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하나님을 알아가는 시작입니다
서승동 지음 | 예수전도단
묵상, 하나님을 알아가는 시작입니다
서승동 지음
예수전도단 / 2011년 2월 / 240쪽 / 11,000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명상과 묵상의 차이
명상과 묵상은 근본적으로 전혀 다릅니다. 명상은 머릿속의 생각을 자꾸 없애고 비우려 하는 것이지만, 묵상은 근본적으로 생각을 온통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채우는 것입니다. 깊이 있게 생각하면 할수록 문제가 자꾸 꼬이는 것 같을 때, 그 이유가 하나님이 아니라 일을 생각하기 때문은 아닌지 한번 점검해 보기 바랍니다. 우리는 묵상을 한다면서 대개 나에게 당면한 일, 복잡한 문제를 생각합니다. 이렇게 걱정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 아버지가 실직하시면 우리 가정은 경제적으로 더 어려워질 거야. 동생들은 이제 대학교에 가야 하고…. 어떻게 하지?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그러다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뀔 때, 복잡했던 문제들이 풀리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복잡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모든 문제가 풀리기 시작합니다.
사람을 무너뜨리는 사탄의 전략
사탄의 목표는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게 합니다. '너, 아브라함과 비교하면 아직 멀었지? 다윗과 비교하면 아직 멀었지? 그래, 더 노력해야 되겠다.' 별의별 생각을 다 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아브라함으로, 다윗을 다윗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는 신앙적인 열등감을 갖게 합니다. '다윗은 다윗이고, 나는 나지.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하며 체념하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말씀 묵상의 키워드
말씀 묵상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깊이 있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 살고 계신 시골에 내려간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가 시골을 찾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부모님을 뵙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시골에 가서 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엄마, 저 왔어요!"라고 하며 부모님께 인사드리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인사를 드리기는커녕 자기 집으로 가져올 쌀자루에만 관심이 쏠려서 그것부터 챙기기 시작하면 부모님의 마음이 어떨까요? 말씀 묵상도 이와 같습니다. 말씀을 읽을 때 우리의 최대 관심은 하나님을 만나 뵙는 것이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계시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가장 큰 관심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생각할 때 초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자비롭고 은혜로운 하나님의 성품이 내 성품 가운데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을 보면,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저절로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붙어 있어서 그분과 더불어 교제하고 그분을 깊이 묵상하면 저절로 우리 성품이 바뀌게 됩니다. 저절로 열매 맺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고슴도치를 품으시는 사랑
제 경험을 나누고 싶습니다. 요한일서 4:7-8절 말씀을 읽다가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라는 부분이 제 마음에 깊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인가?'라고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형제를 사랑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은 아주 충격적인 사건을 일으키셨습니다. 이렇게 응답하신 것입니다. "너는 네 모습이 어떤지 아느냐? 진정한 네 모습을 알기 전에는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갑자기 한 그림이 제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고슴도치의 모습이 보였는데, 온몸에 가시가 난 고슴도치는 다가오는 형제들에게 상처를 주어 아프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네 모습이다. 네가 네 형제들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아느냐? 너의 몸에 돋힌 가시가 네가 사랑하는 아내, 자녀, 형제들을 아프게 하고 있다."
계속해서 하나님은 또 다른 놀라운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을 향해 달려가 그분 가슴에 안겨 참 쉼과 안식을 누리는 한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저였습니다. 저 때문에 주님 가슴이 멍들고, 제 몸에 나 있는 가시 때문에 주님 가슴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제가 다가가려 하면 언제든 주님이 안아 주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분은 고슴도치 같은 저를 항상 받아 주셨습니다. 원망이나 불평이라는 가시를 가지고 나아갔을 때조차 가슴에 품어 주셨습니다. 그럴 때 저는 놀라운 평강을 누리며 그분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더 강하게 안아주고 위로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후로 저는, 가시를 품고 저에게 다가오는 형제를 가슴에 품으며 주님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형제를 품게 되면, 그가 제 가슴에서 쉼과 평강을 누릴 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뒤에 주님을 바라보면, 주님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했습니다. "이제 네가 나를 닮아 가는구나."
말씀을 어떻게 묵상할까?
말씀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라
말씀을 묵상하려면, 하나님과 약속한 자리 가운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니, 말씀 묵상뿐만이 아닙니다. 기도와 예배의 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출 25:22). 하나님은 이 세상 어느 곳이나 항상 계신 분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굳이 일정한 장소를 정하여 성소를 만들게 하시고, 그 성소로 나오라고 하셨을까요?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지금 시대에는 성소라는 외형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소로 나오라고 하신 하나님의 원리와 원칙은 똑같이 우리 삶 속에 적용된다고 믿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내게로 나아오라"라고 하시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온 천지에 계신 하나님이 일정한 장소를 정해 그곳으로 나아오라고 하신 것은 우리에게 마음을 정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일이면 우리는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나옵니다. 분명히 몸은 교회에 왔는데, 마음은 집을 왔다 갔다 합니다. 특히 예배 중에 쉽사리 꺼 놓지 못하는 핸드폰이 그 증거입니다. 비록 몸은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세상 어느 누구에게나 마음이 열려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다른 데 가 있다는 표시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합니다.
감사함으로 나아가라
하나님께 나아갈 때, 오늘날의 우리도 구약시대에 어린 양을 제물로 드렸듯이 제물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제물을 준비해야 할까요? 우리의 제물이 되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번제물이 되셔서, 우리를 묶고 있던 모든 죄의 근원을 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그곳'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들을 묵상하며 감사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십자가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고 감격하여 하나님의 임재하심 가운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지 못하는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에 감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감사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할 때마다(성막의 '물두멍' 상징)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를 정결케 해주시며 용서해 주십니다.
물두멍에서 깨끗케 되었다면, 이제 빗장을 열고 성소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성소 안에는 열두 개의 진설병이 놓여 있습니다. 이는 열두 지파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 우리의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님께 감사드리면서 떡덩이를 하나하나 바꾸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나라를 향한 생명의 떡, 또 이것은 북한을 위한 생명의 떡, 그리고 이것은…' 그렇게 말입니다. 또한 성소 안에는 일곱 등대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내 생명의 빛이 되시고 내가 가야 할 길을 비추는 빛이 되시며, 내 마음의 어둠을 밝혀 주시는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어둠과 혼란 가운데 있을 때면 언제나 빛이 되어 주신 주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성소에서 피우는 향은 성도의 기도입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는 하나님께 열납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성령님을 찬양하며, 점점 성소 안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성막의 그림을 머릿속에 그리며 감사와 찬송으로 나아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젠 지성소로 들어갈 차례입니다. 지성소 안은 매우 깜깜합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을 잠잠히 기다릴 수밖에 없는 공간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빛이 됩니다. 이 빛이 임할 때 우리는 주님과 깊은 교제 가운데 들어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마음껏 누리고, 주님께 우리의 헌신을 드립니다.
관찰훈련하기
이제 말씀 묵상의 자리에서 말씀을 펴고 말씀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말씀을 관찰하려면, 몇 가지 안목이 필요합니다. 사건 현장을 취재하는 기자의 마음으로 성경 속 현장을 관찰해 봅시다. 혹은 드라마 연출자가 되어 그 성경 속 사건을 드라마로 재구성해 본다고 가정하여, 배경이나 분위기들을 구상하고 등장인물들을 어떻게 분장시킬지 등을 관찰해 봅시다. 우리는 말씀 속 사건의 현장에서 말씀을 관찰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영화나 연극을 보듯 성경의 모든 사건을 그저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듯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감동을 받아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지만, 그 사건은 우리에게 심각한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신 장면을 관찰하라고 하면 지식적으로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분석합니다. 그러나 거기엔 으레 사건의 현장성이 상실되어 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라
사건의 현장성이 살아나면, 내 마음이 움직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은 내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우리는 그 사건에 대해 성경인물들과 이야기 나누어야 합니다. 또한 성경을 기록한 사람과도 나누어야 합니다. 내 마음 속 깊이 있는 것들을 끄집어내어 그 사건을 대하는 나의 태도나 마음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관찰입니다. 사건을 관찰할 때는 내 마음이 드러나야 합니다. 내 사고방식이 드러나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을 관찰할 때 내 마음속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할 때 사건의 현장성이 살아나면 내 마음도 반응하게 됩니다. 눈물이나 분노, 침묵 등 내 마음의 모습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로 전환하기
이제 우리는 사건의 관찰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말씀 묵상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이것은 시선을 사건에서 하나님께로 돌리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생명 있는 묵상을 위한 첫 번째 원칙은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원칙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주님은 항상 우리와 동행하시지만, 우리 눈이 가려져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어떤 사건이 지난 후에야 그 일 가운데 주님이 함께하셨음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언제나 동행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생명 있는 묵상을 위한 두 번째 원칙은 누가복음 24장 17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이 질문에 제자들이 답하기 시작하면서, 대화는 주님과 제자들의 대화로 바뀝니다. 묵상에 들어가면 반드시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님과 대화를 나누고,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우리는 대화를 나누면서 그분의 마음을 나눕니다. 이때 우리는 주님의 관심사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비전이 됩니다. 하나님의 관심을 발견한 뒤, 어떤 사람은 미전도 종족에, 어떤 사람은 구제에, 어떤 사람은 정치에, 어떤 사람은 경제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밖에도 삶의 다양한 영역에 관심을 갖고 자기 삶을 드리게 됩니다. 주님과 사고방식을 나누는 것도 중요합니다.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주님의 방식과 나의 방식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그리고 깊이 있게 교제하는 것입니다.
삶으로 이어지는 묵상
말씀 묵상이 끝난 이후에 하는 아주 중요한 훈련으로,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하기, 삶에 적용하기, 묵상 내용 나누기'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말씀 묵상의 초점이라면, 성경책을 덮는 순간에 "하나님은 여기 계시옵소서. 이제 저는 제 갈 길로 가겠나이다."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 속에서 만난 하나님과 온종일 동행하는 삶을 사는 훈련을 부단히 해야 합니다. 그 훈련의 한 방편으로 제가 사용한 것은, 사람을 만날 때면 아침 묵상 때 만났던 주님을 기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을 보거나 사물을 보거나 일을 할 때면 저는 주님께 자꾸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때요? 이 사람 속에도 선한 것이 있나요?" 이처럼 언제 어디서나 주님과 동행하며 대화 나누는 것, 이는 묵상이 끝난 다음에 꼭 해야 할, 중요한 훈련입니다.
말씀을 삶의 현장에 적용하라
묵상한 말씀 속에서, 깨달은 것과 회개할 것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찾으십시오. 어느 날 저희 교회에서 묵상한 내용을 나누는데, 한 분이 "목사님, 오늘 저는 묵상이 잘 안됐어요. 마음속에 콕콕 찔리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착각하는 것의 하나는 '찔림이 없으면 묵상을 잘못한 것이다.'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감정적인 영역입니다. 특별한 감동이나 신호 같은 것은 묵상의 절대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적용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묵상할 때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으면 그저 이렇게 생각해도 됩니다. '오늘은 주님이 내가 쉬길 바라시나 봐.' '계속 하던 대로 하라고 하시나 보다.' 늘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자연스레 알게 됩니다. 주님과도 그렇게 그
저 자연스레 만나면 됩니다. 가족끼리는 사무적으로 만나지 않습니다. 그냥 같이 살다 보면 아들은 아버지를 자연스레 닮습니다.
적용은 감정적인 부분이 아닙니다. 따라서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도 주님이 말씀하시면 감정과 관계없이 의지적으로 결정해서 순종해야 합니다. 적용했다가 실패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에 말씀하셨을 때 안 됐으니까, 이번에도 또 안 되겠네.'하고 단념하면 안 됩니다. 믿음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적용이란 우리 삶에서 드러나 영향력을 미치는 것입니다. 제대로 적용하면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도 변화됩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달라졌을지 몰라도 실제로 내면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가치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세계관도 바뀌어야 합니다. 더 쉽게 말하면, '내가 좋아하는 것'이 바뀌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 삶의 깊이를 더해 줍니다.
묵상한 내용을 서로 나누라
묵상을 하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삶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실 아름다운 집으로 지어져 간다고 했습니다. 이는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막힌 담은 예수께서 모두 허물어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젠 우리들 사이가 서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벽돌 하나하나가 따로 떨어져 있듯 서로 교통이 되지 않을 때, 이를 연결하는 통로는 바로 말씀과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서로 연결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