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은총
권성수 지음 | 토기장이
고통의 은총
권성수 지음
토기장이 / 2011년 12월 / 288쪽 / 12,000원
1부 강가의 유년시절 - 고난 가운데 믿음 뿌리를 내리다
할머니가 우리 집안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셨다. 할머니는 시아버지인 증조할아버지에게도 복음을 전하셨다. 하지만 워낙 완고하시던 증조할아버지에게 복음이 단번에 전해질 리 없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일어났다. 증조할아버지가 안계시장을 다녀오시는 길에 논두렁길을 걷다가 갑자기 넘어지셨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증조할아버지는 바로 하나님께 항복하셨다. "아이고, 며느리가 믿는 하나님 저도 믿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논두렁길을 걸으시다가 또 한 번 넘어지셨다. 다리를 저신 것도 아니고 돌부리를 차신 것도 아닌데 별 이유 없이 실족하신 것이다. 두 번째로 넘어지신 증조할아버지는 조금 전 하나님께 드렸던 약속을 재확인하셨다. "아이고 하나님, 조금 전에 했던 약속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증조할아버지의 마음속에는 종교의 씨, 즉 신의식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증조할아버지의 마음에는 줄만 당기면 소리가 나는 신앙의 종이 달려 있었는데, 며느리가 전도하면서 그 종을 당겨서 종이 땡그랑 소리를 냈지만, 증조할아버지는 그 소리가 듣기 싫어 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종 줄을 잡고 계셨던 셈이다. 그런데 스프링을 억지로 누를 때, 스프링이 갑자기 튀어오르면 어쩌나 내심 불안해하듯이, 증조할아버지도 '내가 불의로 진리를 막고 있구나!' 하며 조마조마해 하셨던 모양이다.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증조할아버지가 예수님을 믿겠다는 약속을 어기지 못하도록 두 번이나 종을 울리셨다.
증조할아버지는 그날 가족을 다 모아 놓고 이렇게 선언하셨다. "오늘부터 나는 며느리가 믿는 예수님을 믿기로 했다. 너희들도 다 믿기 바란다." 그때만 해도 집안 어른의 말씀은 곧 법이었다. 증조할아버지의 한마디에 가족은 모두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인생은 정작 불행했다. 아들 셋 중 두 아들을 잃으셨다. 게다가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남편까지 여의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예수 믿더니 집안이 망했네, 망했어!"라는 조롱을 받으셨지만, 할머니는 변함이 없으셨다. 주님과 교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셨고, 심지어 우리 집 앞 마늘 밭을 교회 건축 부지로 바치셨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둘째 아들을 위해 드린 할머니의 기도 덕분에 둘째 아들은 은혜를 받아 철저한 신앙인이 되었다. 그 둘째 아들이 바로 나의 아버지이시다. 아버지는 목회자가 되셨고 생활비도 받지 못하는 시골 교회들을 옮겨 다니며 사역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기도를 마치고 오신 아버지가 아들 다섯 명을 부르셔서 기도 내용을 말씀해 주셨다. "오늘 새벽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서원했다. 너희 다섯 명 모두 목회자로 만들겠다고 했다. 그런 줄 알거라." 서원 내용을 듣자마자 나는 거칠게 대들었다. 다른 형제들도 강하게 반대했다. 우리 형제들이 그토록 반발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사실, 아버지가 목회를 하시면서 우리 가족은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아버지는 시골교회에서 목회를 하시다가, 고향의 논밭을 다 팔아 서울 홍제동에 개척교회를 세우셨다. 그날부터 우리 가족 여덟 명은 턱없이 작은 한 칸짜리 전세방에서 꽁보리밥을 먹고 칼잠을 잤다.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교회를 일구었지만, 아버지의 목회는 순조롭지 않았다. 심지어 교인들은 두 패로 나뉘어 계속 싸웠고, 그 모습을 보다 못하신 아버지는 전 재산으로 세운 교회에서 빈손으로 떠나시기도 하셨다. 돌아보면 하나님은 내가 어릴 때부터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고통을 경험하게 하셨다. 그 경험들을 통해 나는 고통의 맛을 속속들이 알았고, 삶의 가치와 맛을 배워갔다. 비록 그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총인지 깨닫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2부 지독히도 가난했던 청년시절 - 가난도 멈출 수 없는 꿈을 향해 달리다
정든 고향을 떠나 우리 가족은 서울로 왔다. 우리는 서울 홍제동에 살 집을 얻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가 홍제동에 개척교회를 시작하셔서 근처 판자촌에 집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서울로 왔다고 내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나는 고향에서 지던 나무지게 대신 물지게를 졌고, 주린 배를 물로 채웠다. 그때 나는 매일 아침 6시 산에 올라가 찬송을 한 곡 부르고 매일 기도했다. 무슨 기도를 드렸는지 기억이 가물거리는데 소원이 한 가지 있었다. 집안형편상 대학은 꿈도 못 꾸었는데, 대학만 졸업하게 해주시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고 했다. 당시 나는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 등록금이 없어 바로 진학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해 낮에는 학원을 다니고, 밤에는 홍은동 길거리에서 장사를 했다. 장사는 별로 신통치 않았고, 그래서 새벽에 신문배달도 했다.
나는 학원을 다니며 영어부터 확실히 잡자고 맘먹고,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영문법 책인 『메들리 삼위일체』라는 책을 외우고 또 외웠다. 6개월 만에 지문들을 거의 다 통째로 외우게 되자, 경기고등학교 2학년 영어 시험을 풀어보았는데, 너무 쉬워서 채점도 할 수 있었다. 발음은 엉망이었지만, 문법은 자신 있었다. 지금 영어로 말하고 듣고 쓰고 통역하고 강의하는 데 전혀 막힘이 없는 것도 그때 이를 악물고 공부한 덕분이다. 다른 과목들도 착실하게 공부해서 6개월 만에 대입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아버지는 퇴직금은 고사하고 전별금 한 푼 못 받고 교회를 떠나야만 했고, 한동안 한 교인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셨다. 그러다가 얼마 후 상도동 장승백이에 있는 어느 교회 장로님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그곳에서 설교를 했고, 또 다시 성경 주석가요, 신학자요, 유명한 교수님이셨던 박윤선 목사님과 함께 교회를 개척하시다가, 주문진의 한 교회로 옮기셨다. 아버지가 주문진으로 목회지를 옮기시면서 나만 혼자 서울에 남았다.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했지만 형편상 대입 시험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고작 3개월 입시 공부를 하고 서울대 영문과에 응시했지만 떨어져, 숭실대 영문과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대학에 입학해 보니, 과 동기들은 나보다 최소 두 살은 많았다. 열세 살이 많은 동기도 있었는데, 큰 형님 같은 그는 미군부대 군인인 카투사 출신으로 영어 발음이 기막히게 좋았다. 나는 그가 교정해주는 대로 TH 발음과 R과 L 발음을 거듭해서 연습했고, 독학으로 공부해서 엉망이었던 내 영어 발음이 그 형님의 도움으로 제대로 교정되었다.
한편 아버지는 박윤선 목사님과 개척하신 교회를 그만두셨지만, 나는 계속해서 그 교회에 출석했다. 아버지가 너무 자주 교회를 옮기시는 것을 보고, 나는 내 잘못으로 교회를 떠나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교회를 옮기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주일학교 반사로 봉사했고, 교회에서 일주일 정도 철야기도를 하기도 했다. 철야기도라고 해봤자, 밤새 기도를 드린 것은 아니었다. 겨울에 연탄난로 바로 앞 장의자에 앉아 한 시간 정도 기도한 후, 그 자리에 누워 잠을 자고 새벽기도까지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당시는 등록금으로 힘들 때였는데, 한 주일 기도하고 나면 하나님께서는 신기하게도 등록금을 주셨다. 매번 다 주시지는 않았다. 일부만 주심으로 하나님께 계속 매달리게 하셨다.
넉넉하게 채워주시지 않고 찔끔찔끔 주시는 하나님이 야속하기도 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등록금을 주셔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알고 감사하는 마음이 컸다. 아무튼 등록금 때문에 기도하면서 나는 할머니와 아버지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을 만났다. 그러던 어느 날 입대 통지서가 왔다. 입대하기 전에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다음처럼 드렸다. "제게 지식의 은사를 주신 하나님, 제가 전방에 배치되면 지금까지 쌓은 지식을 다 잃어버리고 맙니다. 지식을 다 잃어버리면 제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도 손해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후방에서 공부하면서 근무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은 나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하지만 내가 기도한 것과는 다른 하나님의 방식으로 응답하셨다. 공부할 여유라고는 전혀 없는 최전방으로 나를 배치시켜 주신 것이다.
자대 배치 후 내가 보직을 맡은 곳은 연대 전투지원중대의 행정반이었다. 나는 군종병도 아니었지만, 주일마다 설교를 도맡아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사단으로 근무 이전 명령이 떨어졌다. 이전된 사단본부 심리전 참모부에는 참모와 대위, 그리고 내 바로 위에 상병이 있었다. 참모는 나에게 대남 방송을 청취하는 임무를 맡겼다. 심리전 참모는 사단에서 영어를 가장 잘하는 분으로 유명했는데, 그는 승진해서 군단장 비서로 영전했다. 그가 영전하면서 마지막으로 내린 지시는 나를 사단 군종병으로 전과 발령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준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나를 '문제 사병'으로 찍었는데, 내가 군종부에서 일하는 것이 적격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군대생활 19개월 만이었다.
사실 나는 최전방부대로 자대 배치를 받으면서 "군종사병으로 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했었다. 나의 이 간절한 기도가 19개월 만에 이뤄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요셉이 억울하게 2년 동안 감옥생활을 더하게 하신 것처럼, 나도 전투지원중대, 작전과, 심리전 참모부, 부사단장실 등에서 19개월을 '썩게' 하셨다. 하나님은 내 기도에 응답하시기 전에 나를 훈련시키신 것이다. 한편 군종병으로 근무하는 동안 나는 배가 몹시 아팠다. 군종 참모님이 집에 가서 쉬었다 오라고 하셨다. 휴가를 받은 나는 할머니와 형님과 동생이 사는 단칸방에서 며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쓰러지고 말았고, 진단 결과, 십이지장궤양으로 인한 과다 출혈이었다. 치료를 받고 나는 다시 부대로 복귀했다.
제대를 몇 달 앞둔 시점에서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이제 무사히 제대하게 해주세요. 무사히 제대하게 해주시면 10일 금식한 후 신학교에 가겠습니다." 그 기도를 드리게 될 줄 몰랐다. 나는 대학 진로를 결정할 때도 아버지의 서원 때문에 신학교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죽어도 신학교에 가기 싫었다. 그런데 군대에 와 하나님께 항복하고 말았다. 십이지장궤양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서야 나는 신학교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 약속했다.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으시고 또 한 번 사건을 만드셨다. 어느 날 사단 군종참모님이 자동차를 타고 전방 순찰을 가셨다. 대개 내가 운전을 해 모시고 가야 하는데 그날따라 혼자 다녀오시겠다고 했다. 그런데 사고가 나 참모님은 갈비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기도한 대로 나를 보호해주셨고, 얼마 후 무사히 제대하게 해주셨다. 제대 후 나는 바로 복학해 남은 1년을 마쳤다. 나는 신학교 문제에 대해 아버지께 말씀드려야 했다.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성수야, 아버지 목회가 힘들어 그러니 2년만 직장생활하면서 나를 도와다오." 신학교 입학은 미룬 채 취직을 하기로 했다.
마침 교수님 한 분이 좋은 직장을 추천해주셨다. 하지만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갔더니 맥주 광고가 벽에 잔뜩 붙어 있어 나는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바로 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저는 맥주회사에서는 근무할 수 없습니다. 교수님이 추천해주셔서 왔는데,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취직을 앞두고 나의 고민은 더 깊어졌다. 제대 말년에 신학교에 가겠다고 하나님께 약속은 했는데, 아버지 목회를 돕느라 시한부 직장생활을 하겠다는 것이 문제였다. 다시 한 번 하나님께 기도했다. "제가 직장을 구하지 않고 바로 신학 공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신학교에서 등록금 없이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옵소서." 나는 김진택 목사님께 조언을 구했다. "목사님, 지금 신학교에 가야 할지, 목회하시는 아버지를 2년 도운 후에 신학교에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김진택 목사님은 짧게 답변하셨다. "믿음으로 한 걸음씩 가십시오." 나는 믿음으로 한 걸음씩 떼기로 하고 신학교 입학시험을 쳤다. 합격자 발표 하루 전 신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권 선생님이 수석으로 합격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기뻤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에 너무도 구체적으로 응답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신학교 시절에도 여전히 배가 많이 아팠다. 배가 아파 하나님께 매달릴 때마다 나는 지나온 날들 동안 내가 드렸던 기도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아무리 기도해도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한번은 손을 들고 기도하면서 보이지 않지만 나를 누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밀어 내면서 기도드렸다. "하나님, 저를 누르시는 이 손 좀 치워 주십시오. 저는 훌륭한 목사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평범한 목사가 되겠으니, 저를 누르지 마십시오. 제발 저를 누르는 손을 치워 주십시오." 나는 바위 위에 앉아서 욥기를 통독한 적도 있었다. 내가 겪는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궁금해서였다.
하나님께 나의 고난을 거둬 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고난의 이유를 알고 싶다고 기도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무 대답도 하시지 않았다. 이렇게 고민하면서 하나님께 손짓과 소리로 반항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나는 425장 찬송을 부르며 항복하기로 작정했다. 나는 그동안 항의하던 일체의 말과 행동을 다 내려놓을 테니, 하나님께서 왜 내게 고통을 그치지 않고 주시는지 이유도 묻지 않겠으니, 나를 온전히 주관하셔서 주님과 함께 살고 있음을 만민이 알게 해달라고 기도드렸다.
한편 내가 신학교 2학년 때 미국 순방을 마치고 돌아오신 김명혁 교수님께서 내게 제안을 하셨다. "권 전도사, 유학 가지 않을래요?" 나중에 알고 보니 김 교수님은 미국 칼빈신학교와 웨스트민스터신학교 등을 다니시면서 내가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겠다는 판단을 하셨고, 돌아오셔서 내게 유학을 권하셨다. 나는 그때부터 유학을 위해 기도하기로 했다. 유학을 놓고 기도하기 시작하자 결혼부터 먼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도원에서 만난 장로님이 선을 한번 보라고 하셨다. 그녀는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경기도 양동의 한 학교에서 중고등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설명해 주셨다. 첫 만남에 강한 인상을 받은 나는 속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저 아가씨와 맺어주시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김명혁 교수님의 주례로 결혼예배를 드렸다. 당시 나는 돈이 없었다. 결혼 1년 후에 유학을 계획하고 있었으니 제아무리 돈을 열심히 번다해도 경비는 한참 모자랐다. 그래서 번역 일을 하는 한편, 유학 자금을 위해 계속 기도했다.
그런데 김명혁 교수님은 내게 이력서와 유학 후 사역 포부 등을 포함한 서류를 준비하라고 하셨다. 김 교수님은 추천서와 함께 내 서류를 전국에서 가장 크다는 몇몇 교회들에 보내셨다. 그러자 부산에 있는 한 교회에서 등록금과 생활비 등 유학자금 전액을 제공하겠다고 소식이 왔다. 단, 떠나기 전 잠시라도 그 교회에서 사역을 맡아달라는 조건이 있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당시 사역하던 교회 김진택 목사님께 여쭈었다. 그러자 목사님은 "우리가 키운 인물을 왜 다른 교회에 빼앗깁니까? 우리 교회가 지원합니다."라고 말씀하시며, 당시 교회 예산이 연 5,300만 원이었는데, 목사님은 내게 그 십분의 일에 해당하는 500만 원을 그해 첫 달 유학비용으로 주셨다. 김 목사님은 내가 평생 잊지 못할 은인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내게 유학 자금을 마련해 주셨다.
3부 감히 꿈꿀 수 없었던 미국 유학시절 - 고통을 심고 은총의 열매를 거두다
1980년 1월, 나는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도착했다. 미국 유학 생활 초기에는 필라델피아 갈보리교회 김수흥 목사님이 친절하게 인도해주셨다. 또 목사님은 나를 갈보리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도록 배려해주셨다. 나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신약신학 석사학위 학생으로 입학했다. 내가 신약신학 석사학위 과목들을 신청하려고 했더니, 선배들이 신약 석사 과목을 바로 신청하지 말고 '특별학생'으로 목회학 석사 과목을 신청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나는 '특별학생'으로 헬라어 강독을 비롯한 몇 과목을 신청했는데, 헬라어 과목 외에 다른 과목들도 들을 만했고, 성적도 꽤 좋게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