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사람 작은 하나님
에드워드 T. 웰치 지음 | P&R
큰 사람 작은 하나님
에드워드 T. 웰치 지음
P&R / 2012년 12월 / 336쪽 / 15,000원
깨진 사랑의 항아리: 나는 숫기도 없었고 자의식 과잉에다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혹은, 할 수도 있느냐에) 항상 사로잡혀 있었지만, 그런 사실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고3 시절 한 시상식에서였다. 나는 수상 후보였고, 내가 그 상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에 무서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강당은 2천여 명의 고등학생들로 미어졌다. 내가 강단까지 걸어가는 동안 우리 반 아이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지가 온통 고민이었다. '이상하게 걸으면 어쩌지? 다른 수상 후보자들이나 또 자기가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애들은? 내가 대신 상을 받으면 걔들은 날 어떻게 생각할까? 수상 소감은 뭐라고 하지?' 나는 기도했다. '하나님, 제발 제가 상 받지 않게 도와주세요!'
자잘한 상들이 발표되고, 마침내 교감 선생님이 대상을 발표했다. "그래서, 올해 대상 수상자는… 릭 윌슨!" 내가 다행이라고 느꼈을까? 당연히 아니다. 나는 철저히 낙오자가 된 느낌이었다. '이젠 사람들이 날 뭐라고 생각할까? 다 내가 후보자인 줄 뻔히 알고 있었는데…' 그날 시상식에서의 일들은 그 후에도 내 머리에서 떠나질 않고 자꾸 재생되었다. 그다음에는 무슨 방도가 없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해답이란 없었다. 자의식, 남의 의견에 지배된 삶, 또는 뭐라고 부르든 간에 이 현상은 관리해야 할 대상일 뿐,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에게 해답은 없었지만, 그날의 일들은 내 문제를 인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마치 눈을 뜨는 것과도 같았다.
그리스도 안에서 꽤 괜찮은 사람: 신학대학원 시절 나에게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1년차일 때 로마서 성경공부를 인도할 기회가 있었다. 전부터 이미 로마서에 나오는 이신칭의(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음)라는 개념은 알았으나, 특히 이때는 내가 남의 의견에 과잉 의존하는 문제와 이신칭의를 적절하게 연관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내가 처음 생각해 낸 것은 아니지만, 내 이론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가 예수님의 구속사역에 기초한 이상 더는 내 자신을 사람들의 생각이 만들어낸 기준에 짜 맞출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나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그런 나를 사랑하시어 보시기에 의롭게 만드셨는데 '다른 사람이 어찌 생각하든 무슨 상관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 결론에 도달한 후에는 진정한 자유를 맛본 듯했다. 그 후 수년 동안 여전히 남들 의견은 골칫거리였으나, 그럴 때마다 나는 사람들의 기준에 부합할 필요가 없다고 재빨리 상기하곤 했었다.
대각성: 그러던 중 나는 결혼을 했다. 그런데 결혼을 통해 그저 그리스도 안에서 꽤 괜찮은 정도로는 내가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타인에게 사소하게 거부당하는 것도 겨우 견딜 만한 내가 아내에게서 내가 바라는 사랑을 받지 못할 때면 전신마비가 올 지경이었다. 이러한 나의 모습을 발견한 뒤에는 두 번째의 깨달음이 뒤따랐다. 나는 내가 마치 속이 텅텅 비어 그 속을 채울 사람을 찾는 깨진 사랑항아리와도 같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았다. 그 이래 나는 같은 처지에 있는 수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 역시 하나님께 사랑받는다고 제법 확신하면서도, 다른 이의 사랑도 갈구하거나 필요로 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남에게 좌지우지되고 허전함에 시달리는 굴레에 갇힌 것이었다.
'인간에 대한 두려움(Fear of Man)' 직면하기: 나와 대화를 나눈 많은 이들도 문제를 인지하게 되었다. 그들은 성경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인간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영혼의 질병을 본 것이다. 아무리 오직 진실하신 하나님만 섬긴다고 맹세해도 속으로는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 때문에 공포에 질린다거나 무서워한다는 뜻이 아니다(물론 그런 경우도 가끔 있지만). 성경적 의미의 '두려움'은 훨씬 폭넓은 의미를 갖는다. 누군가를 무서워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또한 누군가를 우러러보는 것도 포함되며, 또는 사람들에게 조종되어 지배당하는 것, 사람을 숭배하는 것, 사람에게 궁극적인 믿음을 두는 것, 혹은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 등도 해당한다.
어쨌든 인간에 대한 두려움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리를 사람으로 대체한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대신 사람을 두려워한다." 물론 인간에 대한 두려움에는 여러 가지 다른 명칭이 있다. 10대에게는 '또래 압력(peer pressure)'이 바로 그 이름이다. 나이가 든 후에는 '비위 맞추기(people-pleasing)'라고 한다. 요즘에는 '동반의존(codependency)'이라고도 불린다. 이런 명칭을 알고 나면 인간에 대한 두려움은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다.
보편적 문제: 이런 것이 수줍음이 많거나 소심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문제라고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화가 난 사람이나 주변 사람들의 기세를 제압하려는 사람도 결국은 남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경쟁심에서 비롯되는 모든 행위 역시 다 포함된다. 미국에서는 이제껏 시대적 혁명의 일환으로 동반의존에 대한 서적들이 물밀 듯 쏟아져 나왔다. 한 예로 멜로디 비티는 『동반의존에서 벗어나기』라는 책으로 백만장자가 되었다. 그녀는 많은 이들에게 절실한 화제를 논의한 것이지만, 사실 본질적으로는 인간에 대한 두려움의 문제를 세속적 관점에서 해석한 것이었다. 비티는 문제의 본질을 남들에게 조종당하거나 또는 남에게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차원에서 해석했고, 그녀의 처방전은 그
저 자신을 더욱더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성경적인 해답 찾기: 그러나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 그녀의 관점은 다소 얄팍한 것이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은 내 생각보다 더 깊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인식하는 것이 동반의존을 치유하는 데 있어 더 나은 방법이라고 대응했다. 하나님이 사랑으로 충만하게 채우시기에 당신은 사람들을 통해서 자신을 채우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물론 이 해답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너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하라는 훈계보다는 낫다.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더 파고들어야 한다.
1부 어떻게 그리고 왜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는가
"사람들이 나를 지켜볼 것이다": 성경이 가장 압도적으로 많이 제시하는 질문 중의 하나는 도대체 누구를 두려워할(필요로 하거나 지배당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을 경외하겠는가, 아니면 사람을 두려워하겠는가? 성경은 우리가 사람을 두려워하는 세 가지 기본적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다루고 있다. '우리가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의 치부를 드러내고 망신을 줄 수 있기 때문이고, 그들이 우리를 거부하거나 조롱하거나 무시할 수 있기 때문이고, 그들이 우리를 공격적으로 대하거나 억누르거나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이유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사람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더 능력 있고 중요하게) 보고 거기에서 생기는 두려움으로 인해, 남에게 우리가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할지 결정하는 권위를 넘겨준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해답: 물론 하나님은 사람들의 두려움에 대한 해결책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는 곧 그 해결책을 보다 면밀하게 검토하도록 하겠다. 복음이란 하나님이 그분의 벌거벗은 대적들을 덮어주시고, 그분의 결혼식 만찬에 데려오시며, 그들을 파멸시키지 않고 도리어 그 원수들을 신부로 맞아 직접 혼인을 하시는 놀라운 이야기다. 다윗왕은 앞으로 실현될 이 복음을 미리 알고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시 139:1).'
벌거벗은 자들에게는 저주인 하나님의 시선이 다윗에게는 축복이었다. 죄 사함을 받고 죄가 가려진 자들에게 하나님의 시선은 피난처이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여전히 이해할 만한 이유로 두려워할 수도 있다. 예수님의 의로 덮어진 자들에게는 이 두려움이 멸망을 겁내는 두려움이 아니다. 오히려 다윗이나(시 119:120) 이사야의(사 6장) 경외함에 가까울 것이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지존하신 하나님 앞에서 전율하는 경외다. 고백하지 않은 죄에 따르는 두려움일 수도 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한 두려움일 수도 있다. 아니면 남의 죄에 피해 입은 결과로 '부정'한 기분이 드는 데서 오는 두려움일 수도 있다. 우리가 죄인인 이상 수치심은 익숙한 경험일 수밖에 없다.
정답은 간단해 보인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부활하셔서 승천하심을 믿음으로 그분이 당신을 의로운 옷으로 덮어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예수님은 당신의 수치를 없애주셨다. 두려움에 찬 사람이 해방되기 위해서 필요한 가르침은 이것만으로 족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개인적인 경험과 상담했던 이력에 의하면 수많은 경우에 해결책은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 돌아가신 것을 기억하는 것 외에 무언가 더 요구하는 듯하다. 예수님의 복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 말은 우리가 복음 속에 함축된 가르침들을 주목해야 한다는 뜻이다. 일례로 우리가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 생각해보라. 나는 예수의 이름으로 남들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내 자신을 남들로부터 방어하는 데 더 관심이 있는가? 어떻게 하면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을 덜 할 수 있는가?
인간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첫 번째 성경적인 관점은 바로 그것이 죄로 인한 벌거벗음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이다. 아직도 우리 안에 있는 죄 때문에 우리는 당황스러움, 수치심, 노출된 듯한 느낌, 취약한 느낌 등을 겪는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자기방어와 남의 눈 피하기를 위해 힘쓴다. 궁극적인 문제는 남의 시선 같아 보이지만, 사실상 문제는 우리 내면적인 것이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다. 수치심에 따르는 인간에 대한 두려움은 사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눈길 아래 있다.
특히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어긴 것을 깨닫게 되면, 죄를 고백하고 믿음으로 동의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그렇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눈길에 심판을 당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남의 죄로 인해 부정해짐으로 거룩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우리 자신이 부정함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은 없지만, 여전히 우리는 벌거벗었고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죄를 덮는 가리개가 여전히 필요하다.
2부 인간에 대한 두려움 극복하기
주를 경외함을 이해하라: 종류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에 대한 두려움이 가진 공통점은 바로 사람을 위대한 존재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과 사람들을 동시에 경배할 수 없기 때문에, 언제든지 사람들이 우리 눈에 위대해지면 하나님은 별것 아닌 존재가 된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두려움의 올가미를 탈출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시고 영광스러우신 분인지를 인식함과 동시에 사람들은 그렇지 못함을 이해하는 것이다.
주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주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단순히 새하얗게 겁에 질리는 식의 공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 대한 두려움이 그렇듯이 주님을 경외하는 것 역시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온갖 태도를 모두 광범위하게 포함한다. 한편으로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공포(위협으로 인한 두려움)를 의미하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부정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분 앞에서 우리는 수치스러울 수밖에 없고, 또 우리가 처벌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우리가 공포에 떠는 것은 자연스럽고 마땅한 반응이다. 그러나 그런 공포는 하나님 앞에서 주눅 들어 뒷걸음질 치며, 될 수 있는 한 하나님을 피하려는 상태이다.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이런 공포에 해당 사항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눈이 뜨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런 공포를 점점 덜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이런 공포가 자나 깨나 존재한다. 사람들이 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없는 이유는 이 공포가 주로 하나님과 관련된 정체성은 무시된 채로, 단지 막연히 불안과 낮은 자존감 따위의 현대적 증상으로만 표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두려움은 그런 식으로 영원히 위장되어 있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하나님 앞에 경외함으로 무릎 꿇을 그날은 꼭 온다.
그러나 공포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하나의 극단적인 모습일 뿐이다. 그 스펙트럼의 반대쪽 끝에서 볼 수 있는 두려움은 예수님을 신뢰하는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종류의 두려움이다. 곧 하나님께 경건하게 복종함으로 순종에 이르는 길을 말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 '의지하는 것', '신뢰하는 것',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두려움이 공포와 흡사한 점은 이 두려움 역시 우리의 죄악과 하나님의 정결하심, 정의와 죄를 향한 분노하심을 다 철저히 이해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경외다. 그리고 하나님의 크나큰 용서하심과 긍휼하심과 사랑 또한 이해한다는 점이 다르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에 따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자신을 낮추시어 그분의 원수들을 종살이와 사망에서 구원하셨다. 이 경외하는 두려움은 하나님과 우리 중에 "사랑해"라고 먼저 말하는 쪽은 언제나 하나님이신 것을 안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진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주권에 기꺼이 복종하게 하고 순종하기를 즐거워하도록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강건하고 풍요로운 경외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응답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두려움의 차이점을 알면 왜 도대체 성경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요일 4:18)'라고 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주님을 두려워할 것을 요구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결론 -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라": 18세기의 한 목회자는 그의 교회에 인간에 대한 두려움이 판을 치는 것을 탄식하고 있었다. 그는 모두가 하나님의 의견보다 사람의 의견에 대해 더 염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교회의 사람들이 무엇이든 행동에 옮기기 전에 먼저 하는 질문은, "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까?"였다. 그래서 목회자는 그 문제에 대한 설교 시리즈를 하기로 마음먹고, 다음의 대답을 내놓았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당신의 의무가 무엇인지 알라."
그의 대답은 사실 두 가지가 서로 연결된 대답들이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필수적인 토대이다. 그것이 없으면 인간에 대한 두려움이 판을 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 목회자는 교회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했지만 인간에 대한 두려움에 걸려 넘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의무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순종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지 분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몰랐다. 따라서 그 목회자는 지혜롭게도 여러 가지 계명에 대한 설교를 헌신적으로 전했다. 특히, 서로를 사랑하는 계명에 집중했다. 그 목회자는 지극히 성경적인 공식에 이르게 되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나는 머지않아 이 청교도 목회자의 교회에 내가 만났던 몇 명의 사람들과 닮은 이들이 생겨났으리라고 믿는다.
한 소년: 팀(Tim)은 고등학교 미식축구 선수였고 팀의 공동 주장이었다. 그는 또한 주님을 경외함에 있어 자라가고 있었다. 팀은 그의 감독이 발표한 주말 특별 연습이 가족 여행 계획과 중복되는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잘 몰랐다. 하지만 그는 옳은 질문들을 했다.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내 의무는 무엇일까?" 감독의 발표 이후, 그는 감독을 찾아가서 중복되는 계획에 대해 알렸다. 감독에게는 무슨 결정이 옳은지 명백했다. 감독은 "문제가 뭐야? 우리 팀은 네가 있어야 하니까 연습에 꼭 나와야 해. 너 연습에 빠지면 다음 경기에서 제외될 줄 알아."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