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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의 사랑

김수환 지음 | 북오션
김수환 추기경의 사랑

김수환 지음

북오션 / 2014년 3월 / 248쪽 / 13,500원





1장 사랑이 없으면 삶은 빈껍데기



사랑이 없으면 삶은 빈껍데기

인생 공부의 가장 큰 핵심은 무엇일까요?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삶은 결국 빈껍데기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참으로 살 줄 아느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볼 때 우리는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을 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참으로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왜 나는 사랑을 좋아하고 사랑받기를 원하고 또 사랑하기도 원하면서 실제 생활에서는 이를 살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우리 모두 자기중심으로 사랑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참사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랑받기는 바라지만, 사랑받지 못하면 삶의 의미를 잃을 만큼 심각한 지경에 이르지만, 그 사랑을 다른 이에게 줄 줄은 모릅니다.

“사랑은 결심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명한 심리 치료 학자 에리히 프롬도 “사랑은 의지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겠다는 결심을 확고히 세우고 사랑을 실천해야 하지만, 사랑을 향한 우리의 결심과 의지가 너무도 약합니다.

그런데 더 깊고 제일 중요한 이유, 근원적인 이유는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참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를 대속시키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주실 만큼 절대적입니다. 이 사랑을 믿는 것이 믿음이요, 신앙입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모든 인간을 이렇게까지 사랑하시기에 인간은 귀하고 존엄한 것입니다.

예수님, 그분은 우리 각자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 당신의 몸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몸을 나눠 가진 우리는 그분과의 일치 속에 하나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의 일치입니다.

사랑은 과연 모든 계명의 완성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설령 다른 계명을 지켰다 하여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느님께서 사람의 죄를 단죄하신 적도 있지만, 줄곧 참아주시는 모습을 더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하느님의 자비요, 사랑입니다. 마침내 이 사랑이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약해 보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참습니다.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이 사랑입니다. 죽은 것도 살립니다.

벗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치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궁극적으로 자기 모든 것을 남김없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줄 수 있을 때, 그것이 참사랑인 것 같습니다. 가장 큰 사랑인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자기희생과 고통이 반드시 따릅니다. 수고와 고통, 자기희생이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우리가 자신을 열고 그 뜻에 순종한다는 것은 이 사랑에 따르는 자기희생, 고통까지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이 같은 정신이 연인 사이에도, 부부 사이에도, 부모 자식 사이에도 있고, 특별히 가난이나 불구, 병고에 시달리고 기타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에게까지 미친다면 세상은 진정 밝아질 것입니다. 생명의 빛, 즉 광명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이런 사랑 속에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인간 안에는 신적인 무엇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최대 관심사가 인간이요,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어 이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하느님은 당신 생명을 내놓으셨습니다. 본시 하느님과 같으신 분인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피를 흘리고 자신의 목숨까지 내주셨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이 사랑 때문에 인간은 존엄합니다. 하느님은 그 누구도 버리시지 않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어떤 인간에게도 이 존엄성은 있습니다.

예수님이 “진리는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이 뜻입니다. 자유는 궁극적으로 사랑하기 위한 것입니다. 참으로 사랑하기 위해서 자유가 있습니다. 누구도 자유 없이 사랑할 수는 없으니까요. 하느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하느님의 그 사랑에 인간이 사랑으로 응답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모든 선한 것, 진리, 정의를 사랑하면서 완성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중에서도 같은 인간을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서 자유를 주셨습니다.

사랑은 기적보다 강하다

예수님이 전교를 하시고 기적을 많이 행하신 곳은 갈릴래아 지방이었고, 그중에서도 가파르나움, 코라진, 베싸이다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기적을 가장 많이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회개하고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불과 소수였습니다. 이곳들은 마치 예수님이 저주하신 그 말씀이 들어맞은 양 완전한 폐허가 되었습니다.

기적의 힘이 반드시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도, 특히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 회개시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잘 증명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그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깊이 회개시킵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잘 드러냅니다. 돌아가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을 마음속 깊이 회개시키고 인간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넣음으로써 거룩한 마음, 하느님을 닮은 마음으로 변화시킵니다. 바로 이 같은 마음이 세상의 어둠을 밝히고, 메마른 땅을 생명의 물로 적셔주며, 죽어가는 인간을 재생케 합니다.



2장 사랑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닙니다



참사랑의 힘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이셨기에 어느 누구 한 사람도 외면하시지 않았습니다. 당신께 다가오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에게 당신 자신을 전부 내주시고 품어주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소경이 보게 되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사랑으로 좌절과 실의에 넘어진 사람들의 가슴에 희망이 가득 찼고, 미움과 저주로 일그러진 사람들이 용서와 화해의 기쁨을 알며, 오만과 독선에 오염된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알았습니다. 한마디로 죄의 굴레에 겹겹이 둘러싸였던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참인간답게 새로이 구원되었습니다.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을 철두철미 무로 비우신 몰아적 사랑이 이같이 큰 구원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세상을 구하는 사랑

우리의 연약함이, 우리의 가난이, 우리의 죄가 하느님을 사람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만큼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빈자를 동정은 할 수 있으되 부자로 있는 한 가난한 자의 동료나 형제, 생사를 함께 나눌 만한 벗은 될 수 없습니다. 영국의 에드워드 8세는 평민과의 사랑을 위해서 자기 왕관을 벗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인간으로 진실히 사랑하고 구하기 위해서는 가난한 자의 가난과 고통을 나눌 만큼 그와 같은 처지에서 그 가난한 자와 한 몸, 한마음이 될 만큼 가난한 사람 속에 들어가야만 비로소 가능합니다.

부자가 자신의 소유를 다 내놓고 비워야 가난한 자를 구할 수 있습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는 자기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 등 모든 것을 버리고 거지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을 구하기 위해서도 죄인의 처지를 이해할 만큼, 그 번뇌와 어두움을 함께 나눌 만큼 - 죄 자체를 빼놓고는 - 같은 비참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실히 빈자나 죄인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뿐더러 그를 대신해서 죄의 짐을 질 수 없습니다. 죄의 짐을 지려면 - 스스로는 죄 없으면서도 - 죄인과 같이 되어야 합니다. 이 같은 사랑의 이치가 하느님이신 분으로 하여금 죄를 빼놓고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본질을 모두 비우시고 종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그래서 복음도 “하느님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 외아들을 보내시어 사람이 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결국은 우리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너무나 극진하시고 우리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 하나가 됨으로 우리를 궁극에는 당신과 같은 신적 생명을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 먼저 하느님 편에서 당신 것을 인간에게 다 내놓으시고 가난한 자로 인간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하기에 가난한 자가 되셨고, 우리가 죄의 번뇌 속에 빠져 있기에 당신 자신은 죄 없으시면서 죄인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죄인으로 죽으셨습니다. 뿐더러 지옥에 갇힌 분들을 건지기 위해 죽으신 다음에는 거기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고성소에 내리사”는 본시 지옥에 가셨다는 뜻입니다.

이 같은 사랑만이 세상을 참으로 구원할 수 있습니다. 남을 살리기 위해 자기 생명까지도 내놓는 그 사랑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사랑으로써 미움을 물리치고,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는 일치를, 불신이 있는 곳에는 믿음을, 거짓이 있는 곳에는 진리를, 절망에는 희망을, 어두움에는 빛을 심으셨습니다. 슬픔이 있는 곳에는 기쁨을 주셨습니다. 그 때문에 봉사받기보다는 봉사하시고 사랑받기보다는 당신을 버리고 죽으실 만큼 사랑하셨습니다.



3장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내 이웃을 버려둘 것인가?

이웃 사랑을 우리는 흔히 신자로서 닦아야 할 여러 가지 덕행 중 하나에 불과한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서적으로 보면, 이웃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함께 계명 중에서도 가장 크고 중심적인 계명입니다. 뿐만 아니라 첫째가는 계명인 하느님에 대한 사랑도 이웃 사랑의 실천 없이는 완성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웃 사랑은 결코 여러 계명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계명의 중심이요, 완성이며, 그 전부입니다. 이웃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본질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이것과 대립될 수도 없고, 또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핑계 삼아 면제될 수도 없습니다. 이만큼 이웃 사랑은 믿는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이웃 사랑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웃 사랑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하셨고,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랑의 실천과 아울러 겸손하게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의 얼, 성령 앞에 여는 것입니다. 성령이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쏟아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같이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리고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갑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이웃 안에 현존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써 우리는 언제나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보답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봉사는 이렇게 하느님의 현존을 증거하고 무신론자를 신앙인으로 회개시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사랑의 증거가 필요합니다. 이삭을 줍는 마음으로 우리 사회 안에 버림받은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멸시와 천대 속에 소외될 사람들에게 사랑의 봉사를 다한다면, 그것이 바로 오늘 여러분이 하는 종신서원을 참으로 사는 길일 것입니다.

용기가 부족한 이유

우리의 문제는 결국 결심이 안 되는 데 있고, 이행하겠다는 용기의 부족에 있습니다. 그런데 용기가 부족한 이유는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정말 이웃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이웃에게 부정이나 부패를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동시에 사회적 불화나 부정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의 처지를 보고도 응시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랑의 충동으로 무엇인가 이웃을 돕는 선행을 할 것입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에 정비례해서 용기를 가질 것입니다.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우리는 점차 자기 아성을 무릅쓰는 지대한 용기를 가질 것입니다.



4장 사랑의 출발점은 가정입니다



가정을 사랑의 공동체로 만들려면

인도 빈민가의 어머니 테레사 수녀님은 “가정은 자애가 깃든 보금자리, 무한히 서로 용서하는 곳이 되게 해야 합니다. 오늘날은 모두가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더 큰 발전, 더 많은 부를 더 더 하면서 찾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부모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거의 없으며, 부부는 자기들 서로를 위한 시간조차 낼 수 없는 형편입니다. 세계 평화의 붕괴는 이같이 가정에서부터 붕괴되고 가정에서부터 시작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가정의 화목이 깨진 곳에 하느님 백성의 일치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가정이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부부가 서로 진정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남편 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몸을 바치신 것처럼” 자기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 된 사람도 자기 남편을 같은 정신으로 사랑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신자 부부는 자신들의 사랑의 일치를 위해서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함께 기도함으로써 그분 안에 깊이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부부가 같이 그리스도 안에 기도로써 하나가 되어 살 때, 그 가정은 행복하고 성화될 것입니다.

신랑이 신부를 반기듯

본래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사랑함으로써 맺어지는 혼인은 참으로 두 사람을 한마음, 한 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혼인으로 맺어진 부부간의 일치는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이 혼인은 사람이 함부로 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녕 혼인은 조건 없는 사랑을 전제로 합니다. 그 사랑은 참으로 우리를 새롭게 만들고 기쁨으로 가득 차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62장 1-5절 말씀은 하느님이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이런 사랑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성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선민으로서, 하느님께 특별한 은혜를 입은 백성이면서도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과 신의의 바탕 위에서 굳은 약속을 맺은 백성이면서도 자주 그것을 지키지 않고 하느님을 배반했습니다. 구약성경의 <호세아서>, <에제키엘서>를 보면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부정한 아내와 같았고, 창녀와 같이 자기 몸을 파는 여자, 그 때문에 버림받고 죽어 마땅한 여자와도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구원하십니다. 하느님은 이런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으실 뿐 아니라 다시 그들을 정결케 만드시고 그들에게서 정의가 동터오고 횃불처럼 타오르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은 곧 모든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입니다. 하느님은 자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세상 모든 이에게 바쳤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에베소서> 5장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비유하면서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어떤 사랑과 존경으로 대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히 남편 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몸을 바치신 것처럼 자기 아내를 사랑하십시오”라고 권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몸을 바치셨습니다. 그렇게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예쁘고 잘나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죄, 우리의 부족, 불충실, 온갖 부정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때문에 그리스도는 우리를 더욱 측은히 여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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