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마음, 안녕하십니까?
김명숙 지음 | 더드림
엄마 마음, 안녕하십니까?
김명숙 지음
더드림 / 2014년 2월 / 224쪽 / 12,000원
첫 번째 돌봄: “느끼도록 허용하라” - 감정 돌보기
TV에서 다중지능이론에 대한 방송이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다중지능이론은 하버드 대학교 하워드 가드너 교수가 발표한 것으로 인간의 능력은 언어, 논리수학, 공간, 신체운동, 음악, 대인관계, 자기이해, 자연탐구 등 8개 유형의 지능에서 각기 독립적이지만 상호 교류를 통해 발휘된다는 이론입니다. 가드너 교수는 각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약하고 있는 네 명의 다중지능을 진단하고 그 상관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물론 각자 두각을 나타내는 분야의 지능이 월등히 높았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주 분야 외에 공통적으로 높은 지능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이해지능이었습니다. 자기이해지능이란 자신의 생각과 느낌, 감정 상태를 스스로 파악하고 조절하는 능력입니다. 이 지능은 독립적으로는 두드러진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다른 지능이 효율적으로 발휘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자기이해지능이 높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감정과 상황에 대한 이해능력을 포함하는 대인관계지능 또한 높았고, 대인관계지능과 함께 자기이해지능이 높은 사람은 자존감 또한 높다는 결과를 보여 주었습니다. 자신을 이해하는 능력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며 살 수 있는 기반이 되고, 감정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자신을 이해하는 중요한 길잡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감정은 그 상황에 반응하고 있는 ‘나’를 알 수 있는 나의 모습이기 때문에, 감정이 지지되고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그 감정을 느끼고 있는 ‘나’ 자신이 받아들여진다는 것이고, 그렇지 못할 경우 ‘나’ 자신이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키우는 데 감정이 그 아이의 자존감과 직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이해받은 경험보다는 억압이나 강요에 더 익숙한 우리는 자녀들은커녕 자신의 감정과 기분을 정확히 알고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감정도 에너지가 있다
모든 감정에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감정을 억압하거나 회피하면, 마치 움직이려는 사람을 잡고 있으면 힘이 드는 것처럼 감정을 누르는 데 계속 힘을 사용하게 되고 우리가 가진 에너지는 점점 고갈되는 것이지요. 감정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든 나오기 위한 에너지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우리의 에너지는 점점 줄어들고 급기야 그 녀석은 가장 약한 곳을 통해 분출되고 맙니다. 부부싸움을 할 때 케케묵은 옛날 일까지 들춰내서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감정이냐 감정적이냐
우리는 때때로 감정을 표현한다고 하지만 감정을 표현하는 대신 감정적인 행동을 자주 합니다. 우리가 “감정이냐 감정적이냐” 하는 기준과 분별점만 알아도 갈등과 관계의 어려움의 반 이상은 해결됩니다. 소리치고 물건을 내던지는 것, 삐치고 침묵하며 단절하는 것, 비꼬거나 짜증을 내고 반항하는 것 또한 감정적인 행동에 속합니다. 반면 내가 화가 났다고 말하는 것이 감정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나의 상태를 그대로 이야기해 주는 것이지요. 감정은 무조건 인정해 주고 지지해 주어야 하지만 감정적인 행동은 엄격하게 제한해야 합니다. 감정적인 행동은 대부분 서로에게 2차적인 분노를 일으켜서 문제의 해결이 아닌 또 다른 다툼과 상처, 분열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감정은 분명히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뜻대로 쉽고 단순하게 살도록 주신 선물이 바로 감정입니다. 그래서 감정은 자신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모습입니다. 세상의 기준과 강요에 의해 다른 사람의 삶으로 위장해서 살기 쉬운 가운데 우리의 모습을 찾아 그 모습대로 살 수 있는 방법이 감정에 들어 있습니다.
표현하라 흘러가도록
인간이 폭력적이거나 잔인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언어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표현되지 않는 감정이 문제이지, 언어로 표출되면 우리의 뜨겁고 커다란 감정은 그 힘이 소멸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슬프고 두렵고 실망스런 감정들은 좋지 못한 것이고, 때론 그렇게 느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느끼기도 전에 차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판단 기준은 우리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느끼고 인정하고 표현할 수 없도록 합니다. 그러나 감정에는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훌륭한 판단 기준으로 정확히 좋고 나쁘고를 결정하여 누르고 회피한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충분히 느끼고 인정해 줄 때에야 비로소 소멸되기 시작합니다. 흐르는 물을 억지로 막아 놓으면 언젠가는 둑이 무너집니다. 그냥 흐르는 대로 두면 자연스럽게 흘러가지요. 우리의 감정도 그렇게 흘러가도록 놔두십시오.
두 번째 돌봄: “원하는 것을 말하라” - 욕구 돌보기
내가 원하는 욕구를 배제시키기 전에 먼저 순수한 나만의 욕구에 귀 기울여 주어야 합니다. 자기 욕구를 찾는 것은 감정을 더 정확히 찾아내는 방법이며, 자기 본연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정과 마찬가지로 욕구를 지지해 주면 존재를 인정받는 것과 같은 에너지를 얻게 됩니다. 나의 욕구에 귀 기울여야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자신의 욕구를 모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욕구에 맞추어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욕구는 내 행동의 방향을 찾는 중요한 열쇠이기 때문에 자신의 욕구를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욕구에 따라 살면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욕구에 따라 선택한 일을 하다가 힘이 들고 일이 풀리지 않으면, 자신의 어려움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게 됩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내용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린 적이 있습니다. 어차피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위함인데, 왜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나에게서 치워 달라는 기도를 하셨을까? 또 다윗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극찬과 인정을 받은 다윗은 광야에서 사울에게 쫓겨 다니던 긴 시간 동안 하나님께 “원수를 죽여 달라. 원수와 그 자녀와 자손들을 거지가 되게 해 달라”는 저주의 기도를 합니다. 사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셨다는 기록은 없지만, 조용히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다윗은 그 길고 끔찍했던 시간을 잘 견뎌 이스라엘의 왕위를 계승하는 가문이 되었으며,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는 본래의 사명을 다 이루셨습니다. 욕구를 인정하고 지지받은 경험은 더 중요한 것을 선택하고 이뤄 가는 에너지를 공급하며, 행동의 방향과 목표를 찾아 줍니다.
남편의 늦은 귀가가 잦아지고 남편의 인정과 보살핌도 못 받고 무시당하며 사는 불행한 여자가 되어 버린 저는, 나를 불행하게 만든 사람이 남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분노가 치밀었고 거울을 깨뜨리는 마녀처럼 남편에게 감정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남편 또한 감정적인 행동으로 반응하자 저는 정신적인 살인에 가까운 정신적인 폭력을 선택했습니다. 이런 남자와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거나 며칠이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죽은 관계를 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러한 분노 이면에 있는 나의 진짜 감정을 들여다보기 위해 나에게 어떤 기대가 있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그것은 남편과 함께 좋은 시간을 가지지 못해 섭섭하고 속상하고 남편의 건강이 염려되어 안타까운 마음이었습니다. 이처럼 감정적인 행동 뒤에 숨겨진 자신의 진짜 감정을 찾아 그럴 수 있다고 지지해 주고 열어 주면 다시 에너지가 생겨나 새로운 행동의 방향이 보입니다.
아이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핸드폰이 갖고 싶은데 많이 기다려야 해서 속상하구나.” 저는 단순히 아이가 가지고 있는 감정과 욕구를 제 입으로 말해 주고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해 주었습니다. 아이의 욕구를 다 실현해 주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자 우리의 관계는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욕구 조절도 못 하는 아이로 오해받던 아이는 자신의 본질에 가깝게 살고 있었던 것이고, 저는 그것을 인정하면서부터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는 아이의 모습이 장점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마음과 태도가 달라지면서 아이도 함께 세워 가는 규칙 안에서 튕겨 나가거나 거부하지 않고 스스로 욕구를 조절하기 시작했습니다. 존재를 인정받은 경험은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만들어 주고 그것은 우리가 더 큰 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선택하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세 번째 돌봄: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 사실 돌보기
나이 어린 사람이 제 이름을 함부로 불렀을 때 저는 당황스럽고 불쾌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에 대해 저는 ‘나를 불쾌하게 만든 그는 매너 없는 사람’이라는 정의를 내렸고, 그것이 그의 실제라고 보게 되었습니다. 나의 판단에 동조하지 않는 남편에게조차 저는 또 다른 판단 기준을 통해 판단을 이어 가고 있었습니다. 비단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뿐만 아니라, 늦게 들어오는 남편의 행동에서도 ‘날 사랑한다면 그렇게 행동할 수 없어. 나를 무시하는 게 틀림없어. 난 비참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비참한 기분이 든 제가 그런 기분을 들게 만든 원인 제공자에게 그저 섭섭하고 속상한 감정만을 표출할 리 만무하지요. 그에게 분노하고 용서할 수 없을 정도의 마음이 동반되지 않겠습니까?
‘감정이냐 감정적이냐’의 문제 다음에는 ‘사실이냐 사실적이냐’ 하는 문제를 꼭 짚어 봐야 합니다. 내가 보고 있는 사실의 많은 부분이 나의 ‘판단에 의한 사실적인 것’임을 깨닫는 것은, 관계 안의 불필요한 오해와 오류를 제거하는 길이고 본질의 왜곡을 피하는 방법이며 감정적인 행동을 막아 주는 결과를 얻습니다.
개인적인 일로 우울한 이웃이 내 인사에 시원찮은 반응으로 대했는데 그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내가 뭘 잘못했나 생각하기 시작하면 참 어려운 문제가 됩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본 하나만 이야기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뤄야 하는 것은 사실 그 자체이지, 미루어 짐작하여 사실보다 더 사실적으로 믿게 하는 판단이 아닙니다. 이러한 판단은 두려움을 조성하고 현재를 놓치게 하는 주요 요인이 됩니다. 아이가 공부를 안 하고 있을 때도,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부모들이 가지는 막연한 두려움을 포함해서 아직 겪지 않은 일을 미리 염려하는 것은 실제적인 분석에 의한 파악이라기보다는 막연한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자신의 신념이 감정을 결정하는 데 주요한 요인이 된다고 말합니다. 즉, 자신의 경험과 지식의 필터를 통해 느끼고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신념이 우리의 경험과 지식이 축적되어 만들어졌다고 할 때, 현재 눈앞에 벌어지는 사실과 신념의 고리를 끊는다는 것은 감정의 확장을 막는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진실과 본질에 가까운 것을 바로 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네 번째 돌봄: “나는 누구의 삶을 살고 있나” - 경계선 돌보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19:19). 우리는 흔히 이 말씀을 나보다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더 많이 사랑해야 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말씀 그대로 의미를 찾자면 “네 이웃을 네가 네 몸을 사랑하는 것같이 사랑하라”입니다. 즉, 내가 내 몸을 잘 사랑하면 이웃도 잘 사랑할 수 있고, 나를 잘 사랑하지 못하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또 내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으로, 또한 사랑하는 것만큼의 범위 안에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는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의 너무나도 정확한 말씀입니다. ‘나는 나, 너는 너’라는 개개인의 경계선이 아니라 내가 소중한 만큼 너도 소중하다는 인식이 바로 경계선입니다.
아이들은 꾸준히 부모와 양육자로부터 자신의 감정과 욕구에 대한 지지와 인정을 통해 공감을 받아 먼
저 자신을 공감하고 지지하는 능력을 계발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이 생략된 채 “때리는 것은 나쁜 행동이야. 너 그러면 혼날 줄 알아”와 같은 비난과 판단의 훈육은 자신을 바르게 보지 못하게 하고, ‘나쁜 행동이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을까 봐’와 같은 행동 결과와 평가에만 집중하게 합니다. 내 감정과 욕구 대신 타인의 감정과 욕구를 강요받은 아이들은 점차 자신에 대한 이해보다는 타인의 것이 더 중요해집니다. 내 감정과 욕구가 무엇인지 찾기가 점점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경계선이 건강하게 세워지지 못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이 내 욕구인 줄 압니다.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세상이 좋다고 여기는 가치가 내 욕구를 차지합니다. 그렇게 경험해 온 신념들이 내 욕구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경계선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의 모습을 잘 보여 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38-42).
마르다를 어렵게 만들고 있는 ‘마르다의 착각’을 세 가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내가 옳다. 둘째, 너 때문이다. 셋째, 너를 고칠 수 있다. 내가 옳았던 마르다는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자신과 같은 선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이 잘 안 될 경우의 원인은 그렇게 선택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은 사람들 때문이라고 생각하지요. 내가 옳고 다른 사람이 틀렸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를 위해서라도 상대방을 고치려고 하겠지요. 특히 그 사람이 남편이나 내 자녀라면 마땅히 고쳐 줘야 한다고 생각할 거고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부부간이나 자녀와의 문제에서 우리의 이러한 세 가지 착각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게 하고 점점 멀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드러내지 못하거나 과도하게 집착하여 얻으려고 하는 것 모두 그것을 통해 인정을 얻으려는 목적의 또 다른 방식일 뿐입니다. 그래서 소유에 집착하고 성공에 목을 매며 내가 하는 일, 능력, 힘, 희생, 성과, 봉사와 헌신조차 누군가 인정해 주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합니다. 결국은 내 삶이지만 나는 없습니다. 내 집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점령하고 있습니다. 우리 집에서 쉬지도 성장하지도 못하며 나는 점점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비어 가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돌봄: “내 이야기를 하자” - 경계선 지키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침마다 저희 집에는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다른 집과 마찬가지로 시간 맞춰 학교에 보내려는 부모와 늑장을 부리는 자녀 간의 등교 전쟁이지요.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학교에 가는 것은 누구의 일인가? 만약 지각을 한다면 그것은 누가 책임져야 하는 것일까?’ 그렇습니다. 학교에 가는 것도 지각을 해서 벌을 받는 것도 모두 아이의 몫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제일 먼저 한 행동은 이 문제의 책임을 아이에게 넘겨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이 스스로 가능한 시간을 정하게 하고 그 시간엔 데려다 주지만 그 시간 이후로는 데려다 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다음 날 두 아이 중 한 아이가 늑장을 부렸습니다. 저는 준비된 아이만 데리고 출발했습니다. 물론 그 이후로 등교 전쟁은 여간해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배우는 첫 번째 경계선은 가정 내 부모와의 관계에서입니다. “내 자식이니까 너는 이렇게 해야 해.”, “엄마 말만 들으면 돼.”, “나는 남편도 필요 없어. 자식만 있으면 돼.”, “누가 감히 내 자식한테……” 혹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분명히 경계선 침범입니다. 내 것은 지키면서 아이의 것을 아이의 성장에 맞춰 내어 주는 것, 이것이 부모의 역할이며 부모와 자녀 간의 건강한 경계선을 경험하고 만들어 가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떠나보내야 할 때 떠나보내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