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껏 슬퍼하라
노만 라이트 지음 | 노란숲
마음껏 슬퍼하라
노만 라이트 지음
노란숲 / 2009년 6월 / 163쪽 / 8,500원
슬픔의 얼굴들세상에는 수많은 얼굴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익숙하고 어떤 이들은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아주 가까운 사람들 - 친구나 부모, 조부모, 혹은 배우자나 자녀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가운데 한 사람의 얼굴이 사라집니다. 그의 존재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볼 수 없습니다. 삶의 현장에는 빈자리가 생기지만 그리 오래 가진 않습니다. 새로운 얼굴이 고인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나타납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익숙하지도, 친근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슬픔'이라는 얼굴입니다.
슬픔. 당신은 슬픔에 관련해 어떤 경험을 갖고 있습니까? 슬픔은 흔히 우리에게 상처와 혼돈, 당황스러움과 위협감을 가져다줍니다. 그것은 강한 마음의 고통, 또는 날카롭게 찌르는 슬픔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슬픔 속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익숙하던 세계의 바닥이 뻥 뚫려버리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삶의 근간이 갑자기 사라져버린 듯 여겨집니다. 이로 인해 짙은 외로움을 느끼지만, 예수님도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계셨다는 사실을 아직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는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분이셨습니다"(사 53:3).
애통은 슬픔의 경험에 따르는 두 번째 부분입니다. 그것은 슬픔이 표현되는 과정입니다. 자연스러운 것이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회복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찾아온 슬픔을 고치거나, 더 낫게 만들거나, 떠나보내거나, 극복해버릴 수 없습니다. 슬픔은 미지의 땅을 향해 떠나는 여행과 같은데, 그곳에는 골짜기와 봉우리, 사막과 가끔씩 만나게 되는 오아시스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 여행의 각 부분을 통과해야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 끝은 짐작하기 어려우며, 어디에서 여행이 끝나게 될지 확신할 수 없지만 마침내 목적지에 닿게 될 것입니다.
슬픔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그것은 힘든 작업입니다. 시간이 지체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종류의 상실에 필수적입니다. 슬픔과 대항해 싸우거나 막으려고 애쓰지 말고 슬픔을 품어버리거나 수용하려 들면 더 많은 회복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슬픔으로 하여금 당신의 삶 속에서 애통의 작업을 시작하도록 허락하십시오. 그러기 위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슬픔의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고, 자신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감정이 지극히 정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고통과 부인사랑하는 사람이나 아끼는 것을 잃어버릴 때 슬픔은 찾아옵니다. 뿐만 아니라 슬픔의 동반자인 고통도 함께 찾아옵니다. 우리에겐 고통에 대한 면역성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침입해오면 저항합니다. 어떤 이들은 부인함으로써 고통과 싸웁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사망 소식을 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일 먼저, '아니야, 그것은 사실이 아니야,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줘', 또는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라는 식의 반응을 보입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슬픔의 과정은 여러 단계의 부인을 통해 진행됩니다. 처음에는 머리로 받아들이고, 다음에는 감정으로 받아들이며, 마지막에는 삶의 양식을 드러난 현실에 맞게 조정을 하게 됩니다. 부인하는 태도가 줄어들면 고통이 스며듭니다. 이러한 고통을 달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협상을 하거나 자신 안에 파묻혀버리거나 분노를 폭발합니다.
파괴적인 슬픔슬픔은 너무도 무질서하게 진행이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조절할 수도 없고, 언제 슬퍼할 것인지 예약할 수도 없습니다. 슬픔은 또한 우리의 사고나 감정의 능력을 방해합니다. 혼돈이 찾아오고 기억력이 사라집니다. 보통 때라면 상당히 결단력이 있던 사람도 쉽게 집중을 못하거나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사별 후 1년 이내에 내리는 대부분의 결정들은 이 시기의 강렬한 감정들에 크게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슬퍼할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신경을 쓰면 됩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슬퍼하거나 애통해하지 않습니다. 의도적으로 모든 감정을 표현하지 않은 채 가슴속에다 쌓아둡니다. 침묵하는 것은 아직 낫기도 전에 상처를 덮어두는 것과 같아서 감정적으로 세균에 감염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의 짐을 다른 사람에게 지우기도 합니다. 하지만 슬픔은 그렇게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가 자기 방식대로 자신의 짐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슬픔은 왜 존재합니까?왜 슬픔이 있어야 합니까? 왜 꼭 이런 경험을 통과해야만 합니까? 무슨 목적이 있는 건가요?슬픔을 통해 성경 속의 인물, 욥의 고백처럼 새로운 삶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슬픔은 상처도 가져오지만 또 다른 면들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줍니다. 어느 작가는 이렇게 썼습니다. "누군가의 슬픔에 완전히 잠길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당신이 죽음을 진정으로 심각하게 경험하게 될 때, 당신은 살아있음에 대한 경이로움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Robert Veninga, A Gift of Hope)
슬픔은 어렵고 고통스러우며,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여정도 아니지만, 가치 있는 여정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성품이나 인생에 대한 관점을 변화시켜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속되는 슬픔에 잠겨 사는 동안 이러한 슬픔이 평생을 가지 않을까라는 의심이 들 때는 다음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 16:20)
당신의 삶 속에 생긴 빈자리누군가를 잃었을 때, 우리의 삶 속에는 빈자리가 생깁니다. 식탁에서도, 교회의 옆자리에도 사랑하는 이의 자리는 비어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남으로써 그와 연관되어 따라오는 온갖 종류의 상실 때문에 고통은 더 커집니다. 일상의 생활, 사랑하기, 일하기, 예배방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영향을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상실의 슬픔뿐 아니라 결코 가져보지 못했거나 갖지 못할 것에 대한 슬픔도 불러 일으킵니다.
이러한 상실은 특히 대인관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어떤 사람들과는 멀어지고, 어떤 사람들과는 더 가까워집니다. 행동양식도 변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닌 것 같아요"라는 말을 합니다. 특히 당황스러운 경험은, 가끔씩 멍하니 생각이 멈춰버린다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슬픔 속에서 감각을 잃어버리는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이의 사망소식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은 대부분의 사람을 마비상태로 몰아갑니다. 그의 죽음이 갑작스러웠다면 무감각 상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에게 마취를 당하는 것처럼 자연스레 일어나는 방어체계입니다. 이러한 방어체계는 신경계를 마비시키고 비현실감을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는 목적지를 잃은 사람처럼 방황하게 됩니다.
슬픔에 대한 질문들무감각의 시기가 지난 후에는 분리의 고통이 따라옵니다. 이 상태에서는 떠나버린 사람이 돌아와 주기를 간절히 바라게 됩니다. 그의 모습이나, 음성, 그의 냄새, 그가 대문으로 다시 걸어들어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이때의 고통은 워낙 커서 차라리 충격상태나 무감각의 단계로 되돌아가고픈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이런 때 우리는 반사적으로 '왜'라고 질문합니다. 반면에 '왜'라고 질문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양쪽 다 정상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질문하는 것 이상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항의이고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절규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욥도 열여섯 차례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왜?'라는 질문은 '난 설명이 필요해요. 난 응답을 듣고 싶어요.'라는 말입니다. 거기에 응답이 없으면 분노가 쌓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대답을 들었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라고 질문하는 일을 주저하지 마십시오. 욥의 경우, 그는 묻고 또 물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침묵은 천둥소리보다 더 무거웠습니다. 켄 가이어의 말입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할 때 하늘의 음성은, '잠잠하고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고 말씀하시지, '잠잠하면 이유를 알 것이다'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먼 훗날에 '이해'라는 성례가 점차적으로 베풀어질 것입니다."
눈물의 의미이런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위해 마련하신 하나님의 선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눈물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쩌면 한번도 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눈물을 보이는 것에 두려움을 갖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린 울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슬플 때 우는 것은 당연한 반응입니다. 상실을 당한 무렵에는 노아의 홍수 때처럼 한없는 눈물에 잠기게 됩니다. 울고 또 웁니다. 이런 상태가 끝없이 지속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엔가 구름이 걷히고 땅에 물기가 마르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다가도 다시 폭풍우가 찾아옵니다. 그러나 결국은 조금씩 조금씩 맑은 하늘이 되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 잃어버린 사람을 지속적으로 생각하다가 잊어버렸다가 하는 변화를 마음속으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땐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생각을 마음 속에서 멈출 수 없습니다. 이때 몹시 곤핍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럴 때 당신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십시오. 그들이 당신과 함께 울어줄 수 있습니다. 기억해야 할 사실은, 언젠가는 더 이상 눈물이 필요없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러한 시기에 나타나는 또 다른 감정들 가운데 공허감과 외로움, 고독감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안이나 밖이 텅 비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가져옵니다. 바로 곁에 다른 사람이 있을 때에도 외로운 느낌이 찾아드는 고통의 순간입니다. 마음속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세워진 것입니다.
외로움이란 상실의 부산물입니다. 이러한 감정은 사별한 지 약 3개월쯤 지나서 찾아오게 되는데, 이때쯤 남들은 우리가 이제 잘 지내고 있거나 잘 지내야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외로움은 또 다른 감정을 동반하는데, 그것은 '소속되지 않는 느낌'입니다. 우리 자신 또는 사별한 그와 교제했던 사람들이 예전처럼 우리를 자주 초대하거나 초대에 응하지 않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불필요한 존재처럼 여겨지거나 이전보다 더 격리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레고리 플로이드는 6살짜리 아들을 잃고 나서 자신의 감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선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실제적이고도 섬세하게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우린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단지 그분이 우리를 붙잡아주시고, 우리의 가슴이 반복적으로 부서져 내리는 소리를 들어주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시편기자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시 73:23)
지금 그러한 손길이 필요하신가요? 하나님께 말씀 드리십시오.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의 필요, 즉 그들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 주십시오.
두려움과 염려의 엄습다음으로 따라오는 감정은 두려움과 염려입니다. 혼자 남는 데 대한 두려움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 또 다른 것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또 다른 떠남이나 버려짐에 대한 두려움에 이르기까지 복합적입니다.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은 사실상 두려움의 표현입니다. 많은 이들이 상처받은 다른 가족들이 어떻게 견디며 살아갈지를 염려합니다. 다음엔 다른 가족이나 친구를 잃게 될까봐 걱정합니다.
두려움이나 염려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는 슬픔 그 자체입니다. 슬픔의 감정은 강렬하고도 특이합니다. 슬픔으로 인해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것 때문에 두려움이 찾아오게 됩니다. 완전주의적인 성향이 강할수록 통제할 수 없는 상실의 느낌이나 두려움도 커집니다. 두려움은 어떻게 슬퍼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슬픔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거나 느껴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습니다. 슬픔을 당한 이들을 위한 역할 모델이나 지침도 별로 없기에, 이러한 불확실성 때문에 두려움이나 불안감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하나의 방향을 보여줍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시 34:6)
죄책감의 문제죄책감과 수치감도 슬픔의 여정 속에 끼어듭니다.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원인들은 다양합니다. 특히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내게 있다고 생각될 때는 즉시 죄책감을 갖게 됩니다. 죄책감은 관계에서 해결되지 않은 부정적인 감정 때문에 발생할 수 있습니다. 때론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도 죄책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때 경험하기 쉬운 또 다른 경향은, 고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저질렀다고 생각되는 나쁜 일이나 부정적인 것들을 기억하는 동시에 고인이 행했던 선한 일에 과도하게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흔히 우리가 만약 무엇인가를 다르게 했더라면 그가 죽음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무엇인가를 다르게 했더라면 우리의 현실을 바꿀 수 있었을까요? 대부분의 '만약 ~했더라면' 하는 목록들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한 이야기들은 '난 상처를 입었어요' 또는 '난 화가 나요'라는 표현의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이미 지난 일은 흘러갔습니다. 그 일은 바뀔 수 없습니다. 당신은 이미 너무나 많은 고통을 지고 있어서 더 이상 자기고발이나 자학, 자기 비하 등의 짐을 질 수가 없습니다. 후회되는 것이 무엇인지 목록을 적어보고 크게 읽은 다음에 미안하다고 말해 보십시오. 그리곤 하나님께 마음으로부터 죄책감을 거두어 가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죄책감이 남아 있으면, 결코 회복에 긍정적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인식하십시오.
분노의 문제또 다른 감정은 분노입니다. 그것은 불쾌하고 성가시며 항의하는 감정입니다. 분노는 우리가 느끼는 좌절감이나 상처, 두려움, 무기력감 속에서 누군가의 죽음이 부당함을 선언하거나, 누군가에게 대가를 지불하기를 바라며 슬픔 가운데서 항거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분노는 상처나 고통에 대한 반응입니다. 때로 이러한 분노는 가까운 사람들, 특히 가족들을 향해 폭발할 수 있습니다. 분노는 필요한 것일까요? 그것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분노는 죄가 아니라 감정의 정보라는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분노는 슬픔을 표현하는 다양한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때론 고인에 대해서도 분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살아남아 있는 사람들은 때로 버림을 받았거나 희생을 당했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특히 하나님께 화가 났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나님께 분노하는 이유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응답해주시지 않기 때문이거나 자신의 신앙이나 믿음이 소용없는 것처럼 보여서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이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십시오. 슬픔으로 인한 분노가 하나님을 향해 생기는 것은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상실로 인한 반응일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슬픔일지'를 쓰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글을 쓰는 동안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자신과 자신의 분노에 대해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분노를 표출하더라도 자신의 좋은 것을 빼앗기지 않도록 유지하는 한 괜찮습니다. 때가 되면 자신의 분노를 포기하십시오. 분노에는 목적이 있지만, 많은 경우 목적을 다 이룬 후에도 남아 있게 됩니다. 다윗은 분노에 차서 질문한 다음에 다음과 같은 고백의 단계에 다다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