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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역사 설화

안소근 지음 | 가톨릭출판사


구약의 역사 설화

안소근 지음

가톨릭출판사 / 2020년 7월 / 223쪽 / 14,000원



| 룻기 | 삶의 쓰라림 속에서도




모압


낯선 사람. 룻은 아주 낯선 사람입니다. 모압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에서 “암몬족과 모압족은 주님의 회중에 들 수 없고 그들의 자손들은 십대손까지도 결코 주님의 회중에 들 수 없다.”(신명 23,4)라고 할 만큼 이스라엘은 모압을 멀리했습니다. 왜 하필 그런 인물을 이 책의 주인공으로 삼았을까요? 더구나 룻기 마지막에 실려 있는 족보에 따르면 룻의 아들이 오벳, 오벳의 아들이 이사이, 이사이의 아들이 다윗입니다. 모압 여자인 룻이 이스라엘의 족보에서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다윗시대?: 어떤 이들은 룻기가 아주 오래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룻기가 “이사이는 다윗을 낳았다.”(4,22)라는 말로 끝나는 데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저자가 룻기를 쓴 목적이 이스라엘 임금인 다윗의 조상 가운데 모압 여자가 있다는 것에 대한 비판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봅니다. 말하자면, 룻이 비록 이방인이었어도 얼마나 훌륭한 인물이었는지 보여 줌으로써 다윗을 옹호한다는 해석입니다. 그런 목적으로 룻기를 썼다면, 이 책을 쓴 것은 아직 다윗 왕조의 권위가 확립되지 않았던 기원전 10~8세기여야 합니다. 근래에는 룻기가 다윗시대에 작성되었다고 보는 이들의 거의 없습니다.

아무 시대라도 상관없다?: 룻기의 경우 많은 이들이 지지하는 것은 에즈라 ? 느헤미야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해석입니다. 룻기가 던지는 도전의 내용을 보면 언제 누구에게 도전을 했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모압 여자 룻은 자신을 배척하는 이들에게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그 길이 무엇인지는 아직 다루지 않았습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해석들도 기억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 해석들에서 모두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 말씀의 풍요로움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작품


다윗의 족보?: 다윗의 실제 족보에는 룻이 들어 있었을까요? 일단, 제가 검색을 해 보았는데 구약 성경에서 룻이라는 이름은 룻기에만 등장합니다. 룻기의 저자는 자신이 주장하는 바가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이 이야기의 마지막을 다윗의 족보로 끝나게 하면서 룻을 다윗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룻기의 등장인물 가운데 구약 성경의 다른 부분에 언급된 사람은 보아즈뿐입니다(1역대2,11,12). 더구나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상징적인 이름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오미는 ‘나의 감미로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은 ‘나의 하느님은 임금’, 나오미의 아들 마흘론은 ‘질병’, 킬욘은 ‘허약함’을 뜻하고, 며느리 오르파는 ‘목덜미’를 뜻합니다. 룻이라는 이름의 뜻은 분명치 않은데, ‘원기 회복’을 뜻하는 듯합니다. 이것이 실제 인물들의 이름일까요? 또한 룻기에서, 객관적으로 말해서 너무나 가능성이 적은 우연한 사건들이 일어난다는 것도 룻기가 실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방증합니다. 결론적으로, 룻 이야기는 역사 기록이 아니라 저자가 만든 이야기입니다. 저자가 이 이야기를 다윗의 족보로 끝나게 한 것은 그가 다윗의 권위에 의지하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오미 - 마라(룻1장)


나오미 - 마라: 나오미의 남편과 두 아들이 죽었고 생명을 유지할 양식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타향살이 끝에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나오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셔요.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너무나 쓰라리게 하신 까닭이랍니다.” 나오미는 ‘나의 감미로움’이고 마라는 ‘쓰라린 여자’를 뜻합니다. 나오미의 삶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습니다. 그런 나오미에게 하느님은 나를 치시는 분, 나에게 불행을 안겨 주는 분이십니다.

오르파: 나오미에게는 두 며느리가 있습니다. 유다인인 마흘론과 킬욘이 모압 여자들과 결혼했다는 것은 이미 율법에 어긋납니다. 며느리들의 이름은 오르파와 룻입니다. 그 이름들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지만, ‘오르파’라는 이름은 ‘목덜미’와 연관되어 시어머니에게 등을 돌리고 떠나간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오르파는 나오미의 말을 따라 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룻기는 오르파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르파의 선택을 당연하고 정당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룻: ‘룻’이라는 이름은 더 어렵습니다. 과거에는 ‘친구’라는 의미로 여겨졌지만, 근래에는 ‘충족시키다, 만족시키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것으로 봅니다. 그런 이름을 지닌 룻은 나오미 곁에 남기를 선택합니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고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렵니다.”(룻1,16) 룻의 이러한 행동을 가리켜 보아즈는 ‘효성’(3,10)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효성’으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헤셋’입니다.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이지요. 룻기 안에서도 3,10 외에는 ‘자애’로 번역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오미의 삶 안으로 들어온 이 낯선 사람을 통하여 나오미를 돌보십니다. 나오미는 이 하느님의 손길을 알아보았을까요? 나오미는 자신이 며느리의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고, 이 낯선 사람을 돌려보내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 낯선 사람과 함께 머물 때 그 낯선 사람은 나오미에게 하느님의 손길이 될 것입니다.

보아즈(룻2장)


호의: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룻은 추수하고 남은 이삭을 주우러 가겠다고 말합니다. 본래 구약의 율법에서는 수확할 때에 떨어진 이삭이나 포도 등은 “가난한 이와 이방인”을 위하여 남겨두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방인’은 그 지방에 자기 땅을 소유하고 있지 않아 남의 땅에 몸을 붙이고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상종하지 말아야 할 인간인 모압 여자 룻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가장도 없고 주민등록도 없고 의료 보험도 없고, 오늘날의 불법 체류 이주 노동자 같은 처지입니다. 나중에 보아즈가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고 물을 마시라고 할 때에도 룻은 “저는 이방인인데,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시고 생각해 주시니 어찌 된 영문입니까?”(2,10)라고 말합니다.

자애: 보아즈의 축복, 그리고 이어서 실현되는 하느님의 자애. 그것은 과연 하느님의 자애일까요, 보아즈의 자애일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자애는 눈에 보이는 인간의 자애를 통하여 구체화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룻을 율법에서 정해진 것 이상의 배려로, 룻이 기대할 수 없는 호의를 베풀어 보호해 준 보아즈의 호의는 글자 그대로 룻과 나오미가 ‘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세상살이가 그런 모양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살 수 있게 해주고, 다른 누군가가 또 나를 살 수 있게 해줍니다. 룻을 그 자리에 있게 하시고 보아즈를 그 자리에 있게 하시는 것이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룻(룻3장)



구원자: 이삭을 주우러 갔던 룻이 나오미에게 돌아와 보아즈의 밭에서 호의를 입었다는 것을 전했을 때 나오미는, “그분은 우리 일가로서 우리 구원자 가운데 한 분이시란다.”(2,20)라고 말했었지요. 여기서 ‘구원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고엘’은 한 가정의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서 그 가정의 가족들을 보호할 의무를 지닌 사람을 가리킵니다. 빚 때문에 가족이 종으로 팔려 갔으면 그를 속량하고, 집안에 속한 땅이 다른 집안에 넘어가게 될 경우에는 그것을 다시 사들여 집안의 재산을 지켜 주어야 하고, 친족이 살해되었을 때에는 피의 복수까지도 하는 것이 구원자의 역할입니다. 룻은 보아즈에게 그 고엘 역할을 해 주기를 청합니다.

주님의 날개: 주님의 날개(히브리어 ‘카나프’) 아래로 피신한 룻에게, 보아즈는 자신의 옷자락(카나프)을 덮어 줍니다. 다시 한번 그는 하느님 ‘헤셋’의 도구가 되어, 한철의 양식을 마련해주는 것만이 아니라 후손을 마련해 주는 것을 통하여 나오미와 룻의 삶을 가능하게 해 줍니다. 룻의 도전장은 예수님의 도전장과 닮았습니다. “안식일에……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3,4)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은 이들의 완고함을 몹시 슬퍼하십니다(마르3,5). 율법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다윗(룻4장)


축복: 온 백성과 원로들은 롯을 축복하여, 하느님께서 룻을 “둘이서 함께 이스라엘 집안을 세운 라헬과 레아처럼 되게 해주시기를”(4,11) 기원합니다. 엄청난 일입니다. 모압 여자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어머니에 비견됩니다. 이것은 룻의 ‘헤셋’이 가져온 결과였습니다. 오르파와 같이 모압의 친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시어머니 곁에 남기를 선택했던 룻의 헤셋,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하려 하지 않고 엘리멜렉 집안을 위하여 고엘인 보아즈를 찾아간 헤셋, 그리고 이에 응답한 보아즈의 헤셋, 율법의 정신을 지키기 위하여 규정된 의무를 넘어서는 룻과 보아즈의 율법 해석. 이것이 모압 여자를 다윗의 조상이 되게 합니다.

다윗: 룻이 낳은 오벳이 “다윗의 아버지인 아사이의 아버지”(4,17)라는 점은 특별히 주목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족보가 없었더라면 룻과 보아즈의 이야기는 한 평범한 집안의 따뜻한 사랑 이야기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이는 다윗을 낳았다.”(4,22)라는 마지막 말은 룻기 전체를 새로운 차원으로 올려놓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지니는 전무후무한 의미 때문입니다.

보아즈는 룻이 모압 여자라고 해서 내치지 않고, 또 자신이 행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법률 규정의 본 정신을 따라, 그 규정의 의도를 온전하게 살아 내기 위하여 땅을 상속받을 아들을 낳아 주기까지 합니다. 서로를 지켜 주는 가족을 통하여 하느님의 축복이 표현되고, 죽음, 굶주림, 자녀 없음으로 그늘져있던 나오미가 생명, 풍요로움, 후손, 충만함을 되찾을 수 있게 됩니다.



| 토빗기 | 낯선 땅에서도




타향살이


언제?: 토빗기에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법령”, “모세의 책에 있는 규정”, “율법”을 말합니다(6,13;7,11-13). 또한 토빗 14,4에서는 “나훔이 니네베를 두고 선포한 하느님의 말씀을 나는 믿는다.”라고 말합니다. 작성연대는 보통 기원전 225~175년이라고 생각합니다. 토빗기가 제2경전에 속하고 유다인들이 이 책을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도 이 책의 작성 연대가 늦은 편이라고 추정하는 이유가 되지만, 쿰란에서는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로 된 토빗기의 단편도 발견되었습니다.

토빗의 이야기: ‘토비엘’은 ‘하느님은 나의 선’, ‘하난엘’은 ‘하느님이 은혜를 베푸셨다’, ‘가바엘’은 ‘하느님이 나를 들어 높이셨다’, ‘라파엘’은 하느님은 치유하신다‘를 뜻합니다. 대대로 이러한 이름들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신앙심이 깊은 집안이었음을 표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토빗이 처해 있는 타향살이의 처지는, 외세에 침략을 당해 아시리아로 또는 바빌론으로 끌려갔을 때에만 벌어지는 상황이 아닙니다. 자신의 신앙에 일치하지 않는 주변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살아가려고 애썼던 토빗의 타향살이는, 바오로 사도가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12,2)라고 말했던 그리스도인들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선행(토빗1-2장)


타향에서 신앙생활이 어떻게 구체화되는지를 잘 보여 주는 것이 토빗기 1장입니다. 토빗1,3에서 토빗은 “나 토빗은 평생토록 진리와 선행의 길을 걸어왔다. 나는 나와 함께 아시리아인들의 땅 니네베로 유배 온 친척들과 내 민족에게 많은 자선을 베풀었다.”라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이것이 토빗의 자화상이라고 하겠습니다.

포로: 토빗의 충실함은 갚음을 받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는 내가 살만에세르에게서 호의와 귀염을 받도록 해주셨다.”(1,13) 토빗은 살만에세르 임금 때에, 말하자면 외교 통상부 장관과 같은 자리에 오릅니다. 토빗1,15에서는 살만에세르에서 산헤립(재위, 기원전704~681년)으로 임금이 바뀌는데, 역사적으로는 그 둘 사이에 사르곤2세(재위, 기원전722~705년)가 있습니다. 임금이 바뀌면서 메디아로 가는 길이 막히고 은행 거래가 불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산헤립은 유다에서 돌아온 다음 많은 유다인들을 죽였습니다(토빗1,18). 이 상황 속에서 토빗은 유다인들의 시신을 묻어 주는 거룩한 의무를 다하였습니다. 죽은 이의 장례를 치러 주는 것은 중요한 자선 행위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토빗은 위험을 무릅쓰고 죽은 이들을 묻어 줍니다(토빗2,4-7;12,12-13).

자선: 토빗기에서는 자선을 매우 중시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자선’이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사용되는 책이 토빗기입니다(토빗기22회, 집회서13회, 잠언8회 등). 이스라엘 땅에서 살 때에 신명기의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며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고 십일조를 바쳤던 토빗은, 유배지에서는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이에게는 입을 것을 주며, 죽어서 던져져 있는 동족을 보면 묻어 주는 것으로 그의 신앙을 실천했던 것입니다.

선행의 결과: 그런데 토빗에게는, 신명기에서 율법에 충실한 이들에게 약속된 축복은 주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당에서 잠을 자던 중에 뜨거운 참새 똥이 두 눈에 떨어져 눈이 멀게 된 것은 어떻게도 설명할 수 없는, 아무런 이유 없는 고통을 나타냅니다. 선하게 살아온 그가 이런 불행을 겪게 되자 그의 아내까지도 그에게 “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당신의 그 선행들로 얻은 게 뭐죠?”(2,14)라고 말하며 그의 길을 반박합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선에 대한 갚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하느님은 어디에 계신 것일까요?기도(토빗3장)



토빗의 기도: 토빗 3,1-6에서 토빗은 하느님께, 곤궁과 모욕을 벗어날 수 있도록 차라리 죽음을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가 단순히 자신의 고통 때문에 하느님을 원망하고 차라리 죽게 해달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하느님께 목숨을 거두어 주시기를 청하는 것은 이웃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슬픔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에게서 당신의 얼굴을 돌리지 마소서.”(3,6)

사라의 기도: 같은 시기에 토빗의 친척인 라구엘의 딸 사라는 메디아의 엑바타나에 살고 있었는데, 일곱 번 결혼을 했지만 매번 아스모대오스라는 악귀가 남편들을 죽였습니다. 사라 역시 이러한 불행을 당해야 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종은 사라에게 “당신 남편들을 죽이는 자는 바로 당신이에요.”(3,8)라고 말합니다. 남편들이 죽은 불행이 여자의 탓으로 돌려집니다. 상당히 남성 중심적인 관습의 표현으로 보입니다. 사라는 처음에는 스스로 목을 매려고 했지만, 자기가 불행을 못 이겨 목숨을 끊는다면 그것이 아버지에게 모욕이 되고 너무 큰 불행이 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목숨을 거두어 가시기를 청합니다. 토빗과 사라, 둘이 모두 죽기를 바랐지만, 그리고 이것을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생각이라고 여길 수 있지만, 그들은 고통 때문에 하느님과 벽을 쌓고 자신 안에 갇히거나 하느님도 나를 버리셨다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께 매달립니다.

결혼(토빗9장)


지금까지 “형제, 동포”가 강조되었다면 이제 토비야와 사라가 혼인을 맺게 되면서 이 부부에게 초점이 맞춰집니다. 토빗기의 중심에는 이들의 결혼이 있습니다. 평화롭고 행복하기만 한 결혼은 분명 아닙니다. 본문에서는 앞서 사라와 결혼했던 이들이 모두 죽었음을 이야기 했고, 사라의 아버지도 토비야에게 이를 숨기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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