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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펠러, 십일조의 비밀을 안 최고의 부자

이채윤 지음 | 북오션
록펠러, 십일조의 비밀을 안 최고의 부자

이채윤 지음

북오션 / 2012년 3월 / 279쪽 / 14,000원



Part 1 어린 시절



자유로운 아버지와 신심을 가진 어머니

어머니의 엄격한 교육 / 세상 사는 지혜를 가르친 아버지: 록펠러의 어머니는 엄격한 '청교도 신앙'을 지닌 탓에 도덕적이고 경건하고 엄격했으며 때로는 가혹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화가 났을 때도 행동에 절도가 있었고 원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법이 없었다. 록펠러는 어머니의 강한 의지와 근면함, 근검절약 정신을 이어받았다. 한편 록펠러의 아버지는 현실적인 면으로 아들을 가르쳤다. 아버지는 록펠러가 걸음마를 시작하자, 도회지로 데리고 나가서 가죽 신발을 사 주면서 일찍부터 더 큰 세상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운동을 좋아했던 아버지는 록펠러를 비롯한 세 아들에게 승마, 사격, 수영을 가르쳤고, 때로는 아이들을 데리고 호수에 나가서 물고기를 잡는 법도 가르쳐 주었다. 또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술과 담배를 금지시켰다.

어머니에게 십일조를 배우다 / 어려서부터 배운 돈의 이치

2센트의 헌금: 존 록펠러가 여섯 살이 되던 해의 일이다. 어느 날 어머니가 어린 아들에게 말했다. "존아, 오늘부터 혼자서 교회에 다니도록 해라." 그리고 어머니는 록펠러의 손에 난생처음으로 20센트의 용돈을 쥐어 주면서 "20센트는 분명히 엄마가 너에게 준 것이다. 하지만 너는 이 돈을 함부로 다 써서는 안 된다. 이 안에는 네가 하나님에게 바쳐야 할 몫이 있거든. 20센트 중 십 분의 일인 2센트는 하나님의 몫이란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그것이 '십일조'라는 것이고, 앞으로 돈이 생기면 가장 먼저 하나님께 드릴 십일조를 반드시 따로 떼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록펠러는 교회에 가서 헌금 접시에 십일조를 바치고 예배를 드렸다. 찬송을 부르고 목사의 설교를 듣는 동안 어린 그의 가슴에 왠지 모르게 기쁜 마음이 솟아올랐다. 그 후부터 록펠러는 교회에 나가는 것과 십일조를 바치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게 되었다.

칠면조 키우기: 록펠러가 일곱 살 때 일이다. 어느 날 농장 덤불에 드나드는 칠면조 암컷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록펠러는 살금살금 칠면조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칠면조는 순식간에 덤불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록펠러는 다음 날 다시 그 자리로 가서 칠면조를 찾았다. 하지만 칠면조는 전날처럼 록펠러를 따돌렸다. 록펠러는 실망하지 않고 끈질기게 몇 차례 시도한 끝에 칠면조를 추적해서 드디어 둥지를 찾아냈다. 그는 칠면조를 붙잡아 알과 함께 헛간으로 가져왔다. 어머니는 록펠러에게 칠면조를 길러서 팔아보라고 권했다. 늘 근검절약을 강조하던 어머니는 아들에게 그렇게 자립정신을 가르쳤다.

야생 칠면조는 헛간에서 알을 품었고, 얼마 후 예쁜 칠면조 새끼들이 알을 깨고 나왔다. 록펠러는 정성을 다해 칠면조 새끼들을 돌보았다. 가을이 되어 새끼들이 다 자라자 록펠러는 그것들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록펠러는 다음 해에 칠면조 암컷을 몇 마리 사다가 더 많은 칠면조를 부화시켜 더 많은 돈을 벌었다. 그렇게 3년 동안 칠면조를 길러서 모은 돈이 50달러나 되었다. 어머니는 그 돈을 이웃집 농부에게 7퍼센트 이자로 빌려 주도록 했다. 1년 뒤 록펠러는 원금과 함께 3달러 50센트의 이자를 받았다. 3달러 50센트, 그 돈은 그가 하루 열 시간씩 열흘은 감자를 캐야 받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때 록펠러는 돈이 어떻게 이익을 만들어 내는지 깨달았다. 훗날 노년의 록펠러는 자서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그때부터 나는 돈을 위해 일할 게 아니라, 돈이 나를 위해 일하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진정으로 부유해지고 싶다면 소유하고 있는 돈이 돈을 벌어다 줄 수 있도록 하라. 개인적으로 일해서 벌어들일 수 있는 돈은, 돈이 벌어다 주는 돈에 비하면 지극히 적다.'

신흥 도시 클리블랜드로 가다 / 위대한 유산을 남긴 어머니

활기찬 도시 클리블랜드: 열네 살이 되던 해, 록펠러 가족은 클리블랜드로 이사를 했다. 록펠러는 클리블랜드에서 센트럴 공립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록펠러는 학구적인 학생은 아니었지만, 사물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표현할 줄 알았다. 그는 글쓰기와 발표력이 상당히 우수했는데, 그가 우연히 자신을 표현한 말인 '슬플 때에도 미소를'은 별명이자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인생을 함께한 두 친구: 록펠러에게는 친구가 별로 없었지만, 고등학교 시절 인생에서 중요한 두 명의 친구를 만났다. 한 사람은 남자였는데 이름은 '마크 한나'였다. 한나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진짜 사나이다운 기질을 가졌는데, 훗날 상원의원이 되었고 록펠러와 평생 서로를 돕는 관계를 유지하며 우정을 나누었다. 록펠러가 사귄 또 한 사람의 친구는 여자였는데, 이름은 '로라 셀리스티아 스펠먼'이었다. 그녀는 나중에 록펠러의 아내가 되는데 그렇다고 그들이 학창 시절부터 불꽃 같은 연애를 한 것은 아니었다. 록펠러가 로라와 친하게 지내게 된 것은 록펠러가 좋아하는 경영 과목을 그녀가 당시 여자로서는 드물게 선택과목으로 공부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세 가지 유산: 록펠러는 어린 시절 신앙심이 투철한 어머니로부터 여러 가르침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어머니와 한 세 가지 약속은 그가 대 사업가로 성공한 비결이라고 다음과 같이 자서전에서 밝혔다. "첫 번째 유산은 십일조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용돈을 20센트씩 받았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는 십일조 헌금을 해야 한다면서 십일조를 드리는 습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두 번째 유산은 교회에 가면 맨 앞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래야만 목사님의 설교 말씀에 더 많은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세 번째 유산은 교회의 일에 순종하고 목사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입니다. 그 때문에 나는 조금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어도 목사님의 말씀을 따랐고, 어떤 일이든지 교회에서 정한 일은 불평하지 않고 항상 순종한다는 원칙을 지켰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 축복의 씨를 드리면, 반드시 20년, 30년 후에 어마어마한 결실로 돌려주시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Part 2 일찍 시작한 사업



가장 일찍 출근해 가장 늦게 퇴근한다 / 인생을 기록하다, 회계장부A

인생의 첫걸음 / 일에서 느낀 행복: 1855년 8월, 고등학교를 졸업한 열여섯 살의 소년 록펠러는 가정형편이 여의치 못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클리블랜드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일자리를 구했으나,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9월 26일, 3층짜리 벽돌 건물의 계단을 오르며 원하는 곳을 찾았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곳은 '휴이트 앤 터틀'이라는 곡물 위탁판매 회사였다. 사장은 록펠러의 이력서를 들여다보다가 "자네가 잘할 수 있는 일은 뭔가?"라고 물었다. "저는 회계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경리 일을 하고 싶습니다." 록펠러는 자신 있게 말했다. 그렇게 해서 록펠러는 그 회사의 경리직원으로 채용되었다. 한편 사장과 동료들은 록펠러의 성실하고 헌신적인 태도에 모두 놀랐다. 그는 매일 같이 새벽 6시 30분에 출근했고, 밤 10시가 넘어서야 퇴근했다. 그러나 그의 월급은 그의 노력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었다. 록펠러는 사기당한 기분이 들었지만 일을 배울 수 있다는 자체에 행복을 느꼈다. 록펠러는 배달된 물품을 확인하고 계산서를 정리하는 일에서부터 대금 지급과 미수금 정리까지 회사의 회계 장부 일체를 도맡아서 처리했기 때문에, 회사가 운영되는 상황을 누구보다 소상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경영에 대해 배워갔다. 아울러 점차 산업 발전을 보는 통찰력을 키워나갔다. 또한 미국 경제에 혁명을 일으킨 것이 철도와 전신이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일기 같은 장부책: 록펠러는 어린 시절부터 일기를 쓰는 대신, 자신만의 금전출납부인 회계장부를 기록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매일 저녁 그 장부를 기록하며 자신의 하루 일과를 꼼꼼하게 짚어 나갔고, 다음 날의 수입과 지출을 따져보았다. 말하자면 장부에 적힌 숫자가 하루하루의 기록이자 반성이었던 셈이다. '휴이트 앤 터틀'에 입사한 후, 그는 더욱 철저히 회계장부를 기록했다. 당시 그가 기록한 장부를 사람들은 '회계장부A'라고 부른다. 록펠러에게 있어서 '회계장부A'는 사업의 의사결정을 이끌어 주고, 오류에 빠지기 쉬운 감정을 배제시키고, 비능률적인 요소들을 포착하게 해주며, 심지어 부정을 폭로해 주는 신성한 책이었다.

여호와가 인도하는 사업을 시작하다 / 사업보다 열심히 믿음의 활동을 하다

전혀 안 어울리는 두 사람: 1858년, 록펠러는 회사에 3년째 근무하면서 600달러의 연봉을 받고 있었다. 그는 회사의 가치와 자신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연봉을 800달러로 올려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구두쇠인 사장은 적당히 넘어가려는 태도였다. 록펠러는 다른 직장을 알아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다른 위탁판매 회사에서 경리로 일하고 있는 모리스 클라크가 록펠러에게 함께 사업을 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영국 출신인 클라크는 록펠러보다 열두 살이나 연상이었고, 술과 담배를 즐기고, 입에 욕을 달고 사는 거구의 사나이였다.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두 사람은 곧바로 의기투합하여 위탁판매 회사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첫 사업에서 거둔 성공: 1859년 3월, 록펠러는 허름한 창고 건물에 '클라크 앤 록펠러'라는 간판을 내걸고 사업장의 문을 열었다. '클라크 앤 록펠러'사는 육류, 곡식, 어류, 석고, 대리석 등 클리블랜드에서 거래되는 거의 모든 것을 취급했다. 회사 일은 자연스럽게 분업이 이루어져서, 클라크가 현장을 뛰고 록펠러는 경리를 맡았다. 사업은 빠르게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록펠러는 사무실에서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농장을 돌아다니며 직접 거래할 작물들을 골랐고 농부들과 친분을 돈독하게 만들어 나갔다. '클라크 앤 록펠러'사는 첫 해에 4,400달러, 다음 해에는 1만 7,000달러의 흑자를 기록하며 급성장했다. 거기다 1861년 4월에 시작된 남북전쟁은 그들의 사업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열아홉 살의 집사 록펠러: 록펠러는 열아홉 살에 이리 스트리트 침례교회의 집사가 되었다. '클라크 앤 록펠러'사를 차린 후에도 그는 회사 일을 하지 않을 때는 반드시 교회 일을 거들었다. 그는 새로 조직된 YMCA 일을 보기도 했지만. 대부분 교회 사무를 보며 교회 재정을 관리하는 등 행정적인 일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그는 교회의 재정도 세상의 비즈니스처럼 깔끔하게 해야 된다고 믿고 있었으며, 자신의 사업이 번창일로를 걷기 시작하자, 그의 헌금이 교회의 주요한 자금원이 되었다.

영적(靈的) 복식부기: 해가 바뀔 때마다 록펠러의 헌금 액수는 놀랄 정도로 많아졌다. 그가 운영하는 회사가 엄청난 규모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교회에 헌금을 내거나 남을 돕는 일은 보답이나 명예를 바라지 않고 해야 할 기독교인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1895년,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보살핌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소. 나는 내 양심이 명하는 바에 따라서 그 돈을 쓸 것이요. 하나님은 내가 돈을 벌면 곧 그것을 다시 나누어 줄 것임을 아시고 나를 도구로 사용하시려 하는 것 같소."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사용하는 법 / 영혼의 동반자를 맞이하다 / 능숙한 이는 왕 앞에 설 것이오마음으로 깨달은 재능 / 두 번째 선물, 석유: 일찍부터 자신의 재능을 깨달은 록펠러는 돈을 버는 재능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여기고 평생 즐겁게 열심히 돈을 버는 데 전력을 다했다. "엄청난 양의 석유는 분명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이것은 록펠러가 석유 사업에 성공을 거둔 후에 한 말이다. 사실 석유는 그에게 주어진 두 번째 선물인 셈이다. 록펠러가 '클라크 앤 록펠러'사를 세운 이후, 미국은 남북전쟁에 휘말려 들었고 미국 전체가 엄청난 시련을 겪었지만, 그 혼란 속에서도 미국 사회는 독점 재벌을 탄생시키는 자본주의의 확고한 실험대가 되었다. 곧이어 미국 사회에는 '골드러시'에 이어 '오일러시'라는 강력한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최초로 유전을 발견한 것은 1859년, 펜실베이니아 '타이티스 빌'의 에드윈 드레이크 대령이었다.

타이티스 빌의 유전이 발견된 지 4년 후, 클리블랜드에는 획기적인 일이 발생한다. 클리블랜드에서 뉴욕, 그리고 '석유 지대'의 중심지와 직결되는 철도가 놓인 것이다. 록펠러는 이제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는 예측을 불허하고 실패 확률이 높은 유전개발보다는 정유업의 전망이 더 밝다고 내다보고, 동업자인 클라크, 사무엘 앤드루스와 함께 8,000달러를 투자해서 정유 회사를 설립했다. 그들이 차린 정유 공장은 몇 대의 증류기, 용광로가 전부였고 기술력은 일천했지만, 그곳에는 곧 철도가 들어설 예정이라는 장점이 있었다. 록펠러는 석유 회사를 세우고 항상 그래왔듯이 일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현명한 여인, 로라 / 서로에게 내린 축복: 1864년 3월, 록펠러는 로라 스펠먼과 약혼했다. 그리고 록펠러는 사업이 궤도에 올라서자 로라에게 청혼했고, 그해 9월 8일, 두 사람은 로라의 집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목사님과 양가 식구들, 그리고 직원 몇 명만을 초대한 단출한 결혼식이었다.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날: 1865년 초, 잘나가던 록펠러의 회사가 경영진의 불화로 분열될 위기에 처했다. 클라크는 회사 부채가 거의 10만 달러나 된다면서 불만이 많았고, 록펠러는 록펠러대로 사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클라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회사를 경매에 부쳐서 가장 높은 값으로 사들이는 측에게 매각하는 게 최선이라는 합의에 도달했다. 물론 석유 전문가인 앤드루스는 록펠러의 편을 들었다. 회사의 경매는 1865년 2월 2일에 열렸다. 입찰은 클라크가 500달러부터 시작했다. 그러자 록펠러가 바로 1,000달러를 불렀다. 가격은 계속 올라갔다. "7만 2,000달러." 절망적인 목소리로, 클라크가 말했다. "7만 2,500달러." 록펠러가 주저 없이 대답했다. 결국 클라크는 손을 들고 말았다. 그날 이후, 회사는 '록펠러 앤 앤드루스'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록펠러의 성공 요인 네 가지: 첫째,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다. 록펠러는 첫 직장에서 새벽 6시 반에 출근해서 밤 10시가 넘어서까지 일에 매진했다. 둘째, 자기 분야에 끝까지 파고든다. 록펠러는 석유 사업을 시작한 후, 오로지 석유만 생각했다. 셋째, 인재 관리에 뛰어나다. 록펠러는 사업 초기부터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재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넷째, 앞날을 내다보는 통찰력을 가진다. 록펠러의 성공은 대개 앞날을 내다보는 선견력과 통찰력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는 석유 사업에 몸을 담으면서 원유를 생산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정제하는 정유 사업과 그것을 저렴하게 수송하는 운송업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를 창안함으로써 석유 산업 전체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Part 3 일생을 바친 석유 사업



기도로 위기를 극복하다 / 믿으면 모든 것을 맡겨라 / 원유업계를 점령해 나가다

탄광에서의 기도: 1863년, 록펠러가 처음으로 석유 사업에 뛰어들었을 때의 일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석유 사업의 진가를 잘 알지 못했던 록펠러는 광산업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친구 한 사람이 광산업을 권유했고, 그는 거금을 들여서 탄광을 인수했다. 그러나 아무리 광산을 캐고 들어가도 돌덩어리만 나왔다. 광부들은 임금이 밀리자 폭도로 변해 아우성을 쳤다. 그는 믿을 곳이 한 곳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황량한 폐광에 엎드려 기도했다. 그러다가 그는 잠든 듯 쓰러져 이상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잠시 잠이 든 것인지, 꿈을 꾸는 것인지, 어떤 길을 가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보게 되었다. 길은 무척이나 험했다. 그러다가 너무 피곤해서 한편으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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