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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대답

조규만 지음 | 가톨릭출판사


오래된 대답

조규만 지음

가톨릭출판사 / 2019년 12월 / 284쪽 / 14,000원



◆ 신은 우주 만물의 창조주라는데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가톨릭 신앙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을 하느님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인간의 한계 때문입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까닭에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 하느님은 분명 인간보다 훨씬 큰 능력을 지닌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우주의 광활함에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인간의 보잘것없음을 깨닫습니다. 인간이 비록 돈, 컴퓨터, 로봇, 건물, 우주선 등을 만들어냈지만 산천초목과 더불어 해와 달과 많은 별 등 우주 만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인간 보다 훨씬 더 큰 능력을 지닌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이 우주 안에 인간보다 훨씬 지적이고, 인간의 과학보다 더 과학적이며, 인간의 심미적 아름다움보다 더 아름답고, 인간의 선함 보다 훨씬 더 선한 어떤 존재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우주는 137억 년 전 소위 ‘빅뱅’ 사건으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미국 항공우주국이 우주의 팽창 속도로 따져보니 우주의 나이는 137억 년(오차 범위 2억년)이라고 결론 내렸다고 합니다. 우주는 빛의 속도로 위로, 아래로, 옆으로, 뒤로, 사방으로 펼쳐져 나가 우주 공간의 지름이 274억 광년의 거리로 펼쳐졌다는 것입니다. 우주 공간의 지름이 274억 광년의 거리라면 빛이 한 점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졌으니 반지름은 137억 광년이 될 터이고, 이것이 우주의 나이가 되는 셈입니다. 더욱이 다중 우주를 주장하는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이런 우주가 여럿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공간은 더욱 넓어집니다.

최근 천문학자 이성형의 『빅뱅 우주론 강의』에 따르면, 빅뱅으로 이 우주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폭발하는 속도가 적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빠르면 열린 우주가 되고, 너무 느리면 팽창하다가 다시 축소되어 우주가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적정한 속도가 나타나려면 밀도가 정밀해야 한다고 합니다. 1입방센티미터가 4472해 2591경 7218조 5074억 0128만 4016그램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1그램만 더 밀도가 짙어도, 또 1그램만 더 밀도가 옅어도 우주가 형성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정밀함이란 하느님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가끔 ‘하느님이 쓰신 큰 글씨’인 밤하늘을 바라봅니다. 어둠 속에 별들이 희미하게 여기저기 있습니다. 지상의 불빛이 약하고, 공기가 맑은 곳에서는 별들이 찬란하게 빛나겠지만, 그래도 광활한 우주의 대부분은 어둠입니다. 물론 태양처럼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리우스나 북극성처럼 거리가 멀어서 희미하지만 태양보다 더 밝은 별들도 많다고 합니다. 그렇다 해도 우주 대부분은 캄캄한 어둠으로 덮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만큼 우주는 광활하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있는 태양계도 1천억 개의 항성들로 이루어진 성단의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에 위치해 있다고 합니다. 비록 성단의 변두리에 있지만 그래도 태양계는 태양이 어둠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태양과 가장 적당한 거리에 있는 지구는 태양계에서 생물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태양에 가까운 수성이나 금성은 너무 뜨거워서 사람이 살 수 없고, 화성이나 목성 또는 토성은 태양과 너무 멀기 때문에 추워서 살 수 없답니다. 하지만 혹시 생물이 사는 별이 또 있지 않을까 하여 지금도 열심히 찾는 중입니다. 1백억 개의 별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 성단이 1천억 개 정도 있다니, 혹시 수백 억 광년 저 멀리 어느 곳에 지구와 같은 환경을 지닌 별이 하나쯤 더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다중 우주에 관한 생각도 있습니다. 우리 태양계가 속해 있는 이 우주 외에도 다른 여러 개의 우주가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한 곳에는 인간과 유사한 지적 존재가 생존할 가능성이 훨씬 높지 않을까요? 정말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처럼 광대한 우주에서 지구는 어쩌면 한강 백사장의 모래알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우주를 만드신 하느님께서 보잘것없는 지구, 그리고 그 지구에서도 점 하나에 지나지 않는 작은 존재인 인간들을 창조하시고 돌보시고 사랑하신다는 일 자체가 쉽게 믿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창세기가 표현한 대로,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며,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기고,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 1,1-27)면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니 시편 작가의 이러한 외침은 당연한 듯합니다. “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4-5)

우리는 우주의 크기에 놀라지만, 우주의 정교한 운행을 알면 더욱 놀라게 됩니다. 중력 법칙을 따라 지구를 비롯한 행성들은 태양을 중심으로 부지런히 돌고 있습니다. 그 사이로 혜성이 궤도를 침범하기도 합니다. 하늘에서는 수많은 별이 죽고 다시 태어납니다. 죽어 가는 별똥별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지구를 향해 날아오는 운석도 수없이 많습니다. 목성은 지구 저 멀리에서 일정한 궤도를 돌면서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운석들을 막아 주는 방패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구는 벌써 산산조각이 났을 것입니다. 또한 지구는 궤도를 따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을 어김없이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꽃이 피고 집니다. 해마다 나무의 나이테가 생겨납니다. 그런 것을 그저 우연이라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저절로’ 그리 되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 정교합니다. 그건 마치 시계가 저절로 움직여서 시간을 맞추어 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래전에 솔제니친이 쓴 글을 읽었습니다. 인간들이 달이나 화성을 탐사하기 위해 우주선을 만드는 대단한 일을 하지만, 자신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는 병아리 한 마리를 바라보면서, 그처럼 연약하지만 살아 있는 생명체를 만들 수 없다는 인간의 한계를 느끼며, 한편으로 새 생명을 창조하시는 조물주를 찬양하는 글이었습니다. 분명 창조주는 세상에 존재하시고 당신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흔적을 분명히 남겨 두셨는데, 어떤 사람은 그것을 읽어 내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제대로 읽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그림은 그 화가가 훌륭한 화가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그 그림에서 화가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창조한 작품 안에서 창조주 하느님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흔적을 찾을 수는 있습니다. 하느님의 창조 자체가 그 증명입니다. 그 흔적을 읽어 내는 것은 우리 눈에 달려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닐까요?



◆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하느님은 없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희생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일이 최대의 난제일 것입니다. 하느님이 안 계시는데 왜 그들은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것일까요? 단순히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일까요?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기 위해서일까요? 그렇게 단순한 이유라면, 참 대단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하느님이 계신다’고 믿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난제는 고통입니다. 이병철 회장의 다섯 번째 질문처럼,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왜 인간에게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하는 것은 풀리지 않는 의문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 ‘욥기’가 탄생했다고 여깁니다. 욥의 삶 자체가 의인의 고통을 질문하고 있습니다. 왜 죄 없는 사람이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저를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한다고 믿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강조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삶에 대한 근본 물음입니다.”(<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2항) 그리고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에서 거듭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강조합니다. 즉,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우리의 희망’(<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27항)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회칙 <진리 안의 사랑>에서도 사랑이 얼마나 큰 하느님의 선물인지를 강조합니다. “사랑은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로 하느님의 약속이며 우리의 희망입니다.”(<진리 안의 사랑>, 2항)

저는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신 까닭에 하느님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도 당신처럼 영원한 생명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이를 강생의 신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죄를 속죄하도록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로 하여금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겪게 하셨습니다. 이를 파스카의 신비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자신의 몸과 피를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음식과 음료로 주셨습니다. 이것은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성체의 신비입니다.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오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내려오셨습니다. 그것 하나로 우리는 하느님의 큰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거기에서 비롯됩니다. 사랑받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에서도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어느 누구에게서라도 사랑받는 사람은 그 사랑 때문에 살아갑니다. 그것만으로도 존재의 이유가 충분하며 그 사랑 하나로 소중한 존재가 됩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존엄성을 지닙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 개인적인 삶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하느님은 늘 제 능력 이상의 것을 주셨습니다. 저는 농사지은 적이 없으면서도 잘 먹고 있습니다. 길쌈한 적도 없는데 헐벗지 않고 있습니다. 손에 기름을 묻히지 않고도 자동차로 아주 먼 곳까지 편하게 다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더 알 수 있도록, 당신을 더 생각하도록 사제직에 불러 주셨습니다. 제가 깨닫지 못하지만 하느님이 베푸신 사랑은 더욱 더 많을 것입니다. 하루하루가 기적 같은 날이 참으로 많습니다. 때로 걸을 수 있다는 것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눈물겹게 고마울 때가 있습니다. 오늘도 저는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이 기적 같은 고마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이 주신 ‘사랑’이라는 선물 때문에 우리들의 삶이 풍요로워지고 있습니다. 만일 인간들에게 ‘사랑’이라는 선물이 없었다면 우리들의 삶은 지옥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모두가 다른 사람들을 이기려고 사는 세상은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와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 인간 사회에는 약육강식의 동물적 삶이 남아 있습니다. 욕심에 의해 벌어지는 전쟁, 테러, 살인 등이 그 증거입니다. 그럼에도 이 세상이 ‘사랑’ 때문에 훈훈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걷는 오솔길이 아름다워집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의 사진이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에너지와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낭비’합니다. 그런 에너지와 시간 그리고 재화들이 경쟁을 위한 투쟁으로 사용된다면 우리 세상은 정말 험악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지옥’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에게 ‘사랑’은 정말 큰 선물입니다. 사랑은 우리들이 힘든 세상에서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에너지입니다. 고달픔 속에서도 기쁨을 느낄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어린이가 독사와 사자, 호랑이 등 모든 동물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에덴동산이 그리웠던 어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왜 아담 할아버지와 하와 할머니는 선악과 열매를 따먹어서 그곳으로부터 쫓겨나 마음껏 놀지도 못하고, 하기 싫은 공부를 해야 하는, 이 고통스러운 세상으로 오게 했을까 원망스러웠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아담 할아버지와 하와 할머니의 잘못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잘못이라는 걸 깨달은 건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하느님은 아담 할아버지와 하와 할머니에게만 생명이냐 죽음이냐를 선택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오늘을 살아가는 나에게도 여전히 생명의 길을 걸을 것인지 죽음의 길을 걸을 것인지를 선택하게 하십니다. 오늘 나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많이 있습니다. 선택할 수 있는 일도 많이 있습니다. 좋은 일, 나쁜 일을 선택하는 건 나 자신입니다. 기쁜 일, 슬픈 일, 고통스러운 일은 내가 선택한 일의 결과일 뿐입니다. 물론 우리가 남김없이 해명할 수 없는 고통의 신비도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고통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대가입니다. 그러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실수로, 또는 고의로 내가 고통을 겪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나와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의 잘못은 나의 고통이 됩니다. 부모나 자녀나 형제가 잘못한 것이 나에게도 아픔이 됩니다. 이것이 연대 책임이며, 원죄성의 고통 분담입니다. 이와 같이 고통은 죄의 대가를 치르는 값입니다. 윤리적이든, 물리적이든 내가 실수를 했든, 또는 우리 가족의 누군가가 잘못했든 그 죄를 속죄하기 위한 아픔입니다. 고통을 통해 우리는 속죄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어떤 고통으로도 속죄할 수 없는 큰 잘못도 있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 고통은 우리가 성장하는 힘이 됩니다. 훌륭한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큰 고통을 겪은 사람들입니다. 또한 그 고통을 이겨 낸 사람들입니다. 겪어 낸 고통이 클수록 더 위대한 사람이 됩니다. 고통은 우리를 키워 주는 에너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식일수록 여행을 시키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집을 떠나 보아야 고생하게 되고, 고생을 해야 사람으로서 철이 든다는 말입니다.

셋째로, 고통은 신비입니다. 물론 고통은 죄의 대가일 수도 있고, 고통이 우리를 더욱 성장시키는 에너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비의 부분도 있습니다. 사실 그 부분이 더 클 것입니다. 사랑만 신비가 아닙니다. 고통도 신비입니다. 죄가 없는 사람도 고통을 겪습니다. 그 고통 없이도 그는 충분히 훌륭한 인물입니다. 그런데도 고통은 왜 올까요? 다 알 수 없습니다. 욥기는 말합니다. “자네가 하느님의 신비를 찾아내고 전능하신 분의 한계까지도 찾아냈단 말인가? 그것이 하늘보다 높은데 자네가 어찌하겠는가? 저승보다 깊은 데 자네가 어찌 알겠는가? 그 길이는 땅보다 길고 넓이는 바다보다 넓다네.”(욥 11,7-9)

저는 고통이 사랑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면서도 고통을 주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을 주는 것일 수 있습니다. 능력이 있기 때문에 고통을 주는 것일 수 있습니다. 자식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아버지는 자녀에게 어떤 것도 요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식에게 무엇인가를 해 줄 수 있는 아버지는 자녀에게 힘든 일을 요구합니다. 고생을 시킵니다. 그 고생을 보상해 줄 자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왜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님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게 하셨을까? 왜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의 길을 걷게 하셨을까? 아버지,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울부짖는데 왜 들은 척도 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마지막 고통인 죽음까지 겪도록 방치하셨을까? 예전에 멜 깁슨이 제작한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예수님에게 잔인한 고통을 주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잔인한 아픔을 방치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모습도 느껴졌습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고통을 묵묵히 겪어 내시는 예수님의 사랑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고통 속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고통도 느껴졌습니다. 장작을 지고 가는 아들 이사악의 모습에 가슴이 먹먹했던 아브라함처럼 말입니다. 그럼에도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죽음 넘어서까지도 그 아들에게 뭔가 해 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부활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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