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김성원 지음 | 토기장이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김성원 지음
토기장이 / 2012년 12월 / 328쪽 / 13,000원
정국용 : 한국입체교육정보원 원장 - 북한 실리콘밸리 건설의 주역들을 키운다
배우고, 실행하고, 다시 배우고, 또 실행하고! 한국입체교육정보원 정국용 원장의 남한살이 12년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다. 그는 북한에서 청진광산금속대 자동화시스템학과를 졸업했다. 한국에 와서는 40대를 넘긴 나이에 정수기능대학(현 한국폴리텍1대학) 자동화시스템학과에 학부생으로 입학했다. 백석대 신학대학원 과정도 병행했다. 낮에는 신학을, 밤에는 공학을 공부했다. 대학 졸업 후엔 1년 정도 로봇회사에 다니며 야간 신학대학원을 다녔다. 서울산업대(현 서울과학기술대) 케타트로닉스학과를 졸업하고, 한세대에서 유비쿼터스(Ubiquitous) 관련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직업 훈련을 위해 한국교육기술대도 졸업했다. 단언컨대 한국에서 정 원장보다 가방끈이 긴 탈북자는 없다.
낮에는 신학도, 밤에는 공학도
하루는 하나원에서 남한의 시설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정 원장이 몇 사람과 함께 간 곳은 정수기능대. 그중에서도 자신이 전공한 자동화시스템학과에 관심이 갔다. 하지만 별로 기대는 하지 않았다. 북한에서는 5년제인데 남한의 2년제 학교에서 뭘 배울 게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강의실을 가보고는 충격을 받았다. 교실에 가득한 최신 컴퓨터를 학생들이 마음껏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에서는 실습 장비라는 게 열악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대신 북한에서는 이론 공부에 치중했다. 정 원장은 이론에 대해서만큼은 남한의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지만 컴퓨터 앞에서는 작아졌다. 마침 “입학원서를 써 놓고 가도 된다”는 학교 측의 말에 곧바로 원서를 써서 제출했다. 2001년 2월, 그는 하나원 수료와 함께 정수기능대에 01학번 신입생으로 입학했다.
정수기능대와 백석대 신학대학원을 동시에 다니게 된 이유는 이렇다. 정 원장은 탈북과 함께 중국에서 한 재미교포 선교사를 만났다. 정 원장은 종교는 아편이고, 기독교는 제국주의의 앞잡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선교사는 달랐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선교사의 인품에 홀딱 반하고 말았다. 가족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성경 공부에도 참여했다. 그러다 아내와 자녀를 남겨 두고 정 원장이 먼저 한국에 왔다. 하나원 교육을 마치고 사회에 나오니 아득했다. 의지할 누구도 없었다. 그때 중국에서 만났던 그 선교사가 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다짐했다. ‘나도 남한에서 그 선교사님처럼 살자.’ 신학대학원을 알아봤더니 “북한 대학 졸업장이 있으니 신학대학원 입학이 바로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주간엔 백석대 신학대학원, 야간엔 정수기능대를 다니게 된 것이다.
직업은 없지만 꿈이 있습니다
정 원장은 먼저 취업을 했다. 정수기능대 교수에게 소개받은 경기도의 한 로봇 제작 회사였다. 회사 규모는 작았지만 그만큼 열심히 일하면 보람도 클 것 같았다. 실무가 또다시 걸림돌이었지만 3개월 좌충우돌 끝에 로봇 조립 속도가 경력 20년의 선배 직원들을 앞질렀다. 다 잘했지만 정 원장에겐 한 가지 불가능한 영역이 있었다. 칩Chip, 즉 반도체 분야였다. AS가 들어오면 기계 쪽은 정 원장이 직접 수리할 수 있었지만 칩 쪽은 경험이 전무했다. 칩 고장은 무조건 다른 팀으로 넘길 수밖에 없었다.
이게 반복되다 보니 특유의 오기가 발동했다. 사장을 찾아가 칩을 배우고 싶다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일주일 중 2-3일은 칩을 다루는 개발팀에서 자리 잡고 칩을 배웠다. 하지만 개발팀 어느 누구도 그에게 칩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다. 며칠 후 정 원장은 사장을 다시 만나 “배려해줘서 고맙지만 신학에 전념해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로봇 회사는 11개월 만에 자진 퇴사했다. 그때 정 원장에겐 이미 딸린 가족이 있었다. 정 원장이 하나원에 있을 때 방문했던 천기원(두리하나선교회 대표) 목사가 정 원장의 소식을 듣고 두 달 만에 중국에 있던 가족들을 국내로 데려와 주었던 것이다. 천 목사는 나중에 정 원장의 신학대학원 후배가 됐다. 딸린 가족은 있지, 회사는 그만뒀지, 신학대학원 공부는 마쳐야 되지, 막막했다. 그즈음 메카트로닉스라는 신기술이 정 원장의 마음에 꽂힌 상태였다. 알아보니 서울산업대에 그 학과가 있었다. 국내에서도 신설된 지 얼마 안 된 학과였다. 원서를 접수하고 면접을 보러 갔다. 면접 교수 여덟 명 중 실향민 출신의 교수가 있었다. 합격이었다.
회사원에서 다시 학생으로
실향민 출신의 교수는 “앞으로 친구처럼 지내”라며 정 원장을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생계가 어려운 걸 알고는 프로젝트에도 참여시켜 줬다. 그중 한 프로젝트는 강판 등 부품들의 흠집을 체크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니 ‘통신’이 핵심 기술이었다. 그는 통신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하고 교수를 찾아갔다. 전문 학원에라도 다니며 통신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교수는 완강히 반대했지만 정 원장은 계속 찾아가 설득했다. 이렇게 해서 서울과학기술대(전 서울산업대) 대학원을 졸업할 때는 하드웨어, 칩, 조립, 통신 등 학원만 10여 곳을 수료했다. 일본에 가서 국제 네트워크 전문가 CCIE 자격증까지 취득했고 그 밖에 운영체제 솔라리스, 선시스템 관리자 자격증 등도 취득했다.
전문 학원을 다닐 때였다. 그때 막 유행하기 시작한 유비쿼터스라는 용어에 솔깃했다. 석사 과정을 마치고 공학박사 공부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지도교수가 연세대와 고려대 정보통신학 교수를 소개해줬다. 면접을 봤는데 두 군데 다 불합격이었다. 직업이 없다는 이유였다. 유비쿼터스 박사 과정을 찾아봤더니 마침 한세대에서 막 그 과정을, 대한민국에서 하나밖에 없던 유비쿼터스 박사 과정을 개설한 참이었다. 담당인 권창희(현 한세대 컴퓨터공학과 교수) 한국 U-City학회 회장 교수를 찾아가 자신의 화려한 이력서를 보여주자 권 교수는 “박사 과정을 하면서 연구소에서 같이 일하자”고 제안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정 원장은 박사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퇴로가 없는 길,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하루는 교수의 후배라며 연락이 왔다. 경비보안업체를 운영하고 있는데 탈북자들을 취업시키고 싶다는 거였다. 친구가 소방 관리 업체를 운영하는데 학교 200개를 관리한다고 했다. 여기에 먼저 탈북자를 취업시키고, 취업한 이들은 다시 경기도 소재 동원대 소방학과 야간 과정에 입학시키자는 제안이었다. 그중 한 학급을 산학과정으로 해서 정 원장이 지도 교수를 맡는 조건이었다. 그렇게 사업을 시작했다. 정 원장의 임무는 학생 모집과 교육이었지만 학생 모집은 전혀 안 됐다. 2개월이 넘자 자신을 불러들였던 대표는 업체를 폐업시키겠다고 했다. 정 원장은 “내가 맡아서 해볼 테니 교육을 하게 해 달라”고 했고, 그 대표의 소개로 지금의 서울 구로구 건물로 오게 됐다.
정 원장이 이곳에 올 때만 해도 한국입체교육정보원 사무실은 불당으로 쓰이고 있었다. 임대료 낼 돈은 물론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탈북자 대상 직업 교육을 한다는데 지자체에서 분명 지원해줄 것이다’라는 기대로 관할 구청을 찾았다. 구청이 배정한 탈북자 대상 예산은 고작 세 명분밖에 없다고 했다. 그때 알고 지내던 세무사에게 부탁해서 한국직업능력진흥원이란 이름으로 비영리 단체 등록을 했다. 정부 지원을 받기 위해서다. 그리고 통일부로 찾아갔다. “기회의 땅인 줄 알고 남한에 왔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아무리 노력하고 전문성을 갖추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통일부에서 도와 달라 이번 예산만큼은 꼭 지원해 달라”는 정 원장의 말에 기적처럼 담당공무원의 자세가 바뀌었다. “고맙게도 통일부에서 저를 돕는 마음으로 예산을 검토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열다섯 명에 대한 6개월 과정 직업 훈련 예산을 지원해주었습니다.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에서도 저희 정보원을 사회적 기업으로 채택해 재정적으로 지원해주었습니다. 탈북자 직업 교육에 날개를 달아준 것이죠.”
북한에 실리콘밸리를
정 원장의 꿈은 북한에 미국의 실리콘밸리 같은 산학 협력의 모델을 만드는 것이다. “이론은 실습을 통해 검증되고, 실습은 이론으로 더욱 탄탄해지는 겁니다. 북한이 필요로 하는 것은 이론과 실습 두 가지 다 병행할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그래야 스스로 역량을 키워 안착할 수 있고, 통일 후 혼란도 줄일 수 있습니다.” 통일을 말하면 두 부류로 갈린다. 통일 비용을 걱정하는 이들과, 남북 간 협력으로 인한 시너지로 통일 비용을 커버하고도 남을 통일 편익이 발생한다는 이들이다. 적어도 정 원장이 언급한 이론과 남한의 기술 및 실습이 결합한다면 ‘북한엔 첨단의 실리콘밸리가 들어설 수 없다’는 전제는 의미를 잃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통일 후 북한의 실리콘밸리’를 생각한다고 해서 너무 먼 미래를 보는 것도 아니다. 그는 당장 한국의 각 지역에 이 모델들을 정착시키고자 한다.
“현재 탈북 대학생 열 명 중 일곱 명이 중도 탈락하거나 가까스로 졸업합니다. 대학 입학이 무의미한 상황입니다. 탈북 청년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학위도 학위지만 직업 교육입니다. 전문 직업 교육을 시켜서 전문 분야에서 일하게 해야 합니다. 각 분야 전문가가 될 때 그 모델을 그대로 북한에 접목시킬 수 있기 때문이죠.” 개인적인 앞으로의 계획이 뭔지 물었더니 조금도 망설임 없이 그는 대답했다. “최고가 되어야죠. 최고가.”
이애란 : 북한전통음식문화연구원 원장 - 음식으로 남과 북을 ‘확’ 버무리겠습니다.
“그동안 이곳은 탈북자 강제 북송 저지와 통일 운동을 위한 성지역할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지역 주민의 민원과 교회, 경찰 및 구청 등의 결정으로 인해 아쉽지만 77일째가 되는 오늘로 마무리할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독일 통일 직전 라이프치히의 니콜라이교회 앞에 모였던 수만 명의 집회가 독일 통일의 기폭제가 되었던 것처럼, 이곳이 언젠가는 한반도의 통일을 위한 초석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지난 4월 말, 서울 옥인동 옥인교회 앞 도로변. 77일간 ‘탈북자 강제 북송 반대’ 집회를 이끌었던 국회의원 박선영 씨가 기자회견을 갖고 있었다. 박 의원의 집회 중단 선언으로 이제 ‘탈북자 강제 북송 반대’ 목소리는 잦아드는 것처럼 보였다. 박 의원과 함께 단식하며 시위를 주도했던 이애란(북한전통음식문화연구원 원장) 박사도 ‘당연히’ 집회 중단에 동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박사는 다음 날 “나는 탈북자 강제 북송 반대집회를 끝낸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집회를 계속 이어갈 뜻을 분명히 했다. 이후 집회는 비록 소수지만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녀를 바라보는 두 갈래 시선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존경과 의혹, 두 갈래였다. 탈북자의 인권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는 것과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하는 것 아니냐는 거였다. 이 박사는 옥인교회에서 철수하기 하루 전 자신의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솔직히 저는 이번 옥인교회와 종로구청 사태를 핑계 대고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습니다. 하지만 저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이 무섭고 책임과 참여를 요구했던 남한 국민들에게 미안해서 그렇게 할 수는 없겠네요. … 저는 처음부터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실수할 수도 있고 하는 일이 부실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라도 따라가야 할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밝힌 적도 있다. “저는 2010년, 한 일도 없으면서 여성의 사회 정의와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했다고 미 국무부로부터 ‘용기 있는 국제여성상’을 수상했습니다. 저는 추호도 제가 일을 많이 해서 이 상을 받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분단조국에 태어나 6ㆍ25 전쟁 시기 월남한 할머니 할아버지 때문에 매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출신 성분의 장벽에 막혀 자살을 기도했던 적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인지 누구보다도 북한의 현 정권에 대해 분노가 많고 북한 주민들의 현실이 안타까운 것도 사실입니다. 김정일이 죽기를 그처럼 원했는데 김정일은 죽었지만 세상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고 김정은의 북한 주민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더 강화되고 있습니다.”
시위 참여 이유에 대한 이 박사의 답변을 이처럼 길게 소개하는 것은 ‘의외’였기 때문이다. 이 박사를 만난 건 2012년 1월 말경이었다. 탈북자 강제 북송 반대 시위가 시작된 게 그다음 달 13일이었으니까 그녀를 만날 당시만 해도 ‘강제 북송’ ‘탈북자 인권’이란 말은 전혀 들어볼 수 없었다. 그녀의 본분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북한 전통 음식을 남한에 알리고, 이를 통해 밥상에서부터 통일을 이루는 게 바로 그것이다.
그녀를 찾아간 때는 설 연휴가 막 지난 무렵이었다. 그녀의 사무실 한 켠에는 ‘개성약과’ 박스가 더미로 쌓여 있었다. ‘설 시즌이다 보니 배달용으로 쌓아둔 거구나.’ 퍼뜩 든 생각이었다. “개성약과 주문이 많지요?” 이 박사야 남한에서는 워낙 상징성 있는 탈북자이고, 그녀가 만든 개성약과는 설날 공중파 TV에서도 소개됐던 터라 당연할 거라고 생각하고 던진 질문이었다. “없어요.” 이 박사의 답변은 짧았다. 표정은 싸늘하리만치 굳어 있었다. 엄살이 아니라는 얘기다.
통일은 밥상에서부터
“개성약과는 그래도 많이 소개됐던데 그렇게 주문이 없어요?” ‘설마’ 하며 다시 물었다. “요즘 저희만 안 되는 게 아니잖아요. 대기업이 순대 장사까지 하려는 마당에 우리처럼 남한 사회에 기반이 없는 회사가 제대로 될 리가 있겠어요?” 긴 탄식이 이어졌다. 이번엔 답변이 길었다. “남한 사회가 북한 음식에 대한 관심이 없어요. 북한 주민들이 먹을 식량이 없어서 굶어 죽고 있는 마당에 북한 음식이 뭐가 인기가 있겠어요? 거기다 탈북자들을 데리고 일을 하려니까 툭하면 아프다고 하고 효율성도 떨어지고, 제가 지금 사업을 하는 건지 구제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북한전통음식문화연구원에는 이 박사를 포함해 열한 명의 직원이 있다. 그중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탈북자들이다. 직원 수에 비해 수입이 턱없이 모자라다 보니 벌써 몇 개월째 임대료도 못 내고 있는 형편이란다. 이 박사는 4년 전 연구원을 만들고 나서 지금까지 거의 매일 ‘이 일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해왔다고 한다. 이 박사는 현재 경인여대 식품영양학과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가르치는 일 하나만으로도 보람 있고 생활하는 데도 크게 지장이 없을 것 같은데 굳이 연구원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답변은 짧고 분명했다. “제가 평생 지고 가야 할 사명이니까요.”
연구원의 표어는 ‘통일은 밥상에서부터’다. 기도 중에 마음속에 떠올랐던 문구다. 남북통일에 음식이 왜 중요하다는 걸까. 연구원 홈페이지에는 음식을 이렇게 소개해 놨다. ‘음식은 정이고 고향입니다. 음식은 함께 먹으며 외로움을 달래고 서로를 위로하는 위로제입니다.’ 그렇다면 이 박사에게 음식은 뭘까. 음식은 곧 남북을 잇는 가장 끈끈한 매개체다. “통일은 거창한 일이 아니고 함께 한 밥상에 둘러앉아 먹고, 함께 사는 일입니다. 가족 간에 친구 간에 아무리 싸우더라도 다음 날 한 밥상에 둘러앉으면 끝입니다. 남북 관계도 밥상부터 마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편견이 사라지게 되고, 친밀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거야말로 어느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통일인 거죠.”
개성약과, 블랙커피를 만나다
이 박사가 개성약과와 블랙커피를 내왔다. 이 박사가 직접 개발한 개성약과는 고려 시대 전통의 맛을 그대로 살린 것이다. 고려시대 때 개성약과는 특유의 파삭함으로 궁중에서는 물론 원나라 사신들에게까지 인기를 끌었다. 블랙커피를 곁들인 것은, 개성약과는 약과대로 전통을 살리면서도 현대인의 입맛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북한 음식이나 남한 음식이 다른 것 같지만 차이가 별로 없어요. 남한 음식이 서구화됐다고 하지만 불과 몇십 년일 뿐이에요. 아무리 서양 음식이 판을 치고, 거기에 익숙해있더라도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오는 몸속 DNA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남북한 음식의 공통점이고, 그걸 통해 통일을 열어 가자는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