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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된 예수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 창해
신이 된 예수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창해 / 2010년 9월 / 400쪽 / 15,000원




1부 예수는 누구인가?



논쟁의 발단 : 예수는 사람인가, 신인가?

신약성경의 텍스트를 읽으면서 느끼는 점은 예수의 형상에 대한 서술이 극도로 복잡하다는 사실이다. 그를 명백하게 정의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갈릴리인(예수)은 2세기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교황이 말한 것처럼 절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기적을 행하기 때문에 그렇고, 그의 강림이 유대 성서에 이미 예언되었기 때문이고, 신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렸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그가 승천하고 나서 수년이 흐른 뒤 바울에게 나타났기 때문에 그는 분명 보통 사람을 훨씬 뛰어넘는 특별한 존재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명시적으로 신이라고 정의하기에는 아직 주저하게 만드는 한 걸음이 남아 있다. 왜 그럴까? 복음서 저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은 처음부터 근본적 문제와 맞부딪친다. 즉, 일신교의 근본을 문제 삼지 않으면서 어떻게 신의 호칭을 예수에게 부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예수를 신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이전까지 지켜온 신적인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사렛인(예수)은 제2의 신이 아니다. 물론 다른 신들 사이에 끼어 있는 하나의 신도 아니다. 그리스 로마 신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그런 신들은 점점 매력을 잃고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하나의 유일한 신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초기 기독교 증인들의 저서는 그들이 스승의 모습을 이야기할 때 마치 계란 위를 걷듯 얼마나 신중을 기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어떤 호칭도 예수라는 존재가 지니는 생소함을 충분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것 같다. 선지자, 분명 그렇다. 그러나 다만 그뿐인가? 메시아, 물론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메시아인가, 아니면 인류의 구원을 위한 메시아인가? 신의 아들, 분명하다. 그러나 아버지와 견주어 그는 정확히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가? 주, 당연하다. 그러나 그 명칭에 대해 이방인이 말하는 주인가, 아니면 유대인들이 부여하는 의미의 구주인가? 어떤 호칭도 다른 호칭들을 완전히 배제시키는 절대적 호칭이 못 되기 때문에 초기 그리스도인은 결국 예수를 지칭하기 위해 여러 명칭을 동시에 사용했다.

그렇다고 해도 예수의 제자들이 속한 다양한 공동체들이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생각을 지닌 것은 아니다. 매우 미묘하게 다를 수는 있으나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 "믿는 무리가 오직 한마음과 한뜻을 가질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 무엇보다 신앙의 핵심을 이루는 근본적인 일치는 예수가 부활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모두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 이전에는 갈릴리인을 의도적으로 랍비, 스승, 다윗의 자손으로 부르던 것이 부활 이후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주'가 된다. 부활은 예수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보게 하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예수의 새로운 모습을 정확하게 해석한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사도행전 2:36).

이에 뒤질세라 바울도 <로마서>에서 예수의 정체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그의 아들에 관해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라"(로마서 1:3-4).

인간적 관점에서만 고려한다면 다윗의 자손으로 매우 존귀한 계보를 지닌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신의 아들'과 '주', 다의적이면서도 경직되지 않는 이 호칭들은 예수의 절대적 위대성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택하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이해될 여지를 남긴다. 그렇다면 예수의 신성에 대해서는 정확히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엄격히 말하면, 쉽게 넘지 못하는 어떤 웅덩이가 하나님의 아들의 신성과 하나님의 신성을 나누고 있다. 그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다. 초기 그리스도인은 예수에게 신의 이름을 부여하는 것을 주저했기 때문에 종종 넌지시, 그리고 수줍게 소곤거린다. 그러나 바울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예수의 형상을 과감하게 선언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다"(골로새서 1:15).

"그 안에는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골로새서 2:9).



마침내 예수의 신성을 증거하는 '강생'의 개념이 이방인의 사도 바울의 입을 통해 이처럼 거의 터져나오려 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형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립보서 2:6-8).

그가 택한 단어가 암시하듯 바울은 매우 과감하면서도 절대로 신중함을 잃지 않았다. '하나님의 형체시나'와 '하나님과 같이'라는 단어의 조심스러운 사용이 그렇다. 2세기 초에 이르러서도 사람들은 예수의 신성을 여전히 우회적으로 표현한다. 예수의 신성에 개방적인 사람들에게서조차 많은 의문이 사라지지 않은 채 맴돌고 있다. 어떻게 성부가 갈릴리인을 낳았는가? 그는 아버지인 하나님에 비해 열등한 존재인가? 어떻게 그에게 신의 몫과 사람의 몫을 동시에 부여할 수 있는가?

2부 예수의 여러 형상



이교도 국가의 그리스도인

2세기에 이르러 유대교의 주변 종파에 머무르던 기독교가 이제 완전한 종교로, 그리고 유대인을 넘어서서 보편적 종교로 인정받기 시작한다. 보편성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카톨리코스 katolikos(가톨릭)는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를 지칭한다. 기독교는 세상과 사람을 생각하는 방법과 신을 생각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는다. 마치 허기증에 걸린 환자가 쉴 새 없이 먹을거리를 찾듯이 예수의 형상은 언제나 새로운 생각을 요구하며, 또한 다양한 해석을 낳는다. 여러 해석이 때로는 모여지고, 때로는 서로 흩어진다.

바울은 십자가의 죽음을 말하는 기독교가 분명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비천한 종의 모습으로 죽었다는 메시지가 아무리 미련해 보여도 우상을 숭배하던 사회에서는 뭔가 생소함으로 새롭게 주목을 끌 수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생경했던 기독교가 이교도의 척박한 땅에서 제대로 뿌리내리는 작업이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제자들은 조롱당하고 잘못하면 죽을 만큼 심한 체형을 당하면서도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수십 년에 걸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그들의 끈질긴 노력은 3세기 말에 이르러 마침내 제국의 여러 지방에서 기독교가 다수의 종교가 되는 뚜렷한 결실을 맺는다.

혁명! 사도 요한과 신의 로고스

예수의 형상에 관한 점진적 탐구에서는 <요한복음>이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사도 요한이 말하는 것은 놀랍게도 카리스마를 지닌 갈릴리의 한 선지자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온 신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주교가 시적인 문체로 쓰여진 이 책을 주저 없이 '가장 영적인 복음서'라고 말한 것은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요한은 예수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로 일치시킨다. 예수는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 곧 신의 로고스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예수는 신의 대변인을 훨씬 뛰어넘는 존재이며, 그가 곧 말씀이다. 말씀은 세상의 창조보다 먼저 존재했다. 왜냐하면 신은 말씀과 함께 세상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강생한다. 다시 말해 예수는 육체적 출생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

따라서 요한복음은 예수의 신성을 분명히 알려주는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다. <요한복음>에서 드러나는 예수는 이제 단순한 메시아가 아니며, 신과 순전한 친자 관계도 아니다. 그는 성부와 같은 본질로서 동일한 신성을 지닌다. 공관복음에서는 형식화되지 않은 이런 심층적 내용이 <요한복음>에서 자유로운 고백으로 표현된다. 마지막 복음서인 <요한복음>은 '믿지 않는 도마'가 자신의 손을 예수의 상처에 깊숙이 집어넣는 순간 터뜨리는 환성으로 의미의 절정을 이룬다.

강생이라고 일컫는, 육신이 된 말씀의 개념은 그때부터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연약한 인간이 되기 위해 세상에 내려오는 그리스도에 대한 연구는 우리가 종종 바울 서신인 <로마서>(1장 3절)에서 보듯 인간 예수가 신의 의지에 따라 하늘로 올라가는 그리스도에 대한 연구와 쌍을 이룬다. 예수는 강생을 통해 그 안에 모든 것을 함축한다. 그것은 요한이 밧모섬으로 추방당했을 때 집필한 매우 중요한 저서 <요한계시록>의 내용에 잘 드러난다. 이 책은 그리스어 아포칼립시스 apokalypsis에서 유래하며, 이는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재앙'이 아니라 '계시'를 뜻한다. <요한계시록>은 예수의 죽음과 아울러 그가 악의 권세를 물리치고 완전한 승리의 귀환을 하기까지 반드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신의 계시를 기록하고 있다. 로고스의 선상에서 그리스도는 신이 보여준 '창조의 원리'가 된다(요한계시록 3:14). 예수는 스스로를 그리스어 철자의 시작이자 끝인 알파요 오메가라고 표현하고, 자신이 곧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선언한다(요한계시록 22:13). 그렇다면 예수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한다!

그리스 철학에서 인용한 로고스의 개념은 추상적 관념에 익숙한 이방 문화에 들어갈 수 있는 지적 교량이 된다. 또한 세대의 개념으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구별을 설명하므로 '말씀'인 예수를 더 명확하게 이해시키는 이점이 있다. 예수는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아들로 그들의 본질은 서로 같다. 아직 의미가 구체적으로 형식화되지 않았지만, 요한의 저서는 삼위일체 개념의 씨앗을 품고 있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뿐 아니라 성령을 상기시킨다.

물론 성령의 개념은 성서에 이미 언급되어 있다. 즉 <마태복음>에서 마리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하며,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성령강림일에 성령이 제자들에게 내려오는 장면을 서술한다. 한편 성령의 개념은 <구약성경>에도 배어 있다. 성령을 나타내는 그리스어 프뉴마 pneuma는 '숨결'을 뜻하는데, 이것은 이미 <창세기>부터 나타난다. 하나님은 숨결을 통해 아담에게 생명을 불어넣는다. 또한 다윗왕은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라고 성령을 언급한다. 성령은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의 일하는 능력이다. 바로 성령이 그리스도인을 행동하게 만들고 그들에게 영감을 주며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아버지의 진리의 영'이 공동체를 인도하고 파라클레토스, 즉 그들의 보호자가 된다고 설명한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한복음 16:13).

3장 신 그리고 인간인 예수에 대한 의문



어떻게 신이 인간의 본성과 결합할 수 있는가? 신도 사람처럼 고통을 당하고 죽을 수 있는가? 만약 예수가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이라면 아버지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리고 성령과는 또 어떤 관계인가?

가현론: 나무조각 맞추기처럼 난해하고 골치 아픈 이런 질문들을 가현론자라 불리는 신학자들은 빠르게 해석한다. 그들은 간단하고도 분명하게 강생의 개념을 부인한다. 예수가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명한 신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예수는 단지 인간의 모습을 지닐 뿐 분명 신이며, 예수의 삶에서 일어난 것을 모두 환상으로 본다. 즉, 어떤 경우에도 말씀은 육신이 되지 못하고, 출산의 피 흘리는 모욕을 겪는 여인의 몸에서 잉태될 수도 없으며, 전적으로 수치를 당하며 생을 마칠 수도 없다. 또한 십자가의 고난도 분명 일어나지 않았다.

1세기 말부터 나타난 이 사조에 맞서기 위해 <요한복음>의 저자 사도 요한은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라는 곳까지 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는 가현론자들을 '미혹하는 자'에 빗대어 이렇게 맹렬히 비난한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요한2서 7절). 말씀의 신학자들, 특히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와 테르툴리아누스, 오리게네스는 가현론자들을 반박하기 위해 집요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현론자들의 교리는 세상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다. 2세기에 있었던 많은 기독교 운동은 어떤 식으로든 이 사조와 적잖은 친밀감을 보인다.

2-3세기에는 가현론의 영향을 받은 묵시문학이 절정을 이룬다. 큰 성공을 거둔 그들의 교리는 4세기 말이 돼서야 비로소 교회의 정경에서 배제되고, 교회가 그들의 저서를 거짓으로 선언하면서 마침내 몰락의 길로 들어선다. 실제 저자가 아니면서도 마치 어느 사도가 직접 지은 것처럼 잘못 알려진 가현론자들의 저서는 예수의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기 위해 인위적 신비로 그의 삶을 장식한다. 2세기 말 시리아의 기독교 공동체에서 집필된 가현론자들의 저서 <베드로복음>은 예수에게서 모든 인성을 배제한 새로운 이미지를 그려낸다. 예수는 어떤 순간에도 고통을 느끼지 않으며,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에도 그에게는 아무 고통이 없었던 것으로 묘사된다. 안디옥의 주교 세라피온은 더 이상 그것들을 믿지 말라고 당부한다.

양자설: 말씀의 강생에 대한 부정

이번에는 가현론자들과 완전히 반대 입장을 취하는 다른 기독교 교리가 예수의 인성을 강조한다. 그들에 따르면 예수는 삶의 어느 시점에 신에게 양자로 선택되었다. 선택된 시점에 대해서는 어떤 학자들은 부활의 시점으로, 어떤 학자들은 변형의 시점으로, 어떤 학자들은 세례를 받는 시점으로 보는 등 의견이 분분하다. 어쨌든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는 하나님의 독생자로 태어난 것이 아니므로 강생한 존재일 수 없다. 예수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친숙한 신격화의 도식에 따라 단순하게 성장했으며, 도식처럼 특별한 삶으로 말미암아 일반적 운명에서 벗어나 신격화되었을 뿐이다. 이 이론은 2세기 말에 크게 발달했다. 테오도투스는 문자의 실제 의미가 아니라 순수하게 상징적인 신의 친자 관계를 주장하며 이 이론을 로마에 전파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엄격한 일신교의 범주 안에서 예수-신을 통합하지 못하는 근본 문제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예수가 완전한 인간이라는 주장이 곧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양자론자들과 맞서 교부들은 예수가 잉태되는 순간부터 완전히 신이라는 사실을 밝히려고 노력한다. 이를 위해 동정녀 수태라는 주제가 본격적으로 탐구된다. 물론 유스티누스가 말한 대로 마리아의 무염수태(마리아가 원죄를 지닌 사람의 씨가 아니라 성령으로 원죄 없이 잉태한 사실을 말한다)는 "세상 사람들로서는 믿을 수도 없고 단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우리가 확인하고 있듯이 이 부분이 기독교의 대중적 신뢰에 큰 장애물이 될지라도 신학자들은 이 주장을 절대로 꺾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 안에서 두 본성의 연합, 즉 마리아를 통한 인간의 몸과 성령으로 말미암은 신성의 결합을 설명하는 근본적인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나중에 외경으로 밀려나는 모든 문학이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라는 주제를 힘껏 찬양한다. 이는 특히 야고보의 초기 복음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예수의 형제 야고보는 <마리아의 탄생>이라는 제목이 붙은 저서에서 동정녀를 통한 강생의 신비를 다음과 같이 더욱 구체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작은 동굴에 피신한 마리아가 예수를 낳는다. 그녀는 신생아의 메시아적 특성을 인정하는 한 현명한 여인이 보는 앞에서 분만을 한다. 동굴에서 나온 그녀는 살로메라는 여인에게 신비한 탄생을 알린다. 물론 살로메는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내가 손가락을 마리아의 생식기에 넣어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동정녀가 아기를 낳았다는 말을 절대 믿을 수 없다." 두 여인은 비장한 모습으로 어린 산모 옆에 앉는다. 살로메는 마리아의 생식기에 가만히 손가락을 집어넣는다. 그리고 크게 소리친다.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의심하다니, 나의 불신과 염려가 얼마나 어리석은가! 여기, 불이 삼켜버린 내 손이 떨고 있지 않은가!" 아기를 품에 안은 살로메는 뜨거운 감동이 차올라 큰 소리로 외친다. "나는 그를 찬양하리라! 그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태어났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는 여전히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야고보의 책에는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엄마의 젖을 힘껏 빨았다"는 내용이 강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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