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가 나를 춤추게 한다
이용호 지음 | 부크크
하나님 나라가 나를 춤추게 한다
이용호 지음
부크크 / 2020년 4월 / 198쪽 / 14,500원
하나님 나라를 누리라(Engage the Kingdom of God)
병든 교회 나는 이 글을 쓰는 중에 병원에 다녀왔다. 나를 케어하는 담당의사는 밝은 모습으로 나를 맞이한다. 그리고 스쳐 가지만 중요한 이야기를 해준다. “무엇보다 자신을 잘 알아야 돼요. 그래야 처방을 하죠. 목사님, 교회만 신경 쓰지 말고 목사님 몸도 잘 돌보세요.”하고 말이다. 미국은 한국과는 다르게 병원 가는 것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언어에 대한 부담감도 있지만 의료보험 비용이 워낙 비싸기 때문이다. 많은 이민자들이 이런저런 어려움으로 병원에 가지 못하는 것이 참 안타깝다. 나는 여전히 치과의사를 만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치과 보험은 엄두도 못내니 말이다. 이것이 이민교회의 이야기다. 이처럼 이유가 있다. 병원에 가지 못하는 나름대로의 이유말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방법을 찾아 그것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어느새 몸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병원 이야기하는 이유는 교회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교회가 이렇다. 교회가 병들었다. 병들었는데 그냥 참고 지낸다. 참고지내다보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에 교회는 병들었는데 병든지 모르고 지내고 있으며 자신의 교회는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나라를 잃어버린 교회: 현대교회의 문제점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교회도 있고, 예배도 있고 성도도 있는데 하나님 나라가 없다는 것이다. 교회는 현대의 치명적인 바이러스인 세속화와 물질주의 그리고 형식주의에 깊이 물들어 있다.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교회에서는 자기의 의를 쌓기에 바쁜 바리새인과 같은 지도자로 채워지고 있다. 나는 이런 성도들을 보면 교회가 병들었음을 알 수 있다. 주일날 멋진 숙녀복을 입고 아름답게 화장을 했지만 속은 회칠한 무덤 같다. 그 아름답게 화장한 입술 사이에서 사람을 죽이는 독이 나온다. 교회가 그렇다. 교회에는 교회에 온 사람들은 있으나 예수님이 없고, 하나님 나라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들이 다니는 교회의 모습이라면 우리에게는 정말 우리를 진단해주고 수술해 줄 진실한 의사가 필요한 것이다.
나는 2017년 풀러신학교에서 있었던 김형국 목사와의 대화를 늘 기억한다. 김형국 목사는 풀러신학교에서 ‘하나님 나라 복음에 기초한 교회 갱신과 개척’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인도했다.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한국교회는 기복신앙과 이원론의 영성에 깊이 빠져있다. 교회를 다니면 복을 받는다는 사상은 한국교회가 가지는 취약한 영성아닌가! 거기에다 교회 안에서는 거룩한 모습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가정과 일터에 가면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살아간다. 이것이 이원론적 영성이다. 그리고 한국 교회는 개인주의 영성이 지배한다. 공동체에 대한 취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가! 교회는 사회와 약자보다는 교회 안의 사람들을 보살피는 교인 중심의 교회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교회 안의 사람들을 잘 돌보는 것조차도 제대로 못하고 있지 않는가!
편협한 십자가 복음에 빠져있는 교회: 십자가 복음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서 말씀하신 ‘이신칭의(Salvation by Faith)’ 사상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상이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프레임, 즉 ‘천국과 지옥’으로 우리의 신앙의 모든 것을 함축하려고 한다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에 대해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통치를 생략하게 하고 천당 가는 것에만 초점을 두게 했다. 현대교회는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야 한다는 사상을 알지 못한다. 십자가 복음을 너무 단순화 한 것인가? 아니면 십자가 복음을 편의대로 각색한 것인가? 이러한 사상의 극단적인 예가 바로 구원파식 복음 이해이다.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간다. 천국은 죽으면 가는 곳이다.” 하나님 나라를 제거한 십자가 복음은 진짜 십자가 복음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없이 구원을 이해하면 하나님 나라(천국)는 죽어서만 가는 곳이 되고 만다.
복음 전수를 하지 않는 교회: 현대교회는 복음 전수라는 제자훈련의 가치를 잃어가고 있다. 한 때, 한국교회에서 대학교 중심의 선교단체의 제자훈련(네비게이토, CCC와 같은)과 사랑의 교회의 옥한흠 목사를 중심으로 한 평신도 제자훈련은 한국교회를 세워가는 정말 중요한 방향들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제자훈련이 프로그램화되어 직분을 받는 과정 정도로 전락하고 말았다. 현대교회가 프로그램화한 제자훈련은 숙제를 점검하고, 암송하고, 성경공부를 하면서 과정을 마치면 성장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제자훈련의 진수는 삶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살아내는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수하는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형식적인 제자훈련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살아내는 제자훈련으로 그 방향을 바꾸고 복음을 전수하는 제자를 키워내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5, 개역개정)
이미 왔고 지금도 오고 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은 어떤 의미인가? 이것은 예수님의 중심사상을 설명한다. 예수님의 중심사상은 사랑이나 자비가 아니다. 예수님의 중심사상은 하나님 나라이다. 소망 없이 살던 사람들에게 손꼽아 기다리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이것이 “때가 찼다”라는 표현이다. 우연히 어느 날 갑자기 그날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셨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여셨다. 이제는 죄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현재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8-19)
나는 개인적으로 이 말씀을 사랑한다. 이 말씀을 읽으면 하나님의 통치의 현재성과 역동성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면 저절로 어깨가 들썩인다. 내가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복음이 전파되어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이 자유를 얻는 것을 상상해 보았는가? 바로 내가 그런 존재다. 하나님의 통치를 누리는 것에 감격하여 나는 춤을 추고 기쁨을 견디지 못해 사방을 뛰어다닌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11:6)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하여 영적인 잔치가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적대자들과 의심 많은 무리들은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교회를 생각한다. 교회를 다니지만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성도들 때문이다. 늘 무엇인가 불만을 찾고 교만한 이야기들을 하며 교회에서 불안을 조장한다. 잊지 말라. 메시아 시대는 도래했고, 그분의 통치는 시작되어 잔치가 벌어지고 있음을 말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기쁨을 누리며 춤추는 자들이어야 한다.
SO WHAT? 나는 목사로서 결혼식을 주례한 경험이 꽤 된다. 미국에 와서 결혼식을 준비하기 위해 리허설을 하고, 당일 날 결혼식 파티에 참석해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처음에는 너무 힘들고 익숙하지 않았다. 어떤 결혼식에 갔는데, 신랑과 신부가 와서 나에게 춤을 추자고 제안했다. 그때처럼 당황한 적은 별로 없다. 수많은 하객들이 쳐다보는데 무슨 춤을 춘단 말인가? 사실 춤을 춰본 경험도 없다. 그것이 미국 문화였고, 그렇게 춤을 추는 것이 그 자리를 빛내주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날 나는 무슨 춤을 추었는지도 모른다. 단지 그 순간 신랑과 신부의 잔치에 행복을 나누고 싶어 춤을 추었다. 당신이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여 덩실덩실 춤을 춘 적이 언제였는가? 우리 모두는 매일같이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여 기쁨을 누려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미래다 깨어 있으라: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미 실현된 하나님 나라가 전부가 아니다. 현재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누린다고 해서 이것이 모든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앞으로 맞이하게 될 하나님 나라의 미래 상태에 대해 궁극적인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24:42-44)
SO WHAT? 2020년 새해가 되면서 나는 제일 먼저 우리 교회에서 후원하고 있는 선교사로부터 ‘긴급 기도요청’편지를 이메일로 받았다. A 선교사가 사역하는 곳에 테러로 인한 심각한 전쟁 기류가 흐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곳에 있는 정부 기관들이 본국으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아 사람들이 귀국하고 있으며 심각한 테러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소식이었다. 엄청난 위기의 이메일을 읽으며 나는 무엇보다도 이 선교사의 기도제목에 큰 감동을 받았다. 사람들이 본국으로 철수하지만, 자신은 그곳에서 사명을 감당할 것이며, 더 많은 선교사들이 그 땅으로 오게 해달라고 기도해 달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이메일을 읽으며 A 선교사는 소망이 없는 그 땅에 소망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을 내다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 소망의 나라는 바로 하나님 나라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라(Live the Kingdom of God)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살아내라 하나님 나라의 현재를 살아내라: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13:44-46)
이 두 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이미 이 땅에 온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삶에 대해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학자는 이 비유를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는 기쁨에 대한 비유라고 표현했다. 하나님 나라를 발견했는가? 그렇다면 기뻐하라. 너무 기뻐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각오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생명을 걸 수 있는 삶을 변함없이 추구해야 한다. 기억하라. 하나님 나라는 철저한 요구를 수반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살아내라: 겨자씨 비유(마13:31-32)와 누룩 비유(마13:33)는 한 쌍으로 설명된다. 이 비유들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작은 시작과 마지막에 있을 대단한 결과 사이의 대조를 명확히 표현해 준다. 겨자씨는 예수님이 사셨던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잘 알려진 아주 작은 씨였다. 유대인들은 격언적으로 아주 작은 것을 지칭할 때 자주 겨자씨를 사용하곤 했다(cf. 마17:20). 이 겨자씨 비유는 제자들에게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때, 그것이 엄청날 것이라고 항상 믿었다. 그들은 미미한 시작을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아직 미약한 모습을 보일지라도, 하나님 나라가 이미 그 안에 내재해 있다고 선포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로마 제국이 아닌 로마의 변방 속국인 이스라엘에서 전파하기 시작하셨다. 이것은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면 눈에 띄지도 않는 아주 미미한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하나님 나라는 불과 한 세대가 지나가기도 전에 로마까지 퍼져나갔고, 결국에는 온 제국과 그 주변 나라들이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 하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전 세계의 모든 민족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그 시작과 끝이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확연한 대조를 이룬다. 이 겨자씨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 사이의 통일성과 긴장 관계를 적절히 드러내 주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긴장 관계를 살아내라 철저한 종말론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부정): ‘철저(한) 종말론(Consistent Eschatology)’은 독창적인 미래 종말론으로 임박한 종말에 대한 기대로 예수님의 종말론을 일관되게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철저 종말론은 리츨과 하르낙이 강조한 현재적 종말론을 배척한 것이다. 리츨(Albrecht Ritschl, 1822-1889)은 미래의 종말론적 측면을 배척했다. 그는 기독교를 본질적으로 ‘도덕적인 종교’로 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란 신약에서 예수님이 가르치고 실행하셨던 윤리적 가치들과 목표들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에게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건설된 윤리였다. 리츨은 예수님을 도덕 선생으로 보았다. 하르낙(Adolf von Harnack, 1851-1930)은 리츨보다 조금 더 넓은 개념을 가지고 있지만 그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리츨과 하르낙에 의해 대변된 예수님의 상과 하나님 나라의 이해에 대항하여 19세기 말엽에 강렬한 반항이 터져 나오게 되었다. 첫 번째 반항은 리츨의 사위일 ‘요하네스 바이스(Johannes Weiss, 1863-1914)’로부터 나왔다. 그는 리츨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의 견해가 19세기의 진화론적 사고와 비종말론적 사고로부터 나왔다고 비판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미래의 실체로 바라보았다. 바이스는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미래 종말론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신학계에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 나라가 전적으로 미래적이며 결코 현재적일 수 없다고 한 것은 지나친 주장이었다. 바이스의 견해는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에 의해 동의되고 확대되었다. 이들의 종말론적 관점의 중요한 특징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이 미래적이지만 매우 ‘임박한(imminent end)미래’라고 주장한 것이다.
실현된 종말론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 부정): 이와 대조적으로 찰스 헤롤드 다드(Charles H. Dodd, 1884-1973)는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을 주장했다. 실현된 종말론에서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실현되었다고 주장한다. 다드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한 것은 큰 업적으로 남지만, 그에게 큰 아쉬움으로 남는 것은 그가 ‘미래 종말론(미래에 일어날 것으로 간주되는 종말론적 사건들에 대한 가르침)’을 부정한 것이다.
개시된 종말론 (D-day와 V-day의 비유): 쿨만(Oscar Cullmann, 1902-1999)은 알버트 슈바이처의 ‘철저 종말론’과 찰스 다드의 ‘실현된 종말론’을 결합시키려고 노력했다. 이것을 ‘개시된 종말론(Inaugurated Eschatology)’이라고 한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기간이 두 부분(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으로 나뉘었다는 사실로 설명되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쿨만은 ‘D-day와 V-day의 비유’를 사용했다. 이 비유는 당시 동시대 사람들에게 친숙한 제2차 세계대전 때 있었던 노르망디 전투를 예로 든 것이다. 이곳의 D-day(작전 개시일)는 연합군들이 프랑스에 있는 노르망디 해변에 도착한 날을 의미한다. 이날은 완전히 승리한 날은 아니지만 이미 작전이 개시된(승리가 예고된)날이다. 그리고 V-day(승전일, 결정적인 승리)는 연합군이 완전히 그 전투에서 승리한 날을 의미한다. 이처럼 승리는 보장되었지만 시간의 차이가 있고, D-day와 V-day사이에는 긴장감이 있다. 이 비유는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재림의 관계를 설명한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과 더불어 이미 결정적인 결론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가지 그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