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틸리히의 신학1
황민효 지음 | 한국장로교출판사
폴 틸리히의 신학
황민효 지음
한국장로교출판사 / 2008년 3월 / 369쪽 / 15,000원제1부 문화신학자로서의 틸리히틸리히에게 있어서 종교란 '좁은 의미의 종교'와 '넓은 의미의 종교'로 구분될 수 있다. 넓은 의미의 종교는 궁극적으로 관심된(ultimately concerned) 존재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마음의 종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좁은 의미의 종교는 신의 상징들이나 교리나 종교의식 등으로 나타나는 궁극적 관심들의 표현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종교라고 부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넓은 의미의 종교는 바로 좁은 의미의 종교 -흔히 우리가 제도적 교회라고 부르는-의 개념을 포함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종교개념을 넘어서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넓은 의미에서의 종교를 '무한정자를 향한 지향성'(the directedness toward the Unconditional)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은 종교를 넘어서는 종교의 개념이며, 또한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기 위해 유한한 실재를 항상 초월하고자 노력하는 시도이다. 따라서 틸리히는 이러한 넓은 의미의 종교를 '인간의 정신적 차원에서의 초월성'(the self-transcendence of life in the dimension of the spirit)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그의 종교개념과 같이 문화의 개념도 '좁은 의미의 문화'와 '넓은 의미의 문화'라는 두 가지 정의로 구분될 수 있다. 좁은 의미의 문화는 흔히 우리가 세속 사회라고 부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독일어의 '문화'라는 단어가 모든 인간 정신 혹은 영의 창조물들을 포함하는 것처럼, 틸리히는 문화의 개념을 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한다. 이 '넓은 의미의 문화'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문화라는 것은 순수 미술, 문학, 철학, 과학, 정치, 경제, 심지어 좁은 의미의 종교까지 포함하는 인간 정신의 총체적인 창조물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문화는 모든 인간의 삶의 영역과 제도들에서 나타나는 인간 정신의 창조성을 의미한다. 즉 넓은 의미의 문화란 '문화를 넘어서는 문화'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무한정자(the Unconditional)의 개념틸리히가 말하는 문화신학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틸리히가 말하는 종교와 문화의 상호내재에 대한 그의 논의를 이해해야 한다. 틸리히는 종교와 문화의 상호내재의 논리적 근거를 '보다 넓은 의미의 종교' 개념에서 찾는다. 틸리히는 종교를 "무한정자를 향한 지향성"이라고 정의하면서, 무한정적인 실재의 의미가 현존하는 실재를 통하여, 가치들을 통하여, 또한 인격적인 삶을 통하여 드러나게 된다고 말한다. 신비주의적인 언어로 말하자면, 무한정자는 "절대적인 존재이자 동시에 절대적인 비존재로서 모든 존재들을 초월하는 실재"이다. 그러나 틸리히는 '존재한다(exist)'는 술어는 실재를 왜곡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며, 자신이 논의하는 대상은 '존재의 실재(a reality of existence)'가 아니라 '의미의 실재(a reality of meaning)'라고 말한다.
틸리히에 따르면, 무한정자는 종교라고 부르는 형식의 틀 안에 사로잡힐 수 없기에, 종교는 -비록 그것이 무한정자와 그 궁극적인 의미를 다루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을 다른 영역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영역이라고 주장할 수도 없다. 그리고 신학 역시 초월적 실재를 다른 일반 대상들처럼 자신의 특정한 객체로 가질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문화 안에 특별한 종교적인 영역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된다.
종교의 역설적 본질틸리히에 따르면, 종교는 바로 자신의 이름인 '종교'라는 개념에 의해 파괴되는 실체이다. 무한정자에 의거한 종교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모든 한정적인 개념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학적인 담론을 하기 위해, 개념화(conceptualization)의 요청을 묵살할 수 없다. 따라서 틸리히는 비록 특정한 개념들을 사용하되 더 이상 파괴되거나 종속될 수 없는 최상의 개념에 종속시킴으로써 개념화의 오류들을 극복하고자 한다. 바로 이 최상의 개념이 틸리히가 말하는 '무한정자'라는 개념인 것이다. 이 무한정자는 원칙적으로 주체와 객체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를 한 객체로 다루는 것은 '근본적인 역설(the primal paradox)'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언어는 무한정자를 대상으로 다룰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무한정자에 대한 모든 명제는 필연적으로 역설적일 수밖에 없고, 그 역설은 어떠한 경우에도 극복될 수 없다.
틸리히는 일반적인 종교개념이 '무한정자'로 하여금 '한정자'에게 근거를 갖게 하여, 무한정자를 한정자로 만들고, 결국 그 자신을 파괴시킨다는 것의 예시로서, 제일 먼저 무한정자의 확실성과 자아의 확실성을 서로 비교한다. 무한정자의 확실성은 무조건적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종교개념에 의해 사고할 때는 무한정자의 확실성보다 자아의 확실성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 인식주체가 가진 확실성이 하나님의 확실성보다 더 선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는 자아의 확실성은 무조건적인 확실성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아의 확실성과 관련된 객관적인 세계가 단순한 현상으로 분해될 때 -즉, 데카르트의 인식론적 합리성에서와 같이 모든 객관적 사물과 세계의 확실성이 부정될 때- 자아의 확실성은 꿈속에 나오는 천막과 같이 희미하게 된다.
따라서 자아가 무한정자의 자기 인식을 위한 매개체로 이해될 때에만, 어거스틴의 경우와 같이 절대적인 삶의 형태로 나타난 무조건적인 확실성이나, 데카르트의 경우와 같이 절대적인 형식으로 나타난 -그가 '의심의 방법'을 통해 자아가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에 도달하여 내린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하기에 존재한다)"라는 명제처럼- 무조건적인 확실성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무조건적인 확실성을 제공하는 근거는 무한정자이며, 자아는 단지 매개체인 것이다. 만일 자아가 매개체로 간주되지 않으면 종교는 독립된 인간의 종교가 되고, 하나님을 상실함으로써 자아 역시도 상실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무한정자의 확실성이 종교개념에서 확립되면, 종교는 한정적인 세계에서 무한정자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대상을 찾기 위해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며, 하나님은 이 세계를 보조하는 역할로서 세계와 관련되고, 결국 이 세상의 일부가 되고 만다. 여기서 하나님은 자연신론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 아래의 하나님'이 되거나, 또는 모든 '유한한 형식의 총체 또는 종합'으로써 '세계'와 동일시되는 범신론(pantheism)의 하나님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하나님은 공허한 하나의 대상이 되고 만다.
틸리히에 따르면 많은 신학자들이나 종교사상가들은 한정자를 무한정자와 동일시하거나, 혹은 무한정자를 한정적 개념들에 결부시킴으로써 커다란 오류를 범해 왔다. 예를 들어, 슐라이에르마허는 종교의 자리를 '영적인 삶 안에서의 섭리'에서 찾고, 트뢸치는 종교의 본질을 '종교적인 선험성'에서 찾으며, 쉘러는 종교를 인간행위의 최상의 범주, 즉 '종교적인 행위'에서 찾는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한 개인이 윤리적이고, 과학적이며, 미학적이고, 사회적이며, 또한 정치적일 수 있는 것처럼, 개인은 또한 종교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종교를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기능으로 간주함으로써 무한정자를 한정자와 병행하는 것으로 나타내게 된다. 그러나 종교는 결코 개인이 종교적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확언하지 않는다. "종교는 여러 가지 기능 중의 하나가 아니다. 가장 높은 기능이라도 그것은 종교가 될 수 없다." 따라서 틸리히는 종교를 "인간 정신의 모든 자율적 기능들에 반하여 소멸시키는 불"이라고 정의한다.
마지막으로 종교는 신앙의 무조건성을 여러 가지 정신적 기능의 하나로 상대화시킬 뿐만 아니라, 계시의 무조건성을 종교사와 문화 속에 나타난 한정적인 진보나 전환으로 상대화시킨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가 어느 특정한 종교가 되는 순간 -즉, 그리스도교 계시가 상대화되는 순간 -그리스도교는 그 절대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종교는 그 자체를 초월할 수 없는 종교가 되기에 -결국 무한정자가 그 안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에 -'하나님 없는 하나님을 향한 지향'이라는 오명을 갖게 된다. 여기서 계시는 자율적 정신이 발견한 지식의 전달이 되어 초자연적인 것의 도움을 가끔 필요로 하는 단순한 합리론으로 타락하거나, 혹은 문화사가 되어 '문화적 과정의 가능성'으로 매도된다.
그러므로 무한정자의 본질에 충실하고자 하는 종교철학은 무한정자 자신과 한정자의 근거가 되는 무한정자를 한정자 속에서 파악해야만 한다. 즉, 한정자는 무한정자가 파악되는 매개체라는 것이다. 매개체는 어떠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정자가 현시하는 장소'의 개념이다. 그러므로 무한정자에 대한 진술의 의미와 한정자에 대한 진술의 의미는 서로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한정자에 대한 진술은 주체와 객체의 형식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에, 무한정자에 대한 명제는 역설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 역설적인 진술은 앞서 말한 종교를 파괴하지 않으면서 개념화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준다.
일반적인 개념화의 과정에서 무한정자의 확실성과 자아의 확실성은 갈등상황으로 전개되나, 무한정자에 대한 역설적인 진술에서 이 둘은 상호배타적이거나 대립적이지 않다. 여기서 무한정자의 확실성은 형식적으로는 이론적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이론적일 수 없는 역설로 나타난다. 즉, "하나님의 확실성은 자아의 확실성에 포함되면서도 자아의 확실성의 근거가 되는 무한정자의 확실성"이다. 따라서 자아의 확실성과 자아의 종교는 오직 무한정자의 확실성에 근거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하나님의 확실성이 은연중에 내재하지 않은 확실성이란 절대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자아의 확실성에서 하나님의 확실성으로 나아갈 수 없기에, 자아로부터 하나님으로 나아가는 길은 없다는 것이다. 본질적인 측면이 아니라 지향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하나님으로부터 자아로 오는 길만이 존재한다. 즉, 하나님의 확실성에서 자아의 확실성이 도출되는 것이다.
무한정자에 대한 이러한 역설적인 진술은 첫째, 하나님과 세계간의 대립적이거나 동일시되는 갈등을 극복한다. 종교개념이 지배적인 곳에서는 하나님의 실제성이 세계의 실제성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자연신론에서처럼 하나님은 하나의 한정자로서 객체화되거나, 범신론에서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와 동일시된다. 그러나 역설적인 진술은 "무한정자는 무한정자이다"라는 명제를 재확인한다. 즉, '모든 유한한 현실성 속에 있는 무한한 실제의 힘'이 하나님이다. 이 힘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절대적인 심각성이며, 끝도 없는 깊이이며, 또한 거룩함이다. 즉, 역설적인 진술은 무한정자를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실존적 판단의 대상으로부터 자유롭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실제성을 인정하고, 유한성으로부터 하나님을 해방한다.둘째, 역설적인 진술은 종교와 문화의 대립 역시 극복하게 한다. 흔히 종교가 문화 위에서 설립될 때, 종교는 분리된 하나의 기능으로 설립되거나 혹은 모든 문화적 기능들의 종합으로 설립되기도 한다. 그러나 종교는 다른 인간 기능 중의 하나도 될 수 없으며, 그들의 연합도 될 수 없다. 종교는 한정자나 유한한 실재를 향한 것이 아니라 무한정자를 향한 관계성이자 또한 궁극적인 의미를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종교는 다른 기능들과 병행하는 기능이거나 혹은 다른 기능들을 일치시키는 인간정신의 기능이 아니라, 단지 그것들을 통해 무한정자를 표현하는 '무한정성의 기능'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논리를 종교와 문화의 변증법에서 살펴본다면 -매개체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세상 속의 사물들이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무한정자의 매개체이듯, 문화는 정신의 삶 가운데 있는 무한정자의 매개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처럼 한정자 안에서 무한정자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표현은 '역설'(paradox)이라는 용어이며, 또한 무한정자는 항상 상징적으로 언급되어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즉, 종교와 문화의 관계에서 살펴보자면, 만일 종교가 무한정자를 개념화하기 위해 무한정자를 한정적인 개념으로 환원시킬 때, 종교는 무한정자와의 관계를 상실한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 된다. 또한 만일 종교가 역설의 방법을 객관화시키고 한정자를 무한정자로 대체시킨다면, 이를 위한 초자연적인 법칙을 만들게 되고, 인간정신과 문화는 종교개념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따라서 틸리히는 종교개념의 극복을 이렇게 정의한다. "종교개념을 극복하는 것의 의미는 종교를 객관화의 운명으로부터 구속하는 것이고, 무한정자로 하여금 모든 형태의 상대화를 극복하게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무한정자에 대한 역설적인 진술은 종교개념과 계시간의 갈등을 해소한다. 종교개념이 지배하는 곳에서 계시는 '이성의 계시된 종교'나 '종교사'로 간주됨으로써 계시를 인간 정신의 자율적인 삶에 의존하게 만든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행위가 인간의 종교적 정신이 만드는 상대적인 진보로 여겨지는 것이다. 여기서 종교개념은 무한정자와 한정자, 하나님의 차원과 인간의 차원을 동일선상에 놓아 버린다. 그러나 역설적인 측면에서 종교를 살펴보자면, 물론 모든 종교는 무한정자를 객관화시키기에 상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반면 또한 모든 종교는 절대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계시란 무한정자가 그 무한정성 안에서 한정적인 것들을 돌파해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종교는 그 종교가 가진 계시의 정도에 따라서 절대적이다.
"보편적으로 진정한 종교의 존재는 숨겨져 있다. 그것은 때때로 단순한 종교에 대항하는 '위대한 신비적 또는 예언자적 반항'으로 나타난다. 종교가 이러한 저항에 얼마나 개방적일 수 있는가에 따라 그 종교의 상대적인 가치가 드러난다. 절대적인 종교는 결코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무한정자의 순간적이면서 생동적인 돌파이다. 하나님은 회의주의나 종교의 역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모든 종교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자신의 절대성을 계시함을 통해, 종교의 절대성의 주장을 파괴함으로써 자신의 절대성을 증명한다.
문화신학의 정의와 임무틸리히에게 있어서, 종교와 문화의 관계를 규명하는 해석학적 열쇠는 바로 '형식'(form)과 '실체 또는 의미'(substance or import) 간의 변증법적 관계이다. 모든 문화의 창조물들은 형식과 실체(의미 또는 본질)를 가지고 있다. 이 형식과 의미는 의미 없는 형식이나 형식 없는 의미가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틸리히는 이러한 형식과 의미와의 관계를 하나의 직선으로 형상화한다. 이 직선은 한쪽은 순수한 형식을 의미하고 다른 한쪽은 순수한 의미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들은 한 직선 위에 놓여져 있기에 항상 그 둘의 일치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직선의 비유를 통해, 틸리히는 종교는 문화의 실체(의미)를 제공하고, 문화는 종교의 형식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만일 의식이 의미의 개별 형식들과 그 일치를 지향하면 문화가 생겨나게 되고, 만일 의식이 무조건적인 의미, 다시 말해 의미의 의미(the import of meaning)를 지향한다면 종교가 생겨나는 것이다. 종교는 무한정자를 향한 지향성이요 문화는 한정된 형식들과 그들의 동일을 향한 지향성이다."
다시 말하면 종교는 무한정적인 의미를 향한 영의 지향성이며, 문화는 한정된 형식들을 지향하는 영의 지향성이다. 그러나 이 둘은 의미의 형식들의 완전한 통일을 지향함으로써 서로 만나게 된다. 형식과 의미는 항상 서로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형식과 의미를 분리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단지 인위적인 것일 뿐이다. 형식이 자신의 의미나 본질과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문화 역시 종교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비록 문화와 종교가 과학적 방법의 구조에서는 서로 구분될 수 있을지 모르나, 본질적으로 다른 두 가지의 행위가 아니다. 이처럼 형식과 의미의 변증법을 통해 틸리히는 문화와 종교의 상호연관성을 증명한다.