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사람을 사람으로

이상훈 지음 | 두앤북
사람을 사람으로



이상훈 지음

두앤북 / 2018년 12월 / 256쪽 / 14,000원





기. 아프리카는 ‘영원’을 생각한다 - 아픔을 넘어 희망을 일구는 사람들



아프리카의 마음, 하쿠나 마타타



아프리카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친숙한 말이 있습니다. 바로 ‘하쿠나 마타타’입니다. 이 말은 동부 아프리카의 부족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통용되어온 인사말로, 스와힐리어입니다. 스와힐리어는 자체 문자가 없기 때문에 영어 알파벳을 차용하여 Hakuna matata로 표기하는데, ‘문제없어, 잘 될 거야’라는 뜻입니다. 이 말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아무래도 월트디즈니 사의 애니메이션 <라이언 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저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영화가 나올 무렵 두 딸 훈희와 진희가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태어났고, 아이들과 함께 50번 이상은 본 것 같습니다. 덕분에 영어 공부에도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첫 장면입니다. 하얀 눈이 덮힌 킬리만자로 산을 배경으로 태양이 떠오르며 주위를 빨갛게 물들이는 장면과 더불어 웅장한 합창이 울려 퍼집니다. 코끼리, 얼룩말, 기린 사슴, 홍학 등 수많은 동물들이 모여들고 세계적인 팝 가수 엘튼 존이 작곡한 주제가 ‘서클 오브 라이프(Circle of Life)’가 흘러나오는 모습에서 생명이 순환하는 대자연의 스케일이 벅찬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달랐습니다. 혹멧돼지 품바와 미어캣 티몬이 도망 나온 어린 사자 심바와 함께 경쾌한 느낌으로 하쿠나 마타타를 부르는 부분입니다.

Hukuna matata! (하쿠나 마타타!)

What a wonderful phrase(아주 멋진 말이지)

Hakuna Matata!(하쿠나 마타타!)

Ain’t no passing craze(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It means no worries for the rest of your days(남은 인생 동안 걱정 없이 살라는 뜻이지)It’s our problem-free philosophy(우리의 인생 철학이야)



이 가사의 내용대로 하쿠나 마타타가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겠지만, 아프리카 사람들의 삶 속에 녹아 있는 철학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쿠나 마타타를 단지 ‘No problem(문제 없어)’ 정도로 옮기면 그 뉘앙스가 충분히 살아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담긴 시간 관념이나 인생관이 확연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과지향적인 서구문화권에서는 시간이 희소한 자원입니다. 빠른 시간 안에 결과를 볼 수 있어야 효율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은 바로 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도대체 급한 일이라곤 없이 느릿느릿 움직이는 아프리카인들의 태도는 좌절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이 같은 상황이 자주 반복되면 답답하다 못해 짜증이 나고 아프리카 사람들의 문화를 미개하다고 단정짓게 됩니다. ‘저급하다’고 이해하는 거지요.

그러나 세상만사가 그러하듯 좀 더 알게 되면 다른 것이 보입니다. 나의 눈으로 보는 것과 그들의 눈으로 보는 것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습니다. 하쿠나 마타타도 그렇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서구화된 현대인에게 현재는 참고 기다리는 대상일 뿐입니다. 더 나은 미래가 오리라는 것은 막연하지만 언젠가 실현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괜찮아’ 하며 오늘을 인내합니다. 그러나 아프리카 사람들은 다릅니다.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견디지 않고 확실한 지금의 순간순간에 자족하고자 합니다. 비록 현재가 어려워도 비관하지 않고 달관합니다. 영원의 시간에 비하면 현재의 시간은 너무나 짧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프리카 사람들은 당장의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미래에 현재를 저당 잡힌 채 아등바등 살아갈 때 이곳 사람들은 물질의 결핍 속에서도 오늘을 편안하게 품으며 풍요롭게 살아갑니다. 〈라이언 킹>의 첫 장면처럼 아름다운 대자연 위에서 오늘 하루를 다른 어떤 것에 구속받지 않고 명랑하고 쾌활하게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인생철학과 태도가 저에게는 더 크고 깊은 지혜로 다가옵니다. 하쿠나 마타타는 우리 인생에 ‘문제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는 있지만 굳이 ‘문제 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게으르거나 답답한 사람들이 아니라 조금 느리게, 그러나 더 멀리 내다보고 사는 사람들일지 모릅니다. 생존을 위한 긴장 속에서도 오래 평화를 유지하는 초원을 닮았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길이 있는 곳에 동반자가



‘한국사회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일까?’ 군대생활에서의 충격과 번민, 이어진 방황과 뜻밖의 축복을 만난 저는 사회에 기여하는 일을 하고 싶어졌습니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기자가 되어 세상의 진실을 밝히고 사람들에게 더 깊고 올바른 시각을 심어주는 사람으로 살면 좋다는 결론을 내리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동아일보> 기사에서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KFHI) 기아봉사단 모집공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제3세계에 나가 일할 자원봉사자를 찾는 공고였는데, 자격 조건이 간단했습니다. ‘크리스천’이라고만 적혀 있었던 것입니다. 순간 그 조건이 제 마음에 쏘옥 들어왔습니다.

공고문에 나온 주소대로 KFHI를 찾아갔습니다. 얼마 후 기아봉사단 훈련을 받게 되었고, 미국에서 오신 대로 밀러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의 강의를 듣고 대화를 나누던 중 마음이 움직여 ‘나도 세계의 빈곤과 기아 문제를 해결하는 데 헌신해보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기아대책기구에 들어간 지 한 달 만에 르완다 난민 지원 구호팀의 선발대에 포함되었습니다. 출발도 갑작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수습간사의 딱지도 떼기 전에 이렇다 할 준비도 없이 저는 군대를 제대한 건강한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홀연히 아프리카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아프리카에 대해 무지한 상태였습니다. 얼마나 몰랐는지 르완다에서 벌어진 실상을 김포공항에서 구입한 잡지 〈타임>과 〈뉴스위크>를 보고 처음 알았습니다, 1994년 르완다 내전의 참상은 이후 각종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지금도 사람들에게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비행기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이틀을 날아가 케냐의 나이로비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마중 나오신 선교사님의 도움을 받아 경비행기를 타고 빅토리아 호를 넘어 내려선 곳이 콩고민주공화국의 고마 라는 도시였습니다. 그곳은 동부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도시로, 르완다난민촌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상당히 넓은 평원에 UNHCR(유엔난민기구)에서 지급한 푸르고 흰 포장을 두른 움막들이 줄을 맞추어 세워져 있었는데, 좁은 구역에 수많은 난민들이 밀집해 있어 각종 폐기물 냄새가 코를 찌르고 걸레나 다름없는 옷을 입은 아이들이 개, 염소와 뒤섞여 있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기가 질려버렸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첫 업무는 2주후 도착할 의료팀을 위한 집과 차량, 도와줄 직원을 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열악하기 짝이 없는 환경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다 보니 무리가 왔던 모양입니다. 결국 급성간염에 걸려 한국으로 후송되고 말았습니다. 호된 신고식을 치른 셈이지요.

치료를 마치고 복귀해서 맡은 일은 구호물자 보급이었습니다. 케냐 나이로비의 지원사무실에서 구호활동에 필요한 의류, 식량, 약품 등을 조달했는데, 그 외에도 난민촌에서 활동하는 동료들을 위해 자 동차 부속품, 식자재, 생필품을 보급했습니다. 르완다뿐 아니라 콩고와 앙골라까지 지원하게 되어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갔습니다. 물품을 사들이고, 보관하고, 분류하고, 세관을 거쳐 비행기 나 트럭에 실어서 목적지로 보내는 일은 참으로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언어 소통도 골칫거리였습니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동료들이 잡음이 섞여 칙칙거리는 HF(단파) 무전기로 요구사항을 전달하면 그에 맞추어 작업을 진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동료들의 말을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무전기 사용은 군대에서 훈련을 받아 익숙한 편이었는데, 각 나라 특유의 억양과 속어가 섞인 영어를 알아듣는 일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습니다.

난민촌에서 봉사하던 시절 한 아가씨를 알게 되었습니다. 팀원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자원봉사자였는데, 열악한 환경과 고된 일로 스트레스가 심했을 텐데도 웃음을 잃지 않고 자신의 일을 꿋꿋하게 해 나갔습니다. 점점 봉사하는 일에 지치고 영혼이 메말라가면서 마음도 거칠어지고 있을 때 변함없이 밝은 모습으로 진심을 다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큰 위안을 받았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많아졌고, 같은 뜻을 지닌 사람으로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자연스럽게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한 여인과 결혼해 생활하면서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길이 있는 곳에 동반자가 있다’는 말을 저의 인생 신조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길이 항상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신혼의 단꿈을 포기한 채 지내던 아프리카 초년병 시절, 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훈희와 진희, 예쁜 아이들을 보며 기쁘고 감사했지만 현실은 현실이었습니다. 좋지 않은 환경에서 아이까지 낳아 키우려니 이만저만한 고생이 아니었습니다. 큰딸 훈희가 태어난 지 6개월 무렵 갑자기 아이의 몸이 불덩이로 변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열이 40도를 오르내리는 아이를 안고 지리도 익숙치 않은 나이로비의 밤거리로 나섰습니다. 다급한 마음에 큰 병원의 응급실부터 찾아갔는데 열을 내리는 약만 처방해줄 뿐 다른 조치는 취해주지 않았습니다. 야간의료를 담당하는 전문의도 없었고, 의사를 불러달라고 하니 크리스마스 연휴라서 호출을 해도 전화를 받지 않을 거라는 답만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발을 동동 구르며 돌아다니기를 여러 곳, 아이는 아프다고 울며 보채는데 얼굴이 부시시한 의사들의 무성의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울화가 치밀었습니다. 아내와 제가 이 약 저 약 먹여가며 교대로 달래기를 수십 번, 드디어 아이의 몸에서 열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크리스마스의 아침이 밝아오는 6시였습니다. 그날 우리 가족 모두는 종일 깊은 잠에 빠져 크리스마스를 보냈습니다. 아프리카가 싫어졌습니다.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심했지만 가장으로서의 책임감도 무거웠습니다. 믿음으로 선택한 길이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제 삶을 감당하게 할 순 없었습니다. 냉혹한 현실이 저를 아프리카에서 밀어내는 느낌이었습니다. 여러모로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승. 이기적인 세상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 선한 의도, 어긋난 결과



누가 더 가난하고, 누가 덜 가난한가



제가 일하고 있는 지역의 현지조사를 위해 MSF(Medecins Sans Frontiers, 국경없는의사회)의 직원들이 먼 길을 돌아 찾아왔습니다. 전에 저희 기관에서 작성해서 UNDP(유엔개발계획)회의에 제출한 ‘영양 실태 보고서’에서 이 지역의 영양실조 상태가 심각한 것을 보고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싶다며 방문한 것입니다. 스위스 출신의 팀장과 직원 몇 명이 저의 숙소 겸 사무실의 마당에 들어섰습니다. 고립된 외지에서 살다 보면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처음 보는 외국인들도 오랜 친구처럼 반갑습니다. 가지고 있던 모든 식품을 꺼내서 식사 대접을 하고 조사 작업을 도와주기 위해서 저희 직원들을 안내와 통역으로 내주었습니다.

며칠 동안 저희 사무실에 묵으면서 친해진 한 스위스 친구가 조사를 마치고 돌아갈 즈음 난민구호활동으로 살아온 자신의 경험을 무용담처럼 들려주었습니다. 그때 제가 생전 처음 들은 단어가 바로 ‘전문 난민(professional refugee, 난민생활에 익숙해져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구호품 등 각종 혜택을 쫓아다니는 사람)’입니다. 스위스 친구는 자신이 일했던 파키스탄의 한 난민촌에서 난민들이 혜택을 더 받기 위해 꾀를 부리는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그중 한 사례는 한 가족이 마치 두 가족인 듯 위장하는 것이었습니다. 텐트를 2개 쳐놓고 가족의 절반은 한 텐트에서 살고 다른 절반은 다른 텐트에서 삽니다. 그렇게 해서 한 가족이 두 가족분의 식량, 의복, 생필품 등을 받고, 이렇게 확보한 여분의 식량과 생필품을 시장에 내다 팔아 현금을 챙깁니다. 상황이 종료되거나 기타 이유로 난민촌이 더 이상 지원을 받지 못하고 해산하게 되면 이들은 또 다른 난민촌을 찾아갑니다. 그러고는 온 가족이 방금 국경을 넘어온 사람들처럼 행세하는 거죠.

속임수와 부정은 난민들에게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구호와 개발 사업에 참여하는 현지 직원들에게서도 심심찮게 각종 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20여 년간 아프리카를 드나들며 현지인들에게 어 떤 일이 도움이 될까 고민하며 살았던 저에게 가장 큰 상처는 그런 직원들을 제 손으로 해고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간다에서는 4년 동안 80명이 넘는 직원을 떠나보냈습니다. 그중에는 근무태만, 업무능력 부족, 불륜, 허위보고 등의 이유로 해고된 이도 있었지만 상당수의 직원은 부정부패로 해고되었습니다.

그들은 번지르르한 영어를 구사하고 그럴싸한 이력서를 만들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지식과 기술이 있는 그런 이들 중에 병든 가치관으로 단체의 암적인 존재가 되어 기생하는 이들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그들은 해고 이후에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다른 NGO나 외국계 기업을 전전하며 살아갑니다. 저는 제가 벌인 부정부패와의 싸움이 몇몇 욕심 많은 개인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부패한 사회 전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4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부조리한 사회나 기관의 문제일까요? 아니면 개개인 각자의 책임일까요? 어디에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걸까요? 분명한 사실은 탐욕적인 인간의 본성이 밑바닥에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리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제가 다니던 학교의 독수리 동상 아래에 새겨져 있던 문구입니다. 이 문구는 학생 시절에도 그리고 졸업한 후에도 늘 제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습니다.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란 것이 있기는 한가, 어디에 있는가, 진리가 어떻게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것인가?’ 중년의 나이가 된 지금도 이와 관련한 질문은 제 가슴에 화두로 남아 수없는 답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친 후 사회에 진출한 저는 사회인이라기보다 거의 폐인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은 진리를 알 수 없는 무의미한 곳이라고 생각하며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소위 고등 백수였지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장 31-32절)

당시에 저는 독수리 상 아래의 그 문구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몰랐습니다. 《성경》의 한 구절이라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것 같기는 했지만, 제 눈으로 확인해보지 않았으니 금강경이나 주역에 나오는 글귀라고 해도 의심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게 진리를 찾아 방황하던 제가 우연히 (또는 우연치 않게)《성경》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자유케 하는 진리를 만났습니다.

1993년 3월 27일이었습니다. ‘이사야서 53장’을 읽다가 저 대신 무거운 짐을 지고 가신 구세주의 존재를 깨우쳐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믿음은 마치 예기치 않은 선물과도 같았습니다. 무의미한 인생에 선명한 의미로 다가온 진리였습니다. 이듬해 9월, 저는 진실하게 살아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아프리카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르완다와 케냐를 오가며 구호요원으로 활동하는 동안 두 딸을 보았고, 이후 미국에서 잠시 개발학을 공부할 때 셋째아들이 태어났으니 세 자녀 모두 한국이 고국인지 모르고 태어나 자란 셈이지요. 그렇게 아프리카와 인연을 맺고 살아온 세월이 24년입니다.

저는 진리와 자유를 향한 인생의 여정에서 매번 이런 질문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순수하게 타인을 위해 살 수 있는가? 또한 세상은 이타성을 얼마나 수용할 수 있는가?’ 질문하고 대답하고 질문하고 대답하고…. 질문은 다르지 않았지만 대답은 그때마다 조금씩 달랐던 것 같습니다. 어느 때는 회의적이었다가 어느 때는 희망적이었다가. 그리고 20여 년의 세월이 지나 르완다의 PLASS에서 개발학을 가르치면서 진리와 자유를 찾아 발을 내디딘 아프리카 땅에서 저의 고민과 경험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