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불확실하나 하나님은 확실합니다
김진수 지음 | 토기장이
인생은 불확실하나 하나님은 확실합니다
김진수 지음
토기장이 / 2009년 4월 / 242쪽 / 10,000원1막 하나님이 선택하신 평범인생가난한 농부의 막내아들강원도 삼척군 노곡면 상마읍리에서 가난한 농부의 셋째 아들이 태어났다.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 나는 큰 형님과 스무 살 차이가 났다. 큰 형님은 거의 술과 살았는데 어느 매서운 겨울날 술에 취해 도끼를 들고 나를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바람에 맨발로 급히 옆집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큰 형님이 술에 취할 때마다 그런 행동을 반복적으로 했고 나는 밤마다 도망을 쳤다. 그런 이유로 나는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매사에 자신감을 잃어갔다. 딸 여섯을 두었던 큰 형님은 집안의 대를 잇지 못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졌고 그 뒤 아들을 가졌지만 안타깝게 40대 후반에 돌아가셨다. 둘째 형님은 군 복무 중 돌발 사고로 20대에 죽음을 맞이했다. 누나는 여자라는 이유로 초등학교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자식 농사에 헌신하신 부모님아버지는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시고 1년 동안 작은 삼촌이 사시는 근덕이라는 면 소재지에 있는 초등학교에 전학시키셨다. 그리고 삼척 중학교에 아버지의 권유로 입학시험을 치르고 합격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논과 소를 팔아서 삼척에 방 세 개짜리 집을 사셨다. 방 하나는 세를 내주고 다른 방 하나는 사촌 두 명과 같은 학년의 시골 친구를 하숙시켰다. 어머니는 매우 부지런하셨다. 어머니는 집 근처에 부잣집 아주머니네 땅을 소작하셨고, 그 대가로 땅에서 나오는 농산물의 절반을 받으셨다. 그 농산물을 동네와 가까운 시장에 내다 파시고 거기서 번 돈으로 학비를 대 주셨다.
보바대학 총장학창시절에 나는 키가 작은 편이었고 운동을 매우 싫어하는 조용한 아이였다. 그래서 일부러 교실에 남아 있겠다고 자원하곤 했다. 답답한 교실에 앉아만 있겠다고 하는 것이 이상했던지 친구들은 '바보'라는 의미를 돌려 '보바대학 총장'이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였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아버지는 진로에 대해 말씀하셨다. 집안 형편상 대학에 보내주실 수 없다며 특수 직업학교인 삼척고등전문학교에 갈 것을 권하셨다. 당시만 해도 대학 진학이 어려운 학생들은 5년제 공업고등전문학교에 많이 진학했다. 그 학교는 공업고등학교 3년 과정과 초급 전문대학 2년 과정을 통합한 학교로 기술 전문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하나님의 선택삼척공전 2학년 때, 나는 생애에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기독교인이 된 것이다. 삼척공전에 입학한 첫 해였다. 각 동아리마다 소개를 하는데 그중 하나가 기독교 학생회였다. 그러다가 중학교 친구가 다니는 성당에 들르게 되었고 그때를 계기로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했다. 그런데 친구의 성당에 다니기에는 너무 멀었다. 그래서 같은 반 친구를 따라 집에서 가까운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그 친구는 반에서 모범적이고 성실하여 나는 그 친구가 믿는 하나님이 솔직히 궁금했다. 나는 삼척 제일감리교회에서 첫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좋은 신앙의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에 나는 가정 형편상 대학 진학은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내 안에는 꿈과 희망이 솟아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니 내 길을 인도해 주실거야. 그러면 나도 뭐든지 할 수 있어. 대학도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4학년 때 대학 편입을 아버지께 말씀드렸을 때 아버지는 형편이 어려워 힘들다고 말씀하셨다. 편입에 대한 꿈은 간절했었다.
도둑공부와 시험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공부하다가 자정을 넘기는 바람에 야간순찰대에게 발각될까봐 대로를 피해 골목길을 통해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집 근처에 공립도서관이 있었는데 책 열람실과 독서실로 분리되어 있었다. 아침 일찍 도서관 옆문으로 들어가 독서실에서 공부하다가 도서관 직원이 출근하기 전에 집으로 돌아오는 도둑공부를 하기도 했다. 2년간의 피나는 노력 끝에 삼척공전 졸업과 동시에 나는 인천 인하대학교 전기과에 15대 1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3학년으로 편입했다. 그런데 막상 편입 시험에 합격하고 보니 입학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그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누님과 친구였다. 누님은 정기적금을 들었는데 만기일을 몇 달 앞두고 해약으로 손해를 감수하면서 편입학금에 보태주었다. 그리고 직장생활을 하던 친구가 돈을 빌려주었다.
편입시험을 볼 즈음에 나는 한국전력에 입사시험을 치른 끝에 1차 실기시험에 합격한 상태였다. 최종합격할 경우 4개월의 기술연수 기간을 거쳐야 하므로 학업과 직장을 병행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합격통지를 받고 1년간 학교를 휴학하기로 결정했다.
신앙 멘토와 인생 동반자와의 만남나를 맨 처음 신앙의 길로 인도해주신 분은 임홍재 목사님이었다. 공전학교 4학년 말 목사님은 삼척을 떠나 서울의 한 고등학교 교목으로 전근을 가셨다. 주일이면 목사님이 교목으로 근무하시는 학교의 강당에서 예배가 있었는데 인천의 학교 기숙사에서 서울까지 전철로 왕복하며 예배에 참석했다. 예배드리던 그곳에서 내 인생의 동반자가 될 한 여학생을 만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용기1977년 5월 당시 나는 서울 쌍문동에 있는 한국전력 연수원으로 입소해 첫 연수생활에 들어갔고 내가 원하는 인천지역으로 발령을 받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4개월의 연수기간이 끝날 무렵 신임 근무지가 본적지 위주로 발령이 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한 나는 연수원의 김천채 교수님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청했다. 기독교인이신 교수님은 연수원부원장이 도와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떨리는 마음으로 부원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내 이야기를 듣던 부원장님은 흔쾌히 도와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부원장님의 도움으로 학교 근처인 서울 전력소 산하 부평변전소로 발령을 받았다.
컴퓨터는 내 친구1982년 봄쯤 근무지에서 변전소를 원방 감시하는 컴퓨터 시스템 부서에서 전산요원을 선발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시만 해도 컴퓨터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었던 나는 선발에 응시했고 선발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내 인생의 진로에 큰 획을 긋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하루 종일 어셈블러(어셈블리 언어로 쓰여진 프로그램에서 기계어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한 번역 프로그램)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분석해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작업은 내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해외 기술연수의 기회컴퓨터 일을 좋아하고 몰입하다 보니 주변의 직원들에 비해 일의 성과 면에서 점차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그 당시 한국전력 연수원에서는 해외 기술연수 준비과정의 하나인 영어 연수과정이 있었는데 김병철 부장님이 내가 그 코스를 밟도록 추천해주셨다. 마침내 1984년 미국의 플로리다 주에 위치한 해리스 사에서 4개월간 기술연수를 받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언어장벽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최고의 기술자가 되기 위해기술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나에게 부산 전력 관리본부에 SCADA 시스템을 설치하는 업무가 주어졌다. 이전까지는 미국의 공급회사에 고액의 컨설팅 비용을 지불하고 그 회사에서 파견된 직원에 의해서만 설치가 가능했다. 하지만 나는 그 설치 작업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한달간의 고생 끝에 나는 시스템을 제대로 설치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SCADA 분야에서 최고의 기술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국으로 건너가 학업을 정진하겠다는 목표 아래 유학준비도 병행했다. 2년의 고생 끝에 미국이 뉴저지 주에 위치한 스티븐스 공과대학으로부터 입학허가를 받게 되었다. 다른 대학들도 지원했지만 토플시험 성적이 좋지 않아 입학이 허락되지 않았다.
2막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인생서른 살의 유학길서른 살이 되던 해인 1986년 8월 15일 나는 아내와 다섯 살 된 아들 현구를 데리고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뉴욕의 존에프케네디 공항에 도착하면서 나는 우리 앞에 펼쳐진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처가와 학교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 왕복 네 시간이 걸리게 되었는데 차를 살 형편이 안 되어 아내와 아들은 처가에서 나는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면서 결혼 이후 처음으로 주말 부부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내는 생선가게에서 열두 시간씩 힘든 일을 해야 했고 나는 학교에서 늦게까지 공부와 씨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미국에서의 첫 직장생활박사과정을 포기하고 마지막 학기 도중에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처가에서 출퇴근하기 위해 나는 500달러짜리 녹슬고 낡은 중고차 한 대를 구입했다. 하루 세 시간씩 운전하며,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수업을 듣는 바쁜 시간이었다. 그리고 석사과정을 수료함과 동시에 나는 직장 부근에 침실 하나와 부엌이 달린 스튜디오에서 월세를 살기 시작했다. 아침 7시에 출근해 저녁 6시에 퇴근한 뒤 저녁식사를 마치고 밤 8시에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 자정까지 일했다. 토요일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거의 2년 동안 이렇게 일했다. 이렇게 내 첫 직장생활은 시작되었고 연봉 2만 5천 달러에서 시작되었다.
사업 결심1991년 중요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스위스의 바젤로 거의 한 달간 출장을 떠났다. 출장에서 돌아온 나는 같이 근무하던 연구개발 부하직원이 프로젝트 관리 담당자로 배치된 사실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프로젝트 양이 급증하여 누군가 그 일을 담당해야만 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총담당자인 내게 의사 타진도 없이 그런 조치를 취한 회사측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나는 회사의 부당성을 제기하면서 연구 개발팀을 다시 구성해야 했다. 그즈음 내가 일하던 LRS사는 장래의 시장 성장과 자금조달을 위해 회사를 상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장회사로 발돋움하면서 회사 분위기는 급변하기 시작했다. 장래성보다는 매분기 실적에 치중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직원들의 불만도 높아가기 시작했다. 또한 내게 주식을 배당해줄 것처럼 말하던 일도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렸다. 회사는 직원들에게 신뢰를 잃어갔다.
회사 설립1992년 8월 20일 나는 뉴저지 주에서 이미지 솔루션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처음에는 문서를 스캔하는 비즈니스를 이미징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회사를 'Image Solutions'라고 했는데 회사 장기 전략회의에서 회사의 특이한 점을 논의하던 중 Integrity, Satisfaction, Innovation이라는 내용과 회사의 약자인 ISI를 접합하게 되었다. 즉 신용(Integrity)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이것을 지킬 때 만족(Satisfaction)이 온다고 믿는다. 만족에는 고객의 만족, 직원의 만족, 회사사장의 만족 및 이웃의 만족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기술혁신(Innovation)은 이것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이다.
당시 나는 회사운영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회사가 나의 집 2층 방이 사무실이고 직원은 나 혼자뿐이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는 한국에 있는 한 대기업으로부터 제법 큰 프로젝트가 할당될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우리가 맡기로 했던 프로젝트가 다른 회사로 넘어가는 바람에 나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고 새 출발은 처음부터 곤경에 빠졌다. 결국 나는 지난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기술 개발에 전력을 쏟기로 결심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하다가 막히면 문제를 토의할 상대가 없었다. 밀려드는 고독은 참기 어려웠다. 나는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로 지혜를 구한 후 밖에 나가 땅을 파고 화초와 채소를 가꾸곤 했다. 그 당시 마이크로소프트 개발자들이 사용하는 컴퓨서브라는 네트워크가 있었는데, 누구든지 자기의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관련 문제를 올려놓으면 해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 그 답을 제시해주곤 했다. 나는 작업에 몰두하다 문제들이 생기면 그곳에 올려놓곤 했다.
돈도, 의지도 바닥나고시간이 갈수록 그동안 저축해둔 약간의 돈이 바닥났고 더 이상 의지할 곳도 없었다. 나는 당시 재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성숙한 기독교인의 모습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다 어려움 속에서 마침내 나는 하나님께 나를 도와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솔직한 나의 상황을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꽉 막힌 듯한 물질의 문을 열어달라고 간구했다. 그 기도를 시작한 지 이틀만에 전에 근무하던 LRS사에서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컴퓨터에 문제가 생겼는데 아무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니 도와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 회사는 프로그램의 문제가 해결되면 다시 회사로 복귀하기를 권했다. 그러나 나는 가지고 있는 꿈이 있었기에 그 회사에 컨설팅을 제공해주기로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나는 하나님께서 물질에 관한 기도도 들어주심을 깨닫게 되었다.
프로그램 개발컨설팅에 의존하며 생활하던 어느 날, 나는 로렌즈라는 독일회사를 통해 DAMOS라는 단체에서 요구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이유를 알고 보니 LRS사에서 그 프로그램을 개발해주기로 했는데 정작 다른 중요한 프로젝트 개발 관계로 그 약속이 계속 연기되고 있다면서 경험이 있는 내게 그 작업을 요청한 것이다. 나는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새 프로그램 개발에 들어갔다. 당장 자금이 필요했던 나는 차후 내가 개발할 상품 소유권을 로렌즈사가 소유하는 조건으로 10만 달러의 개발비 선불을 요청했다. 그러나 로렌즈사는 위험 부담을 지려고 하지 않았다. 프로젝트가 성공하지 못할 경우 투자비를 회수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프로그램 소유권은 내가 가지되 판매액의 절반은 우리 회사에 주는 조건으로 계약이 체결되었다. 사실 프로젝트를 통해 발생한 이익은 10만 달러를 훨씬 능가했다. 그때 개발한 프로그램이 훗날 회사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회사의 급성장회사는 DAMOS 프로그램의 성공적 개발에 힘입어 성장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는 종이문서를 통해 처리해오던 종래의 신약신청 방법에서 서류를 스캔해 전자문서로 변환시킨 다음 CD에 저장해 제출하는 혁신적인 방법 중의 하나였다. 이것은 독일을 주축으로 유럽에서 보편화되었지만 미국 식약청은 그보다 새로운 포맷인 PDF 파일을 주축으로 한 솔루션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내가 처음 PDF 포맷을 알게 된 것은 1994년쯤이었다. 아도비사는 1993년 서류를 대신할 전자서류의 대안으로 PDF 파일을 선보였고 이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이 증폭되었다. 그 당시 나는 이 PDF 포맷이 내가 공들여 만든 TIF를 기본으로 한 이미징 프로그램과 경쟁하는 포맷이라고 생각했기에 PDF 파일포맷을 이용한 솔루션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던 1997년 우리 회사와 지리적으로 가까이에 있는 산도즈라는 회사로부터 PDF 파일을 포맷으로 신약신청을 원한다는 요청이 들어왔다. 내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지만 그 프로젝트를 수용하기로 결정하고 신기술 개발을 통해 해결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지식을 총동원해 TIF 파일을 PDF 파일로 변환하는 기술을 자체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약 6개월간의 노력 끝에 20만장의 서류를 PDF 파일로 전환시켜 여섯 장의 CD에 저장하여 미국 식약청 최초로 PDF 파일 포맷으로 된 신약신청을 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시도는 미국 식약청에 일대 파문을 일으켰고 1년 후 스미스소니언 협회로부터 1988년 기술 혁신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1997년 10명이던 직원이 1년 후 30명 그 다음 해에는 90명으로 증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