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닝 포인트
마크 A. 놀 지음 | CUP
터닝 포인트
마크 A. 놀 지음
CUP / 2007년 8월 / 456쪽 / 15,000원
01.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독립된 자아를 찾다 주후 60년에 로마의 강압 통치에 대한 유대인들의 분노는 마침내 폭발하였다. 유대인들은 여러 파당으로 나누어져 있었지만 급진파의 목소리가 우세하였다. 7년 동안 피로 얼룩진 싸움이 전개되었다. 로마의 베스파시안 장군의 지휘 하에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향해 왔다. 주후 70년 4월에 베스파시안의 아들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이 포위되기 시작했다. 티투스는 유대인 저항세력의 최후 보루들을 계속해서 제거해 나갔는데 거기에는 예루살렘 멸망 후 거의 3년 동안 산지 요새인 마사다를 고수하였던 결사 항전의 집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후 로마에 대한 유대인의 저항은 특히 135년 봉기에 대한 하드리안 황제의 대응에서 볼 수 있듯이 더욱 가혹하게 진압되었다.
70년에 이르러 기독교는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움직였다. 베스파시안, 티투스, 하드리안과 다른 로마 장군들은 예루살렘을 공격했지만 기독교 교회를 파괴시키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기독교 교회를 해방시켰는데 이는 전 세계로 보급되는 보편 종교로서의 지위를 갖게 했다. 로마인들이 예루살렘을 정복했을 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곳을 떠났다. 초창기 교회사가인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의 북동쪽에 위치한 도시 펠라(Pella)에 도피처를 구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교회는 70년 이후 수십 년 동안 유대인들이 치열하고 힘겹게 얻어낸 합법적인 지위를 계속 향유했다. 당시 로마는 로마의 신들을 정복한 민족들의 신과 함께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로마가 유대교를 합법적 종교로 인정하게끔 했다. 이로 인해 유대교와 연결된 기독교 교회도 보호되었다.
교회가 예루살렘의 멸망에 의해 유대적 구조에서 벗어난 후 기독교의 형태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112년에 시리아의 안디옥 교회 지도자인 이그나티우스는 그리스도인들이 감독에게 순종할 것을 권면하였다. 이그나티우스가 감독들에 대해 이런 언급을 할 당시에 두 종류의 문서 즉 마태, 마가, 누가, 요한에 의해 기록된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4복음서와 사도 바울이 기록한 10∼13개의 편지의 사본들이 증가하고 있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회람되고 있었다. 얼마 안 되어 이들 두 종류의 문서들은 사도행전과 영구적으로 묶여져 히브리인의 경전인 '구약성경'에 붙여진 성문서인 '신약성경'을 형성하였고, 그리하여 교회를 위한 권위있는 지침서인 성경이 교회에 제공되었다. 그리고 교회조직의 감독 체계의 발달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삶의 의미를 담은 성경기록이 목도되었던 것과 비슷한 시기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나 지역 집회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간단하고 간편한 요약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것들은 신조였다.
이 신조들은 기독교 신앙의 범위를 규정하는 수단이면서 동시에 기독교의 성격을 초신자들에게 알려주는 유용한 입문서로 사용되었다. 초기 신조들은 감독직과 성경의 정경과 함께 속사도 시대 역사에서 교회를 안정시키는 닻의 역할을 했다. 따라서 교회가 정체성을 갖게 된 수단들은 신조, 정경, 감독제도로 요약될 수 있다.
02. 국가의 비호아래 역사적인 교리를 만들다325년 기독교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 콘스탄틴 대재는 지배권을 갖게 되자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었던 분쟁을 해결하려 했다. 324년 무렵 교회 분쟁의 핵심에는 아리우스의 학설이 있었고, 부활절의 날짜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 규모가 큰 도시들간의 논쟁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와 같은 많은 실제적 사안들이 있었다. 그래서 콘스탄틴 대제는 니케아공의회를 소집하게 되었다. 아리우스의 주장은 예수가 성부에게 종속되었다는 것이다. 즉 성부의 뜻을 행하기 위해 이 땅에 왔다는 기능적 의미뿐 아니라 그가 본질상 아버지에게 복종하는 피조물이라는 형이상학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니케아공의회의 핵심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신 중의 신이었다. 성부, 성자, 성령이 모두 참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와 한 본질로 이루어졌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되지 않았다. 넷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을 위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인간이 되셨다. 니케아공의회가 남긴 두 가지 유산이 있다. 그것은 계시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구원의 진리에 대한 분명한 충성과 교회와 세상의 혼합이다.
03. 기독론, 말씀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기틀이 마련되다 451년 동로마 황제 마르시안은 감독들의 전 교회적 공의회를 소집했는데 이 공의회는 칼케돈에서 소집되었다. 이 공의회에서 예수는 두 본성이 공존하는 하나의 위격이란 결론을 내렸다. 논쟁의 과정을 살펴보면 예수의 위격에 대해 2세기 중반 아리우스 논쟁의 결과로 전면에 등장했다. 이 아리우스에 대한 아타나시우스의 최종적인 답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에 대한 강조였다. 아타나시우스는 인간의 몸을 취한 신적인 로고스를 묘사한다. 안디옥 학파의 주창자인 데오도르의 주장은 그리스도가 완전한 두 개의 본성으로 하나는 인성이며 다른 하나는 신성을 소유했다고 했다. 이 입장을 고수하였던 안디옥 출신의 수도사 네스토리우스는 감독직 초기에 마리아가 하나님을 낳은 자라는 것을 부정하는 물의를 일으키는 설교를 하였다. 그는 마리아가 하나님을 낳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마리아는 인간 예수를 낳았으며 예수의 인성은 하나님의 로고스와 연합되었지만 그의 신성과 분리되고 구별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로마, 즉 서방의 사고구조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며 법률적인 반면, 동방의 사고구조는 추상적이고 정열적이며 사색적인 경향이 있었다. 로마세계는 라틴어를 동방세계는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칼케돈 공의회는 기독교 교리사에서 볼 때 두 가지 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칼케돈 공의회는 성경의 계시를 지혜롭고 신중하고 균형 잡힌 말로 다시 설명하였다. 성경의 가르침이 충실하게 번역되었기 때문에 헬레니즘 세계는 하나님의 경이로운 일을 자신의 개념어로 표현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위격의 완전성과 그리스도 본성의 이원성을 주장한 칼케돈은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매우 중요한 지침을 확립해 주었다.
04. 그리스도의 삶에 영감 받은 수도원, 교회를 구하다 수도원 제도의 등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사명을 맡기신 이후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제도적 사건이었다. 즉 수도원이 교회에 끼친 영향의 폭과 깊이를 그려볼 수 있다. 수도원 제도는 성경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 이 수도원 제도에 몇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첫 인물로는 수도사 안토니가 있다. 그는 270년쯤 이집트에 있는 자신의 가족 농장을 떠나 혼자서 사막 끝을 향해 하나님을 찾아 나섰다. 그의 동료인 파코미우스는 320년경 첫 집단 수도원을 세워 기도생활을 위한 '수도회칙'을 지침으로 생활했다. 그리고 갑바도기아에 있는 교부인 바실은 성령을 삼위일체의 온전한 구성원으로 규정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또한 4세기의 아타나시우는 수도원 제도를 부각시킨 핵심인물로 꼽힌다. 또 한 사람으로 수도원 제도에 있어 가장 결정적이고 유익한 형태를 부여했던 사람은 이탈리아의 베네딕트였다.
베네딕트의 수도회칙은 수도원 제도의 역사에, 넓게 말하면 기독교 역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베네딕트 수도회칙은 복종, 안정, 계속적인 회심의 서약을 법전화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청빈, 순결, 복종이라는 좀더 보편적인 서약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이 수도회칙이 개별 수도사와 전체 수도원 공동체의 안정에 긴 안목의 관심을 보인 점도 동등하게 주목된다.
중세 유럽 수도원 제도의 복잡한 역사를 간단하게 묘사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그 시기 교회를 유지하고 확장시킨 수도원 제도의 커다란 중요성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그 첫 예로, 기독교의 선교 확장은 수도사들의 활동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인도 선교사로 활동했던 스테판 니일(Stephen Neill)이 전 세계 선교 사역을 설명한 훌륭한 개관을 보면, 중세 선교의 역사를 두 시기로 구분하였는데, 처음 500년 동안의 주요 사역은 야만인들을 기독교 세계로 끌어들인 것이고, 다음 500년 동안의 위대한 사역은 명목상의 유럽 그리스도인들을 진정한 신앙인으로 돌려놓은 것이었다. 이들 두 시기의 거대한 활동에서 핵심적인 요소는 수도원 제도였다. 니일이 언급한 첫 시기에 여러 종류의 수도사들은 기독교의 복음을 옛 로마제국의 변경 마을을 넘어 북, 서, 동쪽으로 야만적인 유럽에 퍼뜨리는 개척적인 활동을 했다. 캘틱 선교사들도 개척자들이었는데 5세기에 아일랜드에서 패트릭의 전도 활동이 선구적인 활동을 했다. 그 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온 선교사들은 선교활동을 정착시키는 방법으로 수도원을 활용하면서 켈트인들의 강인함과 베네딕트의 규율을 결합시켰다.
중세후기에 이름뿐인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이 확고한 기독교 신앙을 얻게 된 것은 수많은 순회 설교 덕분이었는데 이는 탁발 수도사라는 새로운 교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도미니쿠스단이 추구한 숙련된 설교와 프란시스 교단의 실천적인 경건은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탁발 수도사들은 인접 지역 사람들에게 전도했을뿐만 아니라 유럽의 기독교 세계를 넘어 선교하려는 초기 수도원의 관심도 계속 지니고 있었다. 프란시스 교단의 레이몬드 룰(Raymond Lull)은 이슬람에서의 성숙한 선교전략을 고안하고 수행한 첫 서구인이었다.
05. 기독교제국,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다 800년 무렵에는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기념하는 것은 정착된 관습이 되었다. 또한 적어도 5세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크리스마스 날을 특징지었던 기독교적 내용과 이교적인 축제의 혼합이 그 무렵에 이르러서 확립되었다.
샤를마뉴는 800년 여름 로마를 방문했다. 그의 일차적 목적은 로마 귀족에 의해 제기된 부패혐의로부터 교황 레오 3세를 옹호하는 것이었다. 이 일은 크리스마스 이전에 잘 해결되었다. 샤를마뉴가 궁정으로 돌아갈 좋은 날씨를 기다리며 로마에서 지체하고 있을 때 미사에 참석하였다. 그 때 교황은 그에게 황제의 관을 씌어 주었고 교황 레오 3세가 그 제관을 씌어주면서 불렀던 칭호를 사용했다.
이후 수세기 동안 수많은 사건들, 인물들, 상황들이 로마 감독이 권위를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교황들은 교황 직책의 본질에 대해 본격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콘스탄틴 대제의 교회 공인 후 사르디카에서 있었던 종교회의(343)에서는 지방 종교회의에서의 결정 사항이 로마 감독에게 상소되어 질 수 있다고 공식적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366년에서 384년까지 교황직을 맡았던 다마수스 1(Damasus 1)세는 로마 감독이 여타의 모든 감독에 비해 우월하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규정하려 했다. 이미 4세기 무렵 로마 감독은 전체 교회의 중심으로서 로마가 정치적 중심지라는 것과 많은 관련이 있었다.
샤를마뉴와 교황 레오 3세의 협력에 의해 상징화 된 그 이상은 삶을 통합적으로 보는 견해인데, 즉 정치, 사회제도, 종교 관습, 경제관계 등 모든 것이 기독교 신앙을 기초로 하였다. 기독교 제국의 핵심적인 종교적 신념은 인간이 죄로 타락했기 때문에 구원받을 필요성이 있으며, 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된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 수행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념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중세의 모습은 구원의 은혜가 교회와 국가의 협력에 의해 규정된 사회적 장치 속에서 성사(sacramentum, 인간의 성화를 위한 모든 성스러운 표징)를 통해 사람들에게 임한다는 믿음으로 나타났다.
교회가 7성사를 포함하는 하나의 체계로 성사 관습을 공식화함에 따라 기독교 제국을 고무시켰던 지역을 포괄하는 사상은 삶의 전 과정을 포괄하는 사상과 조화되었음이 분명해졌다. 중세 가톨릭의 7성사에서는 일상적인 삶의 중요한 모든 단계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특별하게 접촉하는 길이 제공되었다. 세례는 탄생을 위하고, 견진은 성년이 됨에 대한 성사이다. 고해는 죄의 고백을, 성찬은 영적 양식을, 결혼은 가족을, 종부는 죽음을, 신품은 인생의 중요한 전환기에 다른 모든 성사를 제공하기 위한 영적 조직을 만들 수 있는 성사이다.
06. 로마 가톨릭과 정교회, 돌아오기 힘든 강을 건너다 1046년 헨리 3세는 독일인 툴의 부르노 주교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그는 교황 레오 9세로서 교회의 관심을 영적이고 교회적인 문제에 맞추며 헨리와 잘 협력하였다. 레오 9세와 헨리 3세가 가장 정열적으로 추구한 개혁은 성직 매매와 유럽 성직자들의 독신 사상 강화와 관련된 것이었다. 레오 9세가 그의 시야를 동방으로 돌리자 어려운 일이 발생했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관계는 수세기 동안 악화되어 왔다. 9세기 후반기에 두 명의 유능한 지도자인 교황 니콜라스 1세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포티우스 사이에 있었던 격렬한 논쟁은 교회들의 관계를 긴장시켰다. 그 이유는 서방교회가 니케아 신조에 필리오케를 추가한 것과 관련이 있었다. 이 일로 동방과 서방교회는 분열되기 시작했다.
1054년의 사건은 정교회와 가톨릭 교회 사이의 대분열이라고 지칭되나 사실은 이후 수백 년 동안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적어도 두 차례의 진지한 노력이 있었다. 1274년 프랑스 리용에서 재결합을 위한 종교회의가 열려 교회 관습과 신조에 대한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그 합의는 그들 대표가 본국에 도달하자마자 동방 정교회에 의해 거부되었다. 1438년부터 1439년까지 수개월 동안의 격렬한 논쟁 끝에 대규모 동방 대표들 중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 작성된 신조에 동의하였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구체적인 신학적 차이 역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를 분리시켰다. 오늘날까지 동방교회는 서방교회가 니케아 신조에 필리오케라는 단어를 첨가한 즉흥성에 놀랐다. 그리고 교황이 최고의 주권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동방교회이 분노가 구체화되었다.
또 한가지 사건은 십자군 운동이었다. 십자군 운동은 1095년 교황 우르반 2세가 프랑스 클레르몽이 한 부흥집회에서 이슬람으로부터 성지를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고 선언한 데서 시작되었다.
07. 프로테스탄트의 종교 개혁, 십자가와 은혜의 신학1521년 4월 18일 드디어 마틴 루터를 위한 시간이 도래했다. 보름스에 있는 제국 회의장에서 독일의 신성로마황제 찰스 5세 앞에 소환되었다. 루터는 복음, 교회의 본질, 기독교제국의 현 상태에 대해 잘못 썼던 것을 공개적으로 참회하도록 요청받았다. 루터는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의 입장의 표명과 함께 프로테스탄티즘이 탄생하였다. 루터는 보름스에서의 일 이후로 작센의 군주인 현명왕 프레드릭(Frederick the Wise)에 의해 보호받았는데 이는 프로테스탄티즘과 지방 및 국민적 권력의 옹호자 사이에 즉각적으로 증대되었던 동맹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루터는 곧장 보름스로부터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은신하여 그 곳에서 폭발적인 활동으로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는데 이는 성경에 대한 그의 신뢰를 입증해준다.
1517년 비텐베르크에 게시된 95개조에서 비롯된 '개혁'에 대한 루터의 공적 활동을 보면 루터의 하나님에 대한 핵심 관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첫 번째 핵심은 주인 되신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신자의 모든 삶이 회개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기독교는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된다. 기독교가 인간의 삶에 있어 하나의 실재가 되는 것은 남자든, 여자든, 코람 데오(Coram Deo,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로 서서 자신들의 고집이 파괴되는 고통을 겪음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들어가게 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