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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도와주세요! 불안해서 죽겠어요

그레고리 K. 팝케 지음 | 가톨릭출판사



하느님, 도와주세요! 불안해서 죽겠어요

그레고리 K. 팝케 지음

가톨릭출판사 / 2018년 10월 / 256쪽 / 13,000원





무엇 때문에 그렇게 불안해하는가?



삶이 우리를 억누르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빡빡한 스케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산더미 같은 업무와 각종 청구서들, 복잡한 관계에서 받는 상처와 과거에 집착하는 마음,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느낌 때문에 ‘펑’ 터져 버릴 것만 같다. 이 소용돌이 중심에서 우리를 끊임없이 부르는 조용한 목소리가 있다. “오, 나의 아이야. 여러 가지 일로 정신이 없지? 잠시 모든 것을 멈추렴.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단다.”라는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속삭임이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하느님이 우리가 느끼는 불안에 마음을 쓰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한다. 하느님은 전쟁, 기아, 홍수 등 세상에서 일어나는 큰 문제들을 해결하시느라 바빠서 우리에게는 관심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느님은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헤아리시는데 말이다.(루카 12,7 참조)

부모가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듯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한한 사랑을 부어 주려고 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완벽하고 깊은 사랑을 지니신 분이기 때문이다. 어떤 부모가 자식이 걱정만 하기를 바라겠는가? 제자들이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하며 안절부절못할 때 예수님은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받게 될 것이다.”라며 아버지를 굳게 믿으라고 격려하셨다.(마태 6,25-33 참조)

그리스도가 지상에 오신 이래로 약 이천 년 동안,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말라고 바오로 사도가 선포한(2테살 2,2 참조) 이후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줄곧 이러한 정서를 반영해 왔다. 나는 미사에 참례할 때마다 사제가 바치는 청원의 기도를 듣는다. ‘주님, 저희를 모든 악에서 구하시고 / 한평생 평화롭게 하소서. / 주님의 자비로 저희를 언제나 죄에서 구원하시고 / 모든 시련에서 보호하시어 / 복된 희망을 품고 /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소서.’

이 강력한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기도이자 하느님이 우리에게 하신 언약이다. 하지만 사실 이 기도는 이상하다. 모든 시련에서 보호해 달라? 이기적이고 비현실적이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일말의 불안 없이 신발 끈을 묶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감히 그 누가 숨 쉬는 것처럼 매순간 느끼는 불안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주님께 청할 수 있겠는가. 교회는 이 기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서 주님의 기도가 끝나자마자 나오도록 배치했다. 우리는 이에 화답하여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라고 기도를 끝맺는다. 교회가 우리에게 전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악이 준 근사한 선물

이 기도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하느님이 세상과 인류에 대해 갖고 계신 청사진을 살펴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태초로 돌아가야 한다. 창조 이야기를 살펴보면 모든 피조물이 주님 안에서 평화롭게 지내는 조화로운 세상이 하느님의 뜻임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은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라고 하셨다. 이 낙원에서는 두려울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하느님은 매일 거니시는 그 땅에 당신의 가호와 평화를 베풀어 주셨다. 그러다 일이 벌어졌다.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스트레스, 고통, 불안, 노역도 들어왔다. 우리를 괴롭히는 이 모든 것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원죄 이전의 낙원에도 일은 있었지만 그것은 스트레스가 되지 않았다. 첫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기껏해야 먹을 음식을 모아야 하는 일만 있었을 것이다. 창세기에서는 “흙을 일굴”(창세 2,5) 필요성을 충족하기 위해 인간이 창조되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은 불안해하지 않았다. 주님이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해 주시어 음식을 거두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기쁨에 찬 일이었고 행복한 결말을 보증해 주는 일이었다. 무엇을 수확하든 주님이 주신다는 확신이 있었다.

또한 성경에는 아담과 하와가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세 2,25)라는 중요한 구절이 있다. 여기서 알몸이란 궁극적으로 영적이고 심리적인 차원에서 우리의 첫 번째 부모가 하느님과 함께 누렸던 완전하고 기쁨에 찬 친밀함을 드러낸다. 그들은 하느님께 온전히 의존했고 그래서 행복했다. ‘알몸’의 아담과 하와는 악마와 마주할 때조차도 진정한 평화와 신뢰를 느꼈다. 그러나 성경은 원죄 이후에 모든 것이 변했다고 말한다. 아담과 하와는 알몸이 부끄러워져서 숨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그들은 직접적으로 수치심을 느끼게 하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었다. 그 후로 하느님 앞에서 몸을 숨겼다.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두려움 때문이었다.”라고 설명한다.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생기는 두려움에 휩싸인 우리의 첫 번째 부모는 이제 문제가 생기면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세상이 갑작스럽게 거대해졌기 때문에 두려웠다. 이제 어찌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악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사탄은 아담과 하와에게 근사한 선물을 주었다.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준 것이다. 일시적이고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이성적ㆍ감정적ㆍ영적으로 소유와 무소유에 관해, 채움과 비움에 관해 알 수 있는 상세한 지식 말이다. 그리고 죄를 바짝 뒤따라 세상에 들어온 죽음과 같은 상실의 가능성을 알게 되어 아담과 하와는 무서워 죽을 것 같았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가? 무엇 때문에 불안한가? 결국 상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연인의 사랑이 식으면 어떻게 하지? 자유를 빼앗기면 어쩌지? 지위나 신분을 잃어버리면? 가정이 파탄 나면? 죽게 되면? 이것은 결국엔 앎이다. 모든 것을 잃을 수 있고, 자신이 너무 왜소하고 애처롭고 무기력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우리를 죽음에 몰아넣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도록

원죄 이후 오늘날까지 우리는 상실과 끊임없이 마주한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응이란 그저 불안해하는 것뿐이다. 사실 불안으로 꽉 차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세상’을 회복하러 오셨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뜻을 어둡고 왜곡된 이미지로만 알고 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지금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1코린 13,12) 볼 뿐이다.

그렇다면 에덴동산을 생각해 보자. 하느님이 그곳을 창조할 때 의도하셨던 세상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을 방법이 분명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혼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마태 19,8)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인간의 타락을 예견해서 만든 모세의 법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다. 하느님 아버지가 세상을 창조하셨던 방식으로 진실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당신을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분명한 메시지를 주신다. 원죄 이후에 세상이 만들어 낸 불완전한 타협으로는 안 된다. 우리는 온전한 삶과 관계, 하느님이 원래 창조하신 세상을 되찾아야 한다.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에는 본래 불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늘의 문을 여시어 여기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는 은총을 우리에게 주려고 오셨다. 집을 지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잔뜩 쌓인 목재와 바닥에 파 놓은 커다란 구멍을 살펴본다고 해서 집이 지어질까. 오히려 더 불안해질 뿐이다. 일단 설계도와 청사진부터 봐야 한다. 새 아담인 예수님은 에덴동산의 청사진을 우리에게 보여 주기 위해 오셨다. 그곳에서 인류는 한 번 더, 그리고 영원히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 이 일치 안에는 불안이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라고 말씀하셨다. 왜 두려워하지 않을까? 첫째,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 무엇도 우리를 파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주님만 바라본다면 실패할 리 없기 때문이다. 설령 고통스러울지라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어려움이 닥칠지라도 극복할 것이다. 또 성경은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로마 8,31)라고 말한다. 우리는 때로 비틀거리겠지만,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를 일으켜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 저자가 “그분께서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시편 91,11-12)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고통 속에서 한 질문

내 불안과 투쟁을 조금 이야기해 볼까 한다. 인생에서 힘든 시기가 많았지만, 특히 지옥 같았던 1년이 기억난다. 아내가 너무 아파서 혹시나 죽을까봐 두려울 정도였던 시기다. 아내는 음식을 삼키지 못해 힘이 하나도 없었다. 계속 통증을 호소했지만, 무엇이 문제인지 아무도 정확히 몰랐다. 그래서 우리는 병원 응급실에서 결혼기념일을 보내야 했다. 나는 아내 대신 가정을 지키고 아이들을 돌봐야 했다. 또한 아내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다했다. 친척들도 멀리 떨어져 살아서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나 혼자 모든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사업은 거의 망할 지경이었다. 당시 나는 상담 진료를 하는 것 외에 다른 정신과 상담 의사와 공동으로 일했다. 나는 이 협업을 통해 환자 수가 늘어날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의사가 예고도 없이 사무실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내게 줘야 하는 약 3만 달러를 줄 수 없다고 말했다. 소송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는 법률 대리인을 선임할 돈이 없었고, 그에게는 이미 돈을 받아야 할 빚쟁이들이 줄을 서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 책을 출판하기로 한 출판사는 갑자기 파산하고 말았다. 채무 변제 과정에서 담당 판사는 내 저작권을 돌려주지 않았다. 또 그해에 우리 집 벽은 두 번이나 무너졌다. 나는 세상에서 혼자였고, 내 전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 어느 때보다도 두려웠다. 스트레스 때문에 몸이 아프기까지 했다. 나는 아내에게 잘해 줄 수도 없었고, 사업을 잘 운영할 수도 없었다. 더 이상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메말랐다. 기도를 했지만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했다. 당시를 되돌아보면 가장 나쁜 것은 불안이라는 이름으로 나 자신이 짊어진 고통이었다. 이 모든 일로 하느님을 믿는 나의 믿음은 처절하게 부서져 갔다. 나는 모든 것을 믿던 사람이었다. ‘하느님이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는가?’가 나의 신조였다.

그러나 그 끔찍한 1년 동안 나는 무너져 버렸다. 나의 믿음이 어리석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하느님은 내 어리석음 때문에 나를 나무라신 것이었다. 그동안 내가 믿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자만심이었다. 하느님이 계신 한 나는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유치한 믿음이었다. 나는 하느님이 내가 완전히 바닥까지 떨어져 고통에 몸부림치도록 하셨다는 결론을 얻었다. 고통 속에서 질문했다.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이런 고통을 주신 거라면, 과연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아이러니하게 나는 그런 상태에서도 두려움과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을 계속 진료했다.

하느님은 나를 계속 살아가게 하셨고, 아마 하느님은 그분만이 아는 이유로 내가 고통받기를 원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하느님과 나는 불안을 계기로 다시 이어졌다. 하느님이 이끄시는 대로 걸어가자 고통이 줄어들었다. 몸과 마음이 치유되고, 경제적으로도 나아지기 시작했다. 하느님은 나를 좁고 힘든 길로 줄곧 이끄셨다. 지나고 보니 사실 하느님은 나를 푸른 초원으로 이끌기를 원하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나는 혼잡한 도로에서 부모 손을 뿌리치는 아이처럼 “아니에요, 하느님! 저는 그곳으로 가기 싫어요. 여기가 좋아요. 그 길로 내려가면 어떻게 되나요?”라며 늘 하느님께 반항했던 것이다. 나는 삶을 내 손아귀에 넣고, 멋지고 성공적으로 살기를 원했다. 하느님은 내가 현실을 통제할 수 없음을 보여 주고 싶으셨다. 그분은 그렇게 하셨고, 앞으로도 그러실 것이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견디기 힘든 날들을 보내고 있다. 처리해야 할 청구서가 있고, 세심히 관리해야 하는 건강의 문제가 있다. 그렇지만 내가 창조되었을 때 의도하신 하느님의 목적을 실현하려고 열심히 노력하기에 나는 만족한다. 나 혼자서는 내가 창조된 목적을 알 수 없다. 하느님만이 내가 가야 할 길을 알려 주시고 오직 그분만이 나를 이끄실 수 있다. 이제부터는 하느님의 뜻이 선하시다는 것을 믿을 것이다. 내가 가야 하는 길이 아무리 힘들어도 나는 확신을 가지고 그분의 뜻을 따를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한다면 결코 실패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된 자기를 만나러 가자



본래의 자신과 우울증, 불안, 스트레스,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을 구별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감정적인 문제가 있을 때 자신의 존재 문제까지 연결시킨다. 하지만 몸이 아플 때는 어떤가? 사람들은 “나는 독감에 걸렸어.” 또는 “나는 고혈압이야.”라고 말할 때 감정적인 문제를 드러내지 않는다. “나는 독감에 걸렸어.”라고 말할 때, 그 속에는 ‘나는 독감에 걸리지 않을 수도 있어.’ 라는 뜻이 들어 있다. 그러나 “나는 불안해.”, “나는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라고 말할 때는 어떤가? 그저 절망적인 상황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몸이 아플 때 자신의 존재에 대해 말하지 않는 이유는 질병을 자기 내면이 아닌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신체적 질병과 똑같이 생각하지는 못하더라도, 감정적인 문제에도 이를 적용해 볼 수 있다. 나는 불안하지 않고, 강박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우울하지 않으며,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잘 살 수 있다. 지금 가진 감정적 문제들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병원균일 뿐이다.

하느님이 생각하고 계신 것

① 32세인 모니카는 아이 셋의 엄마다. “매사에 불안해요. 저는 남편이 집에 안전하게 잘 들어올지 걱정해요. 아이들에게는 제가 정말 좋은 엄마일까 걱정이 돼요. 막중한 책임감도 느끼고요. 가족들과 잘 지내고 싶은데, 이 불안이 저를 완벽주의자가 되게 하고 관계도 망쳐 놔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② 레리는 27세 물리 치료사다. 레리는 결혼하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막상 여자와 있으면 무척 불안해진다. “저는 자신감이 없어요. 데이트할 때 바보가 되지요. 상대방이 저한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거든요. 사실 저는 여자에게 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다 보니 진짜 저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기회조차 없어요.”

모니카와 레리의 말 속에는 거짓 사고가 가득하다. 우리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거짓’을 골라낼 수 있다. 물론 그들이 처한 어려움은 ‘사실’이다. 문제는 그 어려움에 직면해서 절망, 무기력, 혼란, 실망, 무능력을 느끼고, 나아가 죄책감까지 가졌다는 점이다. 이런 부정적인 사고 때문에 거룩함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성령의 선물과 열매를 자꾸 놓치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이 창조 때 계획하신 존재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거짓 사고’를 당당히 거부해야 한다. 모니카와 레리의 이야기는 진실하다. 그들은 이제 어떤 문제나 시련을 만나도 희망, 용기, 힘, 능력, 기쁨, 평화를 경험할 수 있다. 단,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저는 매 순간 불안해요. 물론 즐거울 때도 불안해하지요. 그러나 이제는 매일 불안과 맞서 싸워요. 여러 부정적인 생각들이 하느님이 창조 때 계획하신 ‘진정한 나’가 되지 못하게 방해한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제 느낌이 저에 대해 어떻게 말하든 저는 제가 아는 건강하고 진실한 것을 해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그의 저서 곳곳에서 “진정한 자신이 되어라.” 하고 용기를 북돋아 준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직분을 다하도록 설계된 대로 실현하는 하느님이 창조한 사람, 곧 ‘태초에’ 공표된 뜻을 믿고, 사랑하고, 실현하는 완벽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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