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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상담에서 본 악

테리 D.쿠퍼,신디 K.에퍼슨 지음 | CLC


기독교 상담에서 본 악

테리 D. 쿠퍼, 신디 K. 에퍼슨 지음

CLC / 2011년 3월 / 206쪽 / 10,000원



제1장 악




'evil'(악)이라는 영어 단어를 거꾸로 하면 'live'(살다)라는 단어가 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것은 사소한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스캇 펙(M. Scott Peck)의 주장에 따르면 '악'(evil)은 언제나 '삶'(ㅣife) 또는 '활기'(liveliness)의 반대 개념으로 그것을 저하시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제시한다. 악은 인간의 삶을 파괴시키고 죽음으로 향하게 만드는데, 이는 육체적 죽음뿐만 아니라 심리적, 영적 죽음도 의미한다. 요컨대 악은 무엇인가를 고갈시키고 부패시키는 성질을 갖고 있다. 심지어 악은 매우 정리되고, 풍성한 환경을 제공해도 그 속에서 혼돈과 무질서, 파괴와 파멸을 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대개 악이라는 단어는 종교적 상황에서 자주 사용되며 그 용어를 들으면 종교를 연상하게 한다. 사실 종교는 악이 어떻게 탄생했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이따금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를 신화라고 부르는데 이는 우리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설명하려는 하나의 상징적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악의 근원에 대한 개념들이 종종 종교적 맥락으로 설명되어온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두 가지를 덧붙여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악'이라는 단어는 점점 더 크게 일반화되어가고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사람들은 종교적 범주 밖에서도 '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무신론자들도 "유대인 대학살은 악하다" 또는 "연쇄살인범 테드 번디는 악한 사람이었다"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인이 아닐지라도 잔인하고 의도적인 악의를 설명하기 위해서 '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둘째, 종교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엄청난 파괴성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물론 종교인들은 두 가지의 질문을 갖고 있다. 첫째는 신정론(theodicy)의 질문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이는 '어떻게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악과 고통을 허락하시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는 비종교적 관점에서는 다룰 필요가 없다. 두 번째 질문은 종교인과 비종교인 모두에게 묻는 것으로 비정명론(anthropodicy)의 질문이다. 이는 인간이 '어떻게 서로에게 악하고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알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 질문 앞에 가로막히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악'을 믿기 위해 반드시 종교적일 필요는 없으며, 다만 악에 대한 우리의 특정한 관점이 우리의 세계관과 일치하는가가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서양에서는 '악'을 '자연적 악'(natural evil)과 '도덕적 악'(moral evil)으로 구분했다. '자연적 악'은 암과 같은 질병뿐만 아니라 태풍이나 거대한 회오리바람(tornado) 또는 지진 등 자연적 재해를 가리킨다. 이것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것으로 종종 인간의 안녕에 파괴적 결과를 초래한다. 물론 어떤 사람은 자연은 도덕적이지도 비도덕적이지도 않으며 의도나 계획이 없는 중립적 존재이므로 '악'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어떤 사람은 자연재해는 악한 결과(영향)를 가져오기 때문에 '악'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전통적으로 '도덕적 악'은 인간의 의도적인 선택으로 인해 생겨난 '악'을 의미한다. 인간에게는 행동에 대한 책임이 있기 때문에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은 악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서로에게 또는 다른 생명체에게, 더 크게는 지구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은 악한 행위이다.



또한 '악'은 '개인적 악'(personal evil)과 '집단적 악'(collective evil)으로 나눌 수 있다. 예를 들면 '개인적인 악'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살해하는 등과 같은 개인의 파괴성을 뜻하며, '집단적 악'은 집단 또는 사회 전체에 의해 미치는 일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 가지 명백하지 않은 개념은 '어떤 형태의 악이 더 근본적(본래의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사회 지향적 관점에 입각한 이론들은 '개인적 악'은 가난, 경제적 불평등, 인종차별, 성차별 또는 자본주의 같이 만연된 사회적 질병들이 만들어낸 결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는 개인을 직접 변화시키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사회적 불평등을 개선하여 매우 공명정대한 사회에서 살아갈 때 개인적인 악은 순리적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본다.



또 다른 사람들은 '사회 악'이 실제 상당부분 존재하지만, 그것은 각 사람의 욕심(탐욕), 이기주의, 다른 사람을 경시하는 마음, 그리고 그밖에 다른 내적 요인들로부터 자라난다고 믿는다. '개인적 악'의 관점은 사회적 불공평을 간과하거나 인간의 내적 갈등에 너무 지나치게 중점을 두었을 때 오점이 생긴다. 또한 우리가 일단 공공정책 문제들을 처리하면 모든 개인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 것은 비인간적이며 극단적으로 단순화된 생각이다. 현실적으로 모든 문제들이 사회적, 정치적 문제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회과학 영역에서는 개인적, 사회적 악 가운데 무엇이 우위에 있는가에 대한 의견대립들이 진행되고 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이 논쟁은 시그문드 프로이드(Sigmund Freud)와 마르크스(Marx)의 대립이라고 요약될 수도 있겠다. 프로이드는 인간의 파괴성의 내적 요소들에 그 우위를 둔 반면 마르크스는 모든 인간의 파괴성은 경제적 불평등과 불공평한 사회조건에 그 뿌리를 두었다고 주장했다.



제2장 악과 사탄




기독교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사탄 또는 악마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사악함의 근본적 화신으로 이해되었다. 오늘날의 세계는 사탄의 정체에 관해 매우 다양한 의견이 있다. 일부는 사탄이 실제로 존재하며 신성한 목적을 파괴하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진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어떤 사람은 인간의 경험 속에서 일어나는 정의할 수 없는 악한 감정을 가리키기 위한 하나의 상징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사탄의 개념을 상징적인 것으로 이해하지만 그것은 단지 총체적인 인간의 악만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한 악의 예는 유대인 대학살의 무시무시한 파괴력이다.



많은 사람들은 사탄이 단순히 유혹적인 생각의 투사, 외현화라고 믿는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 도적질이나 속임, 부당한 행동 등의 유혹이 올 때 우리는 악마의 유혹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말을 할 때 그것은 단지 비유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진정한 유혹은 우리 자신의 의식 안에 존재하는 것이지 외부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 아니다. 일부 학자들, 특히 칼 융(Carl G. Jung)을 따르는 사람들은 사탄을 하나님의 어두운 부분을 나타내거나 하나님의 '그림자'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파괴적인 면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견해를 인정할 수 없다, 아직도 어떤 사람은 사탄이란 단어를 선한 세력과 영원토록 싸우는 악한 세력으로 믿으며 이것은 끝없는 싸움이라고 말한다. '별들의 전쟁'(Star Wars)과 같은 영화에서 이런 관점을 발견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은 사탄이란 개념을 과학시대인 현대에는 속하지 않는 중세시대의 잔여물이라고 본다. 이처럼 사탄에 대한 견해는 매우 분분하다. 아마도 사탄에 대한 기독교 역사의 이해에 있어서 최고의 설명은 버튼 러셀(Burton Russell)의 주장일 것이다.



개념의 핵심은 선한 신이 아닌 그 반대의 다른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세력은 악을 일으키고 부추기며 선을 싫어하는데 그것은 그 자신이 원래 그러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세력은 모든 인간사를 포함해 전 우주에 적용한다. 그 세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본래적 악한 성질에서 나온 것이며, 그가 싫어하는 자유의지로부터 만들어졌다. 하나님께서 그가 악을 선택하고 그 악을 계속 갖고 있도록 묵인하시는 이유는 자신의 신성한 계획에는 진정한 도덕적 자유의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도덕적 선을 증가시키는 목적을 갖고 우주를 창조하셨지만 도덕적 선에는 악을 행하게 하는 자유가 수반된다. 자신의 모든 의지를 증오에 바친 악마는 온 우주가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망가지고 결국 파괴되기를 원한다. 그는 인류를 부패시키고 타락하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핵심은 바로 이것이고 정확한 판단은 이것에 비추어 결정되어야 한다.



로마 가톨릭 교황청의 공식입장과 기독교회 및 동방 정교회의 관점은 사탄이 오늘날 이 세계에 존재하는 실재라는 것에 일치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최근 여론 조사에서는 미국인들의 70%는 사탄의 존재에 대해 믿는다고 보고했다. 사탄의 개념이 자주 미신이나 정신질환과 관련해 혼돈을 일으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이 세계에 실존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리고 많은 자유주의 종교 신자들이 더 이상 사탄의 개념을 믿지 않지만, 이들은 다수가 아니다.



사탄과 유대교

초기 유대교 사상은 인간에게 발생하는 모든 것들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돌렸다, 하나님은 자연 재해나 아름다운 일몰에 대해서 책임이 있으신 것으로 여겨졌다.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창세기 기사에 나온 뱀은 사탄의 상징으로 여겨졌지만 유대교에서는 그렇게 이해되지 않았다. 대신에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사탄의 모습은 고소하는 일을 수행하는 자로 그려지며 그 일을 너무 열심히 하기에 하나님께 힐책을 받는 존재로 그려진다. 신구약 중간기에 유대교인들이 빛과 어두움이라는 두 가지 실체가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다고 보는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부분적으로 사탄을 하나님의 대적자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에서 사탄이 세상에 대해 주도권을 잡고 있다는 강경한 주장을 펼치자, 유대교는 더욱 이러한 믿음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사탄과 이슬람

사탄 또는 악마는 무슬림의 경전인 코란(Quran)에서 이브리스(Iblis)와 샤이탄(Shaytan)이라는 두 가지 이름으로 나타난다. 이브리스는 악마를 뜻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언급할 때 주로 쓰이며, 샤이탄은 인간의 타락 이후에 인간과의 관계를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무슬림과 기독교인의 사탄에 대한 이미지의 가장 큰 차이는, 기독교는 사탄의 타락을 인간 창조 이전에 일어난 것으로 여기고, 그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거나 또는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한 시도와 관련이 있다. 교만과 질투는 사탄의 근본적인 성향이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이브리스가 알라와 동등하게 되려고 생각했다는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신에 그들은 이브리스가 인간 섬기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타락했다고 본다. 기독교처럼 이슬람도 본래 악마는 알라 또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로 이해한다. 알라로부터 왔기에 선한 존재지만, 알라가 자유를 이 피조물에게도 주었기에 악의 가능성이 여기서부터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한다. 무슬림의 사상에 나타나는 타락한 샤이탄은 질투로 가득 차 있다. 샤이탄은 자신이 거부되었다는 생각에 모든 인류를 파멸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절대 자기 마음대로 인간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 이렇듯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사탄의 존재는 사람을 유혹하고 타락시키는 존재지만 인간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으며 그 책임을 지게 된다.



귀신들림과 귀신축출

만약 사탄의 실체를 믿는다면 '이런 권세가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인간이 사탄에게 사로잡힐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계몽주의시대 이후에는 아무도 이러한 개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 안에서는 귀신들림에 대한 믿음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실제로 1999년에 로마 가톨릭교회는 귀신축출(exorcism) 이른바 '구마의식'을 다시 인정했는데 이는 1614년 이후의 첫 개정이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여전히 규칙적으로 세례식이나 입회식에서 구마의식을 행하고 있다. 한편 기독교회에서는 귀신들림과의 영적 전투에 어떤 형식이나 공적인 의식은 없다. 권위자들로부터 인정받아야 하는 과정도 없지만 그러한 권위자들을 찾아보기도 어렵다. 몇몇 기독교회의 구마사들은 팀으로 일하며 그들의 사역을 '구조사역'이라고 칭하고 있다.



귀신들림과 구마에 대해 예수님 당시와 초기 기독교 시대에는 일어나는 일이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것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이 관점에서 악마가 활동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 나타나심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악한 권세가 예수님의 사역을 왜곡하고 막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귀신들림과 구마는 그 당시에만 발생한 것이고 그 시대는 이미 끝난 것이라고 본다. 또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귀신들림이 극히 드문 현상으로서 지금도 발생하고 있는데 매우 주의 깊게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귀신들림이라고 생각하기 전에 모든 가능한 의학적 가능성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학자들과 성서학자들은 귀신 쫒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다루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20세기 후반 셀 수 없이 많은 영화와 미디어, 오락산업에서 이 귀신들림을 다루었다. 윌리엄 피터 블래티(1973년판 감독)의 "엑소시스트"는 공포영화의 고전이 되었으며 우리가 사는 과학적 세계에서도 귀신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많은 논쟁을 낳은 출발점이었다. 이 이야기는 실화에 바탕을 두었으며, 1949년에 일어난 실제 사건이었다. 귀신들린 사람의 신상을 보호하기 위해 소설화했는데, 실제 귀신들린 아이는 소녀가 아닌 소년이었으며 귀신을 쫒은 장소 또한 워싱턴이 아닌 세인트 루이스였다.



제3장 악과 심리학




심리학은 '악'이라는 단어에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어떤 사람은 이 단어를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신에 우리는 '질병', '기능장애', '정서장애' 등과 같은 단어를 사용해서 악한 행동을 표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악'이라는 단어는 수많은 초자연적인 설명을 만들어내고 인간의 파괴적 행동에 대한 진정한 원인을 찾는 것을 방해한다고 봄으로써 대체로 심리학은 '악'이라는 단어를 이해하기보다는 악의 차원을 무시하는 것으로 일반화한다. 그런가 하면 심리학 일각에서는 '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정당할 뿐 아니라, 그것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정신분석학자 중 가장 잘 알려진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악에 관한 주제를 방대히 연구했으며, 정신분석학적 인류학자 어니스트 베커, 인지치료자 아론 벡, 융, 롤로 메이 등 수많은 학자들이 악을 연구했다.



프로이드와 악

프로이드는 악이 초인간의 영역에 있다는 관점을 거부했다. 그는 '신'의 개념을 인간의 불안 때문에 만들어진 창조물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이 자신의 삶의 비극과 책임에 직면하는 것이 너무나 두렵기에 있지도 않은 '신'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그는 악마에 대한 생각의 근원에 관심을 가졌는데, 모든 아이들이 그들의 아버지에 대해 갖고 있는 사랑과 증오가 혼합된 양가감정이 신에 대하여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신을 향한 혼합된 감정은 극도로 금지되었기에 우리의 긍정적인 감정은 신에게, 부정적인 감정은 사탄에게 돌림으로써 신에 대한 대립되는 감정을 해결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악마에 대한 생각은 심리학적으로 신에 대한 우리의 적대적 감정을 바꾸려는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프로이드는 인간의 삶을 움직이는 두 가지 중요한 본능이 있다고 말하는데, 삶의 본능 에로스(사랑, Eros)와 다나토스(죽음, Thanatos)의 본능이다. 에로스는 우리 각자를 파괴에 대한 억압과 싸우게 한다. 다나토스는 증오와 공격적인 것으로부터 나온다. 이 공격성은 외부인을 대상으로 하기도 하고, 자신을 공격하여 자기파괴로 가게도 한다. 프로이드 학파의 주된 논점은 인간의 공격성이 생물학적인 것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프로이드가 주장한 동기이론의 일부이다. 우리는 우리의 내면에 파괴적인 경향성을 가지고 있고 이것은 인간 본성의 한부분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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