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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의 길1

데이빗 맥캐스랜드 지음 | 토기장이
데이빗 맥캐스랜드 지음

토기장이 / 2011년 2월 / 503쪽 / 18,000원



밀알(이집트, 카이로 - 1917년 11월 16일)


1917년 11월, 벌써 제1차 세계대전은 4년째에 접어들고 있었고 이집트의 병원과 회복실은 전사자와 환자로 가득했다. 군 장례식은 카이로에서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날의 장례식은 최고급 장교나 정부 고위 관료들만을 위해 마련되는 특별 순서로 치러지고 있었다. 이 특별한 장례식의 주인공은 군대의 장교나 정부 관료도 아닌 자이툰 지구의 YMCA 사관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였다. 이집트인들을 포함한 거대한 군중이 공동묘지에서 장례행렬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이툰의 주민들도 비통한 마음을 안고 장례식을 찾아왔다. 훗날 장례식에 참여했던 한 사람은 "카이로에서 챔버스가 알게 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곳을 조용히 찾았던 것 같다"라고 회상했다.

챔버스는 그 전날 맹장 파열 수술로 인한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망소식이 카이로에서 팔레스타인까지 퍼지자, 그 소식을 접한 수많은 사람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아연실색했다. 뭔가 실수가 있든지 잘못된 소식이거나 오해라고 여겼다. 왜 하나님께서 챔버스와 같이 귀한 사람을 데려가신다는 말인가? 그것도 불과 43세라는 젊은 나이에? 비디는 병원에서 오랫동안 남편과 함께 보내면서 남편이 회복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기간 동안 그녀의 마음에 임한 성경 말씀은 매우 분명한 확신을 주는 듯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요 11:4).

챔버스의 동역자들인 글래디스 잉그램과 에바 스핑크는 천국에서 자신들을 보며 미소 짓고 있을 챔버스 생각에 눈물을 참느라 서로 손을 꼭 붙들었다. 런던의 성경훈련대학에서 챔버스는 "사랑의 하나님은 결코 실수한 적이 없으시다"고 매우 자신 있게 말하곤 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 모두 이집트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인도하지 않으셨던가? 주께서는 그들을 지키시고 주의 품 안에서 보호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던가? 그런데 어찌하여!

비디와 챔버스는 7년 전 결혼하여 잘 지내왔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볼 때, 지금 최악의 불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비디는 34세의 나이로 과부가 되었고 아무런 경제적 대책이나 도움도 없는 가운데 어린 딸을 키우게 되었다. 그 정도의 불행에 그치지 않고 그녀는 지금 전쟁의 상황, 고향과 가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황폐한 타지의 사막 지대에서 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던지고 있었다. "영국에 돌아가실 겁니까? 챔버스 없이 어떻게 살아가실 생각인가요?" 비디는 눈을 감고 딸 캐슬린을 가까이 끌어당겨 안더니 평소에 잘 부르던 찬송을 조용히 부르기 시작했다."내 영혼아 하늘의 왕께 찬양하라. 주의 발 앞에 영광을 돌리라." 모든 것을 다 잃은 것 같아도 그녀의 유일한 소망이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있는 한, 그녀가 이 찬송을 부르게 되는 것은 결코 마지막이 되지 않을 것이다.

더 위대한 것들의 씨앗

챔버스의 사망 소식은 11월 17일 토요일에 선더랜드에 살던 데이빗 람베르트 목사에게 전해졌다. 그는 프랑스에 있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자신의 심정을 적었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가 이집트에서 소천했다는 망연자실하게 만드는 소식을 받았단다.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구나. 전성기가 되기 전에 죽다니!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내게 챔버스보다 더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은 없다. 나는 내 영혼처럼 그를 사랑했다. 그의 죽음은 1908년에 우리 막내아들 노르만이 죽었을 때의 충격만큼 크구나.

람베르트와 아내 엠마는 9년 전에 막내아들을 잃었다. 비탄에 잠긴 이 젊은 부부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과 치유의 손길을 갈급해 하고 있을 때, 챔버스가 기도 동맹 집회를 위해 선더랜드에 왔다. 람베르트는 호기심으로 그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는 "스코틀랜드 악센트로 힘찬 메시지를 전하는 박력 있는 젊은 목사에게 사로잡혔다." 챔버스의 설교 주제는 '중생'이었고 그의 메시지는 "마치 그 당시 종교의 인본주의적인 많은 활동과 인위적인 모습에 벼락을 치는 듯했다." 챔버스는 람베르트의 집에 손님으로 머물게 되면서 그들의 자녀들에게 인기 있는 친구가 되었고, 그 가정의 지속적인 영적 위로자가 되었다. 람베르트는 아들에게 쓰던 편지를 잠깐 멈추고 책상 서랍에서 노란 봉투를 꺼냈다. 그 봉투 속에는 1909년에 챔버스가 쓴 간결한 답신이 들어 있었다.

친애하는 람베르트 형제님께

마귀가 당신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니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불을 토하는 한, 그것은 우리가 마귀에게 주목 받을 만한 가치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당신 아내와 자녀들에게 마음 깊은 안부를 전합니다. - 오스왈드 챔버스로부터.

1부

스코틀랜드에서의 소년 시절(1874-1889)


2만 명 정도의 무리가 드와이트 무디의 야외 집회에 들어가기 위해 애버딘 브로드힐 언덕을 가득 채웠다. 애버딘에서 유명한 화강암 채석장의 노동자들, 청어잡이 어부들, 은행 직원들, 그리고 대학 교수들이 함께 앉았다. 주부와 어린이들도 점점 늘어가는 군중 틈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분위기는 기대감으로 한껏 고조되어 있었다. 성경과 삶의 이야기들을 특이하게 조화시키는 무디의 놀라운 설교 방법은 청중의 관심을 붙들었다.

당시 36세였던 클래런스 챔버스 목사는 브로드힐에 모인 어마어마한 군중을 둘러보았다. 그가 담임하던 크라운 테라스 침례교회는 주일 아침 예배 때 회중이 다 찬다고 해도 300명을 넘지 못했다. 무디와 같은 해에 태어난 클래런스에게는 그 집회의 광경이 놀라울 뿐이었다. 무디와 동역자인 생키는 재능 있는 독창자이며 작사가로서 자신의 대중 찬송으로 미국와 영국의 교회 음악의 흐름을 바꾸어내고 있었다. 많은 청중이 시를 음악으로 만든 그의 노래를 들으면서 남이 보든 말든 눈물을 훔쳤다.

같은 시간에 본 어코드 테라스 위에 있는 어느 작은 집 안에서는 한나 챔버스가 여섯 자녀들을 돌보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아서(13세), 버사(11세), 어니스트(7세), 에디스(5세), 프랭클린(3세), 거트루드(2세). 그리고 뱃속의 아기 챔버스가 있었다. 클래런스와 한나 모두 스펄전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그것을 계기로 함께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섬기자는 결단을 내렸다. 클래런스 챔버스는 목표 의식이 강하고 엄숙한 사람인 반면 한나는 따스함이 흘러넘치는 온화하고 유쾌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며칠 후 무디와 생키는 애버딘을 떠났지만, 그들이 남긴 부흥의 불길은 계속 타오르고 있었다. 무디와 생키의 복음 운동은 애버딘 사람들에게 큰 영적 갱신을 가져온 동시에 클래런스 챔버스와 마을의 다른 목사들에게도 도전을 주었다. 이 미국인들의 집회로 인해 그들은 교인들에게 더 깊은 인격적 관심을 가지려는 개혁을 체계화하기 시작했다.

오스왈드가 18개월이 되던 때 크라운 테라스 마을에서는 아버지 클래런스 목사의 사역에 불만을 품은 소문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설교에 힘과 생명이 부족해. 설교의 주제가 분명치 않고, 실천에 도움이 되지 않아." 이러한 분위기는 그해 말이 되자 클래런스의 사임을 요청하는 통보로 이어졌다. 클래런스는 더 이상 무거운 마음의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목회를 사임했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침례 연합회는 그를 중국 도자기 본차이나를 만드는 지역의 가정 선교 전도자로 임명하고 파송했다.

챔버스의 가족은 시원한 북해 미풍이 부는 애버딘을 떠나 도자기 가마들로 가득한 거무칙칙한 스토크-온-트렌트로 이사하게 되었다. 클래런스에게는 새로운 일이 생긴 셈이지만, 한나에게는 장소가 바뀐 것 외에는 거의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매일 네 자녀를 학교에 보내야 했고 집에서는 오스왈드를 포함한 어린 자녀들을 돌봐야 했다. 여전히 살림살이는 어려웠으나 그녀는 기쁨으로 하루하루를 맞이했고 위기가 발생할 때면 주께서 공급하실 것이라는 확신으로 그 어려움을 이겨냈다.

오스왈드는 일반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나는 많은 아이들처럼 어린 나이에 기도를 배웠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믿음으로, 그의 기도는 형식적인 기도를 넘어섰다. 형 프랭클린은 5살 때의 오스왈드의 기도를 '매우 독창적'이라고 묘사하면서 그보다 나이 많은 가족들이 밤에 발꿈치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가 오스왈드가 침대 옆에서 기도하는 소리를 듣기 위해 조용히 앉아 있던 때를 회상했다.

오스왈드가 7살 되던 해 아버지가 퍼스에 있는 뱁티스트 채플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게 되어 온 가족이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오게 되었다. '깨끗한 도시'로 불리던 퍼스는 야외를 좋아하는 활동적인 소년에게는 파라다이스였다. 오스왈드는 세 살 많은 프랭클린 형과 함께 마을 동편의 테이 강 강둑으로부터 솟아오른 사화산 키눌 힐의 가파른 경사를 등반하기를 좋아했다. 그들은 마노를 찾기 위해 위험한 절벽들을 탐험했다. 거대한 연어가 숨어 있는 테이 강과 우디 아일랜드는 생생한 상상력을 가진 소년들에게는 쉽게 스티븐슨의 '보물섬'이 되었다. 챔버스는 당시 유행하는 유년기 질환을 앓지는 않았지만 모험심 때문에 발목이 삐고, 팔이 부러지며, 엉덩이뼈가 탈구되는 등 많은 사고를 당했다.

친구들과 가족들은 10살 된 오스왈드를 '시끌법썩하게 웃기면서도 매우 조용한 성격'의 소년으로 묘사했다. 책임감 없이 놀기만 좋아했던 유년기의 그에 대해 형 프랭클린은 "후에 동생에게 나타난 강렬한 두뇌의 힘은 초등학교 시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학교에 다니는 동안 한 번도 우등상을 받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술 영역에서는 청년 시절에 나타날 그의 재능과 열정을 예감하게 하는 유년기적인 특징들이 나타났다. 오스왈드가 7년 동안 다닌 사립학교 샤프 인스티튜션에서는 저학년 학생들에게도 드로잉 수업을 받도록 했는데 그가 백묵으로 칠판에 그린 금독수리는 한동안 학교측이 지우지 않고 보관하여 학교 방문자들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줄 정도였다.

1889년 6월, 클래런스는 침례교 총 금식협회의 순회 담당 비서로 임명되었다. 오스왈드는 이제 곧 가족이 런던으로 이사 가게 될 것을 알고는 들뜨기 시작했다. 대도시에 살게 된다고 생각하니 흥분되었다. 그가 가장 원했던 것은 미술 교육이었다. 런던의 박물관과 미술관, 멋진 건축물들을 생각하면 배움의 기회가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문제는 언제나 돈이었다. 오스왈드는 아버지를 사랑했지만 항상 실리적인 경제 중심의 가치관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경제적인 성공과는 거리가 먼, 꿈 많은 미술가 지망생에게 돈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오스왈드는 마지막으로 테이 강 주변을 오랫동안 걸으면서 자신의 소년 시절에 작별인사를 했고, 다음번에는 런던의 거대한 템스 강을 산책할 것을 고대했다.

런던(1889-1895)

1889년 9월, 15살의 챔버스가 앞으로 자신의 청소년기를 보낼 런던에 도착했을 때, 그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19세기의 산업혁명으로 서로 앞다투어 나타나는 발명품들은 인간의 업적 및 더 나은 삶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듯했다. 챔버스 가족은 런던 중심부에서 남동쪽으로 6킬로미터 떨어진 펙함의 빅토리아풍 2층짜리 연립주택으로 이사해 정착하게 되었다. 그 집은 아침부터 밤까지 버스와 전차와 마차들로 번화한 곳으로, 점점 커지는 런던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오스왈드는 어느새 퍼스의 전원적인 평온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챔버스는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가 담임하지 않는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브리스코 목사는 설득력이 뛰어난 '흥미롭고 감명적인' 설교가로 알려져 있었다. 복음을 향한 열정과 영혼에 대한 관심을 가진 그 목사는 삶의 본으로 회중을 이끌었다. 예배 중에 그는 교인들을 살피며 열심히 경청하는 얼굴들을 찾았다. 매주 빠지지 않고 예배에 참석하는 열정이 있는 청년을 보면, 그는 종종 예배 후에 청년을 따로 만나 질문했다. "자네는 선교지에 나가 복음을 전할 것이지 왜 이곳에 있는가?" 브리스코 목사는 사람을 교회로 끌어 모으는 일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꾼을 양성시켜 교회 밖으로 내보내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다.

이 기간이 바로 오스왈드의 영적 의식이 자라나고 주께 헌신을 다짐했던 때이다. 온 가족이 런던으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오스왈드는 아버지와 함께 저명한 메트로폴리탄 테버너클 교회에 가서 스펄전 목사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만일 그 예배에서 주님께 자신을 드릴 기회가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재빠르게 말했다. "아들아, 지금 그렇게 할 수 있단다." 어린 챔버스는 그 자리에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다. 먼 훗날 형 아서는 그 밤을 "동생이 조용하지만 진지한 결단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맞아들인 날"이라고 확인해 주었다. 그날 이후 챔버스는 크게 변하면서 거듭난 삶을 살았다.

1895년 초, 챔버스는 미술 교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유럽의 큰 미술 센터에서 2년 동안 공부할 수 있는 장학금을 상으로 받았다. 그러나 그가 그 장학금을 돌려주는 바람에 미술 교수들과 친구들이 깜짝 놀랐다. 챔버스가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이와 비슷한 공부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 도덕적, 영적으로 파멸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해 6월, 에딘버러 대학 내 2년의 미술 과정에 등록하기로 결정했다. 이제는 앞길이 분명히 보이는 것 같았다. 하나님의 소명을 분명하게 느낀 이 젊은이는, 그 부름을 따라가기 위해 혼자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2부

에딘버러(1895-1897)


에딘버러는 이 세상에 흔적을 크게 남긴 많은 미술가들을 양성해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챔버스는 그곳에서 그가 오랜 동안 추구해왔던 영적이고 지적인 자극들을 마음껏 맛볼 수 있었다. 칼더우드 교수에게 배우면서 윤리 심리학을 파악했고 그 외 스펜서, 헤겔, 존 스튜어트 밀의 경합 이론들과 씨름했다. 윤리학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플라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푹 빠졌다. 셋 교수는 챔버스에게 심리학이 과학의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면서, 윌리엄 제임스의 글들을 소개했다. 데이빗 마송은 영문학 역사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챔버스가 사랑하는 워즈워스, 스코트, 테니슨, 브라우닝에 이르기까지 두루 다루어 주었다.

첫해에 챔버스는 부지런히 공부했고, 그 보람이 나타났다. 그는 볼드윈 브라운 교수의 추천으로 순수 미술에서 동상을 받게 되었고, 그가 쓴 에세이는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우등상을 수여받았다. 지적인 성취뿐 아니라 그림과 스케치 부분에서 드러나는 적성은 그를 부르셔서 미술계에 영향을 끼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확증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1896년 여름, 상황은 갑자기 전부 달라졌다. 미술 계통의 일자리가 희귀한 가운데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챔버스의 형편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는 그의 일기에 잘 나타나 있다.

8월 1일: 주께서는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을 돕는 특권과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 내게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주께서 나의 무지와 실수와 연약함을 보여주시더라도 나는 하나님을 의지할 것이다. 주께서는 내가 한때 믿음이라고 불렀던 얄팍한 고지식함을 제거하신다. 나는 하나님께 강하게 부르짖고 있지만, 과연 들으실까? 나는 주께 인내를 구했고, 주께서는 나의 성공의 가망성들을 하나씩 제거하신다. 주께서는 전문가들의 예리한 비판을 수단으로, 내가 기초도 모른 채 얼마나 내 생각을 표현하려 했었는지를 들춰내셨다. 내게 끈질기게 공부할 필요를 보여주시더니, 이제는 당장 돈이 필요한 상황에 나를 두신다. 나는 인간의 인내의 한계점에 다다랐으며 단지 기다리며 서서 바라볼 뿐이다.

8월 12일: 상황의 변화가 너무나 갑자기 닥쳐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 감사를 느끼자마자 다시 광야가 찾아온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인내를 위해 이보다 더 좋은 훈련은 없다. 과거 몇 달 동안의 성공이 야망과 교만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내게 유익이 되지 못했던 것이 확실하다. 일이 꼬이는 것은 인내를 훈련하는 데 좋고 인격을 다듬는 데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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