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는 나의 날개
차인홍 지음 | 마음과생각
휠체어는 나의 날개
차인홍 지음
마음과생각 / 2012년 12월 / 248쪽 / 13,000원
서문 : 멈출 수 없는 사랑으로
나는 비행기에서 창가 쪽 좌석에 앉아 점점 멀어져가는 지상 위 풍경을 바라보는 걸 너무도 좋아합니다. 비행기가 하늘 높이 올라갈수록 더 많은 풍경을 가슴에 다 품은 듯한 충만함에 큰 소리라도 지르고 싶을 지경이 되곤 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일 것입니다. 내게 소아마비가 찾아온 두 살 이후, 나의 놀이터는 방 안이나 마루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담 너머에서 들려오는 동네 아이들의 뛰노는 소리가 언제나 내 귀를 자극했지요. 오전이면 놀고 싶고, 오후가 되면 뛰고 싶고, 저녁이 되면 날고 싶은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면 나는 형님 들으라는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 좀 밖에 데려다 달라는 항변이었습니다.
그럴 때 형님은 나를 업고 동네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이 마침 버스 종점이었던 터라 빈 버스가 오면 나를 버스 맨 앞자리에 앉혀서 반대편 종점까지 왕복으로 실컷 다녀오라는 뜻이었습니다. 방 안에만 살아야 하는 나를 위한 형님의 절묘한 아이디어였던 것입니다. 그때 나는 운전석 바로 뒷자리에 앉아 그 큰 창문 너머로 세상을 바라보는 걸 너무도 좋아했습니다. 내 눈앞에 펼쳐진 세상의 큰 길, 작은 길 하나하나 다 놓치지 않으려고 얼마나 열심히 보고 또 보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매의 눈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였나 봅니다. 10년 전, 나의 이야기가 처음 방송이나 사람들에게 소개되면서 나는 지나온 나의 생을 매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소아마비로 걸을 수 없었던 두 살 때부터 나의 앞에, 나의 뒤에, 그리고 나의 좌우 옆에 누군가가 계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누군가가 나의 앞뒤, 좌우에서 나와 함께 계셨기에 내가 여기까지 이를 수 있었다는 게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뒤로 10년이 지났고, 나의 첫 번째 책인 『아름다운 남자, 아름다운 성공』도 절판이 되었지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멈출 줄 몰랐습니다. 나는 그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의 이름이 바로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악장_ 사랑은 우리에게 악기를 건넨다
모든 인생은 선물이다
내가 가난과 소아마비 장애를 딛고, 성공한 미국 대학 교수로, 또 바이올리니스트로,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방송에 몇 번 소개되었기 때문일까요? 세계 어디를 가든, 인생의 장벽을 넘어서는 특별한 비법을 물어오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마다의 한계 앞에서 좌절하며 울고 있는 영혼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일 것입니다. 나는 그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내가 그토록 막막함을 느끼던 때가 언제였나 돌아보곤 합니다.
나는 1976년도부터 ‘베데스다 현악 4중주단’의 제1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을 했습니다. 나를 포함해서 네 명의 재활원 출신의 아이들로 구성된 베데스다 4중주단은 그 구성에서부터 활동에 이르기까지 순전히 주변 분들의 도움으로 움직이곤 했습니다. 그 일환으로 대전의 목원대학교에서 열린 오케스트라 겨울합숙훈련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휠체어를 타거나 목발을 짚은 우리들에겐 초등학교 졸업장밖에 없었지만, 대학생들과 연배가 비슷하니 참여해도 된다는 주변 분들의 배려 덕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느낀 것은 냉혹한 현실에 대한 자각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좋은 가정에서 정규 과정의 음악 수업을 받고 자란 그들의 배경은 내게는 넘을 수 없는 벽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동안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세상의 벽을 마주한 심정이랄까요. 초등학교 졸업장, 가난, 생존, 휠체어……. 내가 가진 조건이나 배경을 다 헤아려보니 내 힘으로는 결코 어떤 미래도 보장받을 수 없다는 사실과 맞닥뜨렸습니다. 그 아득한 벽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내가 느꼈던 한계나 절망과 달리, 30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대학교수로, 지휘자로, 또 휠체어를 타고 자유롭게 전 세계를 돌며 연주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결코 넘어설 수 없다 생각했던 그 벽을 나는 언제 넘어섰던 것일까요?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 벽을 넘어서게 되었을까요?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면 나도 누군가의 처진 어깨를 조금이나마 일으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그것이 ‘스펙’보다 ‘스토리’가 중요하다는 이 시대에 나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이유입니다.
기다리는 자에게 찾아오는 것
내가 아홉 살 되던 해에 ‘성세재활원’이라는 장애인 시설에 맡겨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곳에 가면 최소한 초등학교 과정을 이수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러나 정부 보조가 열악했던 시대상을 반영하듯, 재활원의 운영 현실은 영양실조로 쓰러지는 친구가 있을 정도로 매우 열악했습니다. 재활원에 맡겨지던 날부터 나는 무어라 형언하지 못할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의 어느 날 밤엔 불현듯 잠에서 깨어나 창문 너머의 달빛을 바라보다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휘영청 달은 높이 떠 있고, 나는 눈을 뜬 채 내 가슴속에 밀려드는 고독감을 꼼짝없이 견디고 있었습니다. 그 서늘하고 커다란 재활원의 창문을 보고 있노라면 한겨울이든 한여름이든, 봄이든 가을이든 왜 그렇게 가슴 한구석이 시려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미션스쿨로 세워진 그곳에 들어가면서부터 나는 난생처음으로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의 존재에 대해 처음으로 눈을 뜨게 되었지요. 물론 나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때 그 시절의 골짜기도 주님의 보호와 인도하심 속에 지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 당시 날마다 기적처럼 이어졌던 만남의 축복은 나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자식처럼 돌보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게 해주는 증거였습니다.
그중 가장 놀라운 증거는 강민자 선생님을 통한 바이올린과의 만남이었습니다. 봄볕이 따스하던 그날, 우리는 여느 때처럼 재활원 마당에서 목발을 짚거나 땅바닥을 맨몸으로 구르며 천진하게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서울대학교 출신의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인 강민자 선생님이 유성온천에 오셨다가 봄볕이 좋다는 이유로 택시에서 내려 만년교를 혼자 걸으셨습니다. 그 다리를 건너자 둑 옆에 있던 재활학교가 보였고, 그곳에서 놀고 있는 장애아들의 모습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선 강 선생님에게 어떤 마음을 불어넣어 주셨던 것일까요? 선생님은 갑자기 재활학교 안으로 들어오시더니 “제가 이 아이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주고 싶은데요.”라고 제안하셨습니다. 그 당시 바이올린을 배운다는 것은 꿈 같은 일이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바이올린 수업 첫날, 강 선생님이 들려주셨던 바이올린 소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악기 소리가 저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지, 어떻게 그 소리가 내 마음속을 뚫고 들어와 나를 어루만질 수 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바이올린에 대한 나의 사랑은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네가 아직 나를 몰랐을 때, 나는 네 이름으로 너를 불렀다.
나는 여호와다. 나 외에 다른 하나님은 없다.
네가 나를 알지 못하나, 내가 너를 강하게 해주었다.
- 이사야 45장 4-5절
이후로 나는 왜 그렇게 연습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일까요?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나에 대한 존중감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내 손에 맞는 악기, 내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이 소리를 사랑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충실했던 것입니다. 선생님이 내게 주신 특별한 기회들도 잊을 수 없습니다. 바이올린을 배운 지 1년쯤 지난 후였을까요? 충청남도에서 개최하는 음악콩쿠르에 출전하여 영예의 1등을 차지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특별한 무대에 종종 서게 되었습니다. 강민자 선생님은 내게 왜 그런 기회들을 주고 싶어 하셨을까요? 나중에 어른이 된 후 강 선생님과 미국에서 재회했을 때, 그때의 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차 교수는 그때 참 눈빛이 남다른 아이였어. 이런 생각이 들곤 했지. 저 아이는 정말로 나를 기다렸구나.”
미국 생활을 하며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는 동안 나는 ‘남다른’ 얼굴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구두 수선공이든, 환경미화원이든, 혹은 학자나 예술가든 내가 ‘남다르다’고 느낀 사람들의 얼굴 속에는 평안과 행복, 당당함, 겸손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그들에게는 결코 초라한 표정이 없었다고나 할까요? 비단 표정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삶 또한 존경받을 만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에게선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한 값진 열매가 있었고, 자신에 대한 존중감과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만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빛을 전해주는 느낌까지 있었지요. 나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인생의 원리라고 믿습니다.
때론 에돌아가는 듯해도
그렇게 중학교 3년 과정을 지날 즈음,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일본 ‘태양의 집’으로부터 초청장이 날아왔던 것입니다. 일본에서 최초로 장애인들에게 기술을 가르쳐서 물건을 생산하는 대단위 공장들이 있는 ‘태양의 집’은 다섯 명의 학생들을 초청하여 1년간 연수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했습니다. 일본에 가게 되면 바이올린을 더 이상 배울 수도 없고, 음악에 대한 꿈도 접어야만 했지만, 어차피 나는 음악가로서의 꿈을 꿀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1년 동안의 음악적 공백이 어떤 의미인지를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의 삶을 인도하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그 공백의 의미를 다 알고도 남으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나를 일본으로 이끌고 계셨습니다. 내게 음악의 길을 열어주셨던 그분이 이번에는 왜 나를 거기까지 인도하셨던 것일까요? 나는 그 속에서 1년 동안 살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누구든 장애인이 될 수 있기에 장애인을 위한 투자와 배려를 당연하게 여기는 그곳에서 나는 성격마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던 듯합니다. 외부의 시선 때문이든 스스로 만든 굴레 때문이든 자꾸만 움츠러들었던 내가 어느덧 도전하고 성취하려는 태도도 갖게 되었습니다. 사람들과 만나 어울리고 교제할 뿐 아니라 새로운 일에 뛰어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아마도 그것이 일본에서의 생활을 통해 내게 주시려 했던 하나님의 첫 번째 선물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실제로 나는 일본에서 양지의 운동장을 마음껏 뛰어다녔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냐고요? 그것은 내게 새로운 날개가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태양의 집에서는 양다리 모두 힘이 없는 내가 목발을 짚고 다니는 걸 보고 곧바로 휠체어 한 대를 내어주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평소 좋아하던 ‘운동’을 마음껏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운동을 하다 보니 나도 몰랐던 내 안의 운동신경들이 점점 살아났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나는 석 달 후 일본 오이타에서 열린 제1회 아태장애인 경기대회에 한국 대표로 출전, 휠체어장애물 경기, 800미터 달리기, 소프트볼 던지기에서 각각 금, 은, 동메달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기술을 배우기 위해 떠났던 일본에서 하나님은 내게 메달까지 안겨주고 계셨습니다.
어디 운동 경기뿐이겠습니까? 그 시절, 내가 운동을 하느라 휠체어를 누구보다 민첩하고 정교하게 다룰 수 있게 된 것은 훗날 내가 지휘자로 살아가는 데에도 적잖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음악회를 관람하러 오는 많은 청중들은 무대 위에 세워진 지휘 단상을 보며 매우 놀라워합니다. 생각보다 너무 짧고 급한 경사로로 단상이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짧고 가파른 경사로에 내가 순식간에 올라가서 지휘하다가 쏜살같이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것까지 내다보시고 내 나이 열여섯에 나를 일본에 보내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실수가 없고, 그분 안에 살면 우리가 겪는 모든 경험들이 다 유익하다는 것을 이 일을 돌아봐도 알게 됩니다.
2악장_ 사랑은 슬픔마저도 함께하는 것이다
가장 비천한 곳에서 가장 깊은 은총을
일본의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 그전과는 사뭇 다른 기대감과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뭔가가 새로 시작될 것 같고, 그 일을 잘해낼 것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나를 기다리고 있는 현실은 기대와는 정반대의 것이었습니다. 강민자 선생님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고, 나는 재활학교가 아닌, 집에서 생활해야 했는데 내게 주어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중학교 졸업장이 없는 터라 고등학교에는 진학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족들과 친지 분들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도장 파는 기술이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느냐?”고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유독 손발이 묶여 있었기 때문일까요? 나는 제대로 된 믿음이 없었음에도 내 인생을 내가 주관할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게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누군가의 인도하심을 목마르게 바라보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이 올 때 감사하며 달려갈 준비를 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모습을 하나님께서도 보고 계셨던 걸까요? 어느 날 갑자기 고영일 선생님이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강민자 선생님의 대학 후배라 그전부터 나와 잘 알고 지냈던 이분은 당시 대전의 목원대학교 음악대학에 강의를 나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분의 마음에 다음과 같은 꿈이 생겼다고 합니다. ‘재활원 출신의 아이들 네 명으로 현악 4중주단을 만들어서 세계적인 4중주단으로 키워야겠다.’ 우리는 선생님의 그 꿈 때문에 음악을 다시 할 수 있었습니다. 재활학교 이사장님이셨던 남 장로님은 우리 4중주단의 이름을 ‘은총의 샘’이라는 뜻을 지닌 ‘베데스다 4중주단’으로 지어주시면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너희들은 악기의 좋고 나쁨은 신경 쓰지 말고, 사람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소리를 내는 데 집중해라. 악기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너희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소리를 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그 말씀은 정곡을 찌르는 말씀이었습니다. 마음 깊이 동의가 되었습니다. ‘맞다. 현악기는 그게 가능하다.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것,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연습은 각자의 몫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가끔씩 음악적인 기법을 가르쳐주기도 하셨지만, 대부분의 연습 시간은 혼자 악기를 붙잡고 싸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연습 분량이나 연습 태도에 대해 가혹할 만큼 혹독하게 요구하시는 선생님의 주문에 따라, 우린 날이면 날마다 각자의 연습실에서 악기를 붙잡고 홀로 분투를 해나가곤 했습니다. 좁고 후미진 주택가의 좁은 집에서 네 사람이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며 살았던 그 3년의 시간은 어쩌면 내 생애 가장 힘들었던 전투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안의 고독한 나와 싸우고, 내 안의 무기력과 싸우며, 내 안의 뛰쳐나가려는 욕구와 싸우던 시간이었습니다. 새벽 6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내 연습실이던 연탄광에 들어설 때 온몸을 휘몰아치던 새벽 칼바람은 얼마나 매서웠던지요. 손가락은 얼지 않았지만 하루 10시간 이상 휠체어 위에 놓여 있던 내 발가락들은 심하게 얼어 터져서 상처 나고 곪는 일들이 다반사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고백하건대, 우리는 그 시절 가장 깊은 음악, 가장 아름다운 화음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음악 이론과 지식은 잘 모를지언정 온몸과 마음을 다 적시며 음악의 세계 속에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우리 모두는 유학 생활을 하며 음악 공부를 했는데 유학 기간에도 그때만큼 심혈을 기울이며 음악에 집중한 적이 없다 할 정도로 그 시절의 음악은 우리의 전부였습니다. 그 치열한 몰입의 결과였을까요? 4중주단이 모여 연주를 하면 말로 표현 못 할 앙상블이 우리를 감싸곤 했습니다. 서울에서 내려온 음악가들도 우리가 내는 앙상블에 놀라워하며 박수를 보내곤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베데스다 4중주단으로 연습하고 활동했던 3년은 지금의 음악 인생을 가능하게 한 밑거름의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훗날 내가 유학 생활을 마친 뒤 대전에 와서 대전시향 악장으로 일할 때 나보다 훨씬 화려한 경력을 가진 연주가들을 이끌 수 있었던 힘도 이미 그때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때 나는 손가락을 움직이는 테크닉이 아니라 음악의 감정, 음악의 조화, 음악의 느낌을 확실하게 배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요? 그 비밀은 바로 ‘간절함’이었습니다. 그 옛날 예루살렘 양문 곁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여 있던 환자들처럼, 우리 4중주단은 늘 간절하게 연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