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은 악이 아니라 약이다
조봉희 지음 | 교회성장연구소
고난은 악이 아니라 약이다
조봉희 지음
교회성장연구소 / 2020년 12월 / 300쪽 / 13,000원
고난(苦難)
Q. 질병으로 고통당할 때 - 질고를 져 주시는 예수님(이사야 53:1-6)인류의 역사는 질병의 역사이자, 질병의 극복과 좌절의 역사이다. 이 표현이 참 서글프지만 사실이다. 지금까지 그 어떤 질병도 완치로 종식되지 않았다. 전 세계를 초긴장시키는 전염병은 거의 4-5년 단위로 반복되고 있다. 조류인플루엔자, 사스, 에볼라, 메르스, 그리고 이번에 발생한 신종코로나바이러스까지. 앞으로 또 어떤 바이러스가 등장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그동안의 역사를 보면, 놀랍게도 전쟁으로 죽은 사람보다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최근 미국에서는 원인 모를 독감으로 8천 명 이상이 사망했다. 한 가지 치명적인 병이 그 위력을 잃으면 또 다른 질병이 등장한다. 특히 선진국에서 발생한 질병은 개발도상국으로 쫓겨나고, 거기서 비극을 되풀이한다. 그 대신 문명국에서는 전혀 다른 질병군에 해당하는 심장병, 각종 암, 환경 병, 정신병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 간다. 거기다가 질병은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 그치지 않고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동반한다. 국가가 망하기도 한다. 그래서 전쟁과 빈곤과 질병은 인간이 짊어진 세 가지 원죄라고 말한다.
오직 십자가의 은총만이 우리를 살린다: 이사야서 53장은 예수님의 치유 은총 메시지이다. 53장 말씀 그대로 예수님은 인간의 질고를 해결해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분은 인간의 죄로 인해 발생한 모든 고난과 불행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시려고 우리를 대신하여 죗값을 치르셨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이고, 십자가의 은혜이다. 성경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가 가져다준 고난을 대신 짊어지셨음을 이사야의 말을 통해 선포한다. 그가 우리의 아픔을 당하셨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마8:17, 메시지성경)
그런데 예수님은 단순히 육체의 질병만 고쳐 주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전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마음에 고통이 있는 사람들을 고통으로부터 건져내 주시고, 그 아픔을 싸매 주신다. ‘치유’의 축복은 십자가 구원의 중요한 부분이다. 십자가는 모든 것을 치유한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육체적인 질병과 영적인 상처, 그 외 온갖 문제와 고통들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예수님은 이 고통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다. 우리의 잘못, 우리의 허물, 우리의 죗값, 내면의 아픔과 상처, 영혼의 고통, 슬픔까지도 예수님이 다 담당해 주신다.
다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최근 들어 인간은 너무나 교만해졌다. 21세기에 들어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이름 아래 하나님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상대주의로 흐르다가, 요즘은 각자가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고 있다. 인간 개개인이 모두 신이 되어 버렸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 하나에 맥을 못 추는 존재면서, 인간은 여전히 기고만장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야 한다. 하나님 앞에 나와 엎드려 회개하고, 오직 십자가 은총만 붙잡아야 한다. 오직 예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해야 한다. 나도 질병의 치유를 위해 다섯 가지 제목으로 간구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 둘째, 교회 부흥의 방편으로 써 주소서. 셋째, 교우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심어 주며, 희망 모드가 되게 하소서. 넷째, 가족들에게 행복을 안겨 주게 하소서. 다섯째, 사명을 다하게 하소서. 병들었는가? 십자가 보혈의 능력을 주장하라. 두려움에 빠져 있는가? 십자가 보혈의 은총을 선포하라.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승리하며 살아가기를 축원한다.
Q. 자신감이 떨어질 때 - 당신 안에 있는 예수님의 부활 능력(고린도전서 15:1-8)나는 우리가 민들레 같은 생명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부활의 능력을 불어넣어 주셨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리 짓밟혀도 다시 살아나고 회복하는 하늘의 능력을 지닌 자들이다.
예수님의 부활 능력은 강력한 힘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 4절에서 설명하듯이 부활은 이 세상의 어두움과 절망과 죽음을 몰아내는 능력의 상징이다. 따라서 그 능력은 돌무덤 속에 갇힌 예수님의 죽음 상태에서도 복원력을 상실하지 않는다. 바로 이 복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복원된다. 예수님의 부활 능력은 좌절과 체념의 상태에서도 다시 일어나게 하는 강력한 힘이기 때문이다. 혹시 지금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가? 확실한 것은, 이 세상에서 치료를 받게 되거나 천국에서 치료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병으로 아파 죽게 되더라도 우리에게는 확실한 희망이 있다. 약한 몸으로 고통스럽게 죽을 수는 있지만 더 이상 아프지 않은 몸으로 회복될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 능력은, 어떤 역경도 극복할 수 있고, 어떤 시련도 이길 수 있는 강력한 힘이다. 성경은 그 부활의 능력을 내 것으로 만들며 살아가라고 이야기한다. 그 부활의 능력이 우리를 승리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Q. 낙심이 지속될 때 - 연전연패에서 연패연전(連敗連戰)신앙으로(잠24:16)19세기 초 중국 청나라는 아편전쟁의 후유증으로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다. 반란군의 세력이 하루가 다르게 커져 황제가 보낸 토벌군은 연전연패(連戰連敗)하였다. 토벌군은 계속 밀리고, 광저우에서 시작한 반란군이 남경까지 장악했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황제는 유능한 관료인 ‘증국번’이라는 장구를 토벌군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그 역시 반란군을 물리치지 못하고 계속 패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황제는 군대 지휘관을 교체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에게서 이런 제목의 편지가 왔기 때문이다. “연패연전”(連敗連戰). 곧, ‘계속 지고 있지만 계속 싸우고 있습니다’는 집념과 투혼의 보고서였다. 지금까지의 모든 장수가 보낸 ‘연전연패’, 곧 ‘계속 싸우고 있지만 계속 패배하고 있다’는 좌절에 가득 찬 보고서와는 매우 상반된 것이었다. 황제는 증원군을 더 보냈고, 결국 승리로 이끌어 주었다. 의로운 사람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지만, 악인은 단 한 번의 재앙으로도 쓰러지고 만다.(잠24:16, 현대인의 성경)
믿음의 사람은 다시 도전한다: 성공하는 사람은 IQ가 높은 것이 아니라, 역경지수(Adversity Quotient)가 탁월하다. 축구선수로는 최악의 조건인 평발로 타고난 박지성 선수가 2002년 월드컵 축구 경기 때 병원으로 진료를 받으러 갔다. 그를 알아보지 못한 의사는 그의 발을 보면서 이렇게 진단을 내렸다. “당신은 평발이라 달리기를 할 수 없습니다.” 함께 갔던 친구가 지금 진찰받고 있는 사람이 국가대표 팀에서 가장 많이 뛰는 박지성 선수라고 말하자 의사는 박지성을 “장애를 극복한 승리자”라고 표현한다. 그야말로 역경을 경력으로 반전시킨 인간 승리자이다. 사람은 결국 시련과 역경을 통해서 더욱 사람다워 가는 것이다. 여러 가지 상처가 있는가? 아픔을 겪고 있는가? 하나님이 나를 사람다운 작품으로 빚어 가시는 중이라고 믿기를 바란다. 이것이 승리이다.
티베트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바구니에 넣어 둔다고 한다. 그리고 아이가 울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주지 않고 방치해 두다가 아이가 울기 시작하면 비로소 아이의 탄생을 인정한단다. 지정학적으로 공기가 희박한 고원지대 티베트에서는 울게 내버려 두어야 폐를 발달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역설의 신앙이다. 없는 것도 있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약한 것이 강함이라고 말한다. 죽어야 산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성공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자세와도 통한다. 그들은 회복력이 강하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열정뿐만 아니라, 끈기도 대단하다. 그들은 포기에 익숙하지 않고, 끈기에 익숙하다. 예수님은 어떤 고난과 역경에서도 우리를 다시 일으키시는 분이다. 부활의 능력으로 넘어진 우리를 일으켜 주신다. 그 부활 은총을 날마다 경험하며 살아가기를 축원한다.
악(惡)
Q.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을 때 - 주여, 사랑으로 보듬어 주소서(출2:23-25, 행7:34) 사랑의 하나님은 나의 사정을 보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 중에 있음을 다 보고 계신다. 우리의 괴로움을 보고 계신다. 내 백성이 세상에서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행7:34) 감동적이지 않은가?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다 보고 계신다. 나의 모든 사정을 보고 계신다. 성경을 읽어 보면 예수님은 어디를 가시든지 괴로움 중에 있는 사람들을 안쓰럽게 바라보신다. 공생애 기간에 예수님이 얼마나 바쁘게 사셨는가? 길지 않은 시간에 인류 구원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여기저기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지 않으셨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리 바쁘더라도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 아픔 가운데 있는 사람, 병들어 있는 사람, 큰 슬픔을 당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가지 않으셨다. 세상은 약한 자를 무시하고 억압하지만 주님은 그 반대이다. 나에게 약한 부분이 있을수록, 자녀에게 모자란 부분이 있을수록 주님은 귀히 여기신다.
사랑의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러 오신다: 하나님은 항상 역동적이시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당면하고 있는 괴로움을 보시고, 신음하며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리고 우리를 돕기 위해 찾아오신다. 우리는 지금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불안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언제 어디에서 기승을 부릴지 전혀 알 수 없다.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보듬어 주신다는 사실이다. 미래를 걱정하고 있는 당신에게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내가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Q. 삶의 많은 것을 빼앗긴 것처럼 느껴질 때 - 빼는 만큼 곱해 주시는 은혜(창13:1-18) 어떤 운동이든 힘을 빼야 동작이 자연스러워진다. 골프를 칠 때도 힘을 빼야 공을 반듯하게 멀리 보낼 수 있다. 사막을 여행하는 자동차가 모래 웅덩이에 빠졌을 때 어떻게 해야 빠져나올 수 있는지 아는가? 바퀴가 모래 속에 빠진 상태에서 가속페달을 밟으며 속도를 높이면 차는 더욱더 모래 늪으로빠져들어 간다. 이때는 오히려 타이어의 바람을 빼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빼야 할 것이 힘뿐만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인생의 거품인 허세나 자만심, 교만과 고집을 빼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속 더해 주시는 것만을 복으로 여길 때가 많다. 하지만 뭔가를 빼 주시는 것도 아주 중요한 복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은 것들을 빼 주시는 것이야말로 큰 은혜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더 좋은 것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불필요한 것들을 빼내야 한다. 우리가 빼는 만큼 하나님은 승법공식으로 은혜와 축복을 곱해 주신다.
하나님은 더 많이 채워 주신다: 창세기 13장의 시작과 결론은 매우 대칭적이다. 아브라함은 잠시 믿음이 약해져서 이집트로 내려갔었다(12장). 신앙으로 살아야 할 사람의 영적 가치관이 흐려진 것이다.결국 이집트에서 큰 위기를 겪고, 그곳에서 나온다. 그래서 13장 1절에서는 그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하는 장소로 “올라갔다”고 표현한다.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기로 마음을 다잡고 다시 예배생활을 시작한다(4절). 그의 신앙적 결단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비록 조카 롯이 비옥한 땅을 몽땅 다 가져 갔어도 그는 요동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의연하게 예배를 드렸다(18절). 이처럼 창세기 13장은 예배로 시작하고 예배로 마감한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영성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더욱 번창하는 곱셈의 복을 주신다. 이것이 신앙으로 사는 사람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드라마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드라마에 동원되는 주역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계산으로 살 것이 아니라, 계산을 초월하는 신앙으로 살아야 한다. 이것이 곧 롯의 경제학과 하나님의 경제학의 차이점이다. 롯은 땅의 일부를 차지했으나 아브라함은 온 땅을 약속 받는다. 롯은 세상의 벗이 되어 갔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직접 챙겨 주신다. 결국 롯은 모든 것을 잃게 되고,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차지하게 된다.
Q. 질병과 아픔으로 고통당할 때 - 칼을 다시 칼집에 꽂으시는 긍휼(역상21:1-22:1)최근에 재미있는 글을 읽었다. 내용의 일부를 잠시 소개하자면,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못하는 것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과식하는 사람의 위장, 과로하는 사람의 건강, 과욕을 품는 사람의 재산이다. 곧 ‘과식, 과로, 과욕’의 결과들이다. 요즘 전 인류를 힘들게 하는 환경오염, 지구온난화, 질병의 문제는 모두 인간의 욕심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기억하며 수용해야 할 것은 ‘모든 일은 자업자득’이라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재앙이 천재가 아닌 인재이다.
그리고 천사에게 칼은 다시 칼집에 꽂으라고 명령하셨다(역상21:27절, 현대어성경) 하나님의 본성은 사랑이다. 그 사랑은 ‘은혜’와 ‘긍휼’이라는 두 가지 핵심을 담고 있다. 이러한 본성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향한 진노를 긍휼로 바꾸어 주신다. 분노를 사랑으로, 심판을 자비로, 처벌을 치유로 전환시켜 주신다. 특히 하나님은 인간의 질병과 고난을 불쌍히 여기신다. 따라서 인생의 어려움을 푸는 답은 주님의 긍휼에 있다. 이를 증명하듯 성경에서는 ‘긍휼’이라는 단어를 500번 이상 반복하고 있다.
사탄은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지만, 성령님은 회개하게 하신다: 사탄은 다윗에게 “당신 정말 대단해. 당신은 제왕이니 인구를 조사해 봐! 네가 얼마나 큰 업적을 이룬 대단한 인물인지 보여 줘야지”라고 속삭였을 것이다. 본문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매우 실제적인 가르침을 준다. 첫째, 사탄은 사람의 마음을 교만하게 한다. 다윗은 자신이 왕으로 있는 나라가 얼마나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이 사탄의 충동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의 영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늘 긴장하며 내면을 잘 관리해야 한다. 둘째, 사탄은 사람의 마음을 고집스럽게 한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강행하려고 하자 요압은 인구조사를 하지 말라고 간곡히 호소하나 다윗은 완강했다. 기질적으로 고집이 셀 수도 있지만, 사탄의 속임수로 고집이 세어질 수도 있다. 영적 분별력을 길러야 한다. 잘되고 있을수록 더욱 조심해야한다. 셋째, 성령님은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신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첫 번째 단계가 죄를 깨닫게 하시는 일이다. 영을 밝게 하셔서 내 안의 잘못을 보게 하신다. 다윗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된 것도 성령님의 감동 때문이다. 다윗의 훌륭한 점이 여기 있다. 그는 잘 깨닫는 자이다. 그리고 깨달았을 때 곧바로 죄를 고백하고 회개한다. 이것이 성령의 사람의 특징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하는 곳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심판을 멈추게 하는 곳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에 대한 심판의 칼을 다시 칼집에 꽂게 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하는 모체여야 한다. 영어 성경의 표현처럼, ‘Mercy seat’, 곧 시은소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긍휼을 하늘에서 땅으로 끌어오는 역할이다.
코로나가 중국 선교에 새로운 변곡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지금 중국 교회의 상황은 이렇다. 중국기독교위원회 부주석 왕준은 2014년도 발표에서 “과거에는 ‘기독교인이 많아지면 중국인이 적어진다’는 인식이 팽배했지만, 지금은 ‘기독교인이 많아지면 좋은 공민이 많아진다’는 인식으로 변화되고 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중국 기독교가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중국은 현재 기독교 부흥을 이루어 가고 있다. 국민의 약 7%가 그리스도인이다. 이번 코로나 재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새로운 선교시대를 열어 가실 줄 믿는다.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진노의 칼을 다시 칼집에 꽂으시는 광대한 사랑과 긍휼로 이 세상을 치료하시며 구원하고 계신다. 그 긍휼의 역사 속에서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이 하실 일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