성경 말씀을 인용하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행하도록 유혹했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을 때도, 또 예수님이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 약해져 있을 때도, 마귀는 가리지 않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허기로 주리시자, 마귀는 그 배고픔을 건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마귀는 이와 같이 우리를 시험합니다. 우리가 충만할 때든 곤고할 때든, 어느 때든 마구잡이로 찾아오죠. 당신이 아프거나 과로하거나, 혹은 가정 문제로 부담을 떠안고 있어도, 마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마귀는 그렇게 모든 상황을 틈타서, 마귀의 일을 실행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점차 커질 때, 그 믿음의 시련도 더욱 거세어집니다. 이전에는 받아 본 적 없는 시험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 시험이 결혼 생활에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남편이 직장에서 해고되고 당신 혼자 생활비를 벌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암 진단을 받는 등 건강 문제로 그 시험이 닥칠 수도 있고요. 그러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시험을 혼자서 치르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를 확신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는지 확인해 봐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시험을 이기신 방법이니까요. 마귀가 예수님을 찾아와 유혹할 때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고 답하셨습니다. 에베소서 6장 17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라고 기록되어 있죠. 예수님은 이런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대적해 물리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해야 합니다. 시험을 이기는 가장 큰 무기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이기셨다면, 우리도 말씀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제26주 합력이 최선의 방책입니다하나님은 우리가 분열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미 수많은 가정과 교회가 나누어지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러나 편을 가르고 서로 맞서 싸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레위기 26장 8절 말씀에, ”또 너희 다섯이 백을 쫓고 너희 백이 만을 쫓으리니 너희 대적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위기의 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려면, 우리는 합심하고 협력해야 합니다. 서로를 향해 공격을 퍼붓는 대신, 우리 영혼의 대적에 저항할 힘을 모아야 하는 것이죠. 우리는 서로 합력할 때, 최선을 이루어 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