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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하나님 설계의 비밀

티머시 R.제닝스 지음 | CUP


생각, 하나님 설계의 비밀

티머시 R. 제닝스 지음

CUP / 2019년 12월 / 272쪽 / 14,000원



신념의 힘



인간의 사고는 생체전기 슈퍼컴퓨터다. 매장에서 구입하는 컴퓨터처럼 사고도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 이루어져 있다. 두뇌 컴퓨터를 구성하는 하드웨어는 뇌 조직 자체와 그에 딸린 수십억의 신경세포다. 그런데 하드웨어만으로는 컴퓨터가 기능할 수 없다. 운영체계가 필요하다. 뇌도 그 안에 내장된 하드웨어-유전적으로 뇌를 프로그램화한 배선이라 할 수 있음-의 일정한 특성 덕분에 저마다의 운영체계를 수용할 수 있다. 운영체계는 어린 시절에 설치되거나 주입되어 평생 계속 수정되는데, 각자의 언어, 예배하는 신, 신념, 가치관, 도덕, 함께 놀고 교류하는 방식, 이 모두가 복잡한 운영체계의 일부다. 그리고 우리 뇌의 에너지원은 양분을 공급하고 노폐물을 처리해 주는 혈액이다.

매장에서 구입하는 컴퓨터는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나 양쪽 다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정신의학에서 뜨겁게 논의되는 문제도 그와 비슷하다. 정신질환의 원인은 하드웨어(뇌의 유전적 또는 구조적 문제)인가, 소프트웨어(사고 내용이나 방식 같은 운영체계의 문제)인가, 아니면 양쪽 다인가? 이 불확실한 의문은 종교와 영성 분야로 인해 한층 더 복잡해진다. 영적 신념은 사고 기능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

무수한 경험을 통해 나는 영적 신념이 정신 건강 전반에 미치는 중요한 역할을 확신하게 되었다. 기계화 보병 제3사단의 사단 정신과 의사로 복무하던 중에도 다음과 같은 생생하고 감동적인 경험이 있었다. 1990년 가을에 미국과 여러 동맹국은 중동에 병력을 결집했다.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군이 쿠웨이트를 침공했으므로 대응이 불가피했다. M1A1 에이브럼스 전차의 지휘관으로 세계 최강급 탱크를 담당하던 존스 하사도 이라크 침투를 준비 중인 기갑 사단에 배치되었다. 막바지 준비가 한창일 때 존스 하사는 대대 군목에게 부탁해 탱크에 바를 거룩한 기름 한 병을 구해, 그 기름으로 빙 둘러 차체 전체에 작은 십자가를 계속 그리며 자신과 부하들과 탱크를 하나님께 바쳤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임박한 전투 중에 자신과 부하들을 보호해 주실 뿐 아니라 자신을 크게 써 주시도록 기도했다.

얼마 후 존스의 중대장이 보니 자신의 무전기가 고장 나 있었다. 중대 병력을 지휘하려면 제대로 작동하는 무전기가 필수였으므로, 중대장은 존스 하사의 무전기를 내놓으라고 명령했다. 존스는 전투지에서 사실상 귀를 잃고 위험해질 줄을 알았기에 명령에 불복하려 했다. 그러나 체포해 군법회의에 회부한다는 위협에 못 이겨 무전기를 중대장에게 내주었다. 설상가상으로 존스 하사의 야간 투시경마저 작동이 멎어 있는 것을 어둠이 내려 병사들이 침공을 개시하려고 전차에 탔을 때 알게 되었다. 그는 자기 탱크의 동지들이 전투지에서 귀만 아니라 눈까지 잃을 게 아찔해 즉시 철수 허락을 요청했으나 상관들은 거부했다. 교전이 시작되어 존스의 중대는 탱크, 박격포, 대포 등 온갖 화기의 포격에 포위되었다. 소속 중대의 여러 소대가 타격을 입었으며, 존스 팀도 곧 죽을 것만 같아 모두가 두려웠다.

사막의 폭풍 작전에 참전한 지 4년 후 존스 하사가 내 사무실을 찾아와 악몽, 회상, 불안, 수면 장애, 관계 문제, 긴장, 집중력 저하, 과민 반응, 직장 문제, 우울 등 수많은 문제로 도움을 청했다. 몇 차례의 면담을 통해 그의 삶에 무엇이 중요하고, 평소 행동의 동기가 무엇이며, 걸프전 경험이 어떤 영향을 남겼는지 등 그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갈등의 핵심은 하나님이 자신을 저버리셨다는 신념에 집중되어 있었다. 4회째 면담 때 충분히 확신이 들어 그의 걸프전 경험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주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독교 신앙을 공적으로 고백했습니다. 탱크 전체에 기름으로 십자가를 그리며 자신과 탱크와 부하들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전투에 나갈 때 눈과 귀를 잃은 상태였고요. 소속 중대가 공격받아 다른 몇 소대는 타격을 입었는데, 당신의 탱크는 총탄이나 포탄은 고사하고 파편 하나에도 맞지 않았습니다.” 말마다 사실임을 그가 시인한 후에 내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당신이 경험한 사막의 폭풍 작전은 내게 다니엘이 경험한 사자 굴을 연상시킵니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턱이 쩍 벌어졌다. 즉시 깨달음이 왔다. 그는 양손에 얼굴을 묻고 몇 분 동안 흐느껴 울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내가 추적 치료차 연락했더니, 그는 삶에 임하는 자신의 자세가 몰라보게 좋아져 더는 상담이 필요 없어졌다고 말했다. 18개월 후에 존스 쪽에서 먼저 내게 자신의 성공 가도를 알려왔다. 악몽과 회상이 사라지고 수면이 정상으로 돌아왔으며, 불안과 우울증이 가라앉아 약도 다 끊었다고 했다. 명예 제대한 그는 교육학 학위를 마치고 교사로 전업한 상태였고, 지역교회에서 장로로도 활동하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달라졌을까? 존스 하사는 거짓말을 믿었다.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저버리셨다고 단정했다. 그러던 그가 주님이 자신의 기도에 기적적으로 응답하셨다는 진실을 깨달았다. 이 신념이 변한 결과로 그는 회복되었다. 영적 이슈는 당연히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의 경험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며, 따라서 우리의 인식과 치료 행위에도 포함되어야 한다.

사고의 위계(hierarchy)



존스 하사와 증상이 비슷한 환자들을 계속 접할수록 보통 사람들에게 답을 제시해 줄 실용적 사고 모델을 찾으려는 내 열의도 더해 갔다. 그래서 사고와 그 기능, 인간의 영적 속성 등에 관한 연구에 박차를 가했는데, 거기서 삶을 변화시켜 주는 흥미진진한 발견이 이루어졌다. 이번 장에서는 사고의 조직적 구조를 살펴보고자 한다. 사고의 위계를 알면 사고를 치유할 때 지성적 선택을 내릴 수 있다.

본래 하나님이 설계하신 사고는 그분을 대면하는 교제에 힘입어 완전히 균형 있게 작동했다. 하나님과 동행하던 아담은 지성적 선택으로 그분의 뜻에 따랐을 뿐 아니라, 예배의 법칙을 통해 사고의 모든 면에 그분의 성품이 배어 있었다. 그의 사고는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이성과 양심에 따라 움직이도록 설계되었고, 이성과 양심이 사실과 정황과 증거를 평가해 가장 적절한 행동이나 결론을 정하면, 의지는 그 최선의 행동 방침을 선택했다. 또 의지는 어떤 신념과 가치관과 도덕을 내면화해 실천할지, 어떻게 상상력을 구사할지, 어떻게 하나님 및 타인과 관계를 맺을지, 그리하여 어떤 성품을 빚을지 등도 선택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아담은 자신의 의지로 한심한 선택을 내렸다.

아래 그림은 본래의 사고(죄가 들어오기 이전의 사고) 기능, 조직적 위계, 상호관계를 도식화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고가 하나님의 의도대로 조화롭게 작동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떤 파괴적 요소가 사고를 병들게 해 본래의 조화롭고 건강한 정신 기능을 방해하고 있다. 우리의 사고를 뒤틀어 놓는 그 파괴적 요소와 이를 제거하는 방법을 다음 장에서부터 살펴볼 것이다.

내면의 파괴자



태초에 하나님은 첫 인간(아담)을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본래 인간은 유전적, 정신적, 영적으로 완전했다. 순수한 양심과 고결한 이성이 있었고, 하나님을 대면하는 관계 속에서 온전한 예배를 경험했다. 그리하여 사고의 모든 기능이 늘 조화와 균형을 이루었다. 불행히도 이런 온전한 균형은 오래가지 않았다. 인류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저버린 채 자발적 선택으로 그분과의 친밀한 소통을 끊어버렸다. 그 결과는 참담하고도 즉각적이었다. 사고의 조화로운 균형이 깨지면서 어떤 파괴적 요소가 하나님의 영향력을 몰아냈는데, 사고를 병들게 한 파괴적 요소는 바로 이기심이다. 본래 하나님이 설계하신 사고에는 없던 그것이 감염 인자와 침입자가 되어 사고 기능을 오염시키고 무너뜨렸다. 사고를 치유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개입이 없다면 인간은 절망적인 상태다.

어긋난 균형



이번 장에서는 사고가 본래의 설계와 달리 역순으로 작동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보려 한다. 이기적 욕심에 지배권을 내줄 때 나타나는 결과는 무엇일까? 당신이 처음 엄마가 되었다고 상상해 보라. 첫 아이를 낳은 지 일주일이 지났고, 남편이 출장을 떠나 갓난아기랑 단둘이 집에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아기를 돌보고 온종일 집안을 치우다가 밤 11시 반에 녹초가 되어 쓰러진다. 새벽 2시에 아기가 배가 고파 울기 시작한다. 감정대로라면 자리에서 일어나 아기를 돌보고 싶은가? 아니다. 하지만 얼른 이성이 아기의 욕구와 당신의 책임을 일깨우고 양심도 당신의 의무를 지적한다. 당신은 그야말로 의지적으로 몸을 일으켜 젖을 먹인다. 그러고는 다시 누워 아침까지 잔다. 아침에 일어나면 자신이 어떻게 보일까? 잘했다는 만족감이 든다. 엄마로서 약간 뿌듯할 수도 있다. “난 정말 좋은 엄마야.” 당신의 자존감이 조금 높아지고 자신감도 더 붙는다. 전체적 행복감이 깨지지 않는다.

이번에는 이성과 양심에 따르지 않고 우선순위를 뒤집어 감정에 지배권을 내주어 보자. 새벽 2시에 아기가 운다. 감정대로 당신은 일어나지 않는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는 나도 쉴 자격이 있다고 되뇐다. 잘 쉬고 나면 아침에 더 좋은 엄마가 될 거라고 우겨도 본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기는 밤새 배고픈 몸으로 우느라 초주검이 되어 있다. 이제 자신이 어떻게 느껴질까? 죄책감과 수치심이 차오르지 않을까? 그런 감정을 견딜 수 없어 애꿎은 아기를 나무랄지도 모른다. 당신의 자존감과 자부심은 어떻게 될까? 평안과 행복감이 더 깊어질까? 의지의 통제권을 감정에 내주면 결과는 늘 파멸이다. 자유의 법칙



이 우주에는 하나님이 친히 제정하신 자유의 법칙이라는 법이 존재한다. 이는 무슨 규정이나 법 조항도 아니고 어느 막강한 군주의 자의적 명령도 아니다. 오히려 중력의 법칙처럼 우주적 실재다. 중력의 법칙을 생각해 보라. 그 법칙은 당신이 몰라도 작동하고, 당신이 믿지 않아도 효력이 발생한다. 자유의 법칙도 비슷하게 작동한다. 우리 쪽에서 이 법칙을 믿거나 알거나 인정하든 혹은 그렇지 않든 상관없다. 그런데 자유의 법칙도 어기면 반드시 해로운 결과가 따르는데 그 방식이 너무도 뻔하다.

부부가 식당에 간다고 상상해 보라. 웨이터가 음료수를 무엇으로 하겠느냐고 묻는다. 당신이 “콜라로 주세요”라고 답하자 배우자가 얼른 “콜라는 안 돼요. 우유로 갖다 주세요”라고 고쳐 준다. 당신의 반응은 어떨까? 이렇게 자유를 침해당한 결과로 사랑이 더 깊어질까 줄어들까? 배우자에게 더 정감이 갈까, 아니면 정나미가 떨어질까? 자유의 법칙을 어긴 결과는 항상 똑같다.

사랑이 파괴되고 반항심이 유발된다. 자유의 법칙이 위반될 때마다 항상 사랑이 파괴되고 반항심이 싹트는데, 왜 예수는 남에게 자유를 침해당하실 때도 계속 사랑하셨을까? 결박되어 구타당하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왜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으셨을까? 답은 그분이 자원하여 학대에 순복하셨다는 데 있다. 자원해서 목숨을 버리셨기에 그리스도의 자유는 침해된 적이 없다.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자유를 앗아갈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수 있으려면 자원해서 순복하시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사랑을 파괴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표현하신 방법이다.

사랑의 법



사랑의 법은 생명의 법이다. 우주의 모든 생명이 이 원리 위에 기초해 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므로 만물을 지으실 때도 사랑의 법에 조화되게 작동하도록 설계하셨다. 그런데 죄가 세상에 들어온 뒤로 그와 상반되는 원리에 병들어, 또렷이 드러나던 하나님의 사랑도 흐릿해졌다. 자연에 밴 하나님의 사랑이 이기심의 원리인 죄 때문에 훼손되었으므로, 이제 그분은 기록된 말씀을 주셔야만 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의 원리를 똑똑히 보고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 힘입지 않고 자연을 연구하는 사람은 그분의 손길을 보는 게 아니라 수려한 창조세계를 훼손시킨 병을 볼 때가 많다. 자연주의자는 흔히 그 병을 ‘적자생존’이라는 유명한 말로 설명하는데, 표현만 다를 뿐이지 그게 바로 이기심의 원리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행동을 연구하는 정신의학자와 심리학자도 인류를 망가뜨리는 병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게 ‘본래의’ 상태였다고 결론짓는다. 신을 믿는 신앙을 저버린 프로이트도 그런 비참한 과오를 범해, 이드를 인간의 핵심 요인이라 결론지었다. 이드는 이기심의 병에 불과한데 말이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 우리 사고에 빛을 비춰 주어, 관찰되는 인간 본성을 올바른 문맥 속에서 보게 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분의 말씀을 제외하다 보니 많은 사람이 인류를 망가뜨리는 병을 그냥 정상이라고 믿고 우리 존재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 사고의 핵심 동인이 된 이기심의 원리를 제거하고, 그분의 법인 사랑과 자유를 핵심 운영 원리로 회복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사고가 치유되지 않으면 불가피한 결과는 죽음이다. 온 인류가 현재 이기심에 감염되어 있으나 하나님은 우리를 무력하게 병고에 시달리도록 두지 않으셨다. 그분은 기록된 말씀과 아들 예수를 보내, 우리를 본래의 상태대로 치유하고 회복하실 계획을 계시해 주셨다. 창조주께서 보내 주신 문서를 읽으면 병든 상태와 하나님이 본래 의도하신 상태를 더 잘 구분할 수 있다. 또 이를 바탕으로 지성적 결정을 내려 치유와 변화를 위해 그분과 협력할 수 있다.

믿음-사실인가 허구인가?

정신치료의 첫 단계는 환자와의 사이에 라포, 즉 치유 동맹을 형성하는 일이다. 의사에 대한 신뢰와 확신과 믿음이 없는 환자는 치료 계획을 실천하지 않는다. 우리를 치유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치유 동맹이 없으면-하나님을 신뢰하거나 믿지 못하면-그분의 치유 계획을 삶 속에 적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뢰와 믿음을 길러 주시려고 전력을 다하셨다.

당신이 고열, 가래 기침, 오한 등 여러 증상으로 며칠째 아팠다고 하자. 그래서 근처 응급실로 간다. 다행히 담당의가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증상을 듣더니 저만치 가서 고개를 숙이고 기도한다. 그 모습에 당신은 더 힘이 난다. 그런데 그가 돌아와서 말한다. “다 잘 들었습니다만 기도해 보니 아무 문제도 없을 거라는 아주 좋은 느낌이 듭니다. 무사할 테니 집에 가시면 됩니다.”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까? 그걸로 충분할까? 이제 당신은 집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다른 의사에게 재진을 받고 싶을까?

잠시 후 다른 의사가 들어와 당신의 이력을 듣고 체온과 심박수와 혈압을 잰다. 허파를 청진하고 검사를 주문하고 혈구 수치를 파악한 뒤 흉부 엑스레이를 넘겨받아 자세히 살핀다. 이 모든 증거를 확보해 검토한 끝에 폐렴이란 결론을 내린다. 이 진단을 듣고 나서 당신은 이 의사가 옳다는 확실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확신과 신뢰의 믿음이 느껴지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감정은 그 자체로 증거인가, 아니면 증거의 결과인가? 우리 사고가 진실을 알게 되면 확신의 느낌이 수반된다. 진실을 더 잘 알수록 신뢰와 믿음도 커진다. 하지만 감정이 곧 진리는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손을 잡으려고 내미는 손이다. 그래서 사고가 치유되려면 믿음이 필수다. 하지만 믿음이 치유력을 발휘하려면 증거와 진리와 사실에 기초해야만 한다. 참고로 감정이 믿음에 수반될 수는 있으나 결코 믿음을 규정하지는 않는다. 믿음은 진리를 통해 정립된다. 따라서 진리를 더 잘 알수록 믿음도 커진다. 반면에 심령술은 참믿음의 모조품으로서 이성을 구사하거나 증거를 조사하지 않고 지식을 얻으려 한다. 심령술은 도취감이나 기적을 얻고자 증거를 희생한다. 또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는 믿음이 정립되지 않는다. 기적에도 모조품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적이 수반되지 않아도 진리는 진리다. 하나님은 무턱대고 그분을 신뢰하라고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저 믿을 만한 모습을 보이시면서 우리에게 그분을 알고 나서 스스로 결정하라고 권유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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