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이 마를 때
토머스 그린 지음 | 로뎀
샘이 마를 때
토머스 그린 지음
로뎀 / 2012년 5월 / 320쪽 / 14,000원
PART 1 지식을 넘어 사랑으로
우물, 시냇물 그리고 폭우
예수님이 사시던 시절의 팔레스타인에서는 지금보다 물이 더 귀한 자원이었다. 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쓸 수 있는 물도 위험한 경우가 훨씬 많았다. 고인 물은 괴질의 온상이었다. 예수님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양질의 흐르는 물, 즉 그분이 생수라고 부르신 물이 지니는 가치는 매우 컸다. 그분이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그리고 시편에서도 이미 중요한 상징으로 쓰인 물을 그토록 자주 생명과 구원의 상징으로 사용하신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여호와는 생수의 근원이시고 그의 백성들이 생명의 물을 마시도록 인도하시며 ‘쉴 만한 물가’에서 평안하게 누울 수 있도록 이끄신다.
이와 동일한 상징은 요한계시록의 끝 부분에서 요한이 영원한 생명에 관한 환상을 말할 때 많이 사용되었다.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요한계시록 21:6) 이것은 사랑의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고 요한이 그의 마지막 환상 가운데 그것이 성취됨을 본 내용이다. “또 그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요한계시록 22:1-2)
물론 요한계시록은 신비의 글이다. 또한 원수들의 위협 가운데 놓여 있는 교회를 격려하기 위해 쓰여진 박해 문학이다. 그래서 ‘암호 code’로 쓰여 있다. 그러나 구약에 쓰인 ‘생수’의 중요성과 예수님께서 물을 사용하여 가르치신 요한복음의 내용을 미루어 볼 때 ‘생명수’가 의미하는 바는 충분히 명백하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요한복음 3:5) 초대 교인들은 가나에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고, 장님을 고치신 물, 마지막 유월절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물로 씻어주시는 아름다운 사건을 묵상하면서 물이 상징하는 것은 점점 더 예수님의 핵심적인 가르침이 되어갔다.
그런 의미에서 물이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와야만 했던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갈보리 언덕에서 위대한 드라마를 종결지은 십자가 사건은 다음과 같다. “그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한복음 19:34)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려고 돌아가셨다. 그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흘러나와 교회와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 위에 부어졌고 “그 안에서 영생에 이르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셨다. 이후로 예수님을 물에 비유하는 일은 세례의식을 통해 교회 안에서 계속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모든 위대한 상징처럼, 물은 대단히 풍부한 상징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아빌라의 테레사가 자신의 영적 성장의 경험이 거치는 단계를 설명할 때 물을 비유해 의미를 전달하려 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사용한 물의 이미지는 기독교 영성사에서 가장 유명한 비유가 되었다. 그녀의 ‘정원에 물을 대는 방법’의 비유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여행을 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지도’로 비유할 수 있다.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면 초보자는 자신이 이제 원치 않는 잡초로 가득한 황무지를 정원으로 개간하기 시작했음을 깨달아야 한다. 전능하신 주님은 잡초를 뽑고 좋은 씨앗을 심어주실 것이다. 이제 우리가 명심할 것은 이 일은 이미 우리가 기도를 실행하기로 결심하고 기도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좋은 정원사들처럼 모든 힘을 기울여 화초들을 심고 그것들이 시들지 않고 가장 향기로운 꽃을 피워 우리 주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도록 물을 주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자주 우리의 정원에 오셔서 기쁨의 교제를 나누시며 우리가 맺은 선한 열매들로 인해 기쁨을 얻으신다.”
여기서 가장 기본적이면서 결국 초보자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은 정원의 설계가 기도하는 사람이 아닌 주님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신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한복음 15:16)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한복음 6:44, 6:37,65) 그러니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를 이끌지 않으시면 그분과의 만남을 갈망할 수도 없다.
테레사의 비유에 또 다른 중요한 내용은 물이 화초를 위해 필요하다는 점이다. 물은 기도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종종 ‘영적 위안 consolation’이라고 불리는, 기도 안에서의 하나님 체험이다. 그리고 정원에 심은 꽃은 덕을 말한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께서 심어 놓으신 꽃들에 물을 주는 것이다. 이것이 테레사가 비유를 통해 말하려는 주제다. 테레사는 평생을 기도에 헌신한 묵상가다.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도 기도 그 자체는 그녀가 추구하는 마지막 목적지가 아니었다. 마치 물이 정원의 꽃들을 위해 있는 것처럼 기도 가운데 하나님 체험을 구하는 것은 체험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 삶에서 덕이라는 꽃을 맺고 키우기 위한 것이다.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 이 일로 우리가 치러야 할 노고가 얻는 것보다 클지 혹은 얼마나 오랫동안 해야만 하는 일인지 알기 위해, 물을 주는 방법을 알아보도록 하자. 나는 물을 대는 방법을 네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우선 우물에서 물을 긷는 방법이 있다.(이 방법은 우리가 힘들여 해야만 하는 방법이다.) 두 번째는 수차나 물레방아 같은 장치를 이용해서 저수지의 물을 길어 올리는 방법이다. 세 번째는 강이나 시내에서 물을 끌어오는 방법이다.(이 방법은 물을 훨씬 더 잘 댈 수 있다. 물을 넉넉하게 줄 수 있기 때문에 자주 물을 댈 필요가 없으며, 그만큼 정원사에겐 할 일이 줄어든다.) 마지막으로 폭우가 쏟아져 물에 잠기도록 하는 방법이다.(이 방법은 주님께서 손수 하시는 방법으로 우리는 할 일이 없다. 그러므로 위에서 언급한 어떤 방법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방법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신비로울지라도 그것이 말하는 핵심은 분명하다. 우리가 성숙해짐에 따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점점 더 많아지고 우리가 할 일은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테레사가 말한 것처럼 주님은 정원사를 돕는 일을 기뻐하신다. 그래서 마치 당신 자신이 정원사인 것처럼 정원의 모든 일을 다 감당하신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기도가 점점 더 우리 자신을 만들어가도록, 그리고 변화시키도록 주님께 맡기는 것으로 되어감을 말한다. 우리가 성숙되어감에 따라 기도는 시간을 은혜롭게 허비하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 된다. 단순하게 토기장이의 손에 들린 진흙이 되는 것이다. 이 일은 듣기에는 매우 쉬운 일이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배웠던 일들 중 가장 하기 힘들다. 우리에겐 9일 동안 연속 기도를 올리든지 심지어 쉬지 않고 묵상하든지 우리의 손으로 스스로의 운명을 헤쳐나가는 것이 훨씬 더 쉽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하게 경험하지 못하는 진정한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러나 부여잡은 손을 놓아버리고 자유롭게 부유하며 살 수 있는 복된 사람들에게는 새롭고도 신비로운 세계가 열린다. 이 세계는 콜럼버스나 마젤란이 우연히 발을 딛게 된 신세계보다 더욱더 신비롭고 이국적인 곳이다. 안전한 집에서 나올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한낱 소문일 뿐이며 듣고도 믿을 수 없는 소식일 것이다. 은혜로 인해 그리고 그들 자신의 넉넉함으로 인해 길도 없는 바다를 향해 떠난 소수의 사람들만이 탐험가들의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것을 실제로 알게 될 것이다.
샘이 마를 때
나는 나 자신도 죽을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던 때를 기억한다. 40대 초반이었다. 아마도 사경을 헤매는 아버지를 지켜보며 비록 내게 병의 증상은 없지만 나도 매일매일 죽음을 향해 다가서고 있음을 자각하게 된 것 같다. 우리의 삶이 궁극에 다다랐을 때 비켜갈 수 없는 것이 죽음임을 인정하는 일은 아마도 개인의 삶에 있어 직면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도 고통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외면의 죽음은 우리 삶의 외적인 사건과 환경에서 일어나며 결국 신체적 죽음으로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우리가 또한 언급해야 하는 것은 내적인 죽음이다. 이것은 우리 내면의 삶에서 일어난다. 아빌라의 테레사의 ‘물 긷는’ 비유에 따르면, 이 죽음은 마음의 정원에 샘이 마를 때 시작된다. 신체적인 죽음과 마찬가지로 처음에 이것은 하나님을 상실하는 재앙과도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점차로 우리는 메마름이 성장임을 깨닫는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샘에서 물을 얻기 시작하며, 그것을 발견하게 하신 하나님을 기뻐한다. 그러나 선하신 우리의 지존자 하나님은 여러 이유들로, 아마도 우리를 더 이롭게 하시려는 이유들로, 샘이 마르게 하신다. 우리가 좋은 정원사로서 할 일들을 하고 있음을 아실 때에도 정원을 메마른 상태로 놔두시고 거기에서 덕이 자라도록 하신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가 메마를 때, 즉 마음의 감동이 없거나 영적 위안의 물로 우리를 인도하지 못하는 것 같을 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테레사는 매우 상식적인 답변을 한다. 우리는 꽃을 보아야 한다. 즉, 덕을 보면서 그것이 어떻게 행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결국 물은 꽃들을 위해 존재한다. 덕의 성장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덕이 우리 안에서 살아서 점점 더 풍성해진다면, 더구나 내가 헌신하지도 영적 위안을 받지도 못하는데 그럴 수 있다면 우리의 기도 생활은 메마름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것이다.
처음 기도를 시작할 때, 우리는 기도의 결실을 손으로 만져볼 수 있기를 원한다. 또한 하나님 체험, 곧 그분의 임재를 오감으로 체험하기 원한다. 지각과 상상이라는 강한 요소를 담은 느낌인 감정은 전인적 존재인 우리에게 선하고도 필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자기중심적이다. 물론 이것은 기도를 가능케 하시는 주님을 ‘알아가는’ 과정에 속한 것으로, 묵상이나 명상 등을 총동원한다. 하지만, 기도는 깊이깊이 알아갈수록 흘러나오는 사랑의 행위다.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 체험에 대한 갈망이나 단순히 그분에 대해 ‘아는 것’에서 진실로 그분을 ‘사랑하게 되는 것’으로 나아가는 데 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넘어가는 이 첫 번째 도약 후에 하나님을 아주 가깝게 느끼고 기도가 기쁨이 되는 시간들은 수개월 혹은 수년간 지속된다. 바로 이때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얻으려고 애쓰시는 ‘구혼’의 때다. 이 구혼의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찾기만 하면 열성적으로 반응하시는 것 같다. 어쩌면 우리는 어느 날 돌연 이 사랑의 요구에 직면할 수도 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 사랑의 요구에 진심으로 “예” 할 수만 있다면, 이 헌신의 순간은 우리 삶에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이때부터 기도는 우리가 하는 여러 행위 중 또 다른 하나가 아닌, 바로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가 된다. 주님은 이제 더 이상 여러 친구 중 한 명이 아니라 우리 삶의 가장 중심이 되신다.
그럼에도 우리는 실패할지 모른다. 아니 실패할 것이다. 우리가 성장에 대한 요구와 마주할 때 그런 것처럼 물러나고, 심지어 헌신의 약속을 깨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그때에도 우리는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알고 있다.
이때부터 우리의 기도는 더욱 힘들어진다. 우리는 주님의 길이 우리와 다름을 진정으로 깨닫게 된다. 우리는 어느 날 샘이 말라 있음을 발견한다. 우리는 실망한다. 왜냐하면 이미 위안의 물을 발견한 이후로 메마름의 이유는 거의 언제나 우리 자신의 성실함이 부족하거나 관대한 베풂의 부족이라고 짐작해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근심에 싸여 묻기 시작한다.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왜 하나님은 침묵하며 임재를 거두셨을까? 우리에게 그 이유를 알려주시지 않는 하나님이 잔인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해 기도를 중단해 버리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은 심각한 비극이다.
이 일은 이제 우리가 기도의 메마름이 전혀 새로운 의미를 지니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테레사는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로 이 의미를 우리에게 설명했다. 고독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변덕스러움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진실로 ‘사랑’이라는 덕목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사랑을 방해하는 우리 안의 모든 것이 죽을 때에만 우리는 진실로 사랑 안에서 살기 시작한다. 메마름과 고독은 우리의 사랑을 오염시키는 모든 이기심과 허영을 거둬내고 우리의 사랑을 “죽음처럼 강한”(아가서 8:6) 사랑으로 만든다. 예수님께서도 이 사랑에 대한 열정으로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렸다. 만약 기도 가운데 우리가 찾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발견한 그곳에서 우리도 그분을 찾게 될 것이라고 기대해야만 할 것이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 의미를 이렇게 말한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느니라.”(히브리서 5:7-9)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받으며 순종을 배우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 순종하여 구원받는다. 그분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그분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 유일한 길이시다.(요한복음 14:6)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고통 없이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안내자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가 있음을 분명히 깨달았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로새서 1:24)
분명히 주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고난을 당하셨다. 실제로 그분은 죽지 않고도 우리를 쉽게 구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죽음의 길을 보여주셨을 때 그것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셨고 완벽하게 그러한 삶을 사셨다. 갈보리의 십자가와 흠이 많은 나 자신의 사랑을 보면서 내가 얻은 기쁨들 중 하나는 오직 한 분, 예수님께서는 비록 내가 할 수 없지만 하기 원하는 방식으로 완벽하게 하나님을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 자신의 육신 안에서 갈보리의 신비를 계속 이어 행함으로써 구속의 사역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를 구속 사역의 동반자로 삼으심은 우리에게 보여주실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랑이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나 장 폴 사르트르는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은 우리를 파괴시키거나 비인간화시킨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인간의 문화와 역사 안에서 하나님은 “죽어야만 한다”고 모든 시대의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말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유일한 증거는 ‘경험’이고, 하나님께 모든 기회를 온전히 드린 사람들의 삶이다. 한나 헌나드는 이런 사람들과 함께 침묵 기도를 했던 경험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때때로 우리는 그분의 임재 속으로 깊이 들어가 말 한마디도 할 수 없는 경험을 하곤 했다. 시간은 침묵 속에서 흘러갔다. 이러한 침묵의 교제 시간에는 마음을 완전히 비우려고 하거나 느닷없이 생각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일 따위는 없다. 오히려 이런 종류의 교제는 온 마음과 의지가 주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그리고 기쁨으로 드려지길 원한다. 수동적인 면은 전혀 없고 가능한 한 가장 적극적으로 협력하게 된다. 비록 처음에는 극도로 둔하고 무지근하게 느껴질 수 있으며 생동감 넘치는 교제는 꿈도 꿀 수 없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반드시 오셔서 깨워주시고 능력을 부어주시기 때문에 그러한 기도의 아침이 가져오는 결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의 승리로 인도받을 뿐만 아니라 마음과 몸이 놀랍도록 새로운 힘과 생기를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