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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크리스천

카터 콜론 지음 | 토기장이
180˚ 크리스천

카터 콜론 지음

토기장이 / 2012년 11월 / 272쪽 / 11,000원





시작하는 글_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여, 이제 돌이키라!



마지막 말씀이 선포되었고, 마지막 찬양도 끝났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예배는 이미 끝났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무 예고도 없이,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가 우리 교회를 휩쓸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수백 명의 회중이 자리에 머물러 기도를 드렸다. 몇몇은 무릎을 꿇었으며, 몇몇은 거의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다음 예배 시간까지 앉아 있었다.

그날 저녁 예배에는 더욱 특이한 일이 벌어졌다. 바로 침묵이 임한 것이다. 성가대가 무대 위에 섰지만, 아무도 평소처럼 찬양을 시작하지 않았다. 엄숙한 정적만이 예배당 가득 흐르고 있었다. 그 순간, 뉴욕 타임스퀘어교회에 있던 모든 이들은 이 일이 누군가에 의해서 계획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날 밤 우리는 모든 일을 제쳐 두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브리서 4장 16절).

우리는 이 구절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무언가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으며, 그때를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준비시키고 계셨다. 몇 주 동안 하나님의 강한 임재가 예배마다 가득했다. 회중들은 우리를 바라보며 무언가 인도해주기를 바랐지만, 우리 목사들도 주님 앞에 무릎 꿇는 일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떤 때는 성도들이 자비를 구하며 큰 목소리로 간절히 부르짖기도 했다. 또 다른 때는 거룩한 침묵이 예배당에 가득 임해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기도 했다. 우리 교회 초대 목사님이신 데이빗 월커슨 목사님께서도 그저 “하나님은 전심으로 구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말씀만 전할 뿐이었다.

하나님의 임재가 강력하게 임하시면, 우리는 마음을 철저하게 점검했다. 순간순간 믿음을 가지고 정결한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끗하게 준비시키시는 기간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는 빛의 시대가 아니며 어느 것 하나 빛에 속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자각하는 기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주님이 우리 도시에 임박한 재난을 경고하고 계심을 깨달았다. 동요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동시에 하나님은 반복적으로 하나님이 다스리시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확신을 주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부지불식간 재난에 사로잡힐 이들을 두 팔 벌려 받아 줄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이 재난이 임할지는 그 누구도 분명하게 알지 못했다.

9월 11일, 우리는 알았다. 세계무역센터 빌딩에 비행기가 충돌한 뒤 몇 분 지나지 않아서였다. 교회에 들어가 보니 수십 명의 성도들이 무릎을 꿇고 울며 기도하고 있었다. 나는 오히려 큰 소리로 외쳤다. “이제 모두 일어나세요!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경고를 계속 들어왔습니다. 이 순간을 위해 우리는 몇 주 동안 계속 기도하며 훈련받은 겁니다.”

성도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몇 분 만에 이리저리 흩어져 물, 식료품, 담요 등을 사왔다. 남은 이들은 샌드위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탁자를 세우고 구급 요원들에게 2주 동안 24시간 내내 물과 샌드위치를 제공했다. 또한 교회 문을 활짝 열어 놓고 피난처를 찾는 이들을 모두 받아주었다. 두려워 떠는 이들, 어찌할 줄 모르며 혼란스러워하는 이들, 굶주린 이들 등 하루에도 수백 명씩 교회를 찾아왔다. 우리는 단지 음식과 잠자리만을 내준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로하고 상담했다.

빌딩이 무너져 내릴 때, 우리도 그 모든 비극이 자아내는 두려움과 슬픔의 근원적인 감정에서 자유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신실하심을 의지하며 굳게 섰다. 빌딩이 무너지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애통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셨다. 그리고 빌딩이 무너졌을 때, 우리는 다른 이들을 위해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바로 그곳에 준비된 상태로 있었다.

사고 몇 달 전, 사업가만 백 명이 넘게 참여했던 한 모임에 나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들 대부분은 투자 기관의 경영진들이었다. 그날 우리는 여러 나라에 인도적인 원조를 제공하기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해 모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감동하셔서 예기치 않게 다른 발언을 하게 하셨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 사업가들에게 세상적인 부를 쌓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우리가 죽을 때 그 재물이 우리를 조금도 안전하게 해주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전했다. 얼마쯤 지나 그 회의실에 있던 사람 중 17명이 9월 11일 아침, 세계무역센터에 있었다고 들었다. 대부분은 살았지만 몇몇은 거기에서 죽었다. 목숨을 잃은 이들은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았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그 경고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을까?

우리는 역사상 단 한 번도 예외 없이 반복되는 하나님의 행동 양식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신실하시기에 심판이나 재난이 임하기 전, 자신의 백성들에게 경고를 내리시고 준비시키신다. 우리는 이 사실을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서 계속해서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성벽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멀리 지평선에서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 경고음을 울리게 하신다. 이때 사람들에게는 선택권이 주어지는데, 그 경고에 주의를 기울인 사람들은 즉시 준비 태세에 돌입해 환난 날에도 능히 견딘다. 하지만 파수꾼을 조롱하고 비웃은 사람들은 경고를 무시한 결과 큰 위험에 처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성경에는 후자의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이 등장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마음이 다시 울컥한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무척이나 어렵고 힘든 날이 우리 앞에 다가오리라는 느낌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엄청난 고난의 시기가 이 시대를 강타할 것이다. 세상은 점차 어두워져 가고, 사회는 갈수록 더 각박해지며, 전 세계적으로 항의 시위도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 근본적인 이유는 시위자들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근원적인 것이다. 전 인류가 고통을 느끼며 울부짖고 있다. 흔들릴 수 있는 모든 것이 흔들릴 때, 오직 진리로 나고 진리로 사는 자들만이 남게 될 것이다. 당신과 나는 다시 준비되어야 한다.



사명을 잃어가는 교회



뉴욕의 타임스퀘어 복판에 서서 360˚, 그러니까 한 바퀴를 돌아보라, 당신의 모든 감각 기관은 단 몇 초 만에 압도당하고 말 것이다. 나는 이들을 날마다 마주하며 산다. 왜냐하면 내 사무실은 새해 전야제마다 공이 내려가는 바로 그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마치 주님은 내가 이 ‘과잉의 세계’를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도록 하시는 것 같다. 사실, 이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 마음을 빼앗아 가려고 하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으면 질 수밖에 없다.

사도 바울 시대의 고린도교회처럼 오늘날 이 세상, 우리의 적, 심지어 우리의 육체가 보내는 유혹의 손길에서 벗어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 시작은 미묘하고도 은밀한 유혹일지 모른다. 그저 예전부터 별 생각 없이 편하게 찾던 작은 위안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인도하시는 길이 아닌 다른 길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그래서 요즘 성령님께 부름받은 크리스천들, 심지어 교회조차 그 길에서 완전히 벗어난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게다가 그들 중 일부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마음에서 얼마나 멀리 벗어나 있는지도 전혀 모른다. 어떻게 해서 영적 기초에 생겼던 작은 균열이 사도 바울이 강하게 질책할 정도로 거대한 심연으로 커지게 되었을까?

영적 쇠퇴의 6단계

1단계 - 교회가 사람을 높이는 데 정신이 팔려 있다.

2단계 - 육욕적이고 착취하는 설교자가 교회를 이끌어 나가도록 방치한다.

3단계 - 교회가 진리를 듣고 받아들이는 능력을 타협한다.

4단계 - 교회가 그릇된 영적 정체성을 띤다.

5단계 - 교회가 악한 행실을 용인한다.

6단계 - 교회가 가난한 자들에 대한 마음을 잃어버린다.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난 사태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엄중한 경고가 된다. 당신은 스스로 교회의 지체라고 믿고 있는가? 그렇다면 왜 죄를 짓고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살면서도 아무런 갈등이 없는가? 왜 가난한 자들, 약자들에 대해서 아무런 부담감도 느끼지 않는가? 이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타락한 우리의 본성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우리의 삶을 온전히 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철저히 거부할 때,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 주님만이 제 인생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 제가 감당하도록, 맡기신 모든 일을 할 수 있도록 뜨거운 마음과 힘을 허락해주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이러한 부르짖음에 분명히 응답하신다.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영혼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순간 그리스도의 진정한 생명이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날 것이다.



십자가의 길, 그 길을 함께 가라



많은 사람들은 바울이 가장 힘들게 목회한 곳으로 고린도교회를 꼽는다. 바울이 전도 여행을 하며 어렵게 세운 고린도교회가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을까? 간단히 말하면 이들은 개인적으로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한 해답으로 십자가를 기꺼이 붙잡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섬기라는 부르심에는 응하지 않았다. 고린도교인들은 구원을 받았다. 하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자신들만을 위한 구원이었다.

왜 사람들은 십자가가 아닌 자아실현을 선택할까? 아무래도 십자가를 온전히 지는 삶이 주는 인상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사람들이 십자가에 대해서 느끼는 복합적인 감정을 한 단어로 정리하면 바로 ‘미련함’이다.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말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일이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깊은 의미를 깨닫고, 그 짐을 같이 지자고 초청하신다. 이 사실은 참으로 중요하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많은 이들을 위한 희생 제물로 스스로를 내어 놓으셨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같은 길을 걷자고 말씀하신다. 고린도교회는 바로 이 점에서 십자가를 붙잡을 수 없었다.

현재, 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들도 똑같은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특히 서구 사회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더 두드러진다. 사람들은 십자가의 한 면만을 붙잡으려 한다. 이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죄사함과 평화에만 집착한다. 그 이상으로는 조금도 깊게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이는 자아 중심주의와 그리스도 중심주의가 실질적으로 부딪히는 좋은 예이다. 많은 교회가 자아 중심적인 신학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이 이러한 생각을 내려놓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저버린 삶은 과연 어떠할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신 비유를 생각해보자.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 12:44-45).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였지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은 걷지 않는 사람들에 관한 비유이다. 그 결과, 그들의 삶은 공허하다. 그들의 내면은 영적으로 무너져 있다. 이들에게는 주위를 밝힐 만한 하나님의 빛이 전혀 없다. 그래서 결국은 이기심이라는 길로 빠지게 된다. 성경을 통틀어 ‘7’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안식을 상징한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길을 거절할 때 다른 길이 나타나며, 그때의 숫자 ‘7’은 하나님의 완전하심과는 전혀 상반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성경은 원래 있던 더러운 귀신이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와서 마침내 그 사람 안에 거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길을 버리고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면, 악한 힘이 더욱 강해져 이전보다 더욱 나쁜 상태가 된다.



너희 죄가 반드시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



“너희 죄가 반드시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민 32:23). 이 구절은 꽤나 친숙한 말씀이다. 이 구절은 죄를 숨기고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자들에게 경고할 때 쓰는 대표적인 말씀이 되었으나, 문맥에 비추어 읽으면 이 구절이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때는 몇몇 이스라엘 지파만 자신들의 유업인 땅을 이미 받은 상황이었고, 약속의 땅을 분배받지 못한 다른 지파들도 있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엄중한 경고의 말씀을 선포하신다. “만일 너희가 스스로 정착했다고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에게만 집중한다면, 만일 형제가 자신들의 유업을 얻는 데 어려움을 겪거나, 패배해서 약속받은 땅을 얻지 못한다면, 이 죄가 너희를 반드시 찾아내고야 말리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하나님 나라에는 간단하지만 절대 변하지 않는 법칙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심음과 거둠의 법칙인데, 무엇이든지 심은 대로 거둔다는 뜻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살지 않고, 오직 우리 육체와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만 심는다면 썩어질 것을 거둘 도리밖에 없다. 갈라디아서 6장은 낙심한 자들을 회복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권면을 담고 있는데, 서로가 짐을 나눠 질 것, 모든 이들에게 특히 신앙 안에서 한 가족이 된 자들에게 선한 일을 할 것, 낙심한 자들을 찾아가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다시 이르도록 할 것 등등이다. 또한 감사할 줄 모르는 자들과 거룩하지 않은 자들에게도 선한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자기의 육체와 자아를 높인 결과는 혼돈이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33)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 다른 이를 위하여 우리 소유를 나눌 때, 하나님의 집에서는 혼돈이 사라지며 거룩한 질서가 나타난다. “새 계명을 주노니 너희는 내가 그러했듯이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함으로써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리라”(요 13:34-35).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걷기로 작정하면, 침몰하는 배에서 바울이 그랬듯이 폭풍 가운데서도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감옥에 갇혀 맷돌질하고 있는가?



삼손은 태에서부터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나실인이었다. 사사기에는 세 번 이상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라는 말씀이 나온다. 삼손의 강력한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온 것이었으며, 그도 자신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삼손은 들릴라와 매우 위험한 장난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을 잃었다. 삼손이 하나님께 구별된 모습을 잃어버리자 기름 부으심도 사라졌다. 그는 눈먼 채로, 옥에서 맷돌을 돌려야 했다. 사탄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삼손을 사로잡았다. 삼손에게 와서 그의 영혼이 진할 때까지 조르는 들릴라를 생각해보라. 놀라운 사실은 들릴라가 자신의 의도를 숨기지 않고 공공연히 얘기했다는 점이다. “당신의 힘의 근원이 어디에서 오는지 말해 달라. 나는 그것을 빼앗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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