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 주님을 만나는 시간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지음 | 가톨릭출판사
쉼, 주님을 만나는 시간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지음
가톨릭출판사 / 2019년 8월 / 228쪽 / 13,000원
우리 아버지
강론 -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여러분은 ……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지혜로운 건축가로서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은 집을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집을 지을지 저마다 잘 살펴야 합니다. 아무도 이미 놓인 기초 외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1코린 3,9-11,16-17)’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3-19)’
오늘 전례의 독서에서 우리는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의 영신 수련에서 중요한 한 단어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기초’입니다. “아무도 이미 놓은 기초 외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복음서에도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하나의 기초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객관적으로는 예수님이고 주관적으로는 그분에 대한 신앙입니다. 이 피정 기간 동안 우리가 말하고 체험할 모든 것은 이 기초에서 나올 것입니다. 이 기초는 다시 더 넓은 기초, 곧 창조주이시고 주님이시며 인간의 친구이신 하느님의 신비의 한 부분입니다. 이러한 기초적 진리에서 다른 모든 것이 나옵니다.
하느님, 삼위일체, 사랑, 예수님 안에서 계시된 완전하고 자비로운 존재에서 비롯되는 이 기초는 우리가 신비를 받아들이고 그 분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을 찾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순종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드러납니다. 이것이 피정의 요점입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에 대한 앎에서 비롯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창조주이시고, 주님이시고, 구원자이시고,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충만한 생명 안에서 당신과 함께 있게 하고자 하십니다. 기도와 매일의 조배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분께 우리를 길러 주시고 지탱해 주시고 기준점이 되어 주시고 또한 의지할 곳이 되어 주시기를 청할 것입니다. 이러한 기초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는 지금 우리가 미사를 드리고 있는 것과 같은 주교좌성당들에 의하여 표현됩니다. 이 성당들은 그 기초가 선포되고 눈에 보이게 드러나는 장소들입니다. 우리 각자는 자신의 주교좌성당을, 자신의 교구를 생각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 교회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직 이러한 배경에서만 우리의 진리를, 충만함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이 미사에서, 세상의 모든 교회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그 교회들 안에서 하느님 사랑의 신비가 드러나도록 기도합시다. 우리의 모든 움직임과 행함이 헛된 것이 아니라 반석 위에 자리를 잡도록, 그리고 피정 기간 동안 하는 모든 것이 오직 우리가 교회라는 데에서 나오도록, 언제나 교황과 친교를 이루면서 지역 교회 안에 뿌리박고 머무를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분명 우리는 피정 동안 우리 자신에 대해서, 수덕에 대해서,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뜻에 대해서 마음을 써야 하지만, 이것은 언제나 가시적인 교회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도 영신 수련에서 구체적인 선택들에 관하여 말할 때 언제나 “가시적 교회의 범위 안에서”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 지평 안에서 우리의 진리를, 그리고 우리의 길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라는 확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 길이 진리 안에서, 객관성 안에서, 그리고 교회와 교회가 선포하고 또한 우리를 돌보기 위하여 제시하는 것을 추종하는 가운데 인도되기를 기도합시다. 그리고 사심 없이 헌신적으로, 충실하게 이 교회에 봉사하고자 하는 갈망을 새롭게 합시다.
성령께서 주신 말씀
강론 - 성령과 말씀
오늘의 전례 본문들은 우리의 피정에서 핵심적이라고 말했던 두 주제와 관련됩니다. 그 주제는 성령과 말씀입니다. 믿음: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었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그 사람 속에 있는 영이 아니고서야,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선물에 관하여, 인간의 지혜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말로 이야기합니다. 영적인 것을 영적인 표현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만 판단할 수 있기에 그러한 사람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지만,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 받지 않습니다.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 그분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0-16)’
우리가 피정을 성령의 직무이고 직접성의 직무라고 정의했다는 점을 기억합시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이 성령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오시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과 사람의 생각을 아십니다. 그분께서 형언할 수 없고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인간적인 것을 초월하는 신비가 우리의 작은 역사와 직접 접촉하게 하십니다. 사도는 이어서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버지가 되어 주셨고, 그와 더불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소를, 이어서 사제 성소와 수도 성소를 주셨고, 다양한 봉사의 성소를 주셨고, 또 십자가와 고통의 성소도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모든 실재를 깊이까지 파악할 수 있는 지각, 감각, 지혜, 분별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려고 애를 쓴다면, 자신의 체험을 넘어서는 것임을 깨닫게 되어 그것은 다른 세상의 것이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 안에서, 기도와 신앙의 분위기에서 멀어지고 천상적 실재들에 대한 개방에서 멀어져 더 이상 성령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신앙에 대한 큰 유혹을 겪게 됩니다. 우리는 거의 믿지 않는 사람의 눈으로 판단하게 되고, 신앙인의 상황은 우리에게 어리석은 것으로 보이게 됩니다. 꾸준한 기도, 충실한 성사 실천, 자제를 통해 얻게 되는 성령의 능력만이 우리를 다시 신앙의 삶의 진리로 돌아오게 합니다. 피정은 성령께 자리를 내어 드리기 위한 개방이고 훈련입니다. 피정은 우리가 어린아이가 하늘나라를 받아들이듯이 성령을 받아들이게 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따르게 하고, 그럼으로써 조금씩 평온하게 되는 그 전체적인 전망을 되찾게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절반은 무신론자이고 절반은 신앙인인 것이 아니라 온 마음으로 신앙인이 됩니다.
말씀의 힘: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루카 4,31-37)’
피정은 또한 말씀에, 강하고 힘 있는 그 말씀에 자신을 열어 놓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랍비들의 가르침처럼 단순히 거룩한 본문의 해석과 설명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지금도 말씀의 영향 아래 있습니다. 세례의 말씀은 우리를 자녀가 되게 합니다. 성찬의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삶 전체와 연관되고 예수님의 충실하심과 영구히 결합되는 중요한 결정들을 내리게 합니다. 말씀은 우리에게서 마귀와 세상을 몰아냅니다. 더러운 마귀가 무엇인지는 나와 있지 않지만, 대개 우리가 길을 잃을 때, 정신적으로 동요와 혼란을 겪을 때 말씀은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피정은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 말씀이 울려 퍼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 미사에서 우리가 성령의 은총에, 그리고 말씀에 열려 있을 수 있기를 청합시다. 그리고 그 말씀의 참됨은 우리가 말씀을 실천하기 시작할 때에 드러남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악의 그림자가 다가올 때
강론 -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물을 주시고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 ‘여러분에게 이야기할 때, 나는 여러분을 영적이 아니라 육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젖만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은 먹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지금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육적인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일고 있는데, 여러분을 육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어떤 이는 “나는 바오로 편이다.”하고 어떤 이는 “나는 아폴로 편이다.” 하고 있으니, 여러분을 속된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도대체 아폴로가, 바오로가 무엇입니까? 아폴로와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주신 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1코린 3,1-9)’
우리가 이미 보았고 이해되도록 초대되는 첫 말씀은, 공동체들 안에 분열이 있다는 점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공동체에도 분열이 있었습니다. 바오로, 아폴로, 케파 등 위대하고 거룩한 인물들도 그러했으니 우리는 놀라지 않아야 합니다. 언젠가, 공동체를 시험하는 유토피아라는 주제로 피정 지도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서 바오로 사도의 유토피아,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 공동체와 성적인 무질서, 신자들의 분열, 예식과 성찬 집회에서의 무질서 문제가 나타나는 공동체의 현실 사이의 관계를 지적하면서 그 서간을 설명했습니다. 첫 공동체들이 그러했듯, 열렬하고 강하고 영적이고 자유로우면서도 동시에 괴로움이 많은 그리스도교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것은 우리를 놀라게 하고, 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저는 과거에 수도원 내부의 분열을 엄격하게 판단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 분열 때문에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옮겨 가기도 했습니다. 저에게 그 모든 것은 모순되고, 복음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곧 위대한 수도원과 수도회의 역사에서 많은 부분이 분열과 갈등, 분파, 분리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육적입니다. 우리는 나약합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걸려 넘어지지 않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신(요한 복음서 17장 참조) 형제적 친교를 살기 위해서 힘을 다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어느 정도의 갈등을 지니고 있는 공동체 안에서 일치를 이루도록 부름 받는 것임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복될 것이며 지나치게 불안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목적을 갖고 행동할 것이고, 우리 자신의 노력이나 아폴로 또는 케파의 노력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배울 것입니다. 물을 주고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선한 모든 것은 아버지에게서 옵니다. 작은 봉사들을 하면서 수많은 분열과 불화로 많은 이들의 발을 밟지만, 행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은 그분이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의 가난함에서 출발하여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도 우리에게 계속해서 용서를 청하게 합니다(“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그렇다고 해서 이 길이 여기서 종결된다고 기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일도 우리는 또 새로운 잘못을 범하고, 또 우리에게 잘못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그 삶은 이렇게 하여 완성되고 정화되고 말끔해집니다. 우리는 신뢰와 자비를 길러야 하고, 우리 공동체들과 우리 자신의 부족하고 보잘것없는 사건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계획을 읽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파견: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루카 4,38-44)’
복음은 예수님의 삶에서 본보기가 되고 강령과도 같은 순간을 보여 줍니다. 그분께서는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베드로 사도의 장모와 다른 많은 이들을 고쳐 주십니다. 날이 새자 그분은 기도하러 물러가십니다. 루카는 기도에 대해 자주 언급하면서도 여기서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외딴 곳으로 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 저에게는 언제나 눈에 띄는데, 마르코는 광야를 언급하고(1,35 참조) 아마도 루카는 그것을 전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예수님의 자유로운 행동에 탄복합니다. 사람들이 그분을 찾고, 그분을 붙잡으려 하고, 그분을 독차지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모든 이들을 위한 분이시고, 모든 이들을 위한 사명을 지니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