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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보리 언덕

로이 헷숀 지음 | CLC
갈보리 언덕

로이 헷숀 지음

CLC / 2012년 7월 / 200쪽 / 8,000원



깨어진 마음



우리는 ‘신앙부흥의 문제’에 대해서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앙부흥이란 인간의 마음속에 부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승리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경험은 실패와 무능력의 연속이지만 예수님은 결단코 패배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 가운데, 우리의 생활에, 우리의 사역 가운데 나타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승리의 생활이 우리의 생활에 차고 넘치고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흘러넘치게 되는데 이것이 신앙부흥운동의 참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들 자신의 의지는 완전히 깨어지고 예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하는 것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깨뜨린다는 것, 바로 그것이 ‘부흥’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것은 굴욕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한 길이 생명의 길입니다. 그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길입니다(갈 2:20).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교만한 자신이 깨어지기 전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하여 스스로를 나타내실 수 없습니다.

진실로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반성한다면 너무도 많은 자기 자아가 우리들 각자의 신앙생활 속에 숨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경질을 낸다든지, 질투를 한다든지, 분노한다든지, 남을 비난한다든지, 근심걱정을 하는 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입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냉정하고 딱딱한 태도도 자기 자신의 과시입니다. 수줍어하고, 자존심이 강하고, 자기 보존을 위한 것도 자기 자신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깨뜨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갈라디아서 5장에 기록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기를 원하고 계신데 우리의 마음은 돌덩어리처럼 단단하여 성령의 열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깨뜨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인 동시에 우리들의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떠나서는 도저히 깨어질 성질의 우리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스스로를 십자가 상에서 깨뜨렸다는 사실만이 우리들의 마음이 깨뜨려져야만 된다는 동기를 만들어 주는 강력한 요인이 됩니다. 하나님과 본체이신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생각지 않으시고 스스로 종의 형상 -하나님의 종, 인간의 종- 을 가지사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 주님을 우리는 봅니다. 특별히 인간의 죄를 당신의 몸에 대신 짊어지시고 그 죄를 속죄하시기 위하여 온화하신 모습으로 ‘갈보리 언덕’을 향해서 올라가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남에게 보복하지 않는 마음,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마음 등 ‘산상수훈’이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우리들이 가야 할 자기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깨어진 예수님의 사랑을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들도 그렇게 되어야만 하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죽인다는 것은 단번에 다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실을 맨 처음 우리들에게 보여주실 때가 첫 번째 죽음이며, 그 후에도 계속 자아를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종일 우리 앞에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가 선택한 일을 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모든 수치와 우리를 시험하고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을 깨뜨리는 방편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이 더 오묘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또한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생활은 예수님의 생활임을 알아야 합니다. 결단코 인간적인 생활이 아닙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을 해봐도 우리들의 자기 본위의 생활은 하나님의 생활과 전적으로 반대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아를 꾸준히 죽이고 하나님께로 나올 준비를 계속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이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용기 있는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흘러넘치는 잔



그러나 깨어진 마음은 영적 부흥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본래의 영적 부흥은 성령으로 완전히 충만해져서 넘쳐흐르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은 승리의 생활인 것입니다. 넘쳐흐르는 성령의 뜨거운 역사는 온전히 하나님의 사역이며, 전적인 은혜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해야 할 전부는 우리를 깨끗이 비우고, 스스로의 자아를 깨뜨려 주님으로 하여금 넘쳐흐르도록 부어주시고, 또 부어주시도록 몸을 맡기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예수님 앞에 하나의 ‘잔’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잔’을 들여다보십니다. 만약 우리의 잔이 깨끗하다면 예수님은 ‘생명수’를 우리의 잔에 넘치도록 부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든지 우리 옆을 떠나지 않으시므로 우리의 잔은 항상 넘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말할 때의 의미와 흡사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부흥입니다. 하나님의 끊임없는 화평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시고, 우리는 그 은혜로 우리들 자신이 충만하여질 뿐 아니라 넘쳐흐르는 은혜로 이웃에게까지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우리의 잔에 생명수를 붓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 가지, 만 가지 모양을 지닌 죄입니다. 예수께서는 더러운 잔에는 채워주지 않으십니다. 시험을 당할 때 어려운 일에 부딪혀 자기 자신을 불쌍하게 생각하거나, 자기의 이익을 찾거나, 한가한 시간에 방종에 잠기는 것도 모두 죄악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손해를 보았을 때 신경질을 내고 분노하고 원한을 품고 거기에 대항해서 자기를 방어해보려는 것이나, 자기를 늘 생각하고 말없이 걱정하고 무서워하는 등 인간 자아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죄악입니다. 우리의 잔을 더럽히는 것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것들을 죄라고 부르는 것이 옳은가? 만약 그런 것들을 죄라고 부른다면 인간을 속박하는 것이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만약 그런 것들이 죄악이 아니라면 인간들은 여기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런 것들을 지닌 채 여생을 살아가야만 하겠지요. 그러나 이런 것들을 모두 죄라고 인정한다면 여기에 죄를 씻을 수 있는 하나의 맑은 샘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 그런 죄악들이 생기는 것을 느끼는 순간 ‘그리스도의 보혈’ 아래로 가져가기만 한다면 우리는 깨끗이 씻어지고 죄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잔을 깨끗하게 하신 후에는 성령으로 우리의 잔이 넘치도록 부어주십니다. 우리가 이런 방법으로 깨끗함을 원하면 원할수록 죄악의 충동도 차차 적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골로새서 3:15).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직역한다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의 심판’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평강을 잃었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심판의 호각이 불어지면, 즉시 멈추십시오. 무엇이 잘못인가를 보여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죄를 고백하십시오. 그렇게 하고 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평강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잔이 계속 차고 넘칠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평강을 잃지 않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우리 자신의 죄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심적 반응을 보여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자진해서 깨끗한 마음을 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평강을 지닐 수 있게 하십니다.

오! 하나님의 평강으로 주장받는 생활이 얼마나 단순한 것인가! 성령께 전적으로 모든 것을 맡기고 다른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는 생활입니다.

교제의 길



인간이 타락하여 자기 생활의 중심을 하나님보다는 자기 자신 스스로가 선택한 생활을 할 때, 그 결과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질 뿐 아니라 이웃과의 교제조차도 끊어지고 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하나님과 처음 불화한 원인이 되어, 4장에서는 인간 대 인간의 싸움이 일어납니다. 카인이 아벨을 살인한 것으로 연결되는 것이지요. 만약 내가 ‘하나님의 길’ 대신 ‘나 자신의 길’을 원한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다른 사람의 길’보다 ‘나 자신의 길’을 원할 것도 사실입니다. 인간 개개인이 ‘자기 자신의 길’을 주장하는 세계란 긴장상태와 숨 막히는 장벽, 의심과 오해, 충돌과 투쟁으로 가득 찬 세계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고난의 잔을 마신 놀라운 역사는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교제를 다시 맺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교제까지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형제나 이웃과 참된 교제를 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또한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를 맺지 못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터전 위에서 우리들이 하나님과 그리고 형제들과 진실된 교제를 가질 수 있을까요?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엡 9:13).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우리들의 참된 모습을 숨기려고 애쓰는 것이 죄의 노력입니다. 죄악은 우리의 시조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의 숲 속으로 숨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후 그 죄악은 우리에게 똑같은 시도를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서운 죄악은 항상 인간들로 하여금 참되지 않은 것, 겉치레하는 것, 복잡한 이중생활, 눈속임하는 것, 자기를 변명하는 것 그리고 우리의 이웃을 비난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가 이야기하고 행동을 하는 중에도 나타나지만 무언 중에도 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어두움에서 행하는 일’입니다. 진실로 우리들이 어두움의 상태에서 생활하고 있는 한 우리들의 형제들과도 참된 교제를 할 수 없습니다.

빛 가운데서 생활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어떠한 속박이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나에 관한 모든 것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빛 가운데서 거니는 행동보다는 태도에 있는 것입니다. 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평가나 반감은 이제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지금 이 시간부터 여러분이 새로운 방법으로 당신과 함께 빛 가운데서 생활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당신이 십자가 아래서 깨어지면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여러분과 교제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깊은 영적인 체험을 꾸밈없이 열어놓고 나누어 보십시오. 완전히 하나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참신한 간증을 하는 하나의 팀이 되어서 다른 믿지 않는 사람들을 영접하십시오. 이러한 모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놀라우신 역사를 하실 것입니다.

성결의 대로(大路)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사 35:8).



이 길은 사방으로 둘러싸인 늪 같은 세상에서 고속도로처럼 뚫린 탄탄대로입니다. 그러나 이 탄탄대로로 가는 유일한 길은 좁은 길입니다. 가기 힘든 언덕입니다. ‘갈보리 언덕’입니다. 이 언덕은 우리의 손과 무릎으로, 특별히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야 할 언덕입니다. 갈보리 언덕 꼭대기에는 그토록 처참하고 무자비한 십자가가 대로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면서 외롭게 서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있는 그 십자가는 시간을 나누고 또한 인간을 나누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밑에는 좁은 문이 있습니다. 얼마나 좁고 낮은지 허리를 굽히고 기어가지 않고는 나갈 수 없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저 탄탄대로로 뚫린 영원한 길입니다. 영원한 길을 거닐려면 이 좁은 문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지를 부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시키기 위하여 우리들을 십자가 밑으로 이끌어 주시고 거기서 참으로 무엇이 깨어진 상태인가를 보여주십니다. 갈보리 언덕, 그 십자가 밑에서 우리는 상하신 주님의 손과 발 그리고 가시 면류관을 쓰신 주님의 사랑의 얼굴을 봅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우리들의 죄의 잔을 한 방울도 남기시지 않고 다 마신 주님의 완전하신 깨어짐입니다. 그 모습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깨어짐을 볼 수 있게 되고, 우리의 마음은 이상하게 녹아져서 주님을 위하여 깨어지기를 원하며 “주님, 이 죄인을 구하여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깨어지기를 원하는 기도를 하는 것 이상 더 빠른 응답을 받는 기도가 없음을 발견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좁은 문을 지날 때 단 한 번만 나를 부인하고 깨어지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를 깨뜨린 후에도 계속해서 변함없는 선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멸시하고 상처를 주면 우리는 즉시 그 멸시가 우리를 보다 더 낮고 겸손하게 하기 위한 은혜의 방편으로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이에 반항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모든 마음의 동요를 뻣뻣한 목으로 받아들이거나, 둘 중의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우리들의 깨어진 의지가 매일의 생활을 통하여 증명되는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깨어지지 않고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깨어진 체 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이웃을 통하여 항상 우리들을 시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의 마음속에 아직 깨어지지 않은 찌꺼기가 있음을 깨닫는다면 숨기지 말고 어서 빨리 갈보리 언덕에 찾아가서 씻음을 받고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그 모습을 보는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교만한 죄, 질투의 죄, 분노의 죄 그리고 불순한 죄, 이 모든 죄를 그의 어깨에 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께 빠짐없이 회개할 때, 주님은 십자가 상에서 하셨던 말씀을 당신의 마음속 깊이 속삭여주실 것입니다. “다 이루었도다.” 그럴 때 당신의 마음은 눈보다 더 희게 씻음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드디어 대로로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 대로의 양쪽 둑 아래로는 캄캄한 어두움의 낭떠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대로만은 전적으로 빛 가운데 있습니다. 십자가는 더 이상 어둡고 가까이하기 힘든 처참한 것이 아니라 빛을 발하고 영광 중에 있습니다. 이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 생명의 주님이 우리와 탄탄대로를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곁으로 오셔서 우리들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러고는 우리 마음이 보혈의 피로 깨끗이 씻어졌음을 보시고 우리의 마음을 생명수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생명수로 채워진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며 그들의 구원 문제를 항상 염두에 두면서 성령으로 충만하여 있는 것, 이것이 진정한 부흥입니다. 애쓸 것도 주저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꾸밈없이 각자의 죄를 주님의 보혈에 씻음 받고 주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받으며 우리들을 통하여 주님의 사역이 이루어지도록 주님께 맡기는 생활입니다. 그 생활은 어떤 놀랄 만한 사건이나 한숨을 쉬면서 기다릴 어떤 감정적인 경험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참삶은 주님과 동행하면서 하루하루 평범하게 생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생활인 것입니다.

사탄은 항상 길옆에서 우리에게 큰 소리로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우리의 뜻에 따라 사탄의 음성에 굴복하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시작이지요. 그 순간 우리는 그 대로에서 벗어나 미끄러져 떨어지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곧장 다시 대로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조금씩 더 멀리 대로에서 떠나가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그 원인을 깨닫기까지 시간이 걸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원인을 알아 다시 손과 무릎으로 대로로 기어 올라갈 때, 우리는 주님께 더욱 가까이 가게 되고 주님의 보혈의 피는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예수께서는 거기서 또다시 나의 잔을 넘치도록 채워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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