챔버스는 1907년 10월 중순에 런던에 도착하여 따스한 가족의 품에 안겼다. 11월 중순에는 기도 동맹의 가장 큰 연차 집회가 9일 동안 스페크 홀에서 있었다. 지난 몇 달 동안 많은 경험을 통해 활기가 넘치는 챔버스는 매우 특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리더 해리스도 그 특징을 감지했다. "챔버스는 자신의 주제를 서서히 달구어가다가 간혹 번개가 번쩍일 때와 같은 으스스한 효과가 있는 강렬한 언어를 사용했다. 그의 선포의 중요한 특징은 성경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었다."
앞으로 챔버스가 할 일은 영국을 돌며 기도 동맹 센터들을 방문하여 설교하고, 그들이 영적, 조직적으로 목표를 향해 제대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1907년 11월부터 1908년 5월까지 챔버스는 수없이 기차를 타고 다니며 잉글랜드 남부로부터 스코틀랜드의 북동 연안의 애버딘까지 온 사방을 다니며 집회를 가졌다. 그는 끊임없이 여행을 했고, 수많은 집에 손님으로 체류했으며, 새로운 친구들을 많이 만들었다. 그러나 1908년 5월, 그는 거의 고갈되었다. 이때 그의 기도 수첩에는 신체적 피곤함과 영적 정체 현상 때문에 빚어지는 갈등의 모습이 비친다. 그러나 그달 28일에는 미국으로 항해하여 신시네티의 하나님의 성경학교에서 시작되는 두 달 동안의 캠프 집회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대서양을 횡단하는 10일 동안 완전하게 쉴 수 있다. 이 시간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배 위에서 만난 젊은 여인(1908)
배가 최고 속도로 달리기 시작하자 챔버스는 18개월 전에 같은 배에서 나카다와 함께 항해하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의 여행은 순수한 우정과 모험을 위한 것이었는데, 지금 여행은 달랐다. 그의 바로 곁에는 지난 2년 반 동안 평범하게 알고 지내던 사랑스럽고 지적인 젊은 여성이 서 있었다. 그녀가 멀어지는 잉글랜드의 해안선을 바라보고 있을 때, 챔버스는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왜 지금 그녀의 저런 모습이 보이는 것일까? 그의 마음속에서는 이상한 생각과 감정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뉴욕에 도착하면 그녀는 새로운 일을 시작할 것이고, 챔버스는 두 달 동안 설교와 상담에 정신없이 바빠질 것이기에 아마도 그녀는 마음속에서 거의 잊혀질 것이었다. 그는 그녀의 이름 '거트루드'는 자기 누이의 이름과 같았기 때문에 '비디'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다.
매일 갑판을 함께 걷는 동안 그는 이 젊은 숙녀에게 호기심이 많아졌다. 그녀는 어렸을 때 겨울이 될 때마다 기관지염이 발발해서 2개월씩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학교를 쉬고 어머니를 도와 가사 일을 하게 되었는데, 다른 아이라면 자기 연민에 빠져 풀이 죽었을 텐데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한 가지 야망이 있었는데, 영국 수상의 비서가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속기와 타자를 배우면서 속도와 정확도에서 뛰어나기로 다짐했다. 그러나 기계처럼 받아 적는 선에서 멈추지 않고 내용의 느낌과 문맥이 어떠한지를 살피며 받아 적었다. 뛰어난 속기 실력 덕분에 그녀는 높은 지위의 공무원의 비서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런던의 링컨스인필즈 법률 사무소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지금 그녀는 미국에서 새로운 모험을 하기 위해 떠나는 중이었다.
거트루드와 챔버스는 배 위에서 함께 걷고 함께 식사하며 서로에 대해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했다. 그녀는 그의 예리한 생각과 밝은 유머 감각,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깊은 사랑에 감탄했다. 챔버스는 그녀의 결심이나 실력, 동물에 대한 사랑과 사람들에 대한 진실한 관심 등, 그녀의 모든 것에 감명을 받았다. 전에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서로 그렇게 많은 공통점이 있었던 걸까?
항해가 끝나자 그들은 각자의 길로 헤어졌다. 그러나 계속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고, 미국에 있는 동안에도 시간을 내서 만났다. 챔버스가 영국으로 떠나기 전에도 그녀를 만났다. 챔버스가 8월 19일에 쓴 편지를 보면 그들의 서로를 향한 감정이 얼마나 많이 진전되었는지가 잘 나타난다. "감사하게도 주님이 보시기에 가장 좋은 때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되었네. 우리 각자의 성품을 훈련시키시는 것도, 우리를 함께 훈련시키시는 것도 다 주의 손에 달려 있지요." 챔버스는 수년 만에 처음으로 자기의 깊은 생각과 감정을 마음껏 쏟아놓을 수 있는 대상을 만났던 것이다.
챔버스가 스페크 홀에서 특별 선교 집회를 갖는 동안 비디도 영국으로 돌아왔다. 11월 13일, 챔버스는 그녀를 데리고 그들이 가장 많이 들르던 성 바울 예배당으로 갔다. 그들은 홀만 헌트의 유명한 그림 '세상의 빛' 앞에 서서 서로의 사랑을 맹세하고 약혼했다. 챔버스는 약속의 증표로 세 개의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조그마한 반지를 그녀에게 끼워주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최고로 사랑할 것을 언약하면서, 이 어두운 세상에서 주의 일에 헌신하기로 맹세했다. 그들의 약혼은 최고의 명령을 위한 사랑의 결합이었다.
기도 동맹에서의 리더십(1908-1909)
챔버스가 기도 동맹을 위해 3개월간 선교 여행을 떠나야 했기 때문에, 이 기간에 비디에게 보내진 편지가 남아 있다. 챔버스는 그의 마음을 편지에 쏟아 부으며 앞으로 함께하게 될 그들의 삶을 통해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적고 있다.
당신에 대해 주님의 말씀이 내게 임할 때 얼마나 큰 능력으로 오든지! 내가 대략 무엇을 보았는지 말해줄게. 주님의 명령 앞에서는 모든 우리의 안락함과 친지들 및 친구들과 고향마저 대수롭지 않게 여겨야 해. 당신은 주님과 그분을 향한 사랑 때문에 주의 십자가에 대한 관심 외에 다른 모든 관심을 버릴 수 있겠어? 하지만 당신에게 나와 함께 가자고 요구하면서 내 마음속에는 얼마나 많은 염려가 생기는지, 당신은 이해할까? 우리는 주님에 의해 파송되는 부부가 될 거야. 나는 당신이 주님이 부르신 그 길에 내가 강하게 설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면 해. 나는 당신에게 줄 집도, 돈도 없어.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거대한 험한 세상과 "가서 제자 삼으라"는 주님의 사명뿐이야. 오늘 아침에는 깨어나면서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위대한 부르심을 느꼈어.
기도 동맹 서기인 맨체스터의 소장 스키드모어는 챔버스와 아무런 벽이 없는 절친한 사이였다. 1909년 2월 말에 요크셔에서 만난 두 사람의 대화는 '일반적인 종교적 일꾼들의 무지와 영적 성장과 병행하지 못하는 불균형한 지적 성장, 그리고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지적 우둔함'에 대한 것이었다. 이 문제는 기도 동맹이든 교회든 어느 곳에나 있었다. 그런데 어려운 점은 어떻게 그 문제를 다루느냐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성경학교와 도쿄에 있는 카우만 대학은 챔버스에게 일정 기간의 실천 훈련의 가치를 보여주었다. 두 사람은 조만간 맨체스터에서 열리는 7일 동안의 집회에서 그 훈련과 같은 색다른 접근을 실험해 보기로 했고, 그 결과 그들이 제대로 가고 있다는 아주 강한 느낌을 받았다. 스키드모어는 챔버스를 위해 다른 도시에서도 비슷한 유형의 성경 훈련 수업을 열 계획을 세웠다.
3월 26일, 리더 해리스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런던의 그의 집에서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그 후 4일 뒤, 해리스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챔버스의 소중한 상담자요 정신적 지주이며 친구인 해리스가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큰 부름을 받고 떠났다. 기차가 어두운 밤을 달리는 동안 챔버스는 일기장에 간단한 글을 남겼다.
나 홀로 싸우는구나.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겠지.
그러나 나는 이 은혜를 위해
태양이 있는 곳에서 더욱 기쁘게 싸울 것이고
어둠의 그림자 속에서 더욱 용감하게 싸우리라.
그는 그의 싸움을 싸워 이겼도다.
영국 전 지역에서 모인 기도 동맹 서기들은 동맹의 새 지도자로 해리스 부인을 지지할 것을 결의했다. 챔버스는 리더 해리스의 죽음으로 인해 더 많은 설교 및 가르치는 일을 해야 했고, 기독교 사역을 남편과 아내의 협력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되었다. 챔버스는 그곳에서 많은 수고를 한 후에 미국에서 2개월간 체류하기 위해 배를 탔다.
주를 위해 함께하다(1909-1910)
바다에서 항해하는 동안 쉬면서 새롭게 된 챔버스는 곧 뉴욕에 도착했다. 그는 신시네티의 하나님의 성경학교에서 열리는 올해의 캠프 집회에서 말씀을 전했다. 자신이 먼저 영적으로 강건해야 그들을 영적으로 치유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 소망했다. 그 즈음 비디에게 보낸 편지에 분명하게 드러나는 주제는, 성경학교에 대한 비전이었다.
내 모든 영혼이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주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일을 가까운 장래에 이룰 수 있다는 생각과 기도로 가득 차 있어. 성경훈련대학을 위한 앞으로의 나의 10년 계획은, 4년은 지방, 4년은 도시, 그리고 2년은 외국에서 가르치는 거야. 그리고 또 다른 아이디어는 글을 쓰는 것과 관련된 거야. 이 분야에서는 얼마나 할 일이 많은지, 그것을 생각할 때는 흥분으로 마음이 뛰다가도 그 일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 당장 주저앉는 기분이야.
8월 초 영국으로 돌아온 챔버스는 12월 말이 되자, 두 가지 일이 분명하게 정리되었다. 기도 동맹의 후원 아래 런던에서 열리기로 했던 학내 거주 성경학교 계획이 마땅한 집과 적절한 재정 부족으로 보류되자, 기도 동맹은 우선 챔버스의 지도 아래 6개월의 통신 과정을 열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챔버스와 비디가 1910년 5월에 결혼했는데, 지난번 챔버스가 미국에서 2년 동안 체류한 것처럼 이번에는 함께 미국에서 여름을 보내기로 계획한 것이다. 이제 곧 영국에서의 성경학교 설립의 전망이 실현될 수 있는 상황이 다가올 것이고 기도 동맹에 헌신해왔던 챔버스에게는 새로운 기회들이 열리게 될 것이었다. 이제 믿음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때가 왔다.
성경훈련대학(1911-1915)
맨체스터에서 열렸던 성경 훈련 과정이 매우 잘 진행되어 스키드모어는 챔버스가 영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그 과정을 곧바로 시작할 수 있도록 더욱 의욕에 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런 벅찬 일정을 승낙하고 그 일들을 여유롭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스키드모어가 알기에 챔버스밖에 없었다. 챔버스는 맨체스터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즐거워했지만 여전히 학생들이 머물면서 공부할 장소를 간절히 바랐다. 더눈에서 던컨 맥그리거와 함께 살면서 배운 것들이 교실에서 배운 것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분위기 속에서 날마다 교제하는 공동체 삶은 많은 부분이 '배움'보다 '감동'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주님은 주님의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우리가 필요한 것을 주신다. 1910년 12월 초, 스페크 홀에서 600미터 떨어져 있는 곳의 어떤 큰 집이 비게 되었다. 기도 동맹은 그 집을 임대했고, 즉시 성경훈련대학이 상주 학생 및 주간 학생들을 위해 새해 1월에 문을 연다고 공표했다. 어느 흐린 겨울날, 챔버스는 비디를 데리고 그 집을 처음으로 보러 갔다. 그들은 집의 이곳저곳을 구경하면서 참으로 대학에 잘 맞는 크기와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알고는 놀랐다. 그들은 서로 손을 붙들고 하나님의 영이 이곳에 계시며 언제나 이 집에 함께하시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시기를 기도했다. 돈 한 푼 없지만 오직 하나님께 헌신된 이 두 종은, 이제 곧 남서 런던에서 가장 멋진 집의 거주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매 학기마다 학생들이 증가했고 챔버스는 복음서, 성경 신학, 성경 해석, 성경 주해 등의 과목들을 추가하면서 계속 커리큘럼을 확대해 나갔다. 비디는 성경 암송을 가르쳤고 리더 해리스의 딸인 후커 부인은 성경 개요, 그리고 지역 목회자들은 주일 학교 교사들을 위한 수업을 마련해서 가르쳤다. 학교에 대한 좋은 평판이 퍼지자, 성경훈련대학은 꾸준하게 성장하며 학생 '가족'을 만들어냈다. 이때 합류한 학생들 중 후에 이집트 자이툰까지 동행한 에바 스핑크와 글래디스 잉그램이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캐슬린 챔버스가 태어났다.
챔버스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점에서 말과 행동에 간격이 없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그의 영향력은 강력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챔버스에게 동의하지는 않았다. 종종 그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어떤 면을 단호하게 강조하다 보면 이구동성으로 반대하는 소리가 나기도 했다. 식사 중 어떤 학생들은 자신들이 잘 다져두었던 신학적인 사상을 흔들어놓는 챔버스의 어떤 가르침에 대해 질문 공세를 퍼붓기도 했다. 그러나 챔버스는 절대로 논쟁하는 일이 없었으며 질문하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관점을 관철하려고 애쓰는 일도 없었다. 그는 "지금은 일단 지나가자. 대신 그 점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중에 알게 될 거야"라고 말하곤 했다. 대신 챔버스의 서재는 언제나 열려 있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개인 상담을 위해 찾아올 수 있었다. 한 학생은 챔버스 교장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다.
"그분께는 타협이란 없었지요. 그럼에도 전혀 딱딱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작고 사소한 것이라도 대충 때우려고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정신적이든 영적이든 모든 면에서 커다란 사람이었지만, 한 번도 딴청을 부리며 사람들을 무시한 적이 없었습니다. 허풍선이와 위선자들은 그분과 함께할 수 없었지만,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는 그는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분께 가면 크게 보이던 문제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분께 도움을 구했다가 허탈함을 느낀 사람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걸다(1914-1915)
1914년 8월 5일 아침, 신문의 헤드라인은 끔찍한 사실을 발표했다. "영국이 전쟁에 참여하다." 대부분의 영국 사람들은 전쟁 소식에 깜짝 놀랐다. 갑자기 챔버스와 비디, 그리고 성경훈련학교의 학생들은 전면 전쟁을 위해 정비하는 국가의 시민이 되었다. 신병을 징집하는 벽보가 이곳저곳에 널렸고,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시민 집회가 거리마다 열렸으며, 한 달 후에는 남자들이 하루에 3만 명 정도 군에 입대했다. 겉으로 나타나는 흥분과 애국적인 열정 아래는 어느새 불안과 두려움이 스며들고 있었다. 챔버스는 9월호 《불의 혀》에서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혼란에 대해 언급했다.
오늘날 사람들의 입에는 다음 질문이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전쟁이 마귀의 일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일인가?' 그 답변은 둘 다 아닙니다. 비록 전쟁의 배후에는 하나님과 마귀가 있지만, 전쟁은 사람의 일입니다. 전쟁은 개인이든 국가든 의지의 충돌입니다. 지금은 국가들 간에 무서운 충돌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전쟁, 원한, 미움, 질투, 모독, 추방, 죽음 등이 발생하면 놀라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이것을 미리 말했음을 기억하라." 지금 세계 역사에서 아직까지 본 적이 없는 그러한 전쟁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제 빠져나올 길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는 전쟁이 왜 발생하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두려워 말라. 당황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쟁보다 더 악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입니다. 우리를 그토록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전쟁들이나 황폐함이 아니라 바로 악독한 삶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고통을 만들어냅니다. 여러분은 공포에 빠진 사람들 중 자신들을 위해 설탕이나 버터, 권력을 붙들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두려워하며 공포에 빠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제자들의 가장 큰 범죄는 걱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고 판단할 때마다 우리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전쟁으로 인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예언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고 종말 사상에 온 마음이 휩쓸렸다. 그들은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이 이 세상의 불경건한 나라들 위에 임했으며 영국도 그중에 포함되었다고 느꼈다. 하지만 챔버스는 어두운 현실을 두려움에 떠는 자들이나 비관자들처럼 불길한 징조로 보지 않고 다른 각도에서 보았다. 자신을 주님께 다 내어놓고 조국이 하나님의 도구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중보기도했다. 수업도 계속 기도 가운데 진행되었으며 날마다 새로운 기도 제목들이 나타났다. 특히 챔버스의 기도 내용 중에는 스스로 중대한 선택을 해야 하는 일이 놓여 있었다. 군대를 섬기겠다는 결정을 내린 이후에도 기도 일기를 보면 계속된 내적 갈등을 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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