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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왈드 챔버스의 욥기

오스왈드 챔버스 지음 | 토기장이



오스왈드 챔버스의 욥기

오스왈드 챔버스 지음

토기장이 / 2015년 9월 / 212쪽 / 11,000원





보이지 않는 세계



사람은

받들어야 할 하나님의 뜻과

순종해야 할 주인과

마쳐야 할 과정과

버려야 할 것들과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오, 주여

헛된 것에서 실체로

허물에서 온전함으로

옛것에서 새것으로

좋은 것에서 최고로 변화시켜 주소서!



- 로버트 브라우닝



고통받는 수많은 영혼들이 성경 욥기 말씀을 읽는다. 욥기가 고통의 궁극적인 이유를 알려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읽어도 고난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욥이 고난을 통해 온전해졌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논점을 흐리게 만든다. 그 이유는 욥은 고난을 당하기 전에 이미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온전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그런데 이 온전한 욥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난을 당했다. 자신의 고난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말이다. 욥기 1장 6절에서 12절까지는 초자연적인 세계에서 일어난 한 사건의 기록이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이 세상 저 너머의 이야기로, 바로 이것이 욥의 고난에 대한 설명이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욥 1:9)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 사람들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당신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인간은 그런 적도 없었고 그럴 리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욥도 당신이 복을 주고 형통하게 해 주니까 당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가 누리는 복 가운데 하나라도 건든다면, 그는 당신의 면전에서 당신을 저주할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그 어떤 인간도 당신 자체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의 소유에 대해 마음대로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다. 인간의 소유와 관련된 재앙이 우연히 발생하는 것 같지만 이는 사탄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도’에 대해 말씀하실 때, 재물과 소유에 집착하지 말라고 지적하셨다. 만일 사람의 생명이 소유에 달려 있다면, 소유에 재난이 임할 때 그의 삶 역시 무너져 내릴 것이다.

사탄의 마지막 내기는 인간의 육체였다. 때론 우리의 건강이 사탄의 권한 아래 있을 때가 있다. 욥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잃고 건강마저 잃었다. 이 모든 사건은 하나님과 사탄이 욥의 허락 없이 그의 영혼을 전장으로 내몬 데서 기인했다. 그래서 욥의 인생은 아무 경고 없이 갑자기 엄청난 대혼란에 빠졌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때 욥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나타내지 않으셨고, 그 어떠한 약속도 주지 않으셨다. 그가 겪은 고난은 절망스러울 정도로 하나님과 모순되어 보였고, 자신의 신조와도 어긋났으며, 사탄의 조소가 옳은 것으로 증명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여기서 우리는 ‘욥의 신조’가 무엇이었는지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은 그분을 온전히 믿는 자들에게 복을 베푸시고 형통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즉, 온전치 않은 사람은 형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욥은 자신에게 재앙이 계속 닥쳐올 때 혼란에 빠졌고 그의 신조는 물거품이 되었다.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를 다루실 때를 보면, 당장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 일들이 훨씬 많은 것 같다. 하나님은 우리를 극단적인 상황에까지 내몰기도 하시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겪게도 하신다. 사실 인생의 근원은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 이러한 모든 문제가 욥기에서 우리를 위해 조명되고 있다. 욥기 13장 15절은, 욥이 외적으로는 하나님을 포기한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는 주를 포기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기 13:15).

이것이 욥의 믿음의 한계선이었다. 욥이 하나님에 대해 믿었던 모든 것, 즉 그의 신조는 고난으로 인해 산산조각이 났다. 또한 욥의 친구들은 자신들만의 신조로 욥을 몰아붙였다. 욥은 그가 이해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어려운 일에 직면했을 때, 빠져나갈 길이 전혀 없음을 깨달았다.



비극을 피할 수 없는 인생



무지한 세상은 눈먼 채

위로받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발 앞에 앉아 있다

만일 주의 옷깃을 만지기만 한다면

먼지도 금으로 변화될 텐데

- 휫티어



하나님은 언제나 삶의 ‘근원’, 즉 가장 밑바닥에 있는 진짜 문제를 다루신다. 만일 우리가 겉으로 보이는 것만 다룬다면 구속의 필요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맨 밑바닥에 있는 문제에 걸리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전쟁과 죽음, 극심한 고난이 그러하다. 이러한 문제들은 인간의 수많은 자기 확신적인 믿음을 무너뜨린다. 우리가 삶의 본질적인 문제에 봉착한다면, 그 문제는 인생을 디자인하신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답해 줄 수 없다.

당신이 유명한 철학자가 쓴 책을 통해 인생을 배웠다고 가정해 보자. 실제 삶에서 그 책의 내용대로 되던가? 그럴 수 없다. 인생은 책처럼 단순하지 않다. 인간이 ‘구속’을 바탕으로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단순하고도 완전하다. 철학자의 이론은 마치 탐조등과 같아서 어떤 부분은 밝게 비추지만 다른 부분은 전혀 비추지 못한다. 반면 태양은 탐조등이 비추지 못하는 수백수천 가지의 것들을 드러낸다.

때로는 우리에게도 스스로에게 “힘내. 밝은 면을 보고 일어나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이 찾아온다. 이때 유일한 치료자는 하나님밖에 없다. 우리가 붙들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밖에 없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탄의 모든 고소를 우리가 능히 감당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사탄의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은 잔인하며 모든 일이 다 잘못됐다고 믿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온 맘 다해 의지하면, 그분만이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끝없는 의문



우리는 욥과 같은 문제에 빠질 때, 마치 그 문제의 원인과 해답을 안다는 듯이 말하는 욥의 친구 소발과 빌닷과 엘리바스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에게 고난을 허락하시지 않네.”

그러나 내가 경험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깊은 문제를 겪는 사람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조용히 입 다물고 불가지론자가 되는 것이다. 고난을 당한 사람에게 가장 큰 위로는 많은 말이 아니라 말없이 전달되는 마음이다. 위로자가 있어야 하는 자리는, 가르치는 자리가 아니라 말없이 벗이 되어 주는 자리이다. 고난당한 자의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는 자리이다. 그리고 기다리며 지켜봐 주는 것이다. ‘위대한 일들’은 언제나 기도를 통해 성취된다.



공평한 저울을 가진 판결자



만일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신 하나님을 받아들인 후에 물리적인 우주의 질서를 본다면, ‘하나님의 우주적인 굴절’이라는 표현의 의미가 무엇인지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세상의 질서 속에서 하나님을 보면 굴절되어 보인다. 우리의 이성이 하나님을 왜곡해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으로는 하나님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만일 당신이 온전한 실제를 보길 원한다면, 만사의 근원에는 뭔가 잘못된 것, 즉 굴절이 있다는 성경의 계시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피조물이 궤도에서 벗어나 왜곡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롬 8:19)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주를 정상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사람의 이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관점이 틀렸음을 깨닫게 될 때, 큰 고통을 느낀다.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택하랴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대답하지 못하겠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할 뿐이며”(욥 9:14-15). 그리고 여기서 욥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으며 함께 들어가 재판을 할 수도 없고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욥 9:32-33). 욥은 하나님도 맞고 자신도 맞다고 입증해 줄 판결자가 나타나주기를 소망하고 있다.

“내 신조와 관점, 지식, 어떤 경험으로도 이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욥을 이 고백 앞에 내몬 것은 다름 아닌 ‘비통’이었다. 기쁨이나 형통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오직 비통만이 이러한 일을 해낸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가장 위대한 요소는 바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신”(사 53:10) 부분이다. 고통이 닥치면 인간은 곧 격렬하게 반응하게 된다. 그 고통이 너무 커서 독한 말을 마구 쏟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마침내는 바른 관점을 갖게 된다. 즉, 모든 만사의 근원은 ‘비극’이라는 관점을 갖게 된다. 비통함을 경험한 사람은 이 세상이 최악임을 분명히 알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공평한 저울을 가지고 있는 판결자를 고대하게 되는 것이다. 욥은 살아 있는 ‘실체’를 필요로 했다. 자신의 신조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라는 실체를 두려워하거나 거절하는 성향이 있다. 그러나 이제 욥은 비통에 빠진 가운데 문제의 핵심에 점점 더 다가서고 있다.

“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 그런즉 그치시고 나를 버려두사 잠시나마 평안하게 하시되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하옵소서”(욥 10:20-21).

욥은 “자신에게는 빠져나갈 길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어 주셔서 잠시나마 평안하게 해주지 않으시면 죽음 외에는 피할 길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하기를 거절하는 연약함과 사실 그대로를 직면하는 데서 오는 연약함은 완전히 다르다. 성경을 보면, 인생의 모든 위기마다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이 강조된다. 욥은 난생처음으로 하나님만이 유일한 피난처 되심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맡기는 것뿐이었다.

인간의 문제는 인간이 스스로 해결하기에 너무 크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담대하게 주께 내어맡기면, 욥이 고백한 피난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성령님이 임하면,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들을 다룰 수 있는 피난처를 얻게 된다. 고통받는 사람들이 마음의 쉼을 얻게 된다. 그 가운데 모든 일을 하나씩 이해하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된다.



집요한 추적



욥은 친구들이 하나님의 영예를 위한다면서 거짓을 말하는 것에 대해 비난하고 있다. 신학을 앞세우는 사람은 자신의 관점을 일관되게 지켜 나가기 위해 거짓을 말하게 된다. 신학자가 신학적인 논쟁을 하다 보면, 어느새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의 관점을 놓게 된다. 영적인 삶과 논쟁을 함께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은 지적인 분야를 넓힐 수는 있어도 영적인 성숙은 이루지 못한다. 알렉산더 와이트 박사는 이 점에 대해 아주 탁월하게 표현했다.

“오, 논쟁의 지독한 저주여! 교만한 마음에 타오르는 반박의 혐오스런 열정이여! 형제들이여, 지옥의 입구를 피하듯이 논쟁을 피하라. 논쟁을 좋아하는 것을 피하라. 그들이 자기주장을 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라. 그들이 말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라. 그들이 글을 써도 그냥 내버려 두라. 당신이 틀렸다고 따져도 그냥 내버려 두라. 그들이 당신을 비방하고 정죄하고 판단해도 그냥 내버려 두라. 그들이 당신을 매장하려 해도 그냥 내버려 두라. 사랑이 고통당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진리가 고통당하도록 내버려 두라. 당신은 논쟁자가 될 수 있을 만큼의 신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사야서에서 예수님을 묘사한 말씀을 보라.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반복해서 기도했다. “내 자신을 늘 변론하고자 하는 이 욕망을 치유해 주소서.”

하나님은 오직 한 개인 편에 서서 그렇게 역사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이다. 신학적인 관점은 계속 점검되어야 한다. 만일 하나님의 자리에 신학을 놓는다면, 우리는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식하게 될 것이다. 즉, 그 어떤 다른 관점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러한 맹신의 구제불능적인 무지는 결국 망상에 이르게 되는데, 그 책임은 오직 본인에게 있다. 본질적인 것들은 현실의 삶 가운데서 논리적으로 입증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욥은 자신에게 최악의 일들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느꼈고 자신 역시 진실했다. 그는 자신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 “지금 나는 뭔가를 잘못해서 벌을 받고 있어”라거나 “지금 나는 더 완벽해지려고 고난을 받고 있는 거야”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는 바로 이러한 고통의 순간에 구약 전체에서 믿음에 대한 가장 고상한 발언을 한다.

“주님이 저를 죽이시더라도 저는 여전히 주님을 신뢰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이것을 붙들 것이며 이것이 분명하게 드러날 때까지 기다릴 것입니다.”



절망의 전선



종교적인 삶에서 고자세를 피하기란 어렵다. 종교는 고상한 척하려는 속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누군가를 가르치는 위치에 있다면, 쉽게 고자세를 취하게 될 것이다. 이는 오늘날 성실한 그리스도인 가운데 자주 발견되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 목회자를 가르치는 것이 다른 누구보다 어렵고 오래 걸린다. 종교적인 고자세는 교리를 신봉할 때 생겨나고, 그때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무조건 깔보는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래서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큰 상처를 주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욥은 친구들의 고자세에 반기를 들고 있다. 수많은 슬픔이 “그 슬픔을 쏟아낼 수 있는 적절한 표현을 통해” 위로를 얻는다. 그러나 욥은 그렇지 못했다. 욥의 친구들은 모두 그를 인내하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욥을 버리셨기 때문에 그가 고통을 받는 것이라고 믿었다. 언뜻 보면 그들의 정죄가 다 맞는 것처럼 보였다. 욥는 모든 상황과 자신의 신조마저 자신을 대적하는 것처럼 느꼈다. 특히 자신의 진실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친구들이 그를 손가락질할 때,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만의 분별력과 관점으로 그를 죄인 취급할 때, 욥은 참기 어려울 만큼 힘들었다.

운명은 사람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운명에 대해 자신만의 분별력으로 판단하는 것은 인간의 지혜가 이미 정해진 법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혜가 이미 고정된 법만 따르는 것이 바로 이성주의이다. 그래서 이성적이지 않은 일이 생길 때, 이유 없이 고난당하는 사람을 죄인 취급하게 되는 것이다.

만사의 근원이 이성적이지 않다고 지적하면, 이성주의는 그러한 현상은 일시적인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만사의 근원이 비합리적이고 더 나아가 비극적이라고 계시한다. 사람이 벼랑 끝에 몰리면 이성이 아닌 비극에 닿게 된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하나님과 홀로 대면하게 된다. 우리는 더욱 진실해지고 생각이 깊어질 때, 솔로몬의 말을 더욱 공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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