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라이트의 다니엘서 강해
크리스토퍼 라이트 지음 | CUP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다니엘서 강해
크리스토퍼 J.H.라이트 지음
CUP / 2020년 3월 / 398쪽 / 22,000원
타협 혹은 대결
제국들의 충돌 (다니엘1:1) 느브갓네살은 주전 605년에 갈그미스 전투에서 이집트를 결정적으로 격퇴했다. 이 전투의 결과 바빌로니아는 메소포타미아와 서아시아 전체를 지배하는 세력이 되었고, 다음 70년 동안 그 세력을 유지했다. 열왕기하 23장 29절~35절에서는 이 시기 이스라엘의 역사를 간략히 서술하고 있다. 이 시기는 한시대의 종말이자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었다. 이 지역의 작은 나라들은 바빌로니아의 권위에 굴복해야 했고, 유다 역시 그런 소국 중 하나였다. 느부갓네살은 갈그미스에서 승리한 직후 남하해 예루살렘을 위협했다. 그때 그는 소수의 포로를 바빌로니아로 끌고 갔다.
이 초기의 포로 중에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도 있었다. 당시 이들은 어린 십 대들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종교적 직분이나 정부의 공직을 위해 훈련을 받으며, 다윗의 도성에서 이스라엘 하나님의 정부를 섬기는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경고도 받지 못하고 집에서 1,600㎞ 떨어진 곳으로 보내져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된 채 이교를 믿는 이방인의 적국에서 살게 되었다. 그들은 온통 외국인들, 낯선 언어, 낯선 문화, 무엇보다도 수많은 신과 우상들로 둘러싸여 살게 되었다. 이것은 이 소년들에게 끔찍하고 충격적인 경험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주전597년에 여호야김이 바빌로니아에 대한 반란을 일으켜 죽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은 지혜롭게 느부갓네살에게 항복했지만 많은 핵심 지도자들과 함께 여호야긴은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갔다. 이 유배자 중에 에스겔이라는 젊은이가 포함되어 있었다. 하나님은 5년 후에 그를 예언자로 부르시게 된다. 느브갓네살은 시드기야를 예루살렘의 왕으로 세웠고 그가 더 지혜롭게 행동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시드기야는 다시 한 번 반란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느부갓네살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그 누구도 살려두지 않았다. 그의 군대는 성벽을 부수고 도성으로 몰려 들어가 살육을 자행했다. 그런 다음 시드기야 왕을 비롯해 많은 주민을 포로로 끌고 갔다. 예레미야를 포함해 가장 가난한 사람들만 그 땅에 남도록 허용되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들조차 이집트로 도망쳤다. 이것은 구약의 역사 전체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며, 예레미야애가의 흐느끼는 시가에서는 이 사건의 무시무시한 공포를 그려내고 있다.
역사적 위기 속의 신앙 (다니엘1:2) 왜 이 모든 일이 일어났을까? 2절에서는 숨 막힐 정도로 단도직입적인 대답을 제시한다. “주께서”-즉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유다왕 여호야김을 느브갓네살의 손에 넘기시매.”
하나님이 하셨다: 다니엘서는 바로 이런 종류의 신앙과 사실 사이의 모순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 모순 속에서 살아가야 했지만 그런데도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새로운 사실에 적응하고 자신들의 믿음의 순수성을 지켜낼 수 있었던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통제를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도 그들의 하나님은 여전히 통제하고 계시다고 그들은 주장할 수 있었다.
개인적 위기 속에서의 신앙 (다니엘1:3-20) 그들이 살던 세계를 집어삼킨 국제적 위기 때문에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문화적, 개인적 위기에 빠졌다. 이들은 그때 너무나도 어렸지만, 이 위기를 통해 심각한 시험을 받았다. 그들은 바빌로니아에서 살아야 했을 뿐 아니라 제국의 정부에서 일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예루살렘에서 자란 유대인 소년들에게 이것은 엄청난 문화적 변화와 방향 전환을 의미했다. 어떻게 반응할지를 결정해야만 했던 그들은 양심과 힘겨운 싸움을 했을 것이다.
그들은 이교적 교육에 대해 “예”라고 말했다: 그들은 모두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배워야 했다(단1:4하).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발전한 문명 중 하나였다. 문학과 수학, 천문학, 원시적 과학 분야에서 큰 성취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 문명은 다신론, 마술과 밀교의 관행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빌로니아식 교육은 많은 점에서 구약 이스라엘의 신앙과 근본적으로 다른 종교-문화적 세계관에 기초해 있었다. 하지만 이 유대인 십대들은 이 공부에 전념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남들보다 더 뛰어났으며 구두시험에서 바빌로니아인 동료들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 여기에 세속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의 어려움에 관해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 우리는 그 문화의 신념 체계를 공유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문화는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젊은이들이 우리 문화의 세속적 이교주의와 전혀 접촉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 문화를 잘 알고 분별하도록 가르침으로써 굳건한 믿음과 성경적 지식에 따라 문화와 상호작용하고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구별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뿐만 아니라 문화까지도 이해하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성경적 진리를 우리의 세속 문화가 지니고 있는 필요와 의문에 대한 해답으로 제시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동시에 우리 주변의 세상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복종하고 순종하기 위해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세상에 굴복하거나 순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고 의미 있는 방식으로 복음을 알리고 전하기 위해 세상에도 귀를 기울인다.
절하라 그렇지 않으면 화형당할 것이다
유일신교의 대가 (다니엘3:8-15) 사드락과 메삭, 아벳느고에게 위기의 순간이 찾아왔다. 그들은 이런 위기가 찾아올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보인다. 이 이야기에 관해 세 가지를 지적해볼 수 있다.
의도하지 않은 위기: 먼저 본문에서는 그들과 정부 사이의 이처럼 갑작스러운 갈등이 그들이 의도하지 않았던 것임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왕 앞에 끌려왔을 때 그들의 행동과 말은 사실 그들이 이런 대결을 피하려고 노력했음을 시사한다. 아마도 그들은 축제에 참여하지 않은 채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들은 날마다 맡은 일에 충실한 양심적인 정부 관리들로서 제국을 예배하지 않으면서 제국을 섬겼다. 따라서 이 대결은 그들이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이 그들을 고발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예상하지 못한 위기: 둘째,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실함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시험을 받게 된 것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예상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두려울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고위직에서 존경을 받으며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던 그들은 갑자기 왕 앞에 끌려와 순식간에 그들을 불태워버릴 정도로 맹렬한 불꽃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1장에서 그들은 사소해 보이는 것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고수했다. 그들은 전적인 충성과 의존을 상징하는 왕과의 언약적 식탁 교제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이 전에 내렸던 결정이 이번에 내리는 결정을 강화해주었다. 학생이었던 시절에 그들은 상대적으로 작은 문제에 관해 그들의 헌신의 방향과 한계를 정해 두었다. 문제가 훨씬 더 커진 지금 그들의 결정이 불에 의해 시험받게 되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눅16:10).”
시험: 셋째, 우리는 이 상황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시험이었을지 생각해볼 수 있다. 그들이 왕과 다신론적인 동시대인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명시적으로 부인하라는 요구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느부갓네살과 그의 조각상에게 금세 절하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굴복하지 않았고,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다”는 자신들의 신앙의 핵심적이며 계시된 진리(신4:35, 39)를 위해 기꺼이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신앙의 용기 (다니엘3:16-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8).
충격적일 정도로 놀라운 말이다. 이것은 생명을 위협하는 신앙의 시험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실제적인 매일의 삶 속에서도 결합하기 쉽지 않은 신념들이다. 분명히 보험 증서 같은 신앙-“원하는 바를 말하고 그것을 취하라”(Name it and claim it)-과는 쉽게 조화를 이룰 수 없다. 이른바 번영의 복음에서 그런 믿음은 대개는 설교자에 대한 재정적, 물질적 후원의 형식을 띠는 ‘씨앗’이나 ‘서원’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일단 당신이 씨앗, 즉 믿음으로 구하면 당신이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이런 가르침은 더 교묘한 형식으로 치유 사역에 적용되곤 한다. 내가 젊은 부목사였을 때 우리 교회는 모든 종류의 육체적, 정신적, 영적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위한 치유 기도 사역을 믿고 행했다. 이는 많은 이들에게 축복이었으며 하나님이 정말로 기도에 응답하셨다. 하지만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때, 특히 치유를 위해 기도할 때 절대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이라고 말하지 말라. 하나님은 할 수 있으시며, 하나님은 하겠다고 약속하셨고, 하나님은 언제나 하실 것이다. 믿기만 하라”라고 우리에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더 진지하게 바라보면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은 구해주시지만 어떤 사람들은 설명도 없이 고통을 당하거나 죽도록 내버려 두실 수도 있음을 명확히, 그리고 자주 보여준다.
다시 세 친구로 돌아가자면 무엇이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라는 믿음으로 살 수 있게 해주는 참된 기초였을까? 그들이 ‘섬기다’라는 말을 두 차례 사용했다는 점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사실상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물론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신들보다 더 강하시지만, 우리가 그분을 섬기는 것은 단지 그분이 더 강하셔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그분이 섬김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유일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깁니다. 그분만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분만이 섬김과 예배와 순종을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놓인 선택은 우리의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아니면 당신의 신들을 섬길 것인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수많은 신이 존재하며 그중에서 섬길 신을 선택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다신론자에게만 주어진 선택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원하는 신을 골라 섬기라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유일한 선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길지, 섬기지 않을지, 둘 중 하나를 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 관해 무엇을 행하시기로 작정하셨든지, 우리는 그분을 섬기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신앙의 표지다. 그것은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에 해당하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신뢰하겠다는 결단이다. 욥처럼 “그분이 나를 죽이시더라도 나는 그분 안에 소망을 두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욥13:15).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땅에서 다스리신다 미국에서 가장 미움을 많이 받는 인물에 관한 조사에서 텔레비전 부흥사들이 10위 안에 들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것은 사람들이 타락한 복음과 매체를 조작하는 사람들의 천박한 허영에 전적으로 사로잡히지는 않음을 보여준다. 다른 많은 사람도 이를 혐오스럽게 생각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 일종의 안도감을 느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이 이 거짓 예언자들과 거짓 약속을 파는 백만장자들의 오명에 의해 손상되었음에 깊은 슬픔을 느꼈다. 최근에 여러 차례 그런 일이 발생한 것처럼 텔레비전 부흥사 중 일부가 그들의 은유적 바지를 내린 채 붙잡혀-성적 혹은 재정적 추문에 휩싸여-망신을 당하게 될 때 이들에 대한 모순된 반응은 훨씬 더 혼란스러워진다. 교만과 자기만족은 목회와 설교 사역을 하는 사람이든, 공적인 삶에 참여하는 사람이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심각한 유혹이 될 수 있다.
다니엘 4장에서는 다양한 각도에서 교만과 겸손을 다채롭고 예리한 방식으로 연구한다. 이것은 들을 귀가 있는 모든 사람에게 느부갓네살이 직접 쓴 간증문이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놀라운 일을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하노라(단4:2).” 간단히 말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다스리신다.”(26절) 이것이 바로 느부갓네살이 이 놀라운 이야기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마침내 배운 교훈이다.
벽에 쓰신 글씨 벨사살 왕이 그의 귀족 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고 그 천 명 앞에서 술을 마시니라. 벨사살이 술을 마실 때에 명하여 그의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하여 온 금, 은그릇을 가져오라고 명하였으니 이는 왕과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이 다 그것으로 마시려 함이었더라(단5:1-2).
이 성전 기물들은 대단히 상징적이며 격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물건이다. 성전 자체가 그렇듯이 성전 기물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하심과 연관이 있다. 성전은 지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하는 공간이며, 따라서 그분의 백성 사이에서 그분이 거하시는 공간이다. 그 안에 있는 소중한 물건들을 빼앗는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치욕과 패배를 상징할 뿐 아니라 그들의 하나님이 열등하다는 증거로 여겨졌다.
벨사살이 저지른 신성 모독은 여호와가 시대에 뒤쳐졌으며 더 이상 영향력이 없고 무능하다고 믿었기에 여호와의 이름과 여호와의 것들을 즐거움이나 쾌락을 위해, 악의적인 목적으로 사용했다. 이런 태도나 행동으로 나타나는 신성 모독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하나님께 속한 것을 악의적 목적과 이윤, 재미, 정치적 이익, 군사적 목적을 위해 활용함으로써 그렇게 사용된 물건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행동이 포함된다.
다니엘의 예언 (다니엘5:10-28) 교훈을 배우려고 하지 않는 벨사살: “벨사살이여, 왕은... 이것을 다 알고도... ”(22절) 벨사살은 자신의 유명한 선조의 영광스러운 통치와 그가 광기에 사로잡혔던 불명예스러운 기간에 관한 모든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하나님이] 능히 낮추심이라”(단4:37)라는 느부갓네살의 간증 마지막 부분에 있는 불길한 경고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벨사살의 죄는 빛을 거스르는 죄, 진리를 거스르는 죄, 그가 알고 있는 바를 거스르는 죄, 분명히 효과적인 경고였을 본보기와 교훈을 받은 은혜를 거스르는 죄였다. 그리고 이렇게 고의로, 알고도 저지른 죄가 가장 심각한 종류의 죄다. 이런 죄가 극단적인 형태를 띨 때 예수께서 ‘성령을 훼방하는 죄’라고 부르신 것이 된다. 회개가 없는 곳에는 죄사함도 없다. 당신이 틀렸다고 아는 바를 완벽히 옳은 것이라고 정당화하고 그것을 계속 행하는 것은 대단히 심각하고 위험한 일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벨사살: 벨사살은 느부갓네살이 (어렵게) 배웠던 교훈을 배우기는커녕 “자신을 하늘의 주재보다 높였다”(23절). 벨사살은 인류 전체의 성향을 보여주는 본보기다. 우리의 타락함을 보여주는 표지 중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알고도 이를 부인하기로 작정한다. 그리고 우리가 계속해서 그렇게 할수록 우리 자신의 거짓말을 더 믿게 되며, 결국 우리 자신의 거짓말을 절대적 진리로 과시하고, 진리를 거짓으로 간주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