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으소서
로이 헷숀 지음 | CLC
당신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으소서
로이 헷숀 지음
CLC / 2011년 12월 / 192쪽 / 8,000원
저자 서문
언젠가 내가 영적으로 침체되었다고 느끼고 있을 때 음악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가사는 전에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나를 덮으소서. 나를 덮으소서.
당신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어주소서.
당신은 나의 기업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이 가사는 성경 <룻기>의 주인공 룻이 보아스에게 한 말에서 나온 것이었다. 나는 그 곡을 듣는 동안 나 역시 룻처럼 가난에 찌든 사람임을 깨닫게 되면서 나의 곤경을 고백하며, 이 몸을 주님의 옷자락으로 덮으소서 하는 기도를 드렸다. 주님은 즉시 응답해 주셨고, 그날 이후 나는 심령에 뭔가 냉랭함을 느낄 때마다 그 은혜의 옷자락이 내게 펼쳐져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룻기에 나타난 구속과 부흥
히브리어로 '고엘'이라는 단어는 '기업 무를 자' 또는 보통 '구속자'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율법에서는 남자가 후사 없이 죽으면 그의 형제가 그 과부를 아내로 맞이하여 그 형제를 위하여 혈육을 낳아 길러야 하는 의무가 있었으며, 또한 그 씨가 그 형제의 이름과 기업을 취한다. 룻기에서는 형제가 없어서 그 의무가 가장 가까운 친척에게로 가게 된다. 룻기는 이러한 모세의 긍휼법에 근거한 이야기이며, 이 법이 어떻게 성경에서 실제로 적용되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경우라 하겠다. 그리고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기서 '구속'이란 본래 성부, 성자, 성령께서 온 힘을 기울여 하시는 하나님의 최상의 은혜 행위를 함축한다. 우리는 대체로 이 구속을 에베소서 1:7"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에서 말하는 것처럼 죄 사함과 동일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여러분이 신약의 단어 '구속'에다가 그것이 근거를 두고 있는 구약의 상관성을 도입하면, 단순히 죄를 사한다는 뜻보다 훨씬 더 깊은 뜻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구속이란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로서 인간의 죄를 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죄로 인해 야기된 모든 손실들을 만회하며 역전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룻기> 속에는 아주 특별한 구속과 부흥의 진리가 담겨 있다.
구약의 탕녀 나오미
4개의 장으로 되어 있는 <룻기>의 1장은 중심인물이 나오미이며, 베들레헴에 기근이 들었을 때, 나오미와 그녀의 남편 엘리멜렉은 틀림없이 그 지역의 유지였을 것이다. 그들은 그곳에 남아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기도하며 그 백성들을 인도했어야 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나의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나의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며 그 땅을 고쳐주리라."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벗어날 다른 길을 찾았다. 인접해 있는 이방 나라 모압 땅은 기근이 없는 것 같았다. 들판은 푸르고 기름졌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대신, 그의 몇 안 되는 가족과 재물을 모아 모압 땅으로 떠났다. 그곳에서는 스스로 더 잘 살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결국 그들은 여호수아 때부터 그 가족에게 분배된 기업의 소중한 땅에서 떠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기근의 때를 만나면, 주님의 얼굴을 구하며 왜 이렇게 되었는지, 왜 우리의 심령이 냉랭하며, 주님과의 교제가 끊어졌는지 간구하기보다, 다른 들판 곧 세상의 들판을 바라보며, 우리의 마음을 거기에 둔다. 사도 요한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요일 2:15)고 했을 때 '세상'은 물질적인 자연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분리되어 조직된 인간 사회를 말한다. 세상과 벗이 된다는 것은, 그것이 외견적으로 나쁘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다(약 4:4). 당신에게 기쁨과 자유를 주시던 주님에 대해 무감각해져 당신의 마음이 모압의 들판에 안주하게 되는 것이 누구의 잘못인가? 물론 그것은 당신의 잘못이며, 우리의 잘못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문제를 직시하고 기쁨의 근원이 되신 분에게 돌아오기보다는 탕자처럼, 어쩌면 나오미처럼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대신할 만한 것들을 찾기 위해 먼 나라로 떠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소중한 기업인 기쁨과 자유를 버린다.
나오미가 그곳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고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의 옆에는 며느리 룻이 있었다. 모압 땅에 남기를 택한 첫째 며느리와 달리 룻은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고 말하며 어머니를 따른다. 시어머니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의 자리에 서서 그분께 자복하는 모습을 보면서, 룻은 깨닫게 된 것이다. 즉 나오미의 하나님은 의인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 여인인 자신과 같은 죄인들에게도 긍휼이 풍성하시며 은혜로우시다는 것을! 그러나 그것은 그녀에겐 중차대한 선택이었다. 그것은 곧 빈털터리로 베들레헴으로 따라가서 아무런 전망도 없이 나오미와 함께 가난을 고스란히 겪어야 하는 일이었다. 콧대 높은 이스라엘인들이 이 이방인을 어느 수준까지 같이 살도록 환영해 줄 것인지도 불분명한 일이었다.
가까운 친척 보아스
나오미 남편의 친척으로 아주 부유한 사람이 엘리멜렉 가계에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보아스였으며, 나오미에게는 '고엘'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 당시 '고엘'이 예표하고 있는 분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보아야만 한다. 그분은 수세기를 걸쳐 내려오는 동안, 그리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개인사와 역사 속에서 수도 없는 사죄의 은총을 통해 잃어버린 죄인들의 구속자가 되시며, 절망적인 상황을 회복시키는 분이심을 스스로 입증하셨다. 모든 사람들의 고엘이 되시는 것이다. 그들을 구속하실 권리와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처한 상황들을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회복시키신다.
일이 잘못될 때마다 그분은 우리의 구속자로 거기 계신다. 또 다시 일이 그 시점이나 다른 곳에서 잘못되면, 그분은 그것을 다시 온전하게 만드실 태세를 하고 계신다! 그러니 우리가 언제든 용기를 내어 재빨리 회개하며 우리를 그분께 맡겨드릴 수 있는 것이다. "죽임 당하신 존귀하신 어린 양 그의 보배로우신 피는 결코 효험을 잃는 법이 없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할 때 그것은 죄를 지어도 되는 면허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려고 십자가에서 보혈의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단호히 죄를 거절하는 용기와 위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만약 모든 일이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생각으로 승리의 칼날 위를 걸으며, 혹시 떨어지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에게는 정말 끝이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기업 무를 자의 거듭 속량하시는 능력을 아는 자들에게는 그것이 결코 끝이 되지 않는다!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 줍는 룻
이방 여인 룻에 관한 아름다운 소문은 보아스의 귀에까지 들어왔고, 그 때문에 그녀가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이르렀을 때 그는 보통 이삭 줍는 자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특별한 호의를 베풀며 다른 밭으로 가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일꾼들에게 "그녀를 책망하지 않도록" 했다. 룻은 곧 보아스의 밭이 진정 은혜의 밭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 은혜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그녀는 "땅에 엎드려 그에게 절하며" 묻는다.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간단하다. "네가 한 모든 일이 분명 내 귀에 들렸느니라." 그는 그 가난과 곤경 가운데서도 그녀가 내렸던 깊이 있고 값진 선택에 크게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것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일이다. 이 은혜의 밭을 떠나 다른 곳에 가서 이삭을 줍지 말라.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서 찾을 수 있는 해답 외에 다른 것을 찾으려 하지 말라. 룻은 그녀가 이삭을 줍는 밭의 주인이 그녀의 근족, 곧 고엘이며 그 가족의 손실과 결핍을 속량하고 충족히 해줄 인물이라는 것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그 옛날 찬송시는 노래한다. "십자가를 붙들라. 네 짐이 벗어지리라." 우리가 그분 앞에 고개를 숙이고 우리의 실패와 빈곤을 인정하며, 오직 예수님만이 죄인들에게 선한 일을 이루실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사랑과 격려와 도움이 정말 아주 특별하며 벅찬 방법으로 우리의 모든 환경으로부터 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우리 삶의 전 영역에 한 줌 한 줌 소중한 약속들이 의도적으로 흩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며, 우리가 그것들을 줍는 동안 우리 귀에 거듭거듭 울려오는 소리를 동일하게 듣게 될 것이다. "그녀를 책망하지 말고 꾸짖지 말라."
그렇다.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 은혜의 밭이 아니라 이삭을 주울 수 있는 다른 밭도 있을 것이다. 바울 사도가 그의 서신서에서 말했던 것처럼 "성령으로 시작하였던" 우리가 다른 밭에서 "육체로 마치려고" 하기도 한다. 때로 우리 자신의 힘으로 "뭔가 새로운 일에 진취적"이라는 명성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일도 결국은 우리를 절망과 낙심에 빠지게 한다. 은혜의 밭에 돌아오는 것, 곧 십자가 아래로 돌아오는 것이 얼마나 큰 안식인가. 그곳은 자신의 궁핍함을 고백하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모든 것들이 항상 선물로 예비되어 있는 곳이다.
보아스의 발치에 누운 룻
룻이 이삭을 줍는 밭의 주인 이름이 보아스라고 시모에게 말했을 때, 나오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을 것이다. 그것은 아주 민감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보아스가 기업 무를 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원치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토지를 속량하는 정도가 아니라, 한 여인을 취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오미는 여인의 직감으로 룻도 마음이 후한 이 신사에게 연정이 싹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룻은 나오미가 지시한 대로 목욕을 하고 기름을 바르고 새 옷을 입고는 사람들이 집에 갈 때까지 기다렸다. 보아스가 곡식을 도둑맞지 않기 위해 밭의 어두운 곳에 자리를 잡고 겉옷으로 몸을 덮는 것을 목격한 그녀는 그가 잠들자 그의 발치의 겉옷을 들고 살며시 들어가 누웠다. 한밤중에 깨어난 보아스는 그의 발치에 여인이 누워있는 것을 발견한다.
"네가 누구뇨?" 그는 깜짝 놀라 말했다.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이 종을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여기서 옷자락으로 누군가를 덮는다는 것은 남자가 자신이 선택한 여인이 자기 아내라는 것을 주장하는 상징적 행동으로, 에스겔서에 보면 그 뜻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자신의 아내로 삼으셨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아름다운 비유인 것이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스러운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너로 내게 속하게 하였었느니라."(겔 16:8) 보아스가 대답한다. "참으로 나는 네 기업을 무를 자니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행동이다. 가서 예수님의 발치에 누우라. 그분은 우리의 기업 무를 자가 되셔서 잘못된 모든 것을 속량하시며, 그 형편을 떠맡으실 권리와 능력과 의지를 가지신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실패자임을 깨달으며, 처해 있는 이 상황이 우리가 저지른 죄의 결과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항상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설혹 그 초래된 문제가 내 잘못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일에 대한 잘못된 나의 반응이 분명 한몫을 하는 때가 있다. 다른 사람이 먼저 잘못을 저지르고 나면, 내가 그에게 잘못 반응하여 일을 더 악화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간 서로 언쟁을 하는 동안은 누가 먼저 잘못했는지 잘 모르게 된다. 왜냐하면 이제 양쪽이 다 잘못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먼저 잘못한 사람으로 그 발치에 눕기를 결심할 때까지 예수님은 "그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어" 나와 나의 상황들을 떠맡으실 수 없으시다. 이것은 아주 명백한 사실이다.
룻이 돌아와 보아스와의 이야기를 모두 전하자 나오미는 말한다. "내 딸아,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날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그렇다. 그분이 쉬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쉴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께 문제를 맡겼다면, 주님은 반드시 성취하실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께 순종할 필요가 없다거나, 고백과 화해나 그 외 필요한 협력을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 자체가 문제를 회복시키는 것은 아니다. 이 모두를 속량하는 것은 오직 그분만이 하시는 일이며, 이 영역은 그분만이 영광스런 전문가이신 것이다.
보아스는 룻에게 기업 무를 자로서 일을 행하기에 앞서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찬가지로 십자가 아래 나아와 그곳에 우리의 모든 염려를 내려놓은 후, 얼마간 그곳에 잠잠히 앉아 하나님이 일을 해결하시는 동안 말씀에 순종하며 기다려야 한다. 죄 사함과 우리 영혼의 회복은 즉시 일어나지만, 우리의 처지를 회복시키시는 작업은 조금 더 시간이 걸린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다루셔야 할 다른 복잡한 요인들과 역사하실 다른 영혼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만히 앉아 있으라. 주님이 오늘날 이 일을 성취하시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시리라."
보아스와 그보다 더 가까운 친척
보아스가 룻이 요청하는 것을 하겠다고 말했을 때 그 일을 당장 할 수 없는 장애물이 있다는 것을 덧붙였다. "참으로 나는 네 기업을 무를 자나, 기업을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느니라." 이 사람에게 기업을 무를 자로서의 우선권이 있으며, 먼저 기회가 주어져야 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룻기>에서 주 예수의 모습과 그분을 중심으로 한 복음을 보게 된다. 만약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로서의 주님을 예표한다면, 그보다 더 우선권이 있는 이 '더 가까운 기업 무를 자'를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나는 이것을 죄인들에게 먼저 우선권이 있는 하나님의 율법으로 보아도 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율법이 죄인에게 실행할 수 있는 권리는 그를 정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이 죄인들에게 먼저 우선권이 있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들에게 어떤 높은 기준을 정해 놓고, 그 도덕적 요구에 순응하도록 우리를 부른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그것들은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에 나올 뿐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신 산상수훈이나 신약성경의 여러 곳에 나오는 윤리적 권면 속에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 중 그 누구도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 이 말은 곧 우리가 지키면 생명에 이르게 할 그 율법이 우리가 지키지 못하므로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결국 율법이란 정죄하는 기능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폐지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다 이루어져야 하지만 은혜 아래에서 다른 방법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은혜의 새 언약 아래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서 요구되는 것들을 스스로 책임지심으로써 우리가 이룬 것처럼 하신다. 하나님의 율법과 그것이 요구하는 높은 기준은 아무리 준수한 것들이라 하더라도, 만약 지키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율법은 그를 속량할 수 없다. 지금 <룻기> 4장에서 더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두 번씩이나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예수께서는 먼저 율법과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시면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이행하실 수 없게 된다. 요한일서에는 만약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깨끗게 하신다는 말씀이 있지만, 그렇게 하시기 위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라는 말씀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주님은 하나님의 공의를 짓밟아 가면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기"(롬 4:5) 위해서는 바울 사도가 로마서 3장에서 말한 것처럼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26절)라고 하실 수 있는 길을 찾으셔야만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죄인의 친구가 되셔서 그의 죄를 씻기시며 망쳐놓은 것들을 다루시기 위해서는 그가 하나님의 율법을 만족시키셔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