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바로 보기
류모세 지음 |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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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모세 지음
두란노 / 2010년 7월 / 272쪽 / 12,000원
중동은 정확히 어느 지역을 가리킬까?'중동'이란 지역적 개념은 영국이 19세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며 세계를 지배하는 대영제국으로 탄생하면서 등장했다. 오랫동안 유럽인들이 놀던 물은 지중해 바다가 그 한계였다. 그들은 지중해를 세계의 전부로 인식하며 수천 년을 살아 왔다. 그러다가 15세기 말 신대륙 발견을 시작으로 유럽인들에게는 신비 속에 가려져 있던 동방의 여명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아울러 땅 끝으로 생각한 동방의 지평선도 점점 넓어지게 되었다. '근동'(Near East)은 그리스 발칸 반도를, '극동'(Far East)은 중국, 한국, 일본을 그리고 '중동'(Middle East)은 그 중간에 있는 지역을 가리킨다. 오늘날 중동은 북아프리카, 아라비아 반도, 이란, 터키, 아프가니스탄 등 상당히 넓은 지역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무엇이 이슬람 탄생을 가능하게 했을까?이슬람 역사를 다루는 데 있어서 그 출발점을 이슬람교 창시자 무함마드의 탄생 지점인 570년으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시대를 몇 세기 앞당겨 이슬람교 탄생 이전의 아라비아 반도 상황을 최대한 복원해 보는 것은 신선한 출발점이 되리라 생각한다.
무지의 시대(이슬람 탄생 이전의 아라비아 역사): 선사시대부터 아라비아 사막은 목축을 하던 '베두인 족'과 오아시스 주변의 도시에 정착해 농사를 짓고 대상무역을 하던 '쿠라이시 족'의 고향이었다. 비록 이들만의 자체적인 문명은 없었지만 5,000년간 아라비아 셈족 여인들은 수많은 자녀들을 근방의 수메르, 아카드, 바벨론 등의 도시국가로 보냈고 이들의 타고난 원시적 용맹은 무기력한 도시 문명에 활기를 불어넣곤 했다.
아라비아 반도(비잔틴과 페르시아 사이의 샌드위치): 이슬람교 탄생 이전의 아라비아 역사는 한마디로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으로 불리는 두 강대국 사이에 낀 샌드위치 역사로 표현할 수 있다. 비잔틴 제국은 395년에 로마가 '동서'로 나뉜 뒤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된 후 홀로 남은 동로마 제국을 가리킨다. 서로마와 달리 비잔틴 제국은 서로마 멸망 이후에도 무려 1,000년 이상 질긴 목숨을 연명했고, 1453년 오스만 터키 제국에 멸망당했다. 페르시아 제국은 주전 313년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당한 페르시아 제국의 후계자로 자처하며 주후 224년에 등장한 제국이다. 제국의 이름은 같지만 알렉산더에 의해 멸망당한 원조 페르시아는 조상의 이름을 따서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라 하고, 비잔틴 제국과 경쟁한 페르시아는 '사산조 페르시아'라 한다.
무함마드는 왜 아라비아 반도의 유대인들을 모두 쫓아냈을까?아라비아 반도로 유입된 유대인: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 내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조직적인 핍박이 이어지면서 아라비아 사막으로 유대인들의 유입이 줄을 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국가가 된 비잔틴 제국은 '메시야를 죽인 민족'이라며 유대인들을 줄기차게 핍박했다. 한편, 종교적 관용을 보이던 파르티아 제국과는 달리 그 뒤를 이은 사산조 페르시아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가 종교로 채택하면서 그동안 제국 내에서 자치를 누려오던 유대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동쪽 아라비아 사막으로 깊숙이 들어간 유대인들은 그곳을 자신들을 강제 개종시키려는 비잔틴 전투 병력이 여간해서는 미치지 못할 '안전지대'로 여겼고, 메카와 메디나 두 오아시스 도시를 중심으로 정착했다. 대상들이 머물고 가는 작은 오아시스 도시에 불과하던 메카는 유대인들이 정착하면서 단기간 내에 국제도시로 발전했고, 메디나는 유대인들이 사막의 '무'에서 새롭게 만든 신도시였다.
무함마드의 어린시절: 570년, 무함마드는 메카의 명문 상업귀족인 쿠라이시족 하심가(家)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압둘라는 무함마드가 뱃속에 있을 때 여행 중 죽고, 어머니마저 6세 때 죽자 무함마드는 할아버지에게 맡겨졌다. 하지만 8세 때 할아버지마저 죽자 다시 삼촌에게 맡겨졌다.
부잣집 과부와의 결혼으로 인생이 역전되다: 25세의 성인 무함마드는 대상단(隊商團)의 리더가 되었고, 대상단의 소유주인 과부와 결혼하면서 인생의 놀라운 전환점을 맞았다. 이 과부의 이름은 하디자 였는데, 그녀는 엄청난 부자였지만 무함마드보다 15세가 많은 40세였고 이미 네 번이나 이혼한 경력에 아이도 딸려 있었다. 쉽지 않는 결혼이었지만 이 결혼은 분명 유복자로 태어나 힘들게 살아온 무함마드의 인생이 한순간에 역전된 계기가 되었다.
천사 가브리엘의 계시, 이슬람교 탄생: 610년, 무함마드가 40세 되던 해에 여느 때처럼 메카 근교의 히라산 동굴에서 명상을 하던 중 천사 가브리엘의 계시가 임했다. 이로써 당시까지 문맹이었던 무함마드는 하루아침에 글을 깨우치고 이슬람교를 창시하게 된다. 하지만 메카에서의 전도활동은 신통치 않았고, 메카의 중상류층인 쿠라이시족은 무함마드를 국가 경제를 위협하는 급진주의자로 여기고 핍박하기 시작했다.
헤지라, 이슬람력의 시작: 전도를 시작한 지 9년째 되던 619년, 무함마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던 아내와 삼촌이 세상을 떠나면서 박해는 더욱 심해졌다. 이후 무함마드는 전도 대상을 메카 주민들에서 메카를 찾아오는 순례자로 바꾸었다. 이때 유대인들이 세운 도시인 메디나에서 온 카즈라즈 부족의 순례단이 무함마드에게서 이슬람에 대한 설교를 듣고 깊은 인상을 받고 돌아갔다. 메카에서 성과가 없어 고심하던 무함마드는 개종자 70명과 함께 622년, 메디나로 이동하는데 이 해는 이슬람 역사에서 무척 의미 있는 해가 된다. 바로 622년을 기준으로 이슬람 달력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슬람에서는 메디나 이주를 '헤지라'(거룩한 천도)라 하고, 이때 무함마드와 함께 이주한 70명을 '무하지룬'(이주한 자)이라 부르는데, 이들은 기독교의 12사도와 같은 최고의 존경과 권위의 대상이 된다.
메디나에서의 첫해, 유대인 포섭작전메디나에서 거대한 아랍 부족들을 개종시킨 무함마드는 곧 유대인 공동체에 관심을 기울렸다. 무함마드는 유대인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키면 이들의 재력과 잘 정비된 신학이 이슬람 전파에 엄청난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무슬림들이 기도할 때 유대인처럼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무함마드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개종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이후 유대인에 대한 무함마드의 태도와 전략은 점차 적대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적대감은 624년 1월, 무슬림들의 기도 방향을 예루살렘에서 메카로 바꾸면서 공식화되었다.
이슬람 전사들은 어떻게 순식간에 3개 대륙을 정복했을까? 메디나로 이주(622년)한 지 10년 후, 그리고 메카를 정복(639년)한 지 2년 후인 632년 6월 8일, 무함마드가 젊은 아내인 아이샤의 무릎을 벤 채 죽자 엄청난 혼란이 찾아왔다. 무함마드가 아들을 3명 낳았지만 3명 모두 어린 나이에 죽은 탓에 마땅한 후계자를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슬람의 진짜 능력은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사후에 드러났다. 혼란은 컸지만 일시적이었고, 이들은 '무함마드의 대리자'를 뜻하는 '칼리프' 제도를 확립하면서 빠르게 혼란을 수습해 나갔다. 네 명의 칼리프는 다음과 같다.
아부 바크르: 632~634년 / 오마르: 634~644년 / 오스만: 644~656년 / 알리: 656~661년
아브 바크르(아라비아 반도의 통일): 초대 칼리프로 선출된 아부 바크르는 무함마드의 절친한 친구로서 무함마드 아내인 하디자에 이어 두 번째로 무슬림이 된 사람이다. 그는 짧은 통치기간인 2년 동안 무함마드에 의해 완성된 계시인 '꾸란'을 전 세계로 전파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무함마드가 알라를 위한 '세상 정복의 말'이었다면, 그의 후계자인 아부 바크르는 '세상 정복의 칼'이었다. '꾸란이냐 칼이냐'를 슬로건으로 시작된 이슬람 대정복 운동의 불씨가 그로 인해 점화된 것이다.
오마르(이슬람 제국의 실질적 건설자): 아부 바크르에게서 통일된 아라비아를 인수받은 오마르는 정복전쟁의 화살을 외부 세계인 비잔틴과 페르시아 제국을 향해 정조준했다. 몇 번의 약탈로 탐색전을 펼치던 오마르는 늙은 두 제국의 허점을 곧바로 파악하고 본격적인 정복전쟁을 시작했다. 오마르는 635년 비잔틴의 다메섹을 점령했고, 636년 야르무크 전투에서 5만의 비잔틴 최정예부대가 절반도 안 되는 무슬림군에 대패함으로써 제국의 절반을 고스란히 아랍 제국에 헌납해야 했다. 638년 팔레스타인, 640년 시리아, 641년 비잔틴 제국의 최고 곡창지대인 이집트가 도미노처럼 무슬림 군대의 손에 떨어졌다. 한편 나름대로 선전한 비잔틴 제국과 달리 페르시아 제국은 허망하게 무너졌다. 페르시아의 마지막 황제인 야즈데게르드 3세는 메르브까지 도망갔지만 651년 방앗간 주인에게 암살되면서 1,200년 전통의 페르시아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오스만(친족 중심의 중앙집권 정치): 오스만은 전임 칼리프인 오마르에게서 물려받은 거대한 이슬람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친족들을 지방 총독으로 파견하고 중앙집권적인 권력 형태를 갖추어 나갔다. 아울러 이슬람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확고하게 다지기 위해 다양한 사본이 돌아다니던 꾸란의 정본을 편집했고 나머지 사본들을 모두 불태웠다. 이에 대해 오스만의 반대파인 알리 진영은 오스만의 통치를 '족벌정치'라고 맹비난했고, 독실한 무슬림들은 오스만이 꾸란 사본을 불태운 것에 격분했다. 정복전쟁의 최전선에서 싸운 베두인 부족전사들은 오스만의 인사이동에 불만을 느꼈고, 결국 이집트에 주둔한 군대들이 불만을 토로하기 위하여 메디나로 왔고, 이 가운데서 이탈한 항명집단에 의해 오스만은 암살되었다.
알리(수니파와 시아파 갈등의 시작): 오스만을 암살한 항명집단은 알리를 새로운 칼리프로 옹립했다. 그러나 알리는 오스만 암살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되었고, 복수를 외치는 오스만의 친족인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와 657년 시핀 전투를 벌이게 된다. 역사는 이 전투를 무승부로 기록하고 있고 그 결과 이슬람 제국은 동쪽의 쿠파를 중심으로 한 알리와 서쪽의 다메섹을 중심으로 한 무아위야의 세력권으로 양분되었다. 그러나 661년 알리가 살해되면서 힘의 균형이 무아위야에게 기울었다. 무아위야는 분열된 이슬람 세계를 통합하는 한편 칼리프위에 올라 우마이야 왕조를 세웠다. 무아위야는 선출로 칼리프를 뽑는 전통을 무시하고 아들 야지드에게 칼리프위를 세습했으며, 야지드에게 위험한 인물이었던 칼리프 알리의 차남 후세인을 견제하고자 했다. 후세인은 자신을 칼리프로 추대하려는 지지자들의 초청으로 메카를 떠나 은밀히 이라크의 쿠파로 향했으나, 카르빌라에서 우마이야 가문의 충복 우바이둘라 빈 지야드에게 살해당했으며, 그 일가족이 몰살당했다(680년 10월). 이러한 후세인의 비참한 최후가 알려지자 이라크 지방은 알리 가문에 대한 동정과 반(反)우마이야 정서가 고조되었으며, 결국 이들은 후세인의 죽음을 순교로 받아들이며 하나의 종파로 발전하게 된다. 이들을 '시아 알리(알리의 추종자)' 혹은 '시아'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결국 무슬림 종파가 수니와 시아로 나뉘는 분기점이 되었다.
압바스 왕조는 어떻게 찬란한 이슬람 문명의 꽃을 피울 수 있었을까? 우마이야 왕조의 뒤를 이은 압바스 왕조는 이슬람 제국의 진보 과정에서 최고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750년에 시작된 압바스 왕조는 '천일야화'(아라비안 나이트)로 불리는 현란한 이슬람 문명을 꽃피운 황금기였다. 이때 이슬람이 꽃피운 문명은 유럽을 포함해 전 세계에서 가장 앞선 최고의 문명이었다.
유대인, 이슬람 문명 탄생의 위대한 조력자: 이슬람 제국의 탄생과 함께 이슬람 문명이 계속 꽃피울 수 있었던 데는 유대인들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유대인들은 이슬람 제국 내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은 비무슬림 그룹이었다. 이들은 '지즈야'로 불리는 고율의 인두세를 이슬람 제국에 납부하는 대신, 제국으로부터 생명과 재산, 외적의 침입으로부터의 보호를 받았다. 또한 이들은 월등한 사회적 지위를 누리기도 했는데, 능력에 따라서는 제국의 '와지르'(총리)에 오를 수도 있었다. 이슬람 제국 내에서 기독교인들은 수적으로 유대인보다 훨씬 우세했지만 이슬람 세계에서 위대한 인물이나 문화를 그다지 만들어 내지 못한 반면, 이 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철학, 의학, 과학, 수학 등 거의 전 분야에서 위대한 인물을 배출하며 최고의 황금기를 누렸다.
흔히 '문예부흥'을 뜻하는 프랑스어 '르네상스'는, 유럽보다 이슬람 제국에서 수백 년 먼저 시작되었고, 유대인들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당시 유대인들을 통하여 이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하던 새로운 직종들이 생겨났는데 유대인들은 천문학자, 수학자, 화학자, 건축가, 번역사, 또한 금융전문가로서 바그다드, 카이로, 코르도바에 지사를 둔 국제경영인으로서, 당시 세계의 전부라고 할 수 있던 이슬람 제국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10세기 이베리아 반도의 중심 도시인 코르도바는 인구가 80만 명에 이르는 국제 도시였고 70개의 도서관과 1,600개의 이슬람 사원이 있었다.
유럽 최초의 반격인 십자군 운동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셀주크조(동부의 혼란을 통일하다): 수도인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한 이라크 지방은 압바스 왕조의 중앙무대였다. 하룬 알-라쉬드(786~809) 통치 때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압바스 왕조는 그가 죽은 뒤 칼리프 자리를 놓고 두 아들이 내전을 벌이면서 본격적인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 후 제국의 동쪽은 여러 왕조들이 난립하는 춘추전국시대로 넘어갔다. 그러던 중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유목민인 터키족 출신의 왕조인 셀주크조는 제국 동부의 혼란을 수습하면서 혜성과 같이 등장했다. 200년간 이어지던 제국 동부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고 셀주크조의 통치자는 자신을 이슬람 세계의 왕을 의미하는 '술탄'으로 선포하며 정복전쟁에 나선다. 1071년 반(Van)호 전투에서 셀주크조는 비잔틴의 주력군을 대파했고 비잔틴 황제인 로마누스 4세까지 포로로 잡아감으로써 유럽 전체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십자군원정(이슬람을 향한 유럽의 반격): 비잔틴 대군을 격파한 1071년 반 호 전투를 기점으로 그동안 비잔틴 제국의 영토였던 소아시아는 이슬람을 앞세운 셀주크군으로 인해 터키화가 시작된다. 술탄 말리크 샤(1072~1092)는 1079년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빼앗고 소아시아 징벌을 계속 감행한 결과 1092년 니케아 정복과 함께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바로 물 건너의 적과 마주보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비잔틴 제국의 황제인 알렉시우스는 같은 기독교 세력인 로마 교황청에 구조 요청을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로마 교황 우르반 2세는 비잔틴 황제인 알렉시우스의 구원 요청에 화답했고, 이로써 1096년 1차 십자군 대원정이 시작되었다. 1차 십자군은 1097년에 니케아를, 1098년에 안디옥을 회복하고, 1099년 최종 목표인 예루살렘을 차지했다. 불과 3년만에 놀라운 대승을 거둔 1차 십자군은 예루살렘 왕국과 그 북쪽으로 4~5개의 소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이라크 상부의 모술에서 세력을 얻은 이마드 알-딘 장기가 1144년 십자군 왕국인 에데사와 알레포를 차례로 탈환하게 된다. 이 위험이 유럽에 알려지며 20만 대군의 2차 십자군이 출병하지만 계속된 참패만 맛보다가 초라하게 퇴각했다.
3차 십자군은 또 다른 영웅인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를 탄생시켰다. 종교는 달랐지만 진정한 기사도 정신을 알고 있던 리처드와 살라흐 알-딘(살라딘)은 1192년 휴전 협정을 맺는다. 조건은 예루살렘에 대한 무슬림의 권리를 인정하는 대신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십자군 소왕국들의 영토와 기독교인들의 예루살렘 순례를 보장하는 것이다. 살라흐 알-딘은 이듬해인 1193년 다메섹에서 병사한다. 4차 십자군은 이슬람과는 아무 상관없이 같은 기독교국가인 비잔틴 제국을 약탈한 가장 추악한 십자군이며, 5차 십자군은 무슬림의 심장부인 이집트 본토를 향한 대반격의 성격으로 진행된다. 살라흐 알-딘이 죽고 술탄이 된 동생 알-아딜은 십자군의 진격을 막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아들 알-카밀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나일 강의 범람을 이용해 1221년 십자군을 이집트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