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로 사는 이유
에버하르트 아놀드 지음 | 예수전도단
공동체로 사는 이유
에버하르트 아놀드 지음
예수전도단 / 2012년 8월 / 116쪽 / 6,000원
1. 왜 공동체인가?
우리가 공동체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생명체가 공동체의 질서대로 존재하고 공동체를 조성하기 위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2. 공동체의 바탕은 믿음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다. 그분 위에서, 그리고 그분을 통해 인간은 공동체를 이루어 살 수 있으며, 최종 승리를 위한 대격변의 싸움을 통과할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은 일종의 학설이나 교리, 이념, 맹신, 체계가 아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심을 받아들이고 그 사실에 감탄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 믿음이 있으면, 사회 관습이나 사람의 약점에 근거해 그 사람을 평가하지 않을 수 있다. 결국 하나님 없이 인간의 현재 상태로 공동체의 삶을 살기란 불가능하다. 종잡을 수 없는 기분 변화, 소유욕의 충동, 육신과 정서적 만족을 채우려는 갈구, 야망과 욕심의 이기적 기세, 다른 사람을 자기 뜻대로 부리려는 지배욕, 온갖 종류의 인간적 혜택을 누리고 싶은 사심 등은 모두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는 데 크나큰 장애물이 된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러한 장애물이 결정적 요소라는 착각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능력과 강력한 사랑 앞에서는 그런 것들조차 장애가 되지 않음을 안다. 하나님은 그러한 문제보다 훨씬 강하신 분이다. 하나 되게 하는 성령의 힘은 모든 것을 넉넉히 뛰어넘는다. 공동체를 이루는 일은 더 고차원적인 능력이 있는 분을 믿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수많은 어려움과 문제를 겪으면서도 계속해서 인간의 미덕(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이나 법률의 힘을 의지해서 그것을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악의 실재 앞에서 그런 노력은 실패와 비탄으로 끝나고 만다. 진정한 공동체를 이룰 유일한 힘은 궁극적으로 선하신 존재, 하나님을 믿는 믿음뿐이다.
우리가 공동체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공동체라는 긍정적인 모험을 통해서만, 구원받지 못한 인간이 얼마나 무능한가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또 생명을 부여하고 공동체를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3. 공동체는 사회, 정치 문제의 대안이다
정치 조직들이 국제 평화나 사유 재산의 폐지, 완전한 공유 재산 제도를 놓고 싸우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하게 그런 조직들 편에 서서 그들의 방식대로 싸울 수 없다. 고통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음식을 먹지 못하고 집이 없는 사람들, 착취로 지적 장애를 앓는 사람 모두에게 우리도 깊은 동정심을 느낀다. 우리 역시 '가지지 못한 자들'의 편에서 그들에게 힘이 되고 싶다. 하지만 착취한 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여 계급투쟁을 종용하는 일에는 반대한다. 국가들의 방어적 전쟁에 반대하는 것처럼, 우리는 억눌린 자들을 위해 방어적 전쟁을 벌이는 것도 반대한다.
우리가 공동체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자유와 연합, 평화, 사회 정의를 위해 싸우는 모든 사람 편에 서서 우리도 우리 몫의 영적 전쟁을 하기 위해서다.
4. 공동체는 믿음의 해답이다
모든 혁명, 코뮌, 이념적이거나 개혁적인 운동은 우리의 믿음을 고무하는 한 가지를 거듭 인식하게 한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언행이 일치할 때, 진리에서 비롯한 이런 모습만이 진정한 본보기가 된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악행에 맞서기 위한 우리의 유일한 무기는 오직 하나, 성령의 무기뿐이다. 성령의 무기란 사랑의 친교 안에서 건설적인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감상적인 사랑, 즉 행함이 없는 사랑은 사랑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아울러 함께 일하는 사람과 마음이 통하는 관계, 즉 성령으로부터 말미암는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면 그런 일을 진정한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노동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의 노동만큼이나 성령이 관건이다. 성령에서 오는 사랑이 곧 노동인 것이다.
노동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서로 손을 잡고 이기적이며 독단적인 모든 것을 거부할 때, 이 굳은 소신은 모든 사람을 궁극적으로 연합시키는 이정표가 되어 준다. 이러한 연합은 하나님의 사랑과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능력에 뿌리를 두고 있다. 모든 사람을 위해 평화의 왕국을 이루려는 의지는 노동 현장에서의 다정한 형제애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다. 영으로 노동하고, 노동으로 영을 강하게 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다가올 평화라는, 미래 질서의 가장 기본적인 성격이다. 노동 하나만으로도 공동체 안에서 사는 일이 가능해진다. 노동이란 결국 공동의 선과 기쁨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함께 선과 기쁨을 추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기쁨은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과 성스러운 관계를 유지하는 만큼만 주어진다.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모든 것이 동시에 하나님의 미래에 성스럽게 바쳐진 것임을 기억하는 한 우리는 그런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우리가 공동체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 시대의 불명확한 갈망에 우리가 분명한 믿음의 대답을 하길 원하시기 때문이다.
5. 교회 역사에서 바라본 공동체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이 수세기에 걸쳐 많은 사람들에 의해 증명되어 왔다. 특히 구약 선지자들과 초대교회 교인들이 그러했다. 우리는 역사에서 실존했던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또한 그분의 사도들이 증거하고,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실천했던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을 진리로 믿는다. 즉, 우리는 기나긴 인류 역사에서 공동체로 살았던 사람들과 형제자매로 함께 서 있는 셈이다.
우리가 공동체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구약의 예언자 시대부터 초대교회 시대,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공동체를 인도해 오신 똑같은 성령이 우리를 권면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6. 공동체의 삶은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다
초대교회 시대의 공동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의 외적 필요를 채우는 일만큼이나 내적 필요를 채워 주는 일에도 헌신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셨다. 즉 병자를 치료하고,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 들린 사람들에게서 악귀를 내쫓고, 극빈자에게 희락의 말씀을 전해 주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미래의 하나님 나라가 지금 이루어짐을 뜻했고, 그것은 곧 이 세상이 하나님께 완전히 속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다. 부활하신 주님은 순회 전도를 하는 제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주셨고, 그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한층 더 큰 규모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다. 초대교회는 수천 명이 모여 사는 공동체가 되었다. 내면에서 불타오르는 사랑 때문에 그들은 함께 모여 살 수밖에 없었다. 공동체의 형태에 관한 궁금증은 모든 사람이 하나로 연합하여 사는 삶을 이해할 때 풀리게 된다.
오늘날의 공동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안에서 살아갔다. 성령은 바람과 같다. 철이나 돌처럼 굳고 고정된 존재가 아니다. 성령은 이 세상의 무정하고 차갑고 이성적이며 융통성 없는 정부나 사회 조직과 달리, 언제나 민감하고 유연하다. 사실은 인간의 영혼보다 더 민감하며 인간의 감정이나 마음보다 더 예민하다. 사람들은 인간의 혼과 마음에 영원한 체제를 구축하려다가 실패하곤 한다. 그러나 성령은 매우 민감한 영이기에 그런 것보다 더 강하고 더 매력적이다. 성령은 가공할 만한 힘이나 세력이 와도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 성령은 존재의 깊이이며, 높이이고, 넓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폭력이 없는 사랑, 권리 주장이 없는 사랑, 소유욕이 없는 사랑의 삶을 사셨다. 그분 안에서 성령은 부활하신 주님의 영으로서 강하게 임재하며, 공동체로 이끄는 내면의 목소리와 눈이 되어 주신다.
초대교회는 역사상 잠시 동안만 인류의 길에 '반짝'하고 빛을 비추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 정신과 유산은 초대교회의 교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심지어 수많은 사람이 순교를 당한 뒤에도 꺼지지 않았다. 인류 역사 속에는 초대교회와 형태가 비슷한 공동체가 하나님의 선물처럼 거듭해서 등장해 왔다. 그 안에는 늘 똑같은 성령이 거주하셨고, 그들의 자손들은 현재까지도 성령 안에서 계속 태어나고 있다. 공동체는 생겼다가 사라졌지만 공동체를 이루어 내는 교회는 사라지지 않았다. 인위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하려는 노력은 생명력 없는 위조품만을 양산한다. 우리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 성령을 온전히 의지할 때, 비로소 주님은 초대교회에서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실 것이다. 성령은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향하도록 이끌고, 서로 위하여 살고 일하는 데서 기쁨을 찾게 하신다. 왜냐하면 성령은 창조와 사랑의 영이기 때문이다.
성령에 순복하는 것은 엄청난 체험이라 그것과 견줄 만한 것을 찾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성령은 가장 깊은 내면의 핵심인 공동체의 영혼에 불을 댕겨, 우리의 에너지를 뜨거운 정열로 바꾸신다. 이 핵심에 불이 붙어 완전히 희생할 때까지 타오르면 그 빛은 더 멀리, 더 넓은 곳으로 퍼져 나간다. 그런 면에서 공동체의 삶은 화형당하는 순교와도 같다. 우리 자신이 가진 모든 힘과 능력, 당연히 주장할 수 있는 권리 같은 것도 날마다 희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불이라는 상징이 말해주듯 각 장작개비에 불이 붙어 하나의 장작불로 활활 타오르게 되면 온 땅에 따뜻함과 빛이 계속해서 전해진다.
우리가 공동체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기쁨과 사랑의 영이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을 도와서 항상 그들과 하나 되라고 강하게 독려하기 때문이다.
7. 공동체의 상징
자연을 닮은 공동체
날마다 물로 씻어 깨끗해지듯, 물속에 깊이 잠기는 세례는 죽음의 세계에 속한 모든 것에서 우리가 정결하게 되었음을 상징한다. 우리는 일생에 한 번 물속에 '수몰'되어 완전한 죽음을 맛보는데, 이는 고착 상태와 영원히 단절되었다는 의미다. 또 우리의 안팎에 있는 악을 영원히 증오하겠다는 맹세 의식이기도 하다. 수몰된 뒤에 물에서 나오는 과정(이 역시 일생에 한 번 일어난다)은 부활의 의미를 아주 선명하게, 절대 잊지 못할 방식으로 생생히 새겨준다. 이젠 우리를 감싸는 공기처럼, 혹은 온몸에 휘몰아치는 바람처럼 모든 것을 하나 되게 하고 새롭게 하는 성령에 우리는 완전히 잠겨야 한다.
몸 된 공동체
인간의 육신에 영혼이 공존하는 상징인 만물에 거하시는 성령은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모든 인간에게 확연히 드러나신다. 예를 들어, 남녀가 결혼으로 하나 되는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평생을 약속하여 맺어지는 것이기에 결혼은 성령과 인류의 연합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을 상징하기도 한다. 결혼에서는 정결함(절제된 성생활)이 피조물로서 자유를 만끽하는 기쁨이 된다. 인간의 몸은 죽은 세포가 새로운 세포로 끊임없이 대체되면서 생명력이 유지된다. 마찬가지로 공동체의 삶에서도 영웅과 같은 희생이 있어야만 공동체라는 몸을 유지할 수 있다. 공동체는 서로 돕고 잘못을 바로잡아 주며 재산을 공유하고 노동을 같이하는 교육 차원의 친교 조직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공동체는 계속해서 자기희생과 자발적 순종을 하겠다고 약속한 하나의 언약 조직이다. 그래서 공동체는 존립을 위해 싸우게 된다.
교회 공동체에서는 당연히 주장할 수 있는 개인의 권리를 충족하는 것을 정의라 부르지 않는다. 오히려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이 기회만 있으면 무엇이든 서로 주려 한다. 또 자신을 완전히 바쳐서 하나님이 드러나실 수 있게 하며, 그분의 나라가 삶에 능력 있게 임하게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곳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다. 오직 기쁘게 자신을 희생할 때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성령은 즐거운 마음으로 담대히 희생할 수 있게 해준다. 기꺼이 자원하는 마음, 노동을 기쁘게 여기는 마음, 사람들을 좋아하는 마음, 모든 것에 헌신하는 마음을 주시는 것이다. 기쁨과 열정은 적극적인 사랑의 형태를 띤다.
우리가 육체를 아끼는 이유는, 성령이 거하시는 신성한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흙을 사랑하는 이유는, 성령이 흙으로 땅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힘을 합해 불모지를 개간하길 바라신다. 우리는 손과 힘으로 하는 노동, 장인 정신으로 빚어낸 예술 작품을 사랑한다. 우리는 노동에서 공동체의 신비를 엿본다. 우리는 영혼과 정신의 활동도 사랑한다. 창조적인 예술 작품을 풍성히 누리고, 평화라는 인류 최후 승리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역사 속에서 지적인, 또는 영적인 교류를 탐험하기도 한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지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그 뜻대로 이행해야 한다. 창조의 영이신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만들어, 그것을 우리에게 맡기셨다. 즉, 지구를 돌보는 일은 우리의 과업인 동시에 유업이다. 우리가 가꾸는 동산은 하나님의 동산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일은 마땅히 그분의 나라를 확장해야 한다.
우리가 공동체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만물을 하나 되게 하신 창조적인 연합의 영이신 하나님이 우리가 공동체로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노동과 문화가 하나님의 공동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8. 공동체는 다가올 미래 공동체의 표상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표상이다. 무수한 독립적 세포들이 모여서 하나의 육체를 이루듯이, 언젠가는 모든 인류가 하나의 조직체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에는 기쁨과 평화, 정의가 있다.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의 연합과 질서를 인정하는 것은 그 질서 안에 계신 성령의 자유를 동시에 인정하는 일이다. 공동체의 사명을 분명히 인식할수록 공동체가 '거룩한 하나의 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도 더 깊이 인식하게 된다. 왜냐하면 공동체는 더 큰 조직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섬기기 위한 상호작용이 필요하고, 교회에 있는 모든 성도의 일치된 믿음으로 가르침과 인도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자발적으로 결정하고 순종한다. 공동체의 비결은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결정의 자율성에 있다. 개인이 전체의 뜻에 순종하지만, 더 나아가 선한 뜻을 위해서는 개인의 의지도 발휘할 수 있다는 자율적 결정권이 공동체의 비결이다. 이러한 자율성이 없다면 공동체의 삶은 존재할 수 없다. 자율성은 자아 의지를 발휘하는 힘이 얼마나 강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결단력이 없거나 자제력이 약해서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다. 성령의 능력을 신뢰하고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은 공동체는 개인의 결정이나 공동의 결정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진다.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이 선한 뜻을 위해 노력할 때 자율성은 자연스러운 일치와 화합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자유롭게 된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 나라, 하나님이 이루시는 연합, 전 인류의 유익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것만이 삶의 가장 중요하고 강력한 추진력이 된다.
공동체는 또한 죽음의 세계에 서 있기 때문에 허위나 불순, 자본주의, 군사력의 파괴적이고 강압적인 힘에 대항해 적극적인 의사 표시를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공동체는 어디에서나 전투에 연루되어 있다. 살인의 영과 모든 증오심(조롱하고 싸우는 말의 독을 포함해서), 상대에 대한 모든 불의와 잘못에 대항해서 싸운다. 즉, 증오와 죽음이라는 본질적인 것과 공동체를 대적하는 모든 것에 대항해 개인과 집단이 싸우는 것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휴전 없는 전쟁으로 초대되었다는 의미다. 이 싸움에 임하는 사람들은 한순간도 경계를 늦추면 안 된다. 스스로 의지를 최대한 발휘해야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다른 이들의 도움도 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억눌린 자들을 해방하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며, 그들 자신을 비롯해 주변 세상에 팽배해 있는 악과도 싸울 수 있다.
악과의 싸움은 외부 세상보다 공동체 내부에서 더 치열하게 일어나야 하고, 개인의 삶에서는 그보다 더 치열하고 부단히 일어나야 한다. 공동체 안에서는 그러한 정신으로 말미암아 싸움이 일어난다. 즉, 싸움의 터는 성도 각자다. 새 아담의 입장에서 봤을 때 옛 아담과의 싸움인 것이다. 그런 싸움 덕분에 모든 방종과 일탈은 사랑의 이글거리는 힘으로 정복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